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를 바라는 신앙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 : 19)
녹취자 : 임종찬
사람은 누구든지 다 행복하고 복된 상태에 있으려고 하지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태에 자기를 두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그런 고통스러운 상태에 자기를 두려고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영혼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복된 행복을 모두 사모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는 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때로는 선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 애매히 고통을 당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의 죄와는 상관없이 무슨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세상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이런 저런 괴로움을 당합니다. 또 때로는 자신의 부패한 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질서를 추구하지 못해서 괴로움을 당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간에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괴로움과 고통은 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옛사람을 무거운 짐처럼 필연적으로 끌고 다녀야 되는데 거기서 인간은 많은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 가지 연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늘 고통이 가까이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마다 죄 많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리고 미래의 복락을 앞당겨 누릴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 구원의 은혜가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망하지 못한 옛 시대가 우리 안에 있고 또 끊임없이 죄로 말미암아 악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미 우리 속에 침투해 들어온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공존하도록 만들어주심으로써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대와 이미 임한 시대, 그러나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시대, 그 한복판에 살면서 때로 우리는 육체 때문에 영혼이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때로는 영혼 때문에 육체가 찢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주님이 이러한 긴장을 우리에게 남겨두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을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이러한 신앙경험을 통해서 깨닫는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우리는 이렇게 육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 사이에 찢김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았지만은 그러나 이렇게 영혼과 육체에 치열한 갈등 속에서의 찢김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육체 하나로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고 또 하나님을 거슬려 사는데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바와 원하지 않은 바 사이에서 고통을 받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본분이 하늘나라의 백성이고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아니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도 될 수 없고 다름박질하며 경주하는 그런 운동선수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던 바 목표가 없이 다름질하고 향방없이 사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쉽지만 오늘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쉼이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우리의 육체도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말할 수 없는 갈망이고 소망입니다. 모든 것은 반대편에서 보아야지만 그것을 잘 알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보면 알 수 있고, 어두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를 깨달은 사람만이 선의를 가진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압니다. 다투고 미워하며 고통받아본 사람은 사랑의 소중함을 압니다. 사람으로부터 실망하고 낙심해본 사람만이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서 겪는 고통과 괴로움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께 속한 백성들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것을 깨달아 그 분 안에 있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심이 아닌 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나그네의 삶이요, 영원한 본향집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루 지나는 여관방에 실내장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과객으로 하룻밤을 머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잠시 머물 이 세상이 다만 지나는 나그네 길이요 우리의 참된 소망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거룩한 바램을 품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공정한 생각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매몰되거나 육욕에 붙잡혀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평한 생각을 상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성령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국은 사망의 죽을 몸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에게 삼킨바 될 것이라는 그 보증을 지금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선명하게 느낍니다. (예화)
우리 신학자들은, 특히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자존성의 이유라고 봤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도 생명이 넘치게 되면 육체에서 스스로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살만한 그런 생활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죽음의 기운이 퍼지는 것은 이제 이 생명이 마음대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날이 옵니다.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됩니다. ‘아! 결국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손안에 있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의 생명도 그렇게 붙들어 주셔서 살고 기동하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삶을 살면 영적으로 힘이 납니다. 육체가 죽음의 기운에 삼키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죽음의 기운에 삼킨 바 되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에 사망이 삼킨바 될 그날을 바랄 굳건한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영원한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이 영원에 이끌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육체와 이 세상에 매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가지를 우리에게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몸부림치며 주님 앞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았고 날개짓을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날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그런 육에 속해서 사는 삶을 이 세상에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역도 순풍의 돛 단 것 같이 그렇게 가도록 놔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곳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뭔가 사역의 목표나 방향 자체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순풍에 돛을 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리 한 마리가 물 위에서는 그렇게 우아해보여도 밑으로는 발을 집어넣고 미친 듯이 물갈기 짓을 합니다. 그래서 그 우아한 백조 혹은 오리의 모습이 편해 보이지만 미친듯이 물갈기질을 해서 겨우 물에 떠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신 날 동안에 이 세상에서 육으로 말미암는 번민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로 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사역도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두 긴장 사이에 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며 살 때 조차도 우리가 다만 죄인인 것과 아직은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되는 삶에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같고 괴로운 것 같은 그 모든 날개짓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매 순간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품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에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충성스럽게 살고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믿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고 올 곧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더 많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를 충만한 성령의 은혜속에서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은 그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삶을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러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