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는 길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 이다”(시 43:4).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은 원수들에게 쫓겨서 남의 나라 땅에 망명을 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하나님의 성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없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으신 그 하나님이었지만, 이 성소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각은 다르고 사는 곳도 틀리지만 한 장소에 와서 하나님을 배오면서 그들이 모두 사는 곳과 생각이 다르지만, 그러나 그 성소를 중심으로 함께 부름 받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뼛속 깊이 인식하게 만들어주신 거죠. 그것이 바로 성소의 단일화에요. 그래서 여러 곳이 아니라 오직 한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이죠.
신약시대로 넘어오게 되면, 이제 이런 하나였던 장소의 개념, 그리고 한 곳에서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는 성소의 중앙화의 개념, 이런 것들이 기독론 적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래서 장소와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주님을 경배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한 배경입니다.
시인은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라." 이 '극락'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그런 극락을 의미하기 보다는 '기쁨'이죠. 그러니까 가장 크고 완전한 기쁨이신 하나님께 내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장 완전한 기쁨이요. 가장 큰 행복인 하나님께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기쁨과 슬픔을 많이 만납니다. 꼭 하나님 안에만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니죠. 얼마든지 하나님 밖에도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죠.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누리게 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행복과 기쁨이 이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게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그것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시인은 왕궁에서 왕 가까이에서 모든 영화를 누렸던 사람으로서 오히려 시인이 말하기를 자신의 완전하고 큰 기쁨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책에서 말하기를 아무리 많이 기뻐하고 아무리 많이 즐겨도 자신의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 분, 그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우리들이 그런 쾌락을 누리게 된다면 어떻게든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 텐데, 하나님은 우리가 한없이 누려도 다함이 없으신 분이고 아무리 많이 즐거워해도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부족한 분이 아니시다.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 완전한 기쁨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인간으로 태어난 행복이에요. 그리고 인간 이외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피조물이 없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참다운 행복을 몰라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완전한 행복이시고 기쁨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누림의 원천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이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구하고, 그 하나님에게서 발견한 진리에 자기를 합체하려고 하고 그 일을 위해서 믿음과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게 바로 행복이란 말이에요. 이 시인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참다운 기쁨,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 이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뵈옵고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을 박탈당했을 때, 예전에 그 그리움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생각하면서 그리워하며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죠.
사실 42편, 43편 전편에 흐르는 광경을 보면, 원수들을 멸해달라는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문제, 원수에 의해서 왕위는 빼앗기고 그리고 나라는 찬탈당하고 법궤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이렇게 망명을 온 신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나라의 역사, 그리고 우리를 움직이는 그 모든 삶의 수레바퀴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는 완전한 기쁨이 있다. 오늘 우리들이 맛보는 쓰라림과 고통도 사실은 그 하나님이 참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경험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요.
좀 설명을 할 테니 들어보세요. 하나님 자신이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 전개해 나가시는 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인생 아니에요? 물론 여기에 인간이 기계처럼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뜻을 시간 세계 안에 펼치시고 그리고 우리는 선악 간에 그분의 뜻을 따라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면서 시간 세계 안에서 우리의 삶을 펼쳐가요. 그런데 때로는 우리들이 바르게 살지 못할 때, 시련과 환란을 만나 주님 앞에 의롭지 못하게 살아갈 때, 우리들은 마음의 고통과 그리고 정신의 번뇌를 경험하게 돼요. 때로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처럼 주야로 자신의 눈물이 자기의 음식이 되는 쓰라린 상황이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시간 속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참되시기 때문에 참되지 못한 길을 우리들이 걸어갈 때,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길을 걷는 다는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참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한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홀로 고요히 계신 것 같으시면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끊임없이 일하시는 것 같으시면서 하나님은 고요히 계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바꾸시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을 전혀 바꾸시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멀어지면 고통을 당함으로서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사실을 타락한 삶을 통해서 입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참되시고 사랑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믿음으로 매일매일 이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경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가장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그 속에서 오히려 극락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잘못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고, 주님을 의롭다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버릴 것이고,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극락의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그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당신께 나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끄시고, 당신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설 수 있도록 세우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 자체가 성전에서 이렇게 성도들을 이끌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이 예배를 수종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수금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성도의 삶은 마음 안에서 삶의 다양한 환경과 접하면서 그러면서 그 모든 삶에 다양한 환경 속에서 보이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발견하고는 자기 안에 있는 참된 기쁨을 자신의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에요. 그래서 시편 150편의 마지막이 "호흡이 있는 자는 주를 찬양할 것이다."라는 권면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 시인은 결국은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고 그 일을 위해서 성소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 불과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성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장막이 되어주신 것이죠. 어디에 있든지, 그가 누구든지, 어떤 삶의 환경에 있든지, 거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그 장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때보다도 더 많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과 만나는 길이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찢으신 그 육체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던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우리를 극락의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뵈올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