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가 배신할 때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55:12-14).
다윗의 이런 표현을 보면 아마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그래서 피난을 가고 고생을 하던 그때에 회고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어주죠. 그만큼 아들에 의한 반역의 사건은 다윗에게 있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 사건이 다윗에게 준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아다시피 다윗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신앙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왕이면서 선지자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윗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신학자 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구약에서 거의 유일하게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기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 반역의 사건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론을 다시 쓰게 한 사건이었어요. 인간이 어떤 존재 인가하는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들어 준 사건이었어요. 다윗이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네 가지의 큰 자원이 있었어요. 우선 첫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그 빛 앞에서 인간이 누군가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다윗은 다른 사람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의 속성의 어떠함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의
이러저러함을 통해서 그 빛 아래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하는 이런 이야기 입니다.
여기에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계시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보면은 자연과 인간을 비교하는 것이 많이 나오고 자연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아마도 솔로몬이 잠언의 글속에서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인간에게 배운 많은 지혜를 그것을 습득하는 방식들도 아마도 아버지를 통해서 받은 것이리라 이렇게 여겨집니다. 다윗이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 깨닫는 세 번째 통로는 자기성찰이었어요.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함으로써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마지막 네 번째는 다른 사람들을 살핌으로써 인간이 어떤 존재 인가하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늘 사람들을 경험하며 살지만 그가 하는 행동 그가 내뱉는 말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계획들을 대하면서 그 뿌리를 추적해서 그의 마음을 살피는 가운데 그가 어떤 존재 인가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렇게 더듬어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건, 이 압살롬에 의한 반역의 사건은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론을 새로 쓰게 만들 정도로 큰 충격을 갖다 주는 사건이었어요. 왜? 지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예전에 사울의 때에도 위험과 시기를 당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어 씁니다.. 그런데 이번에 당하게 되는 것은 사건은 자기 뱃속으로 나은 자식이에요. 그런데 그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쪽편에 선 많은 인간들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지체들이었고 또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 하던 지체들이었어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만약에 나를 책망하는 자가 원래 공격하는 자가 이런 뜻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자가 원수는 아니다. 만약 원수였다면 내가 참았으리라. 왜? 그는 원래 나를 미워하는 인간이었으니까. 나를 대해 자기를 높인다 라고 하는 말은 교만해 지는 거죠.
다윗을 멸시하는 거죠. 그 사람이 나를 원래부터 미워하는 자였다면 내가 차라리 상대도 하지 않고 피하여 숨어버렸을 것이다. 한때는 나를 높이고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으로 여기던 그 사람이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생각하고 교만한 얼굴을 치켜들고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원수로 행동할 때에 그때에 가만히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면서 나라를 일으킨 사람이고 자기와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면서 함께 예배하면서 주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넓게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징계하기 위한 섭리였지만 가깝게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본성의 악함을 사용하셔서 그리하신 거죠.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들이였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이런 것을 더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간에 대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 보편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과 개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두 개를 포함하는 거예요.. 물론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것과 같이
하나님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또 자기자신을 관찰하면서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남이라는 존재와 다르지만 그러나 나와 남이 모두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테두리를 넘어설 수는 없죠, 그러니까 항상 인간 전체가 누구인지 알고 이웃을 보면 좀 특별이란 인간이라도 인간을 잘 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아야지만 나라는 존재도 올바른 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이런 자각을 통해서 그러면서 이제 다윗은 정말 인간이 뼈 속 깊이 악한 존재이고 절망적인 인간인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의 인간관은 정말 복음적이에요. 그래서 철저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다윗의 범죄를 통해서 불명예나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에 대한 어떤 보복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오히려 이것은 축복이었죠. 왜냐하면 이런 징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인간 자신을 좁게는 다윗 자신을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라 하신 것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이 위대한 계시를 한 몸에 받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 속에 살던 이 사람이 그 교만하여 지지 아니하고 노년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고 사는 그런 겸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보다 더 시편 전체를 다윗의 작품을 연대를 매긴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후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이 부분들에 있어서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는 그런 현저한 신학적인 깊이와 철학적인 깊이를 갖게 되었던 거죠.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내면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살았을 삶의 한 결과들이에요.. 말만 잘하고 살면 개떡인 경우 사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죠. 그 말이 참되다면 그를 그렇게 데려가신 거죠.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요 동료요 그리고 동지였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여 다윗의 마음에 칼을 꽂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만 보면 원한과 미움이 쌓여서 마음으로 범죄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좀더 높은 하늘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려다 보면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생을 살면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복수를 꿈꾸고 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이에요. 인생은 원래 그런 모순과 악이 가득 찬 곳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신앙생활이죠. 그래서 불완전한 세상을 볼수록 완전한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을 보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만족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매 순간 인생사에서 일어 사는 모든 모순과 갈등이 완전하고 살아계신, 완전하고 사랑스러우신 하나님께로 회기 하게 되는 그런 계기를 삼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