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강해Ⅱ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시84:1)2000.3.26(주일오전) 1
2. 영혼으로 사모하는 집(시84:2)2000.4.2(주일오전) 14
3.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할 때(시84:3)2000.4.9(주일오전) 31
4.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시84:5-6)2000.4.16(주일오전) 44
1. 사랑스러운 주의 장막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시편 84편은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와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그 아름다움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150편으로 되어 있는 시편을 5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84편은 제 3권에 속해있습니다. 후대에 이 시를 편집할 때에 사람들은 1권은 대게 창세기와 관련된 내용들을 수록을 했고 2권에서는 출애굽기 3권에서는 레위기 그리고 4권에서는 민수기 5권에서는 신명기 이런 식으로 편집을 했습니다.
그래서 1권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위대한 권능에 대한 노래가 많이 나오고 2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험, 그리고 주님의 인도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고 레위기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성전, 제사, 예배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그리고 4권에서는 광야의 방황, 나그네 길에서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이런 것들에 대한 노래가 많이 나오고 마지막 5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영광, 하나님의 법도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에 대한 노래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이 84편은 73편부터 시작을 해서 89편까지로 이어지는 시편 제 3권에 중간에 들어있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깊고 애뜻한 사랑들이 아름다운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기록한 개인적인 신앙의 글을 깊이 탐구하는 유익은 그것을 깊이 탐구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만 알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알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에 고백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복음에 깊은 의미들을 우리들이 맛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84편을 우리들이 살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신앙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건강한 영적인 생활,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을 공경하는 생활을 위해서 교회생활이 어떠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기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복음에 입각한 신앙을 다시 한번 정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여러편에 1절이 시작되기 전에 다양한 표제어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보면 “고라 자손의 시”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깃딧에 맞춘 노래” 라고 나옵니다. 아마 앞에 부분은 그 시를 지은 사람이나 혹은 그 시를 보관하고 있는 가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그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한다 라고 하는 음악적인 지시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라의 자손” 하면 생각나는 시편이 하나 있는데 시편 42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 나아가서 그 앞에 뵈올꼬” 하면서 애절하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노래, 시편 42편이 바로 고라의 자손에 시입니다.
그런데 고라의 자손의 시가 오늘 보면 여기에도 같은 표제로 반복이 되는데, 그래서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제 추측에는 아마 이 42편과 84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무대는 아마 역사적인 무대는 다윗의 통치시대였을 것이고 특별히 다윗이 압살롬에 반역을 받아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에 다윗을 수행하였던 고라의 자손중 한 사람이 지금은 당장 찾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성소를 향한 그리움을 이처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시편에 보면 깃딧에 맞춘 노래, 혹은 백합화 곡조에 맞춘 노래, 혹은 사슴 곡조에 맞춘 노래, 시기온옷에 맞춘 노래 등등 우리들이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다양한 표제어들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 깃딧에 맞춘 노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생각들을 학자들이 합니다. 첫째는 ‘깃딧이 아마 악기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가드 지방에서 유행하던 어느 악기를 뜻하는 것이며 그래서 84편을 지은 이 시인이 아마 깃딧이라고 하는 악기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지은 이 84편을 노래할 때에는 깃딧이라는 악기를 사용해서 이 곡을 연주해달라는 요청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그럴 듯 해보이는 두 번째 추측은 이런 것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뿐만 아니라 성경을 절기에 따라서 낭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84편은 깃딧이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무슨 성전과 관계된 절기, 예를 들자면 신년을 맞이 하는 절기라든지 그런 절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깃딧에 맞추라는 이야기는 그때에 부르거나 혹은 그러한 명절에 부르는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가락이 있는데 그 가락에 맞추어서 이 84편을 노래하라는 그런 지시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뭐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제어는 히브리 성경에서 1절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 표제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 표제어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드렸습니다만, 그래도 이 표제어 속에서 우리가 건질 메시지는 있습니다.
