영혼을 향한 권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그러면서 시인은 이 마지막 절에서 후렴구 같은 영혼을 향한 권고를 반복합니다.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라고 하는 자기 대화입니다. 이 자기 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자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대화는 본질적으로 옛 성품과 새 성품의 대화이며, 감각을 통해 보는 것을 알고 판단하는 육신적인 자아와 지성을 통해서 인식하는 말을 알고 감각하는 영적인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육적인 자아가 따로 있고 영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많은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많은 해석을 우리 안에서 낳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들은 판단을 하고 자기와의 관계도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은 믿음이 없이도 하는 일이고 애써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입니다. 눈을 뜨고 생활하는 하루 내내 수많은 물상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고 우리의 코로는 수많은 향기들이, 우리의 귀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우리의 혀끝으로는 수많은 맛들이, 우리의 손과 온몸으로는 차고 덥고 무르고 딱딱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보들을 해석을 하고 자기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기와 가는 관계를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믿음의 속한 것들은 그렇게 눈으로 들어오듯이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 사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희생하신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감각처럼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착념하고 묵상하고 생각할 때, 그 때 그것이 갖는 의미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눈을 뜨면 어디서나 하나님의 증거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 사랑과 자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고양된 상태이고 오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 때문에 마음의 사고의 방식이, 마음의 생각되는 바가 신령한 쪽으로 기울어져있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아주 오래 있게 되면, 이러한 신령한 사고방식이 우리의 마음에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육신의 감각으로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진리와 하나님의 감각들은 육신의 감각처럼 빠르지 않은 법입니다. 더욱이 마음이 죄로 물들어져 있고 육신이 정욕에 빠져있게 되면,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의 마음의 경향과 일치하는 쪽으로만 들어오기 십상입니다. 놀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든 집안의 물건을 바라볼 때 돈으로 보이고 심지어는 사람조차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아서 그 돈으로 알코올을 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알코올을 중심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이 한쪽으로 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어느 한쪽을 꺾고 어느 한쪽을 따르게 되면 갈등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이 두 가지 요소를 마음에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도 한편으로 죄를 지으면서 한편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신자는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경향을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경향 이외에 자기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경향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두 개의 자아가 아닌, 하나의 자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공존하고 있으니, 이것도 나의 자아고 저것도 나의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만약에 신자가 어느 한쪽으로만 쏠린 삶을 산다면 양자의 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이때에 이 옛 본성과 새 본성 사이에 대화가 일어납니다. 옛 본성이 죄를 짓고자 할 때, 새 본성은 말리겠죠?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 너에게 더 많은 고통이 올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널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너는 왜 꼭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느냐." 등등의 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이 대화 속에서 만약에 옛 본성이 지게 되면 그 범죄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고, 옛 본성이 이기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어떤 한쪽으로 쏠려서 커다란 어려움을 만납니다.
오늘 시인은 죄를 짓고 많은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낙심하며 살아야할 감각적인 본성과 그리고 육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비참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소망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나라는 원수들에게 빼앗겼고 자신과 그리고 모든 왕과, 그리고 그 측근들은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왔습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절망적인 소식이 계속 이어지고, 망명 온 나라의 땅, 거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는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느냐?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묻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고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쇠잔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육신의 안목은 희망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죠.
그때에 이 사람 안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안목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남아있는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소리칩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한 본성이 또 다른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향하여 소리치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그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할 것은 어찌하여 낙망하고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며 살지 않는 모든 영혼이 끝입니다. 인간은 맨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 안에 살고 그 안에 있을 때에 참 행복하고 기쁜 것이죠.
비가 오는 날이면, 지렁이 들이 땅밖으로 제사장을 만난 것처럼 기어 나옵니다. 근데 이제 대체로운 일은 비가 오고 나서 비가 갑자기 게이고 그리고 햇살이 비치게 되면, 어김없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지렁이들이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요일 날도 우리 총신대학원에 갔을 때, 마당 여기저기에 말라 죽어 있는 지렁이들이 보여요. 지렁이는 피부로 호흡을 합니다. 그래서 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곤충입니다. 물을 흠뻑 먹고 그리고 그 물기를 머금은 가운데 살 수 있는 곤충이죠. 그래서 지렁이는 풀숲이나 땅속 깊은 곳에, 습기가 잘 보존되는 곳에 삽니다. 그런데 비가 오게 되면, 온 땅에 습기가 가득하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습기가 있는 땅을 찾은 지렁이는 생명에 지장이 없지만, 그렇지 못한 지렁이는 즉시 피부가 마르기 시작하고 호흡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게 되고 그리고 잠시 후면, 햇볕이 비춰서 바짝 마르거나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햇볕이 바짝 나는 동안에는 지렁이가 그렇게 죽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비가 오고 난 다음에 꼭 그렇게 죽는 지렁이들이 나와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처음부터 창조된 인간들이었어요. 어디에서도 인간이 왜 존재해왔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나오지 않아. 그 답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한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품안에서 쉴 때까지는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는 이렇게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쫓겨 오는 이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여전히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을 하고 소망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영혼을 꾸짖으며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하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환경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 어려워도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시로 변하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우리가 의뢰하고 의지하는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얼굴을 돕는 다는 이야기는, 대면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대면하실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진노하셔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대면하시고, 또 하나는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대면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대면하시는 것은 그들을 알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이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그렇게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우시되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영혼을 친교 가운데서 자기를 도우시는 것을 형상화 한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그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는 이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이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생활인거죠.
그래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감각들, 이것들에 의해서 울고 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질 때,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변함이 없으신 것처럼 우리도 올곧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가르침을 명심하며 산다면 영혼의 큰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