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죄를 속하시는 하나님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3).
여기에 보는 번역이 좀 참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될 것 같아요. 죄악이 나를 이기었지만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하시리이다...이렇게 말입니다. 해서 시편에 보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마치 무슨 인간이 죄를 겨루는 것 같은 죄와 무슨 겨루고 싸우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라는 의문이 됩니다. 근데 이제 죄가 이겼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다윗의 생애를 보면 다윗이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장면이 나오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그 간음 사건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에요. 여기에서 나오는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하는 것은 자기 속의 어떤 죄와 정욕, 그것이 교만일 수도 있고 그것이 어떤 욕망일 수도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하나님의 법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강력한 이 마음의 힘이 영혼의 의지, 그리고 마음의 힘이 자기 안에 있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도록 그 죄의 성향이 강해진 상태를 뜻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으로는 이렇게 이렇게 순종하기를 원하는데 실제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께 이렇게 순종하며 살고 싶은데 실제의 자기의 마음의 작용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그런 때, 이게 바로 죄악이 나를 이긴 상태입니다. 신약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나 악이 함께 있다...나는 마음으로 선을 원하지만 그러나 내가 악을 행하는 것이다...오호라..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그러잖아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럼 그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잖아요 그죠? 죄라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난 어떤 행동만이 죄가 아니라 기독교는 그 삶의 뿌리에 대해서 동시에 관심을 가진 종교에요. 왜냐하면 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의 펼침이고 그리고 그 본성을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합당하게 변화시키고 또 변화된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이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삶의 종교에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 것인가 하는 생활의 종교다...그런 이야깁니다. 그렇게 죄악이 나를 이기었지만...이렇게 되는 거죠.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죄악이 나를 이겼지만...우리의 죄과를 그렇지만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해 주실 것입니다....여기서 이제 재밌는 건 뭐냐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이것은 개인적인 고백이잖아요? 그런데 용서에 대해서는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하실 것입니다...이렇게 나와요.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죄악이 나를 이긴 것은 개인적인 죄의 사건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는 것이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전체와 맺으신 그 언약에 기초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는 것임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게 하셨는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분여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죄의 용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와 맺으신 그 은혜의 언약을 따라서 우리에게 시여되는 죄의 용서다..이 얘깁니다. 그래서 여기서 오늘 이 시인은 자기의 죄를 개별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언약 백성 우리 모두의 죄과라고 함께 말해요. 이것은 결코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호도하거나 혹은 자기의 개인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변명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은 비록 죄가 자기를 이긴 상태가 되었지만, 자기를 그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모든 은총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받는 은총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이런 이야기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를 지었는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다음에 우리의 죄악됨은 두 개가 함께 양립할 수가 없는 거예요. 며칠 전에 하도 이제 난로에 불을 때는데, 나무가 불이 붙어서 타는데 그 궁금한 생각이 들었어요. 물에다가 종이컵에다 물을 집어 놓고 이거를 속에다가 난로 속에다가 집어 넣으면 이게 탈까 안 탈까...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 해 봤어요. 별반을 집어 넣고 그 다음에 불이 펄펄 붙는 난로 속에다가 집게를 집어서 정성껏 갖다가 집어 넣었어요. 그래 참 놀라운 사실이 뭐냐면 물이 안 담긴 부분까지는 확 타요. 종이니까...물이 담긴 부분은 절대 안 타요. 속에서 물이 부글부글 끓는데도 종이가 안 타요. 둘 중에 하나일거예요. 물과 불은 불이 물을 증발시키든지 아니면 물이 불을 끄든지, 똑같이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동시에 한 공간에 동시에 한 공간에 공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 라일이라는 사람이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그랬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양립할 수 없는 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뭐냐면,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열렬히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용서받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이미 맺으신 언약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들이 죄의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이 지극히 크신 자비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거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우리의 죄과라는 표현을 쓴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요. 그러면서 시인은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원래는 주께서 속하시리이다...이런 뜻입니다. 속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남이 대신 대가를 지불하고 그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건져내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누군가가 잘못해서 책임을 져야 되는데 남이 와서 그 책임을 대신 져 주고 그리고 그를 용서받게 해 주는 거....이런 것을 바로 속한다라고 표현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뭘 보여 주냐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되잖아요? 그 지불하여야 할 대가를 하나님이 스스로 지불하셔서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여기에서 시인이 왜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고 사람이 서원을 이행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앞에서 모든 육체가 나아오는지에 대한 이유를 3절에서 전격적으로 밝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죠.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우리들이 누릴 때,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함해요. 그러나, 가장 우리에게 있어서 소중하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에 내리시는 축복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그 큰 은혜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시고 의지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구원자가 되시고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