이 시편은 어떻게 보던지 간에 한번 고라의 자손이 고백하고 내어버린 그런 시편이 아니라 자신이 고백했고 이스라엘 후손들이 거듭해서 이 시편을 노래해주기를 바랬고 또 사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자주 노래되던 곡조였다는 사실을 표제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집에 영광과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살아가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오직 단 하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차면 우리의 몸이 교회에 있어도 언젠가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집에 아름다움과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지금은 세상에 있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비록 신앙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전에 아름다움과 교회에 영광에 대한 꿈을 꾸고 그 속에서 누리는 성도의 축복과 즐거움에 대해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일깨워서 그래서 즐거운 세상에서 우리를 아무리 오라고 불러도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안식처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영혼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가득히 이 세상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과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영광을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가득 채울 때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시편에 첫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면서 “야회 제바우트” 즉 “군대의 하나님이시여”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만군” 이라는 말은 많은 군대의 집합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짜뱌” 라는 말에 복수인데 째바우트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늘어선 수많은 군대, 그 군대를 소유하고 지휘하고 계시는 전쟁에 능하신 용사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아주 규정된 호칭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84편 첫절을 여는 그 순간 뭔가 뭉클하게 우리의 마음에 전해오는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왜 이 시인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에 영광에 대해서 노래하면서 군대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왜 성전에 아름다움과 그 성전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에 축복을 노래하기 전에 이 시인은 살벌한 전쟁터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호령하고 이끄시는 전쟁에 능한 용사이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우선 첫째는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때나 이 아름다운 노래로 주님을 찬송하고 있는 시인이 살고 있는 때나 우리는 모두 이 세상 속에서 전쟁하듯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갈등도 없고 그리고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 바다 위에 망망하게 떠있는 배가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진 목적지가 없다면 아마 돗을 내리고 그리고 삿대를 거두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그렇게 떠 있으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만약에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고, 어떤 존재가 되고, 그리고 어떻게 주님을 섬기면서 내 인생을 살아가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신앙의 목표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는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 유혹하면 굴복해 버리고, 핍박이 오면 항복하고, 고난을 받을 때쯤 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생활 그 자체가 전쟁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이런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과 신앙의 목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열렬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화) 여러해 전에 수요 설교를 마친 뒤 내려오시는데 어느 신학생이 질문을 하는데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기에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면서 말씀을 배우면 못한다고 했더니 또 다시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할 수가 있느 냐고 해서 안일한 삶을 버리고 열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신 이야기.
우리의 신앙생활에 목표가 있고 가야할 바가 있으면 때로는 우리들이 방황할 수가 있지만,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전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에 어두움에 주관자들에게 대한 것이라” 악에 영들에게 대한 것이라. 거기에서 나오는 “씨름”이라는 말이 “팔레”인데 그 팔레는 맨주먹으로 철창 속에 들어가서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격투기입니다. 죽기 전에는 승부가 없는 것입니다. 항복이 없는 것입니다. 죽이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우리를 거느리고,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는,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전쟁에 능한 군인과 같은 여호와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대도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고, 세상과 더불어서 싸우는데서도 능력이 필요하고,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데도 힘이 있는 권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만군의 여호와” 라는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현장이 전쟁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되는 그런 하나님이 바로 “우리편이 되어주신다” 라고 하는 이 고백은 바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데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시인이 만군의 여호와여 전쟁에 능하신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즉시 그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공포와 두려움을 모두 내어 쫒고 우리의 마음에 깊은 확신을 줍니다. 