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영혼의 치유책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도다"(시 62:5).
그렇게 악인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고 하고 그 존귀한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모두 지날 때 이상하게 하나님의 도움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명백하게 악인들인데, 내가 지금 당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억울한데,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서 역사해주시면 그러면 나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악인들은 입을 닫을 것인데 놀랍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악인들이 옳은 것처럼 한동안 내버려두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는 마치 버림받아서 만물의 찌끼가 된 것처럼 멸시를 당하고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 다윗의 신앙의 특징을 보면 시의 고백 속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만 악인들이 자신을 모함하고 악을 행하고 그리고 악인들은 원래 말을 잘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신을 공격할 때 이 시인의 일관된 태도는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모든 속에서 잠잠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이 대적들에게는 자신들의 비난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아주 훌륭한 상황이 되고 비난은 더욱더 거세지는 것이지요. 그때에 이 시인 다윗이 그렇게 행동하는 그 이면에는 아주 분명한 사상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잠시 악인이 이기는 것 같고 옳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결국 당신 자신의 뜻을 펼치실 것이고 그때에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치실 때에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들을 옳게, 그른 사람들은 그르게 판단하신다는 신앙이에요. 다윗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다윗이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향해서 비난을 퍼붓거나 욕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속에서는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다윗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주권사상이었어요.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는데 조지 휫필드라는 분인데 제가 한때 굉장히 존경하던 분이었고 그분의 설교를 즐겨 읽었는데 웨슬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에요. 정말 순수한 칼빈주의적 청교도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분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되지요. 그분은 일생의 철칙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논증하지 않는다. 변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험악한 구설수에 올라서 뭐 부흥회의 돈을 다 떼어먹는다는 등 험한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런데 일체 대응하지 않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그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다윗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똑같은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때로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고 공격도 당하고 하지만 그 모든 변화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갈 때 늘 있을 수 있는 변화에요. 그것을 인하여 일희일비하면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그 자세가 오늘 다윗에게서 나오는 것이에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슨 얘기에요? 굳이 자신의 영혼에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는 것은 지금 잠잠하다는 것이에요? 잠잠하지 않다는 것이에요? 잠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시인 다윗 같은 경우는 지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의 크기가 정말 큰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정신의 크기라는 것은 결국 지성과 감성의 크기인데 그런 정신의 크기가 아주 큰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 감성도 굉장히 큰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마음의 상처나 이런 것들도 굉장히 많이 받았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래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록들이 시편에 아주 많이 나와요. 그런데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거라.’ 원래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다면 영혼을 타이를 것이 뭐 있겠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요동하는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것이에요. 우리가 이러한 자세가 꼭 필요한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살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 중에 이러한 대적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본질은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본성 그 자체가 이렇게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 사는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라.’ 이 관용구가 사실은 다윗의 시편에서 여기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나타나요. 이것이 결국 뭐냐 하면 내적 대화에요. 그래서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선택해서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되면서도 한쪽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자아가 있어요. 또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해도 이속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소리치는 자아가 또 있어요. 그래서 피중생자들은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지어요. 그런데 신자가 죄를 지을 때에는 복합의지로 죄를 지어요. 그래서 무엇인가 또 다른 거듭난 새로운 성품의 의지가 자극해서 그래서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반대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가 꼭 그렇게 살아야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온전한 은혜에 잠기게 될 때에는 그런 자아가 완전히 일치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요.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런 새 본성을 거스른 자아가 온전히 못 박혀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아무튼 이러한 대화가 일어나는데 시인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이 바란다는 것은 히브리말도 ‘바타흐’라는 단어인데 그냥 쳐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희망을 그분에게만 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대부분 hope in 이라고 번역했어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어떠한 희망을 찾지 않고 오직 자신이 잠잠히 바라보는 그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설명하기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거기서부터 물이 흘러나오듯이 소망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에게서만 소망이 나온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서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서 사는 그런 신자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나를 옳다고 해도 주님이 그르다고 하시면 그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겠으며 천만인이 나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도 주님이 나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거치는 것이라는 고백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미워해도 내가 주님의 편에 있으면 주님이 나를 기억하고 인정해주시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라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신앙이고 또 생활이에요. 그래서 어디에 있든 지간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평화롭고 순적한 환경에서는 교만하여지고 역경과 어려움이 오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는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순적한 환경 속에서는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우리 자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도 보내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도 겪게 하시고 이렇게 하셔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환경으로 말미암는 역경이나 시련이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당하고 올바른 지식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문제는 참 잘 봐도 자기 자신의 문제와 결점을 어쩜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하고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보게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이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아!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환난을 그리고 시련을 주시고 고난을 주셔야만 겨우 자신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존재구나!’ 그러나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렇지는 않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온전히 의식하고 살면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깨닫고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너그러운 사랑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엄격한 것이에요. 그럴 힘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우리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상황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것은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자기를 향한 찬양밖에 안 나와요. 고난 속에서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은 고난 자체가 거울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를 비춰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고난 중에 깨닫게 되는데 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것은 고난 자체가 거울이 아니라 고난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거울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시인이 119편에서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했잖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런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고난과 역경을 당하여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겨우 생각이 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오는 것은 고난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고난을 당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 억압, 이런 것들이 속에서 막 솟구칠 때 오히려 이성은 더 정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이죠. 여기 성지타워 짓고 있잖아요. 거기 짓고 있는 회사 회장이 자살해서 신문에 났잖아요. 고난을 당한다고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온전히 집중하고자 할 때 그때에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고 그리고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말씀에 비춰볼 때 거기에 진실한 참회, 자기 깨어짐,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포기,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우리가운데 강렬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모든 힘은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바라고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서만 소망이 온다고 확신하는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적합한 마음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에 적합하고, 마음을 쏟아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섬기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