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 67:7).
이게 그 뭐 구지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쌍괄식이죠. 그래서 앞에 결론이 나고 또 뒤에도 결론이 나고 두 번을 반복하면서 그러면서 중간에서 그것들을 펼쳐나가는 그런 기법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의 얼굴 빛을 비추사 주의 도를 땅에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시옵소서...이 결론이 똑같이 7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표현만 다만 바뀌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이 여기에선 복을 주시리니...라고 나오고 주의 도를 땅 위의 구원을 만방 중에...라는 것은 하나님을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원래 말에 경외하다...혹은 두려워하다...공경하다...이런 야레라는 말이 쓰였는데,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꼭 같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그 복은 총체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야겠다고 의도하시는 대상 자체가 인간 존재 전체에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존재는 결국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지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육체가 영혼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육체가 없다면 그러면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참 인간 존재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심과 그 분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우리가 알게 되듯이 동일하게 우리의 영혼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관계를 맺는 것을 보면서 또 그 육체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영혼의 성향이 어떠하고 우리의 영혼이 또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죠. 참 놀라운 유비이고 뭐 아주 탁월한 설명이에요. 그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복도 사실은 이 육체와 영혼을 모두 아우르는 통전적인 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죠. 뭐냐면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서 나머지를 무시하는 그런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물질의 소유나 혹은 육적인 이런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행복들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추구점이 되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똑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열방과 만민이 누리게 되듯이 동일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핵심은 영적인 복이에요. 그렇지만 그것은 또 확장되어 퍼져가요. 그래서 우리의 육적인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의 지경을 넓히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을 아주 커다란 미덕으로 여긴다든지, 아니면 그런 삶을 동경하고 흠모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성경적인 그런 복의 개념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들이 많은 인간들에게 탐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런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들을 접근하지를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없는 우리의 육적인 삶의 번영에 대한 허물을 우리에게 많이 일깨워 주셨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동안에 일평생 싸워야 할 우리의 마음의 적들이에요. 그렇지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칭찬하거나 또 그것이 곧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증거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에요. 하나님은 종종 특별한 섭리 속에서 당신의 교회들을 고난 받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결핍과 고통 가운데 두시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미덕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미덕스러운 것은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한 마음의 덕, 그리고 선,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크기,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고 그리고 돋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주 잘 이해될 수 있을 거예요. 보면 구속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잖아요? 그 창조의 목적은 인간을 처음 지으실 때 이미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둘 다 잃어버린 거죠.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복도 함께 잃어버린 거예요. 영원의 복과 육체의 복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분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구분될 수 있다면 그 두 가지를 함께 잃어버린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가 있는 그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네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다........그리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다......다시 말해서 육적인 결핍 속에 끊임없이 말하자면 고통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타락의 결과였어요.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목적이 창조의 목적의 회복인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는 그렇게 저주 받고 고통 받아서 이마에 땀이 흘러야 겨우 식물을 먹고 힘써 농사를 지어도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그런 비참한 그 비생산, 혹은 열매 없음으로부터의 구원도 동시에 포함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는 이것을 올바른 질서 속에 두는 것이에요. 그래서 놀랍게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할 때 이 복 주신다는 말이 아라크라는 말을 사용이 돼요. 이것은 에세르의 복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의 복이에요. 그래서 정신과 영혼, 육체까지 모두 포함하는 복을 가리키고 이 단어가 족장들의 기록 속에 많이 나와요. 하나님이 이삭을 복 주시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더라...등등 나오는 그 많은 단어들 중들과 같은 단어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그 얼굴빛을 인하여 복을 받고 그리고 열방 중에 만방 중에 당신의 도가 알려지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당신을 충분히 드러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그것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목이었던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복의 포괄성, 영적인 축복과 우리의 육적인 행복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 이런 속에서 이 시인은 모든 복에 있어서 하나님만이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우리의 영혼, 이웃의 영혼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 때문에 일용할 양식까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이상은 모두 탐욕이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육체가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에요.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써 가장 기초적인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이 방식에 대해서 인간은 가장 예민한 거죠. 명예욕도 배고파 굶어죽게 된 사람들에게는 별로 아닙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에요. 불신앙적이긴 하겠지만 그래서 오죽했으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게 되었겠습니까? 그 배고프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배 고파 죽게 되었는데 그까짓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리요...라는 망발을 서슴치 않았어요. 그것이 얼마나 원초적인 욕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은 사실은 극히 적은 부분이거든요. 그것들을 확대해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니까 막대한 자원이 드는 것이지 생존을 유지하려고 한다라고 할 경우에 그건 별 거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러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 속에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필요한 물질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기 보다는 모든 범사에 있어서 자신을 육체의 생존까지 하나님을 의존해야 될 것을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것은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에요. 이런 하나님의 복을 이 시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올바른 질서를 따라서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복을 고하고 또 우리 모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땅에 있는 보편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의 질서이고 이것을 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탐심이 작용하지 않는 그런 복입니다. 