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도를 가르칠 수 있게 됨
“그러하면 내가 주의 도를 범죄자에게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21:13)
시인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놀라운 계시의 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그렇게 범죄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미 부어주신 성신이 떠나갈 것 같은 위협, 끝 모를 큰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큰 고통 속에서도 이 시인은 이러한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을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빛이 무엇인지도 알고 빛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자신의 힘으로 살고 기동하고 하나님 섬기고 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서 벗어나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은혜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그렇게 살며 기도하며 섬기며 주님과 관계 속에서 생명을 이어오게 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공기 중에 늘 있는 사람이 공기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듯이 은혜 안에 늘 있는 사람들은 그 은혜가 늘 소중하고 그 은혜 아래 사는 그것이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살고 그럴 때에도 물론 고난과 시련은 있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올 때마다 애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지만은 그것은 어두움은 아니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오면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가운데 그의 영혼이 끊임없는 쇄신을 하나님 앞에 경험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나름대로 연단을 받으며 한 나라를 주님의 뜻을 받들며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끌어지지 않는 경험, 그 속에서 나누는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과의 아름다운 교제, 위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긍휼. 이런 것들을 아주 풍부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 밖에서 시작된 악을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이기는 경험이었지, 자기 안에서 시작된 악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간음의 사건은 살인의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의 죄를 지어 거기에서 하나님 없이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때에 더욱 깊이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이 여기서 경험한 것은 이러한 악에 빠져 영혼이 깊은 침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자력으로는 그 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깊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복음을 가장 풍부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모세를 능가합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이 누렸던 복음의 의미는 파편적이었지만 다윗이 누렸던 복음은 그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누렸던 것보다 훨씬 총체적이었습니다. 한 쪽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가졌던 모세를 능가하고 또 한쪽으로는 공동체 안에 백성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발견하였던 호세아를 능가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 세계를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쯤 되었을 때, 지금부터 14년 전쯤입니다. 우연히 남의 교회 집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인도한 다음에 기도를 하고 성경을 폈는데 시편 23편을 읽을 차례였습니다. 23편을 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막 쏟아졌습니다. 그것을 우리 교회, 어느 교회 수련회 가서 1절부터 6절까지 한 절에 세 시간씩 열여덟 시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이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이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가 주전 10세기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오시기 천 년 전에 이미 그 복음을 복음의 상당부분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오신 이천년 후에 이미 계시된 빛 아래 사는 내가 그 사람보다 복음을 더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복음에 대한 말할 수 없이 큰 경험들을 다윗이 이 타락의 경험 속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 문제를 깊이다루기는 힘들지만 이것 하나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시는 구약시대였고 율법에 익숙해져 있던 시대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입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 좁은 의미의 율법 이 두 가지가 시인이 접하였던 율법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율법은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흠없는 계시입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인 언약의 당사자로서 의무에 묶는 조항들입니다. 그런데 이 넓은 의미의 율법 속에는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강력한 쇄신의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아마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을 세세하게 나누는 신학적인 안목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효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가까이 했던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들, 이러한 것들을 대하면서. 선지자의 글들은 대부분 모세 이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로 시인이 접하였던 것은 모세오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책이었겠죠.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그 안에서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고 고치시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근간을 이루었던 좁은 의미의 율법들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고 치료할 수 있는 기능이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시인이 이러한 율법을 통해서 그렇게 복음의 의미에 깊이 접근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알 수 있는 비밀을 터득하게 되었는냐.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충분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죄의 힘과 위대한 능력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를 결박한 그 죄의 사슬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려도, 기도해도 무엇으로도 그 죄의 속박과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은 태어나서 아마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해서 스스로 결박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소하게 지은 죄에서는 그것이 자기를 결박하고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강제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 받는다는 정도가 각각 다릅니다. 가볍게 받을 수도 있고 깊이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은혜를 받고 자기가 은혜를 겪게 되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정신을 새롭게 하는 힘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게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그 말씀에 묶여버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 것은 결국은 은혜가 주는 힘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신적인 강제력이고 죄가 사로잡게 하는 것은 죄의 결박하는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느끼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야하는 것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시고 말씀을 보내셔서 자기를 그 결박에서 끌러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하게 되었을 때 이 용서의 경험은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이전에 다른 것들을 통해서 보게 됐던 하나님의 성품의 빛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지식과 실제적인 경험의 세계를 다윗의 마음속에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의 앨라바바라는 곳에 갔는데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헬런켈러가 살던 집이 그대로 백년가까이 되어도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신문사 사장이었는데 돈이 많았던 것 같아요. 굉장히 큰 저택이었고 소설 속에서 본 그림과 똑같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눈길을 끈 것이 설리번 선생이 앞도 못보고 귀도 먹은 그 소녀에게 교육을 시키는데 교육을 어떻게 시키겠습니까? 헬렌켈러의 자서전을 보면 설리번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수돗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때로서는 정말 드물었을 밀펌프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 펌프를 선생님이 부어주셨습니다. 무언가 시원한 것이 내 손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 손바닥에 water라고 써 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거죠. 설명할 수 없는 거죠. 눈에 보이면 설명하는데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 때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강물처럼 밀려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궁창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를 경험함으로써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 이전에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들에게 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칠 수 있겠나이다. 그리하면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주님 앞에 자신의 범죄를 통하여 범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용서가 가르쳐준 것이죠. 그런 은혜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겠나이다. 아버지 앞에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죄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 그 죄를 미워하고 부르짖으며 그 깊은데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이죠. 선택은 다윗이 했지만 거기서 벗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삶이 필요함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미끄러진 날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셨던 은혜가 우리 안에 지식으로 살아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