사랑은 어두움 속에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은 빛 가운데서 사귀는 사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시련과 싸우고 고난과 싸우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라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고백이 시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너무나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환경을 고치고, 상황을 바꾸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도구로 사용되는 대신에 그저 상황에 굴복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고갈을 경험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오늘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필요로 하는 삶의 현장에는 우리도 똑같이 있는데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다”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이 없기 때문에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능력과 위대한 힘이 나의 삶을 통해서는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자신이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전쟁터와 같은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84편의 역사적인 무대에 대한 설교자의 추측이 맞다면 더더군다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왕권을 뺏기고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남의 나라 땅에 망명생활을 하면서 이 고라자손의 이 시인은 사람들이 종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렇게 질문을 받았고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이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기의 음식이 되었노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만군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처절하게 자신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이기려고 할 때에 쉽게 넘어지고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은 비참한 하나님의 자녀들에 진정한 위로는 바로 하나님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집 앞에 엎드려져서 자신은 능력이 없고 힘이 없으니 하나님이 도와달라고 하는 진실한 고백과 눈물어린 성전에서의 그 탄원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유일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 나를 혼자 있게 마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거친 비바람 불어올 때에 나를 동행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그래서 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양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싸우면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때는 정말 사자와 같고 용맹스럽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싸움이 다 끝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자기가 얼마나 힘이 없는 인간이고, 그리고 정말 매 순간마다 붙들어주시는 주의 강한 능력이 없이는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아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 사람들이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 약함과 강함이 아주 절묘하게 양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보이는 교회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보이는 교회와 결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마음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메이커 없이 유통기간도 표시되지 않은 채 시중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이름없는 식료품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것을 사겠습니까? 요즘은 먹는 것들을 얼마나 조심해서 먹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가서 두부 하나를 사도 어느 메이커인가. 그리고 언제 생산이 됐나. 유통일자는 언젠가. 다 보고 돈을 더 주더라도 믿을 수 있는 것을 사오는데 생산된 곳도 없고, 제조처도 없고, 그리고 유통기간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그저 때가 까맣게 묻은 채 비닐 봉지에 담겨 가지고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먼지가 뽀얗게 싸여서, 그것은 불량식품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식료품 가게에 손님들이 들어갔을 때, 믿을 수 있는 메이커에 라벨을 붙이고 당당하게 정가를 받기 위해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는 그러한 식료품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이리 집어 던지고, 저리 집어 던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들고 가서 뜯어서 조리해 먹고 배탈나는 그런 종류의 무허가 식품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런 무허가 식품이 되고 싶지 않으면 교회를 정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떠돌아 다니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보이는 교회와 결혼하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시고 또 어디서든지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고 가장 충만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많이 느끼면서 그렇게 그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장소가 어디인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을 가장 보편적으로 그리고 충만하게 맛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곳입니다. 물론 교회당의 개념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물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난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론 하나님의 교회는 쾌적하게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단정할 필요는 있고, 그리고 요란스러울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미적인 감각을 갖춘 공간이어야 합니다. 여름이면 적절하게 시원하고, 겨울이면 적절하게 따뜻하고, 그리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예배드릴 수 있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주님과에 만남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공간이어야 합니다. 연애하면서 슬리퍼를 신고 온 자기 애인을 질퍽질퍽한 뒷 골목으로 끌고 가서 사랑한다고 고백할 그런 바보같은 남자 청년이 있겠습니까? 있다면 시집가지 마십시오. 그런 바보한테 가서 뭐하겠습니까. 저는 장화 신고 나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장소입니다. 화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정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여기에 들어섰을 때 다른 공간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가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들이 많아져서 도저히 여기서 모일 수가 없어서 학교를 빌려서 큰 텐트를 치고 임시로 예배를 드린다고 그러면 거기도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제 다 뜯어버리고 술집을 만들면 술집이 되지 교회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도록 지정된 그 장소, 거기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말입니다.
전 21세에 회심을 해서 이제껏 까지 왔는데 한 3-4교회를 옮긴 것 같습니다. 길게는 8년 짧게는 5년 정도 있으면서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교회를 개척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로 충만했던 내 신앙의 그래프와 교회를 깊이 사랑했던 그래프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요즘도 만나서 가끔 지체들이 옛날 그 지하실 교회가 그립다고 그러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 지하실 교회, 실평수 24평밖에는 안되는 곳에 240명이 들어갔으니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입니다. 그 빽빽한 곳에 좋은 자리도 아닌데...., 어느날 새벽기도를 갔더니 캄캄한 곳에 불도 키지 않고 발을 내딛으니까 풍덩하고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생수가 넘쳐야지 진짜 생수가 넘쳤습니다. 오죽 했으면 그 교회당을 얻어났는데 위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오셔서 혀를 차며 “여기는 교회가 안되는 곳이야. 여기는 벌써 몇 교회가 문을 닫고 떠났는데. 저런 잘못 짚었구만 쯧쯧쯧 가엾으라” 그러면서 가시는 것입니다. 왔으면 축복기도나 한번 해주고 가시지, 무슨 하다못해 호떡집에 개업을 해도 그렇게 초를 치는 소리는 안할텐데....
