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을 보복하시는 하나님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덥게 하기 전에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 58:9-10).
계속해서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인에 대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을 토로하는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지난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가시나무가 땔감으로 사용되어서 그래서 물을 끊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물이 끊기는커녕 가마를 뜨겁게 덥히기도 전에 불붙은 가시와 아직은 불붙지 않는 가시를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가시나무는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우리를 찌르는 이웃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가시나무라는 것은 시인을 찌르듯이 고통을 주는 이웃들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은 자로서 살아갈 때 자기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이웃이 있는데 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은 바로 그 사람의 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가시나무라고 하는 비유로 도입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시를 써도 이것을 읽는 히브리인들은 그 시의 비유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아주 실감나게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저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 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가시나무를 가리키겠지요. 가시나무 중에서 아직 타지 않은 것과 타는 것 이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니’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 저가 누구냐는 것이죠. 대명사로 나오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게 바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고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결국은 해석이 마찬가지인데 이런 뜻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진노 때문에 그렇게 지금 막 타오르고 있는 가시와 같은 시인의 이웃들, 그리고 아직은 타지 않았지만 잠시 후 불이 당겨지면 타오를 것과 같은 그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리신다.’는 뜻이거든요. 그 대적들을 제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시인이 표명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보면 당연히 여기에서 이제 ‘불이 가마를 데운다.’는 것은 가마솥 밑에다 불을 때면 가마가 뜨거워지면서 물이 끊기 시작하잖아요. 하나의 의로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 가시와 같은 이웃의 한 비유에요. 여러분들도 고생하고 힘들면 ‘끊는다, 끊어’ 그러잖아요. 괴로움과 고통을 받은 어떤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때 하나님이 회리바람으로 이것을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이죠. 성경에 회리바람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람이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도 이 바람이 등장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한 상징이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대적들과 그리고 아직 타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잠재적인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사실을 시인이 기대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은 우리 자신의 죄성에 비추어 보아도 적합하지 않고 또 그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을 보더라도 또 적합지가 않아요. 그런 고통과 이중성이 있게 마련이죠. 그 때에 그런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삶속에 간섭하고 개입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런 간절한 기도와 몸부림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악인들을 제거하시고 그리고 자신이 받는 그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끝나게 해주시기를 구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어제 한 것이니까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시인은 이제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드디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편 중 특히 다윗의 시에서 인간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 의인은 이 의인과 악인의 대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과 세상나라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죠. 세상나라에도 하나님의 백성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 나라에도 세상백성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축은 현저히 달라요. 근본적으로 그들의 축은 상이한데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종종 세상나라 백성처럼 살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점이 하나님이에요. 세상나라의 백성은 가끔 하나님나라의 백성처럼 사는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중심은 결국은 자아에요. 세상이에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나눠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따라서 이 의인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악인은 그 언약관계를 끊임없이 파기하고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시고 당신의 통치를 확고히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 때문에라도 악인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적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 보복을 당하는 것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잠시 번영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나타나요. 그것을 보면서 의인은 기뻐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고소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파멸당하는 악인들을 통해서 확장되어가는 여호와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인이 멸망되는 그 자체를 보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 발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생생한 표현을 했을까요? 다윗은 원수의 압제로 인해서 수없이 도망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던 그 끔찍한 과거 그것은 결국은 악인들의 끊임없는 도전 때문이었잖아요? 그들이 파멸당하고 그리고 자신의 발을 그 속에서 씻는다는 의미는 이게 그의 고난이 끝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고난을 그에게 고난을 준 많은 사람들을 징벌하심으로 이제 그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이 속상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면서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추격하고 고통을 줄 이웃이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쉬게 되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 참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참 이상한 것이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도 마음에 남고 우리를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몰아넣고 아픔을 준 사람도 우리의 마음에 남는데 누가 더 진하게 마음에 남아요? 사람의 마음이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하지요. 물론 남아요. 그런데 그저 가슴에 잊혀 지지 않도록 따뜻하게 남아있지 그렇게 불같이 뜨겁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원수들이 우리들을 괴롭힌 것에 대한 우리의 원한은 언제든지 생각하면 다시 그 정동 속으로 들어가리만치 그렇게 선명한 기억으로 뜨겁게 남고 이것이 이제 아주 심하고 클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복수를 꿈꾸게 되는 것이죠. 그게 우리는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의 삶에 대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 다윗이 기도는 이렇게 했지만 자기 손으로 원수를 죽이려고 나섰느냐하면 사실 그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끊임없이 의지했어요. 사울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을 내가 손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자기 아들에게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갈 때에도 자기를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을 보지요. 처단할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죠. 법궤도 두고 갑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이 시인의 아주 열렬해 보이는 원수에 대한 멸망을 구하는 기도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호소하는 다윗의 사상이에요. 그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위대함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어차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어차피 인생을 사는 것이 시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시련 속에서 인간의 의무는 자기가 피할 수 없도록 주어지는 그 모든 고난을 그대로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에요. 그 모든 즐거움과 고난, 시련과 고통의 시간들을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많은 이웃들도 우리는 오히려 용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로 우리는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마음이 들고 지난날에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떠오를수록 깊이 기도하고 의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