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1-3).
이 시는 다윗의 시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42편, 44편이 고라자손의 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끼여 있어서 이게 같은 사람의 저작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다윗의 작품이고 아마 고라 자손이 보관을 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43편이 다윗의 시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다윗의 시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는 거죠. 뭐 정확한 답은 우리가 "모른다." 이게 사실 정확한 답이죠. 그런데 어조로 보면, 이게 지금 뒷 절에 보면 후렴구가 또 나옵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하는 후렴구가 나와서 42편과 43편이 짝을 이루는 쌍둥이 시이기도 해요. 그래서 이것을 고라자손의 시일 것이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시인은 다윗의 시로 보던지, 아니면 고라자손의 시로 보던지 간에 42편과 연장된 선상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제 송사를 변호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송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재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죄를 캐고 그리고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죄를 캐고 자신을 멸시하고 압박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자기를 향하여 고소하는 사람들로 본거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송사를 변호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송사를 당하는 것, 이것은 사실 사람의 송사는 별것 아닌데, 우리 자신의 양심이 송사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양심의 기능이 크게 두 가지에요. 하나는 정죄하는 기능이고, 하나는 송사하는 기능이에요. 송사라고 하는 것은 "얘가 이러 이러한 잘못을 했데요." 하고 이르는 거죠. 정죄는 그러니까 너는 이러 이러한 형벌에 해당한다 라고 판결을 내리는 거죠. 그 두 작용이 양심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이에요.
그러면 양심은 내 안에 있으면서 이상하게 내가 죄를 지을 때에는, 내가 아닌 것처럼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되어서 죄지은 나를 정죄하고 또 고발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들은 이 양심을 "인간 안에 남은 마지막 하나님의 목소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양심신성설'이에요. 그러니까 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누구편이에요? 자기편이에요. 근데 유독 자기편이 안 되어 주는 것, 자기가 죄를 짓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악을 행할수록 더욱더 자기편이 되지 않는 그 무엇이 인간 안에 있어요. 그게 양심이에요. 그게 이제 송사를 하는 거죠. 이 기능은 올바로 유지되고 있느냐 그러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게 만약에 믿을만하고 올바르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지 않겠죠. 그래서 이 양심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요. 이 양심도 영혼의 기능이기 때문에 영혼과 마음이 죄에 점령되면서부터 양심의 작용에도 올바르지 않는 구분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양심은 우리가 신뢰가 하기 어려운 그런 것이 되는 거죠.
여기에 보면 송사를 한다고 그랬는데, 이 송사는 "이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고발이고, 송사할 때는 그 사람이 죄를 그 사실을 가지고 송사하지만, 정죄할 때는 율법을 가지고 정죄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양심은 율법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두 개의 율법을 새기셨는데, 하나는 돌 판에 새기시고 하나는 사람의 마음에 새기신 거에요. 그게 율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율법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가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하는 사실을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핑계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송사들을 많은 나라들로부터 받고 있어요. 여기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많은 백성들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이 시인이 무엇을 염두 해두고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이것이 다윗의 시라면 다윗이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나라가 망한 것을 비난하는 자국 백성들이 될 것이고, 고라의 자손의 시로 본다면 이것은 이방의 땅에 망명을 왔을 때에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이 송사하는 그것일 수도 있는 것이죠.
어쨌든 거기에서 깊은 서러움을 느꼈을 것인데, 이 송사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하나님이여 나의 송사를 변호해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회상하게 되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그 견딜 수 없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그 때에 그 곳에서 벗어나는 경건의 기법에요. 그게 바로 회상이에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거늘", 이것은 다윗의 시편 18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것을 바로 다윗의 시로 보는 견해가 있는 거에요. 근데 "주는 나의 힘이시거늘" 이것은 마치 42편에 나오는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의 주를 기억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거든요. 그 요단땅 과 헤르몬과 미살산을 생각하는 것이 그 민족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이것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셨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거죠. 시편 18편에 나왔던 다윗의 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이것도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의 인생이 가장 곤고하고 사울에게 쫓겼을 때에 지은 시에요. 여기에서도 이 시인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닙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셨고 그래서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나와 동행하셔서 이기게 하셨는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인 것처럼 다닙니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죠.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호소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한 거죠. 왜 그러셨겠어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버리시고 그리고 "내가 원수의 압제를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어요? 시인은 다 알고 있는 거에요.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비는 기도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주의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결국은 이러한 송사를 받고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으며 국가적인 위기와 난관을 겪고 개인적인 깊은 고통을, 망명의 고통을 겪고 멸시와 고통을 당할 때, 그때에 하나님 앞에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거에요. 42, 43편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 나라를 뺏은 원수들을 격파에 달라는 기도가 안 나와요. 신기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만을 호소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여기서도 똑같이 "원수를 도말 하소서" 아니면, "왕을 내어 쫓은 저 악한 자들을 징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안 나와요.
그리고 간절히 비는 게 뭐냐 하면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성산과 장막에 누가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계신 거죠. 결국은 이 시인의 갈망이 세상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구하는 데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정말 그리워한 것은 이 세상에 나라와 왕국,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왕국을 다스려주시기 때문에 그 왕국이 자신들에게 의미 있음을 보여준 거죠. 그러면서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비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여 그 성산과 장막에 이르러 하나님을 뵈옵는 것, 그것이 간절한 소원이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인생의 가장 큰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굳게 믿었던 거에요. 원수 하나 하나 하나님이 격파하시고 원수를 향해 한 맺힌 마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갈망, 주의 임재가 있는 그 성산과 그 장막에서 주를 뵈옵겠다 라고 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이기게 하고 있는 거죠. 이게 결국은 그 성산과 장막,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그 공동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결론적으로 보면, 좋은 교회 가서 주님 제대로 만나고 사는 것이 그게 많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에요. 문제는 많아도 답도 많은 게 아니에요. 문제는 많아도 답은 하나에요. 여러 분들의 인생이 거룩한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 은혜와 사랑에 굳게 붙들려 살 때, 인생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 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오늘도 사랑해 주시고 이 시간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하나님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