그래도 우리는 거기에서 그 장소를 그렇게 그리워 합니다. 지금도 그 골목을 지나가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저 먼 골목길 끝에서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잠시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지체들을 발견할 때, 그 골목에서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교회당을 내려갈 때는 꼭 화장실에 한번 인사를 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도 생각이 납니다. 정말 생각이 나고 그리고 거기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생각이 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지체들의 모든 장면 장면이 입가에 번지는 미소하나 까지도 모두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간이 그립습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립습니다. 거기서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거기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고, 거기서 주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을 맛보아 그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해주신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그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니까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추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인격적이고 좋은 신앙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출장을 온다든지 혹은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틈새가 생겨서 잠시 출석한다든지 혹은 부득이한 이유로 가까운 교회에 나가든지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잠깐 동안의 일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만나는 그런 신앙에 감화가 있는 교회에 뿌리를 내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저 교인들이나 등록을 하게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는 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목양을 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왜, 아무리 오래 나와도 교회에 등록하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네 신앙을 똑바로 해라.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하고, 교육하는 이것은 목회 윤리상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교인인데 왜 내가 붙들고 야단을 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고 교인의 입장에서는 정착을 하고 신앙생활을 안하니까 계속해서 교회가 남의 교회같고 그리고 자기의 소속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방법은 좋은 설교나 쌈박한 훈련이나 아니면 묘한 방법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전 포괄적이고 그리고 전체적인 그런 것들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엄마 아빠는 사회에서 아주 존경을 받는 훌륭한 분인데 애는 완전히 돌연변이가 나오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전혀 엄마 아빠를 안닮고 아주 불한당처럼 막가파 자식이 나오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아이들이 어떤 경우에는 밖에서 인정을 받는 아버지, 엄마의 모습과 집에서 만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워낙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격이나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평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빗나간 경우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엄마, 아빠가 그저 훌륭하기만 할 뿐, 자기 같이 훌륭하지 못한 자식과는 접촉점이 없는 가정생활이 계속 되기 때문에 그런 막가파 자식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언행심사를 바르게 하고 모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부모는 자식들에게 무슨 쇼윈도 위에 마네킹처럼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똑바로 살아서 모본을 보이는데 그게 자녀 교육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 하나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함께 데리고 뒹굴기도 하고, 끌어안고 씨름도 하고, 때로는 여행도 다니고, 때로는 잘못해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도망도 다녀보고 그러면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것만 기억하지 말고. 그러니까 전 포괄적이고 전 삶을 포괄하는 아주 전 포괄적이고 전 방위적인 접근을 통해서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렇게 어느 한가지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바른 교육을 받는 것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감격이 있는 예배도 중요하고, 또 은혜로운 설교도 중요하고, 또 상담도 중요하고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한 두가지를 통해서 우리가 성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전 포괄적인 목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뿌리를 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설교는 저 교회에 가서 듣고, 찬송은 저 교회에 가서 배우고, 상담은 이 교회에 가서 배우고, 헌금은 또 시골 교회에다가 하고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치고 건강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갈등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교회 생활을 하면 아마 아주 협소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목회자가 될텐데.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친구들은 아예 전도사로 갈 때 목사님하고 합의를 봅니다. 