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 1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시 69:7-8)
여기에서 시인은 다시한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요, 회방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제 이것은 정말로 이 시인이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그리고 자신에게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부지런히 추적해 볼 때에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이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다 라고 판단을 한거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시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즉시 남들이 볼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그릇되게 살면서도 형통할때가 있는 가 하면 올바르게 살면서도 마치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인도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판들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즉시 와서 도와 주신 것은 아니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고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을 상당한 기간동안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어요. 그래서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수치가 내 얼굴에 덮혔나이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 얼굴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마찬 가지겠지마는, 굉장히 중요한거죠. 그 얼굴에 예를 들며는 시펴에 보며는 저들의 뺨을 치소서. 그러거든요! 히브리어 성경에 보며는 뺨이 턱으로 나와요. 레히라고 그래서, 그래서 그 턱을 치는데, 뺨을 치는데, 때리면, 턱을 치잖아요. 그게 바로 커다란 모욕이죠. 그다음에 얼굴에 침을 뱉는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아주 인격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 얼굴은 복수를 사용해요. 복수는 인제 신비하고 장엄하고 이런것들에 대해서 복수를 사용하는데, 그래서 얼굴이 파님이라는 복수에요. 근데, 그 얼굴에 수치가 덭혔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부끄러움이 이 시인을 압도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얼마나 그 치욕과 수치가 넘쳤던 것인가 하는 것을 보며는 알 수가 있는 거죠.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것이였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러는 고백을 여기에서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수치가 그 얼굴에 덭혔다. 그런 부끄러움과 수치가 덭혀서 이 시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에는 사람들이 말하기에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바 되었다. 라고 하는 그때에는 형제들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형제와 친척들에게도 객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며는 히브리 말로 게르라고 하는 건데요. 옛날에는 이렇게 땅이 씨족들이 모여서 사는 그런 때 잖아요.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나그네로서 들어와서 살게 되는거에요. 우거한다고 하거든요. 그렇게 우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나그네라고 부른 거죠. 그러니깐, 그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보며는 타성밪이라고 그래가지고 예를들면 박씨성들을 가지고 모여사는 사람, 그속에 최씨가 하난 들어가서 한두 가정이 산다. 그러며는 그 구박과 그런것들이 늘 많잖아요. 그게 바로 인제 씨족에 들어온 타성들에 대한 대우거든요. 지금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는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나그네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렇게 커다란 서러움과 응어리들을 담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깐 어떻게 보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던 것도 사실은 노예지마는 어떻게 보며는 그나라에 나그네 였기 때문에 나라가 없어서 당하는 서러움 아니에요! 그러니깐 그렇게 심지어는 자기가 가장 친한사람들에게도 객이되고 나그네가 되어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것이에요. 그러니깐, 하나님앞에 고난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큰 부끄러움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해주고 돌바주고 그러는게 아니라 이렇게 나그네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영광이 있을 때에는 그 영광에 계속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고,그리고 그 영광으로부터 멀어져 수치를 당하면 그러면 사람들이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사람들이 변화 물상한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언젠가 누가 연변에를 갔데요. 그 연변은 역사적으로 보며는 북한하고 매우 가깝거든요 사실은 그 살람들이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뿌리를 사실은 북한에 있다. 이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뭐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좀 잘 살게 되면서부터 연변과 이쪽에 있는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과 관련을 해서 굉장히 지휘가 높아졌거든요. 소득도 많아지고 그때, 제가 몇 년전에 만난 그 북한의 가이드는 한국에 한창 경기가 좋을 때, 중국에 살면서 한달에 칠백만원씩 벌었데요. 그거는 사실은 중국 그당시에 7,8년전에 중국과 비교해서 생을 해본다면, 한국에서 한 한달에 4,5천만원씩 버는 그 맛잡이거든요. 그러니깐, 굉장히 재미가 좋았죠. 그래서 인제 한국사람들이 가서 잘 음식을 먹고 나와서 “조선동포여러분 잘 계시십시오.” 아! 정색을 하고 “우린 조선동포 아니라고” “그럼 조선동포 아니면 뭔 동포냐고! 한국동포라 그랬데,” 그러니깐, 텔레비전이 다 한국TV 가나오고 그렇니깐, 사람이 영광이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며는 따르는 사람도 많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관계를 갔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느낌을 받게되며는 그 좋은 친구와 좋은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는 거죠.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사랑이 얼마나 유한하고 그리고 얼마나 번덕스러운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요.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가장 고난을 받을 때,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사이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로하게 인식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앞에서 이렇게 모두 다 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누구보다도 나를 가까이 해주어야 할 내 형제들에게는 나그네가 되고 그리고 내 모친의 자녀, 다 똑같은 말이에요. 모친의 자녀가 누구에요! 모친의 자녀가 누구에요! 형제잖아. 누가 그러더나고 내 인생에서 내가 안았을 때, 가장 행복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누구냐! 그러니깐, 자기 엄마라고 그러더라고, 자기 아버지의 아내니깐, 하나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반복하면서 가는 거죠. 그러니깐, 형제들이에요. 혈육의 형제들일 수도 있고 믿음의 형제 일 수도 있지마는 어쨌든 형제들에게 조차도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만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도 주님과 함께, 주님은 영원히 자기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며는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시지마는 사람의 사랑과 섞여 있을 때, 우리는 하r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구별하지 못해요. 근데 이런 시련의 시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 그때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사이의 사라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을 갖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또 이런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신앙에 있어서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아주 훌륭한 그 통로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던 때를 가만이 보며는 그 직적에 어떤 일이 있냐며는 외로움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아무도 의지할 수 없이 나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기대고 의지할 만 하지 않다는 그런 확신!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영원하신분이고 나를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그 신앙이 생겨나게 되요. 그때, 그 거룩한 고독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 가는 것이에요. 가난한 마음은 반드시 이런 고독의 느낌을 동반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사실은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