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시는 하나님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소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64:2).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64편 제2절입니다.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소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시 한 번..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 이 시인은 그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바는 자기를 숨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은 그 이 시인을 수색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사실 시기는 누구도 그 간단하게 그 확정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묻어나 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사울에게 쫓기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도망 다녔고, 사울은 자객들을 풀어서 이 다윗을 쉼 없이 찾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도망 다니는 그의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그를 숨기지시 않으셨더라면 아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숨겨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되 우리를 숨기심으로 보호하시는 분이시죠.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 동안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커다란 자연적인 현상에도 직면하면서 천둥과 번개를 피하기도 했을 것이고, 비를 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피하게 하시는 은신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여러 번 고백하고 또 피할 바위요, 산성이라고까지 고백을 합니다. 자연의 재해와 전쟁으로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자기를 건지고 구원하시는 많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시던 분이시고 또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한 섭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섬김에 있어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붙들면서 이 다윗은 고난과 시련이 와도 그 환경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환경을 능가하는 능력과 사랑으로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숨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숨겨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 숨겨 달라고 간청하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는 것입니다. 행악자의 비밀한 꾀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비밀한 꾀라고 하는 것은 악인이 가지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겉으로는 선을 베푸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고, 겉으로는 달콤한 것 같으나 그 뒤에는 칼이 들어 있는 그런 종류의 그 음모를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대부분 단순합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하면 그 말이 마음에 담겨져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것을 그 사람의 말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받아 들이는 것, 이것이 진실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대적자인 사울을 비롯해서 자기를 배반했던 부하들, 일생의 원수가 되었던 그 많은 행악자들 안에는 이러한 일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편에서는 이 행악자, 이것은 악인과 통하는 개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악인은 질료적 개념이고, 행악자는 거기에 구체적인 악인의 의도가 들어가서 그 쌓여있는 마음의 악으로부터 구체적인 악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행악자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용암과 같이 그 마음에 있는 악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일치, 그리고 진실함, 이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죠. 그러면 그런데, 선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입어서 선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행악자들은 그렇게 용암처럼 솟구치는 가운데 악을 행하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일관성이 없는 거짓과 그리고 사위, 이런 것들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악인의 그러한 기질들, 경건한 백성들이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악인에게는 없는 작용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의 의지인 이 율법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서 끊임없는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완전하지는 않아도 항상 제사를 드리거나 혹은 율법을 읽을 때 가르침을 받을 때 그 율법이 진리가 되어서 자신을 비추어 주는 거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고 또 그 진리의 책망을 받아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 가는 거죠. 그러나 악인들은 처음부터 그런 진리의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오늘날 이렇게 죄에 대한 관념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은 결국은 사람들의 양심이 실종되었기 때문이에요. 양심이 실종된 이유는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는 죄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것이 바로 행악자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악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는 사람들이라 이거죠. 그러면서 솟구치는 욕망과 그리고 악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생각해내는 그 수많은 악한 꾀의 다양성과 종류는 이 선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선한 사람, 경건한 사람에겐 처음부터 행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지만 악인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많은 꾀들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은 죄악을 짓는 자들의 무리들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평정, 평안, 그리고 고요한 평강의 상태, 이 모든 것들은 진리만이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진리 그 자체가 질서의 한 표현이기 때문에,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 진리가 질서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그 진리만이 질서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진리에 자기를 합치하는 사람들만이 평강과 평정을 느낄 수 있지 그것을 떠나서는 느낄 수 없는 거죠. 만약에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죄악된 죄악이 가져다 준 평화에요. 그것은 결코 영구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상은 그 자체가 세상의 본질이에요. 물이 끓듯이 이 세상은 그렇게 요동치게 돼 있어요. 그 속에서 평강을 잃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그리고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다는 확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내적 평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이기도 한 것이죠. 이 시인은 이러한 비밀한 꾀와 요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언제나 주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신실하신 주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날마다 큰 바위에 숨기시고 악한 자들의 비밀한 꾀와 죄악을 행하는 자들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