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1 새벽예배
주를 바라보는 자의 기도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앞에 문맥하고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탄원의 내용이 불쑥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6절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머릿속에 그려 냅니다. 전형적인 병행법인데, 바라는 자와 찾는 자가 짝을 이루고 수치를 당한다는 내용과 욕을 당한다는 내용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를 바란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 그리고 짝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을 찾는 자 즉,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사실은 다른 사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의 다른 특성들을 강조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히브리어로 읽으면 딴따딴다 딴따딴따 이렇게 박자가 맞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운율이 맞게끔 되어있어서 읽을 때 아주 리듬미컬하게 읽히도록 되어 있는 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런 것 까지 다 번역이 안됐습니다.
시인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런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이유는 무엇 때문 일까요.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악인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에 그 모습은 누가 보든지 간에 비참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자칫하면, 저는 주께 버림을 당하였도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누구나 이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워 싸여서 멸시를 당할 때에는 멸시를 하는 많은 사람들 보다 멸시를 당하는 이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대편에 서있다고 하는 것이 일방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행복하고 복되게 살아가면,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지, 고난을 받고 시련을 받는 속에서 그것이 너무나 올바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난을 받는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면밀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 하면서 자기 안에 자기는 하나님 앞에 너무 무지하고 악하기 때문에 내안에 무슨 죄가 있는지 나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그런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고의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해서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는 주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 신실하게 주님을 간절히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실족하지 않도록 그런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자신과 함께 의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지들이 부패한 권력이나 혹은 악한 사람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받을 수 있는 박해를 염두해둔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이후로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렇게 고난을 받을 때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도 정치적으로 분리한 위치에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동행하는 자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이 자기 때문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보시면서, 저희들을 선대해 달라고 하는 기도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또 하나의 해석은 그런 측면도 물론 있겠지만, 이것을 순수하게 신앙적으로 해석을 해서 이 시인이 어쨌든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라고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튼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한 자들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악한자들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깊이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크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 고난 받고 시련을 끊임없이 당하는 수많은 원수들에게 애워 싸여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나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한 인간들에게 고통을 받는 구나라고 하는 판단이 흔들려서 저렇게 오랫동안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니, 아마 다윗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죄를 지었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버려 고통을 당하게 하시나 보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의 고난이 길어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는 탄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뛰어나게 자신을 불사르도록 내어 주기까지 헌신했던 사람들도 고난이 길어지고 하나님의 도움이 그친 것 같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그때에만, 주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손을 놓으시면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 하고 그렇게 주님의 은혜에 놓임을 받은 평범한 사람의 마지막은 그가 누구였는지 다 모두 주님께로부터 물러나고 자기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길어지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넘어져 실족하는 일들이 없도록 도와 달라고 오히려 고통 받는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인생은 자기의 인생 같아도 자기의 인생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교회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또 구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나라 갈때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인연들 가족들 자녀들 우리의 부모, 형제들 이웃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편지라 예수의 냄새라고 그들에게 일러 주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편지는 보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것입니다. 편지는 아무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들에게 읽혀집니다. 냄새는 누구의 코끝으로 달려 가야겠다라는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풍겨나면,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가 그냥 하나님 앞에서 혹은 주님을 떠나서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그 모습 그 자체가 자식들에게는 커다란 인생의 격려가 되기도 하고 혹은 이 인생에 커다란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삶의 연관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아릅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