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4일 새벽예배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시 59:10-11).
Ⅰ. 대적을 향한 기도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고난 받는 자기를 인자하심으로 영접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인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 중에서도 특별히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을 기초로 해서 베푸시는 자비에요. 이것은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만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고 이것을 신약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그래서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 자비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하나님이 자기는 이러한 놀라운 자비의 사랑으로 대해주시지만 대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대적을 하나님이 전멸시키시고, 죽여 버리시고, 파멸에 이르게 하시고, 환란가운데서 그들의 생명을 끊으시고 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이여 저희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시편에 나오는 이 대적을 향한 저주의 시들이 단순한 보복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중요한 방증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그들을 죽여 버리신다면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죽어서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그 큰 고통 속에서 죽는다면 그의 행한 악에 대한 징벌은 되겠지만 그 당시에 그가 죽는 것을 보는 사람들 이외에 누가 그들을 알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시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달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큰 능력으로 낮추십시오. 그러면 낮아진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대적한 마지막 결과가 어떨까 하는 것을 언약백성으로 하여금 친히 보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그 행복을 알게 해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지요. 이게 바로 그것이에요. 그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기도는 명백히 원수에 대한 증오심에서 우러나온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북주시는 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악인을 위한 심판의 기도가 선교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Ⅱ. 고난으로 우리를 일깨우심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살기를 기뻐하시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그런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고난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것은 이 세상의 본질과 밀접히 관련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고자하는 길은 선한 길이고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지요. 비록 신자들이 때때로 물러가 침체에 빠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악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안에는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심으신 선한 삶을 살고자하는 강력한 욕구가 있어요. 이것은 마치 파도치는 바닷가에 있는 바위와 같아서 큰 파도에 가끔 가려지는 적은 있어도 결코 사라지는 법은 없어요. 파도가 쳐서 해변을 뒤덮을 때에는 잠시 바위가 보이지 않지만 얼마 지나고 나면 다시 물이 빠져나가면서 그 바위가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신자 안에 두신 선의 본성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끔 이 세상과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게 신자의 모습이에요. 이러한 이중성을 세상은 정확하게 알지요. 그래서 의도가 없어도 세상은 신자를 미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죠. 이것은 또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해요.
그래서 어제도 우리 신학생들이 공부하겠다고 마당에 잠깐 모여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끝없이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한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셔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시련을 당함으로써 수시로 하나님이 그에게 죄 많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이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던지 결코 하늘 가치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그를 일깨우시고 또 깨우쳐서 이 세상으로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으로써 우리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두 발은 딛고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을 향해 살게 하시기를 마치 물위에 떠있는 배가 거기에 있는 사람이 물위에 있지만 그 물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고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죠.
지난주에 칼빈 공원을 완성했는데 칼빈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마음으로 많이 울었던 대목이 그것이에요. 조용히 대학에서 공부만 했더라면 학자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인데 주님을 만나고부터 결국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아주 비판하던 사람이었어요. 이제 세네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의 관용 론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여기에 주석을 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식으로 학자로 데뷔를 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파리에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는 회심을 경험하게 되요. 루터와는 달라서 이 사람은 그런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이야기 안 해요. 그러면서 이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후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시련에 직면하게 되요. 그 간사하고 악랄한 사람들의 모함, 심지어 볼쉐기라는 사람과 논쟁을 벌이는데 나중에 그는 가톨릭으로 넘어가는데 칼빈을 색광, 그리고 동성애자로 소문을 내요. 엄청나게 많은 인쇄물을 만들어서 전 유럽에 돌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엄청난 대적들이 자기를 에워싸요. 그래서 칼빈을 자기말만 안 들으면 다 불태워 죽이는 아주 악랄한 폭군으로 그렇게 묘사합니다. 사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세르바투스를 화형 할 때에도 그는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막아보려고 애썼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의회가 결정을 해서 죽여 버립니다. 그런 속에서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마지막에는 사랑하던 아내도 먼저 죽지요. 아내가 죽어갈 때 아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아내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늘나라의 소망이에요. 그러한 절절히 배여 있는 하늘나라의 소망,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에요. 우리의 참된 위로와 행복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이 소망을 절실하게 피력해요.
그래서 어제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야 된다. 잠시 있다가 가는 것 지금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오늘밤에라도 너희 수고를 그치고 너희는 내게로 오라하면 모두 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이에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에요. 일도 사라지고 관계도 사라지고 심지어는 교회도 떠나게 되요.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주님이신 것이죠.
Ⅲ. 우리의 방패가 되신 주
그러면서 시인은 주님을 표현하기를 주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전쟁에서 비 오듯이 화살이 쏟아져도 방패를 세우고 그 뒤에 우리의 몸을 은닉하면 그러면 아주 충분히 그 수많은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고난이 오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시달리고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알고 오직 방패가 되시는 주님 뒤에서 피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