수요일은 이 교회에 안 나오겠습니다. 그리고 수요일은 말씀이 좋다는 교회, 앞서간다는 교회, 심지어 지방에 있는 교회까지 두루두루 다닙니다. 그러니까 앉아서 이야기하면 어느 목사님의 설교는 어떻고, 어느 교회에 가니까 예배 분위기가 어떻고, 죽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교회는 한 100여명 모이는 교회에 8년이나 전도사로 있었으니 뭐가 되겠습니까. 왜, 그 교회가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보내주셨으니 내가 여기에서 살겠노라. 그리고 이것이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 기쁨이다.’ 그런 정리된 마음을 갖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사람들이 대단해졌는가 하면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나 나나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늘 느끼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이 가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방황이 하나님께 정착함으로서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신앙으로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신앙의 방황을 마지막 마무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뿌리를 내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잘하면 격려와 칭찬을 받고, 고난이 닥칠 때는 위로를 받고, 잘못했을 때는 혼나야 합니다. 우리 사람이 경우에 없고 위 아래를 몰라보고 짐승처럼 살면 뭐라고 하는가면 ‘후레자식’이라고 합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누군가가 집안에서 휘어잡고 야단을 치면서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주는 교육이 없이 마구 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이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면서 손톱만큼 자신이 살아가던 삶의 습관이나 경향들을 바꾸는 게 팔목 하나 잘라버리는 것만큼 힘든 것입니다. 수술 하는 것이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을 수 있는 길을 수없이 하나님이 주시고 심지어는 고난까지 주셔도 변화되면 될텐데 자살하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자기가 바뀌면 될텐데, 죽을 마음을 먹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은 틀린 말이라는 것입니다. 죽기 보다도 어려운 것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교훈하고 책망하고 그러는 사람이 없다면 이게 얼마나 슬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지금 저에게도 야단 맞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해보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을 짐승처럼 생각하면 야단치지 않습니다.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짐승같은 사람에게는 최대한 예의 바르고 존중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야지만 후환이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앉혀 놓고 야단을 칠 정도가 되면 마음 속으로 벌써 믿는 것입니다. “네가 나한테 야단을 맞을 정도로 잘못 살아가고 있지만 너는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나의 사랑하는 양떼다.” 그러니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막 야단을 치는데 “네가 뭔데” 그러면 뭐라고 그럽니까. “난 목사인데.”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지요? 그런데 정착을 안 하면 목양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와 같아서 한번 교회에 들어가면 교회를 온통 뒤집어놓고 꽃밭이고 야채밭이고 막 밟고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판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이 이놈의 말, 그러면 금방 울면서 사랑이 없다고 그럽니다. 자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것은 생각은 안하고 그런 것은 어떻게 해결이 되어야 합니까? 옛날에 야생마들을 데려다가 조련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굉장히 돈을 많이 버는 인기 직업이었습니다. 옛날에 서부 시대 때, 야생마는 죽어도 사람을 태우는 법이 없는데 제 멋대로 길길이 뛰는 놈을 말을 잘 타는 기수가 탁 올라타서 틀어쥐고 재갈을 딱 물린 다음에 절대 말에서 안 떨어지고 서너 시간만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난리를 치면서 떨어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끝까지 안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타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4일이 되면 말로 바뀌는데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말은 처음부터 요령도 함께 배우지만 이 야생마는 사람을 안 태워봤기 때문에 요령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능력만 어느 정도 있으면 질풍같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야생마와 같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한번 목회자가 올라타서 그래서 길을 좀 들여야 합니다. 기를 좀 꺾고 길을 좀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야단도 맞고, 사랑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배우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다음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를 때는 교훈을 받고, 잘못했을 때는 혼이 나고, 그릇되었을 때는 함께 고치고, 그리고 죄와 불의가 가득한 길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살도록 돌봄을 받는 그런 신앙생활이 존재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떠도는 신앙생활에서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시인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사랑스러운지요” 라고 말하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반드시 다 같은 동기는 아닙니다. 하나는 신앙이 동기가 되지 않은 인간적인 동기에서도 교회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앙적인 동기입니다.
