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리이다
“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1-3).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난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목표 자체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셔서 우리를 분리시키시기 위함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분리된 사람들이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려는 계획을, 이 세상에 함께 살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거죠. 그러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나면 오히려 고난이 더 많아질 수도 있죠.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생각없이 살아갈 때에는 가족 속에서도 누군가가 부모든지 자식이든지 혹은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형제든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면 우리도 똑같이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은혜를 받고 나면 이제 십자가가 져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가 내게 깊이 상처를 주었다면 그 부모를 용서하고 그리고 또 자식이 날 아프게 해도 자식을 용서하고 동기 간에도 자기가 손해를 보고 살아도 동기간에 화합을 도모해야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우리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알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나면 오히려 고난이 더 많아질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차이는 있어요. 뭐냐하면 우선 생각해 볼게 뭐냐하면 그러면 그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그러면 그게 그렇게 행복한 행복한 삶이냐?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없거든요.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자기가 희생을 하지 않는 삶이라고 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은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무리 단기적으로는 고생을 덜하고 그것을 회피하고 또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악을 행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마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거거든요.
무슨 얘기냐 하면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거 모두 불문에 붙이고 부모를 용서해서 효도를 하면서 사는 것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상처를 부여안고 부모와 척지면서 살아가는 것도 그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고난이죠. 그래서 아우구스누스가 말하기를 순경에 처할 때에는 역경에 떨어질까봐 두려워 하고 역경에 빠졌을 때는 순경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 인간이니 사는 것이 어찌 시련이 아닌 것이 있겠나이까 라고 고백을 했어요. 그게 산다는 거 자체가 끊임없는 고통이고 괴로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차이는 있죠. 뭐냐하면 그렇게 자기 자신이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없이 그저 또다른 자기 사랑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가족들에 대해서 자기가 그런식으로 살아가노라면 결국은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식으로 살아가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좋은 끝이 있겠어요? 그렇게 하면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은혜는 사명을 그 속에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족들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을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자기에게 고통을 준 부모를 용서하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칩시다. 거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죠. 설령 그 일이 끝까지 잘 안 이루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고 그렇게 그런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해야할 일이라면 우리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종교의 진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예요. 깨달아 지게 되라는 거죠. 그 진수를 깨닫게 되는 거죠. 그건 사실은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거죠. 그래서 보면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의 사랑과 애틋함을 수없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걸 설명한 들 그것을 느낄 수 있겠어요.
제가 몇해 전에 그 편도선 수술을 했잖아요. 근데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픈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남들 심방할 때 편도선 수술한다고 하면 사실은 심방도 안갔거든요. 그리고 가도 뭐,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 ‘괜찮다 창자가 구만리다,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그저 병원에서 푹 쉬다가 나오면 된다’ 이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는 조금 특별한 경우이기는 했어요. 왜냐하면 막 열꽃이 이 편도선부터 시작해서 이 안에까지 돋았고 하여튼 20년을 의사생활했던 사람이 내가 기록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커다란 편도는 처음봤다고 할 정도로 속에 밥을 먹으면 밥알이 들어갈 정도로 편도가 곪아가지고 구멍이 뚫어져서 밥알이 들어갈 정도로 그렇게 심했어요. 그런데 그거를 떼어낸 거예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픈거예요. 나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사람인데 너무너무 아픈거예요. 그랬더니 심방이라고 어느 자매가 심방을 왔어요. ‘좀 어떠세요?’ 그래서 ‘아우야 너무 아프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자매 하나가 ‘목사님 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모르지만 애 낳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아파요’. 그래요. 그래서 그래 뭐 ‘나는 안 낳아봤으니 할말이 없겠지’. 그랬는데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수술을 해서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내가 직접 못들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그거 어마어마하게 아파요.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파요’ 그 사람은 둘 다 경험을 했으니까 나의 증인이 되어 준거죠. 그렇게 설명해서 옮긴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으세요. 이 기독교 신앙에서 온갖 세속주의와 이단이 어디에서 생겨나냐면 믿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거예요. 믿지 못하는데서, 믿으면 많은 말이 필요없고 단순해요. 근데 안 믿으려고 결심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말이 아주 많아지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속에서 전수되어야 할 지식을 그게 아니라 이 이성으로 받아들여야 되니까 너무 어려운 거죠. 도저히 이야기가 안 통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하는 말이 있죠. 먹어봐야 맛을 알지 그러잖아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먹어봐서 그 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의 맛에 대한 경험을 말로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무지하게 말이 많아지겠죠. 근데 똑같은 것을 그 사람에게도 먹여 주면서 그 사람이 먹고 음~ 하고 말한다면 언어가 별로 필요 없잖아요. 이게 똑같이 그런 거예요.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을 그림으로 느낌을 그려보라면 이제 너무너무 어려워지는 거죠. 코로 냄새를 맡으면 될 거를 그거를 말로 해보라고 그러면 아주 복잡해지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건 불가능한 거죠. 이것은 모두 육체 감각인데도 서로 통하기가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이게 영혼과 정신에 속하는 그 감각이 바로 믿음인데 그거를 이 육체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라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거죠.
이런 신앙의 정수를 경험하게 될 때에 이런 신앙의 정수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신앙의 정수를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사람의 마음, 당신을 의지하는 그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 분이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면 좋을 텐데 인간이 절대 그렇게 안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이 타락한 죄성의 정체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립하려는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매달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모든 것이 있어도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면 우리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예민해져 있는 둔감해져 있는 우리의 영적인 이 사고가, 둔감해져 있는 우리의 영적 사고가 일깨워 지지 않을 때 예민해져 있는 우리의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죠. 내 안에 은혜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둔감한데 가난해 지고, 망하고,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고, 이런 건 예민하잖아요. 언제나 예민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걸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한번 전체적으로 만지시고 돌보시는 거죠.
옛날에는 보링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거의 없습니다. 엔진을 한 몇 만 km타고 나면 차가 너무 비싸니까 엔진을 열어서 몇 가지를 이렇게 교체하고 해 가지고 엔진을 새 힘을 내게 하는 그런 기술이죠. 지금은 뭐 차가 타기 싫을 때까지 엔진을 써도 엔진이 아무 문제를 안 일으키니까 너무 잘 만들죠. 그런 단어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요.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링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는 내적인 고통을, 환경적인 어려움을 주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때가 있는 거죠. 시인이 지금 그런 때에 들어서 악인들에게 에워 쌓여서 고통을 받고 두려움을 느끼는 그 날에 주님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정수를 다시 한번 이 시인에게 알려주시는 기회로 삼으신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