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4).
물론 시인이 살아온 길이 그렇게 평탄한 길이 아니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맡기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이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이런 일들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성경에 기록들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쫒기는 끊임없는 도망자의 처지에서 그는 매순간 하나님의 건져주시는 능력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언제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 기름부음 받은 이후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주님의 통치에 반기를 들던 수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며,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 왕이 된 후에도,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깐 전쟁터에서 만큼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경영해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이제까지 경험한 것과는 좀더 다른 차원의 구원을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구원의 개념은 사실은 구출의 개념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 구원의 개념은 아직까지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의 영혼을 속죄를 통해 구속의 은혜로 건져주시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런 개념들이 훨씬 약하고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언약백성들을 곤란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시는 그런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구출의 개념과 많이 맞닿아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물리적이고 육적인 환경적인 구출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신약에서는 반대로 그렇게 우리를 그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죄에서 건져내고 구원하시므로 그 의미를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우리를 구출해 내시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으로,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본질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이렇게 나아가는 각기 다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윗이 바로 이런 개념 속에서 익숙해왔던 사람인데, 놀랍게도 외적으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시면서, 불행을 선택하도록 하심으로써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범죄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체의 폭풍과 같은 시련을 주시지 아니하고고, 고요한 가운데 나라와 모든 것들이 평안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니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 다윗이 범죄 하자마자 시련과 끊임없는 환란들이 나라와 가정에 즉시 시작되었다면, 아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이 고통이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영적인 고통인지 이 세상의 시련과 환란 때문에 오는 마음의 결과적인 고통인지 매우 혼란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평탄한 가운데, 이런 것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 때문에 영혼이 깊은 고통을 받고, 무엇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까지 가게 하셔서, 결국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영혼을 이런 깊은 심연에서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중에서 일반섭리를 통해서 오는 복보다는 영혼에 임하시는 복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깨닫게 되듯이, 똑같이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마음에 있어서도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들에 있어서도, 이런 환경적이고 섭리적인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보다도 무엇으로도 치료될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으로 인해 주님께 매달릴 때,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주님이 자신의 온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것은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래서 이렇게 시인이 하니님이 물리적이고 일반섭리적인 환경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인생에 핵심이 되는, 자신의 영혼을 건져주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에 대해서 절실하게 느끼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그런 구체적인 자신의 죄가 생각이 났던 것이 예요. 그러니깐 우리아의 아내와의 관계는 결국 우리아를 죽이는데 까지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인 것은 아니거든요. 자신이 죽도록 꾸몄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가 되니깐, 그 둘 사이의 차별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피를 흘렸습니다. 언약 백성의 피를 제가 흘렸습니다. 더욱이 당신 때문에 나에 대해 가장 충성스러웠던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죄는 항상 발전하는 양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한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생물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죄의 지배 속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맑은 정신으로는 이렇게 죄를 지으면, 마지막에 죄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 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그것은 정신이 나간 것이죠. 다윗이 그런 죄를 지은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토설하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커다란 은총가운데 하나가,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축복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토설하며 하나님 앞에 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빌면서도 그 관계에 끊임없는 변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과 성찰이 없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포괄적인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해요. 그것은 하나의 의례적인 인사요, 의례적인 고백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시인이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의가 아니라 혀입니다. 이것은 시인지 가지고 있는,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이 사람은 찬양의 사람이었고 노래의 사람이었습니다. 80여편의 시를 썼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시인이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심지어 춤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예전에는 그의 몸 전체가 하나님 앞에 울려 퍼지는 악기였는데, 어느 순간에 화연의 줄은 끊어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린아이처럼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몸의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그렇게 늘 노래하던 사람이, 혀가 천장에 붙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입술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다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을 것 같은 속박을 느낀 것 입니다. 그래서 “하니님이 자유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깐 마음이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는 노래와 삶과 정신의 활동과 이 모든 것이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꾸며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이모든 것이 소화되어서 일체의 자유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영혼이 속박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그렇게 자신의 입술을 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술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열린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게큼 묶여있는 자신의 영혼을 풀어 달라고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라.”라고 고백하면서 그 다음절에서 내일 보겠지만, 입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혀와 입술의 관계가 마치 영혼과 자신의 육체의 관계와 같이 그렇게 이 속에 있어서 움직이고 노래하고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모두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라.”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라라고 하는 것은 다윗의 저작의 관점에서 보면 이중적인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율법과 관련해서, 원래 구약에서 나타나는 의의 성경신앙적인 개념이 율법과 관련된 법정적 개념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요구에 부합하면서 살면, 그것이 법정적인 판단에서 볼 때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윗자신에게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결국 주님이 가지신 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나는 이렇게 범죄해서, 율법으로부터 심하게 이탈되어 정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르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하신 법을 떠나실 리가 없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의 요구에 불합하지 못할 리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은 의로운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복음과 관련해서는 이 의가 시인에게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완전함으로 나를 구하시고, 주의 의로 나를 살리셨습니다.”라는 이 고백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그 의로 나를 의롭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미 구약에 이런 의의 전가의 개념들이 충분이 제시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자연스러운 계시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이다.”의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이 당신 자신의 율법에서 어긋나시지 않는 그 의로운 아름다운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죄는 자신이 지었더라도 계속 곤고하게 되면, 하나님을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너무 심한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많이 당해야야해’ 라는 식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게 될 때에는 “하니님은 옳으시고, 나는 틀렸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주께서 판단하실 때, “의롭다 하리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한 승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내가 그 의를 덧입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이 나를 건져주시면, 주님이 나를 징벌 상태에 두셔도 주님은 의로우신 것이며, 나를 건져주셔서 용서해주셔도 주님이 의로우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전자는 하나님의 율법적인 의고, 후자는 하나님의 복음적인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인이 예전에 들어가 보지 못한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