(예화) 예전에 부교역자로 1-2년 섬기시던 교회는 참된 예배의 모습이 전혀 아닌 죽어 있는 교회의 모습과 같은 곳인데 40억이 드는 교육관 공사를 하기 위해 딱 한번 헌금을 했는데 45억이 나왔는데 12분의 장로님들의 헌금이 25억이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깨어있는 신앙이 아닌데도 그런 헌금을 할 수가 있을까 의아해 하셨다는 이야기
그것이 저의 상식을 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헌금을 내는 것은 정확하게 신앙의 표지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앞 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별로 신앙이 없었습니다. 뿌리 깊은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뿌리 깊은 신앙이 그렇게 좁니까. 그런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바느질을 하고 정말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3년 후에 교육관을 지을 것이라고 하니까 다 적금을 들었습니다. 최소한 500만원, 100만원씩 다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한달에 50만원도 못 버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굉장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 깊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해야지만 ‘이 교회가 내 교회다’ 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닐수도 있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것이 가능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예화) 섬기던 교회에 어느 교인 한분이 위스키 도매상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무슨 일로 해서 그 교회에서 나와서 늘 골목에서 술에 취해 교회를 욕하며 다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판단하시기를 저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싶어 장로를 시켜 주겠다고 해서 다시 그분이 교회를 나가셨다는 이야기
이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 교회가 분명히 있는데 다른 교회를 계속 나갑니다. 몇 년째, 그래서 아니 그러면 교회를 옮기지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목사님, 저는 교회를 못 옮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내 나이 이제 50이 되어가는데 그 교회 유년주일 학교부터 다녔는데 여태까지 다닌 것이 아깝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보험금을 타는 것인지. 뭐가 아깝습니까. 그것이 그게 뭔지 아십니까? 그 유명한 교회에 40년 가까이 다녔다는 것, 그게 옮기면 기록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디 나와있는 신앙입니까?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입니다. 엄마, 아빠가 그 교회에 다녔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다녔는데 왜 자기가 다닙니까? 엄마, 아빠가 안 다니고 원수가 다녔어도 내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분명이 그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과 승복이 있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방에 가서 교인들을 만나면 장로교 목사인데도 아주 피치못할 때는 장로교가 아니라 다른 교단에 교회에 소개시켜 줄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교파도 중요하지만 교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말씀에 서 있고 건강한가 하는 것입니다. 꼭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병도 못 고치면서 매일 같은 병원에만 다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이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 저 교회에 메뚜기처럼 몰려 다니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좀 깊이 생각해보는 교회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다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또 연세드신 분이 어느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된 것을 보니까 옛날 교회에 있던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자네는 어떤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더니 너무 은혜롭고 내가 너무나 많이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입을 벌리고 “야 너는 참 좋겠다.” “그러면 당신도 한번 그렇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교회로 한번 옮겨봐.” 그랬더니 “에고 이 나이에 말 갈아타서 무슨 기쁨이 있겠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태만한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면 다시 또 새가족 교육을 하고 뭐 또 하라고 하고 뭐를 떼어오라고 그러고 다시 또 심방오고 다 지겨울 것이고 누구 눈치를 보고 서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그런 것이 싫은 것입니다.
여 성도들에게는 또 어떻습니까? 마실가는 것과 같은 구역예배 재미도 교회를 못 떠나게 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젊었을때부터 우리가 죽마고우처럼 지냈는데 그래서 해마다 같은 구역에 편성이 되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우정충만하게 사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신앙생활을 무엇으로 보상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도저히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거기에는 뜨개질 클럽이 있다고 합니다. 잘났습니다. 정말 잘났습니다. 뜨개질은 여름에도 합니까? 뜨개질 클럽이 있다고 합니다. 더 교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 교회에 다니면서 사업적으로 교인들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의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이 시인에 고백에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보십시오. 정착된 교회 생활을 안하면 목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어느날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패역한 옛 기질이 발동해서 누구의 재제도 받지 않고 또 다시 우리 멋대로의 신앙에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경건할 수도 있고, 성경을 많이 읽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목양을 안 받으면서 성경을 많이 읽으면 불량식품에 영어 글자를 많이 써놓은 것과 같습니다. 알아볼 수도 없는 영어 글자를 잔뜩 써넣고 메이커도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뭐가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런 식으로 자라게 끔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교회 안에서도 제품 실명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구” 그러지 말고 “어느 교회 누구” 그렇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회색 교인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에 대한 한없는 감격 속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정착하고 신앙생활을 안 하면 목양만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아십니까? 잘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깊이 받았을 때는 외롭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늘 주위에 나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변화받고 나면 변화받은 지체와 함께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말씀에 은혜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울다가 또 기도하고, 또 먹고 마시다가 또 이야기하고 그래서 제 경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 참 건전한 여가생활은 무엇인가 하면 신앙이 좋은 지체들과 더불어서 함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과 손잡고 노래방을 가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혹은 직장 일에 찌들고 찌든 사람들이 어느날 시간을 내어서 이쪽 부부, 저쪽 부부 이렇게 만나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그런 편안한 곳에 돗자리 깔아놓고 탁자 하나 놓고 간단하게 먹을 것을 시켜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꾸는 꿈,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인생의 계획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새롭게 회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부수적이기는 하지만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나누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큰 힘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건전합니까. 