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65:5).
시편 65편 제5절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아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아멘.
바로 앞 절에서 시인은 언약 백성의 복이 무엇인지를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즉 언약백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는 교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 모든 인간이 그토록 누리고 싶어하는 복된 상태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당신 자신이 복 되신 하나님의 그 복됨을 본뜬 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복되시다라고 하는 뜻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지극한 행복 속에 계시기 때문에 무엇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요. 그리고 바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그런 지복의 상태에 계시기 때문에 당신과 관계를 맺고 당신의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복됨의 참여하게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좀 어려우면, 예를 하나 들어 드릴께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하나님 거스르면서 살다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 마음이 지옥과 같죠.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죠. 우리의 삶 속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살던 집도 그대로고, 주님 앞에 나오기까지 겪었던 많은 고통스런 일들이 있었다면 그것이 즉시 해결됐을 리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그대로인데,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잠시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사라져 가는 것들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얻는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 자신이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항구적이죠. 그런 행복한 상태가 결국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친교 속에서 우리에게 획득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복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그에게 가까이 있는 존재가 되어서 그래서 그 분과의 교제 속에서 그런 택함과 복됨을 누리게 되는데 문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야 언제든지 당신이 선택한 많은 사람들을 당신 가까이 부르시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지만 악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 분만을 사랑하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는 싫지만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은 행복한 상태에는 도달하고 싶어요. 그럴 때, 이제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그 행복을 조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 같은 행복은 얻고 싶지만, 하나님 때문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상당히 비슷한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따면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거죠. 예를 들자면, 사치스런 삶은 모든 것에서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흉내냄으로 그와 유사한 행복을 얻게 되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뛰어나 교만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잠시의 행복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높으심을 본뜨는 거죠. 또 자기에게 상처를 주거나 악을 행한 사람들을 징벌할 때 보복할 때,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본뜨는 거죠. 다만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거죠. 본뜨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뭐 끊임없지 않겠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아래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려고 하는 대신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밑에 두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자기의 발 아래 두려고 하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결국은 주권을 휘두르시는 하나님을 흉내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악하게 하나님을 본뜨면서 행복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어서 되돌아 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악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인간이 선을 행할 때에는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뜨고 악을 행할 때에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흉내내기 때문에 악인이든 의인이든 결국은 그 하나님을 흉내내려고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나님을 본뜨고 살아가는 그 삶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얻어 보려고 하고 자기 자신이 언제나 복된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본받으면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글 속에서 이야기 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선을 행할 때에는 친근히 대하시는 하나님으 뵈옵는 것이요, 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이니, 우리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래 성경에서도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모든 죄와 고통, 그리고 모든 원수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것과 꼭 같은 곤경이 여전히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다만 그들은 그런 곤경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의의 구원을 받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언약백성과 언약 밖에 있는 백성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면서 사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삶이에요. 신앙의 중심은 마음에 있고, 그리고 그 마음은 항상 순전하고 올곧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이죠. 물론 때로는 죄에 빠질 때도 있고, 때로는 어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도 있고, 또 믿음이 식어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고난과 시련이 올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구원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찾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면서 살 때, 삶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파도가 되는 것이죠. 그것을 타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무슨 뜻일까요? 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우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렇게 봤어요. 땅을 커다란 쟁반이라고 생각을...그런 생각은 사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했던 그 추측이었어요. 유대인들은 그 위에다 어떻게 봤냐면, 쟁반과 같이 커다란 것이 지구이고, 땅이고, 하늘은 그 위에 투명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이렇게 봤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위 얘기하는 궁창이라는 라키아에요. 거기에 별들이 다 이렇게 매달려 있다고 생각을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 쟁반같이 생긴 땅의 마지막 끝이에요. 그것은 끊임없는 낭떠러지로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끝에 있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떨어진, 떨어지면 거기가 어디냐면 음부다..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떨어진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땅 끝과 바다 끝은 마찬가지에요. 땅 끝도 저 끝으로 가면 그 보이는 거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고, 바다 끝도 결국은 그 이렇게 떨어지는 그 마지막 지점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땅 끝과 바다 끝이라고 하는 그 표현 자체가 지금 말씀드린 것 같은 그런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는 지옥으로 매우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희망이 없는 그 백척간두에 있는 딱 조금만 더 가면 떨어지는 그런 상황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거기에까지도 당신의 지배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또 다른 곳에 보면, 그렇게 해서 떨어져서 음부에 내가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그러니까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가 읽으니까 별로 실감이 안 나지? 그 당시에 이런 시인과 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읽을 때는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문학적인 표현이었어요. 땅의 모든 끝, 먼 바다에 있는 자들조차도 의지할 주님이시다...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이 없고 그리고 어떠한 도움도 끊어졌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그 의지할 주님께서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어떻게? 당신의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리이다...이건 무슨 뜻일까요? 이 엄위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 속에 배여 있는 그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뜻하는 거죠. 이 하나님의 엄위는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그리고 구별되심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틀림없이 이것은 거룩성과 관계가 되는 거예요. 이 엄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엄격하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모든 이 땅에 있는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뚜렷한 구분점을 이루는 거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이 엄위는 사실은 하나님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일치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미학이라고 하는 것도 맨 처음에 생길 때는 뭐 인간의 신체를 들여다보고 미학이 생긴 게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위엄을 생각하면서, 숭고한 것, 자연속에 나타나는 그 창조조의 큰 위엄을 생각하면서 사실은 그 미학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돼요. 그래서 인간의 아름다움은 친근하고 가까이 하는 아름다움인데,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엄은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격차를 느끼게 되고, 이 위엄을 느끼면서 인간은 비로소, 이건 칼빈의 설명이에요. 이런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런 위엄 있으신 하나님이 사실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보아서 그 분의 위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당신의 모든 속성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엄도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분으로서 행사하시는 피조물들에 대한 주권의 행사를 통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시인이 이런 엄위하신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언약백성으로 살아갈 때, 자신을 공격하고 해를 입히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 속에서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의 행사 밖엔 없는 거죠. 자기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자요, 그리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이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엄위하신 주권을 공의를 따라서 행하실 때, 자신은 주님의 편에서 덕을 볼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려 자기에게 악을 행했던 사람들은 악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이 살기가 힘들고 어렵고 또 이 불신앙적인 구조이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올바로 살기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의 핑계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로우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 죄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호를 받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이런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편에 서 있는 자가 될 때, 오히려 가까운 심판에서 피하는 은택을 입는 길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고난 당하는 자의 위로이시고, 그리고 홀로 우는 자들의 어머니가 되시고, 집을 나간 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죠. 그래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