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바라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시인이 현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있는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더 많이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보는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보는 것도 보는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마음으로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이 믿음에 관한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약속과 그분의 능력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친교를 누릴 때에는 눈으로 보는 많은 것들을 극복하고 오히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믿음의 작용,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대부분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 뒤 따라 오는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방의 땅에 망명을 온 삶이었습니다.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그래서 시인은 일행들과 함께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수는 매우 강하고 자신들은 약하며, 그들은 큰 권력을 잡고 승리하였고 자신들은 왕국으로 다시 돌아갈 기약이 다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즐거이 노래하며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던 때,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으로 인도하던 때에, 그 기억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마음의 눈은 눈에 보이는 눈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낙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대화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신앙을 독려하기 위한 가장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면 이 자신과의 대화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 안에는 두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안에서 두 마음이 함께 있어, 어떤 마음은 양심을 따라 살려고 하고 또 어떤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양심을 거스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향하여 갈등하고 그리고 또 다른 마음에게 명령하거나 강요받기도 하는 일이 불신자의 마음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양심의 가책', 또는 '양심의 송사'라고 말하는 것이죠. 마음이 깊이 어두워지고 그리고 본성의 빛조차도 방해를 받으면 예외인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양심의 기능들이 작동을 하게 됩니다. 비록 신앙은 없지만, 자신의 마음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토대로 자신이 행한 것, 혹은 행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송사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율법을 기초로 정죄하는 것이죠. 이 정죄와 송사의 기능이 양심의 기능인데, 이 양심은 법을 기초로 작용하는 기능이에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목적을 반하는 일들을 스스로 그만두게 되고, 또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일들에 격려를 받고 그 일들을 행하게 되는 거죠. 이러한 때에 마치 그 사람은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을 어기면서도 행하려고 하는 욕망 사이에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보다도 훨씬 더 고차원적이고 본질적인 영혼의 대화가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두 영혼이 인간 안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한때 빠졌던 마니교에서는 이렇게 인간 안에는 두 개의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이 있어서 싸운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한 영혼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본성과 또 하나는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죄 된 본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인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는 마치 자신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죠.
한쪽에서는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보며 "이제 다윗 왕국은 끝났다. 원수는 이겼고 너희는 패망하였으니, 아무 희망도 없다."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매우 크고 결정적이어서 그 강력한 증거에 항거할 어떤 근거도 자신의 삶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 상황 자체가 절망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리고 다윗 왕국을 선대해주시는 하나님의 과거의 은총의 행적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대화를 이루는 이 고전적인 경건의 기법을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러며 갈등하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그런 경건의 기법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미 있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타자인 것처럼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하고 타이르는 그것은 또 누구입니까? 그것도 역시 영혼입니다. 영혼이 영혼을 향하여 타이르는 것이죠. 타이름을 받는 영혼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여 낙심하는 자신의 또 다른 본성이고, 타이르는 그 영혼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힘입어 주와 함께 동행 하며 살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믿음으로 살려는 또 다른 영혼의 본성입니다. 둘 사이에 충만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영혼이 마지막 도달하는 길은 절망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지푸라기 같은 인간이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한줌의 흙과 같은 인간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게 될 때, 그 지푸라기 같은 영혼이 이 땅에 살아 있어야할 이유는 보석과 같은 것이죠. 그는 지푸라기 같으나 그를 살게 하신 하나님,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그 계획은 보석 같은 것이죠. 불로 타거나, 사라지거나,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존재죠.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불안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참다운 안식과 평안이 있지,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마음, 신앙의 눈으로 행하지 않고 단지 육신의 눈으로 행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말합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라." 이런 뜻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하나님 속으로 소망을 갖거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을 인하여 낙망하게 되었을 그 때에 "하나님 속으로 소망을 갖거라, 하나님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분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완전한 영혼이 되거라, 그리고 그 안에서 희망을 갖는 영혼이 되거라"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오는 그러한 도움을 가리키는 것이죠. 여기에 나오는 이 얼굴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충만한 임재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절망 같고,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아도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될 때에, 그 때에 우리가 그 안에서 참된 생명, 그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처럼 바로 하나님 속에, 하나님 그 안에 모든 인간의 희망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속으로, 주님과의 교제 속으로, 그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
(찬양) 주님과 같이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원수에 의해 에워싸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