그리고 함께 먹고, 육신적으로 쉬고, 그 다음에 사회적인 욕구도 채워지고, 그리고 마지막 대화를 끝나고 일어날 때, 그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풀밭 옆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두 부부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며 한번 간절히 기도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저는 한때 247장 찬송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 중에서도 특별히 3절에 “주 믿는 형제 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주 앞에 다함께 모일 곳 시은소” 라는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제가 여러해 울었습니다.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한때 정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혹은 불신앙으로, 혹은 사명을 받아서 그렇게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절절하게 그리워집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받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펑펑 우는 감격은 있는데 사람은 싫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 은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스럽고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갖는 행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교제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를 만나고 싶고, 그와 함께 대화하고 싶고, 그리고 그와 함께 깊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다짐하고 싶은 소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정착을 안하면 이런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교회 생활을 통해서 받는 유익을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일주일 동안 우리는 때때로 승리하면서 살때도 있지만, 때로는 완전히 패배하고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아무 기대감이 없이 교회에 나와서 엎드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속에 새로운 신앙이 주어지고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겨납니다. 이게 바로 정착된 교회 생활 속에서 오는 하나님의 큰 위로와 용기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 고난을 당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시대도 우리들이 순전한 신앙을 가지고 진리를 쫒아서 살고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우리의 삶은 불화살이 날라 다니고 그리고 창칼이 번뜩이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 우리의 삶에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그리고 거기로부터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고 있습니까? 위기에 처했을 때에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눈물을 흘리는 고통이 있을 때에 받고 싶은 위로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갈길을 알지 못할 때에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할 그런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에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저쪽 방배동 쪽에서 차를 타고 언덕을 넘으면 열린 교회 빨간 지붕이 보입니다. 어느 지방에 갔다가 올라올 때에 그 고개를 넘을 때 기분이 제일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빨간 지붕이 있습니까? 쳐다만 보면 가슴이 뛰는 빨간 지붕이 있습니까? 그리고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형통할 때나, 고난을 당할 때나, 언제든지 찾아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여기가 내 집처럼 느껴지는 그런 교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우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강합니다. 삼겹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함께 믿음을 따라서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무릎에 맺힌 피를 닦으면서 걸어가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는 교회 생활이 내게 있는한 나는 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주님이 한 교회에 모으시고, 세상에 모진 눈보라가 치는 겨울 밤에는 서로 목을 부비면서 체온을 나누고, 시련에 비바람이 불때는 서로가 교회의 그늘 아래 피하는, 그래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주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깊이 결단하고 정착된 신앙생활을 해서 오늘 이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어떤 그 하나님의 집을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영혼으로 사모하는 집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랑을 1절에서 고백한 후에 시인은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탄식 어린 목소리로 2절을 토해놓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에서 느끼는 행복과 그리고 은혜에 가득 찬 환호가 아니라 무엇인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지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사실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많고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우리의 사랑을 받는 대상을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집착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안 사랑했는지는 그와 작별해보면 압니다. 우리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가 정말 단지 누리고만 살았는지 아니면 정말 사랑했는지 그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아마도 시편 42편과 같은 이유로 원수들에게 쫒겨나서 남의 나라로 망명을 떠났고 하나님의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억압 속에서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고 나니까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이 더 간절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잃어버리고 나니까 더욱더 절실하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번져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교회에 나와서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고,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일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지체들과의 교제가 있고, 그리고 목회자의 교훈이 있고, 목양이 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앙이 자유로운 때에는 핍박이나 혹은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 부득이하게 교회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흔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은 외부적이고 물리적인 환경이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교회가 싫어서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했던 이 사람은 여호와의 집에 있을 때에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복된 교제를 누리고 성도들과 함께 사귐을 가지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복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에 의해서 이 시인은 쫓겨났고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추방당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망명의 길에 올라서 