그래서 그런 복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큰 나무처럼 펼쳐지고 그리고 거기에 피하는 모든 이 세상 사람들이 덕과 혜택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돌보고 이끄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며 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구원의 계획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텐데 그러면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땅의 모든 끝...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그것은 뭐냐면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복을 누리고 그 복은 하나를 위한 수단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면 주의 도를 만방 중에 알리게 하시는 그 도구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자원들, 그 영적인 자원들은 바로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진리의 말씀들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서 많은 덕스러운 것들을 맺게 되죠? 사랑과 온유와 오래참음, 자비, 양선, 절제, 충성 등등의 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돼요.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이것들이 없었더라면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참고 이것이 없었더라면 포학하게 대할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대하고 이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인내하며 충성스럽지 못했을 텐데 이것들이 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그 목적이 이뤄지기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영적인 자원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런 영적인 자원을 제외해 놓고 육적인 자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에요. 오늘날 우리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고 봉사를 해야 된다고 이야기 하면서 물질적으로 교회가 풍부하니까 사실 많이 돕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이게 전부 다 찢어져서 통합이 안 돼서 그렇지 뭐 그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이나 아니면 불우한 이웃을 돕는 많은 운동들에 사실은 그 어느 정도보다도 개신교가 월등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도 상당히 염려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교회마다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에 열심히 돈을 거두어서 그렇게 후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곧 예전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한다거나 아니면 고난을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의 하나의 전형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죠. 물질은 내어놓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인내하면서 사람들을 참고 그들을 품고 그리고 그들이 정말 변화되길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그런 내적인 투쟁과 몸부림들은 이제 안 하려고 해요. 이것이 바로 경건이 그 이 세상의 도덕으로 대치되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개념 그 자체를 아주 좁게 형성을 해 버려요. 아주 좁게....그래서 들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개혁 신학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만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이렇게 보지만, 이 사람은 딱 잘라 말해요. 불신자에게 무슨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없다...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있다는 아주 극단적인 입장으로 몰고 가요. 아주 작은 몇 가지 표현에 있어서 흔적을 불신자에게서 찾기는 하지만 없다고 보는 거죠. 그 이유가 바로 그 시대에 있었던 보르티우스나 아니면 소키누스주의나 이런 이단들이 있어서 그래서 참된 경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신적 사랑의 까리따스의 표현과는 인도주의적인 불우이웃돕기 같은 것들을 막 혼동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참된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 영적인 자산에 대해서 도외시하는 거예요. 그럴 땐 위기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이 양자가 서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쐐기를 박으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회심과 중생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하나님의 형상도 회복될 수 없다고 발언....그러니까 자연적인 사람들이 자연적인 형상을 통해서 덕을 베푸는 것이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복된 그 초자연적인 형상을 통해서 베푸는 덕스러운 삶과 대치될 수 있다든지 연장될 수 있다든지 하는 것들을 쐐기를 박는 거죠. 이런 것들의 질서를 아주 분명하게 유지하는데 있어서 한국교회가 지난 날 실패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기복신앙으로 나타난 것이다.....그래서 오늘날은 또 정반대로 그런 실패 때문에 무조건 이 세상에서의 물질의 복이나 이런 것들 자체를 하찮게 여기거나 아니면 신앙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무시하거나 그러면서 사람들이 그런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는 멀어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점점 신앙과 삶 자체를 분리시켜서 이원론적으로 사람들을 만드는 거죠. 자,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에서 아바타 영화를 보지 못 하게 했다...그러면 진짜 교인들이 안 보느냐...그게 아니라 다 가서 보고 교회에 와서 입을 딱 닫고 봤다는 이야기를 안 하는 거죠. 왜 보지 말라 그러느냐...뉴 에이지 작품이다...듣지 마라 보지 마라..그렇게 얘길 하는 거죠. 그러니까 보고 와서는 서로 말을 안 하는 거야...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것을 이제 교회에 와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그러고 입을 닫아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시체말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삶을 사는 거예요. 자기는 다 들은 것들을 즐기고 먹고 하면서 신앙적으로 통제가 안 되는 거죠. 이런 것들은 아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이 아니라는 거죠.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이 적용된 그런 포괄적 주권주의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 신자의 의무에요.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토론할 수 없는 문제가 없고 그러고 하나님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는 문제들이 없는 거죠. 그러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결국은 땅의 모든 끝들이 그런 나타남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어서 그 분을 두려워 하게 되는 것, 그것이에요. 그런 영적인 자원들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그게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 그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자산들을 풍부하게 해서 그래서 그 지식들을 흘려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지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한 시대의 교회의 사명은 둘이에요. 자기 시대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분히 누리는 것과 그래서 후대에 전달해 주는 거죠. 그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 사람들이 몰라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았다는 중요한 표식이 되는 거라 이거에요. 그것이에요. 그것은 마치 여러분들이 자식을 기를 때 돈을 많이 벌어놨다고 칩시다. 자식들이 오래 그것을 기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돼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가난했어도 오래도록 그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어머니에 대한 인상이 살아 남아서 사람들은 갔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이 자녀들의 후손들의 삶을 움직이는 하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거죠. 교회가 똑같은 거라...그런 것들을 흘려 보내는 도구들로써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육적인 자원을 사용하시는 것....똑같이 우리의 구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가 함께 내포와 외연으로 다가오고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면으로 그리고 육적인 축복들과 이런 모든 물질적인 섬김들을 도구로 삼아서 흘러가서 그래서 망가진 그들의 육신을 펴고 그 다음에 어둠 속에 있는 그들의 영혼을 고치는 포괄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이 인간들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게 이게 미끄러지고 타락을 하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피폐한 상태 속에서 그러면서도 육적인 부요함으로 스스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거죠. 모든 자원을 자기 자신이 최종적인 소비처로 만드는데 여기선 하나님 앞에 구원의 목적을 전적으로 망각한 그런 패역한 삶이라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흘러가도록 만드는 거죠.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이에요. 먹고 입고 인간적인 삶을 누리면서 살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 육적인 축복 위에 담아서 떠내려 보내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의 굽어진 곳을 펼치는 거예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 필요한 것이에요.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