수많은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뺨에 흐르는 수많은 눈물들이 밤낮으로 그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정말 자유롭게 교회 생활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기대며 살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목양해주는 목회자가 있고 진리가 있는, 은혜가 있는 그런 교회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여러분들이 잃어버리기 전에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예화) 어느 선교사가 북한의 교회에 대해 적어 보낸 선교 보고의 내용은 북한의 지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성경, 찬송도 없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말씀을 듣는 것은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되지만, 찬양을 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 고 입만 움직이면서 마음 속으로 찬양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여러분, 마음껏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목소리를 높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 생활이 얼마나 복된 생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마음껏 목청을 높여서 하나님을 찬송해도 누가 뭐라고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 가끔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그러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를 않고 요즘은 이중으로 유리를 해서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화) 신학교 선배 가운데 한 분이 독특한 사역을 하시는데 공산권에 침투해 가서 자 유세계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믿음의 식구들을 구출해내는 일을 하시는데 소련이 공산권 치하에 있을 때, 천신만고 끝에 외국으로 망명시킨 사람이 있는데 한동안 살더니 다시 소련으로 보내달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억압과 감시 속에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일이 얼마나 그리움 속에 이루어지는 일인지 자유 세계의 교 회에서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성도들을 만나기 어렵다며 감시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격 속에서 경배하는 그 살아있는 생활, 살아있는 하나님과 의 만남이 있는 교회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오라는 교회가 많으니까 이제는 뭐 중요한 고객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없으면 우리는 고아와 다름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성전으로 가까이 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그 사모함이 더 열렬하고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교회 생활하는 그런 바보 같은 신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잠시 등록을 하지 못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또 등록을 했다고 그래서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은 요즘 교인들은 얼마나 영악한지 등록을 하면서 조건을 내거는데 심방을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등록을 하겠다고 합니다. 잘났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일이면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깡통 찬 교인들, 처음에는 그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서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런 생활이 간섭도 받지 않고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서 교회 생활을 하니까 편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편리한 것은 대부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자기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느 교회에 뭐가 좋더라 그러면 메뚜기 때처럼 호르륵 몰려드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누가 가르쳐준 신앙생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극장 프로를 따라서 옮겨 다니는 영화구경꾼들과 같은 신앙생활이 그게 성경에서 가르쳐준 신앙생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적용되어서 녹아들지 않기 때문에 항상 일시적인 감정의 체험으로 그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사랑 할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면서 그런 병든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나, 또 그런 교회를 역사와 전통에 빛나게 하기 위해서 그냥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나, 혹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얻어먹듯이 깡통 차는 것 같은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어차피 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만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님과의 만남, 함께 부르신 지체들과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그러한 만남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를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저를 만나려면 길거리에 가다가도 만날 수가 있고 화장실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사람들은 교회로 연락하거나 집으로 연락하면 저를 만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꼭 비슷하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혼자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 또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그래서 유치장에 가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아니면 술집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봤습니다. 그런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도 아름다운 교회 생활로 들어와서 정상적으로 목양을 받고 말씀에 잘 양육을 받으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그의 신앙생활에 아주 다행이지만, 종신하는 생활을 하기에는 계기가 될 수가 있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고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확실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고 주님의 진리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사람, 이것이 가장 족보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물론 살다가 보면 번잡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도 있고 그리고 또 쉬기 위해서 좀 떠나서 뭔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대면하면서 명상에 잠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려면 꼭 어디로 가야지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함께 경배하는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아름답게 자랄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시인이 물리적인 환경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을 때에, 그때에 그 하나님의 궁전에 대한,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모함이 이 시인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집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집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늘 만나고 교제하는 신앙의 참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모함이 있습니까? 마음에 떠오르는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교회가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습니까? 마지못해서 다니는 교회 생활이 아니라 인생을 살다가 고난에 처했을 때면 생각나는 하나님의 집, 선택의 기로에 놓여서 무엇을 결정해야 될지 확신이 서지 않고 두렵게 흔들릴 때에 생각나는 교회가 있습니까? 마음이 컬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에 기도하고 싶은 그 장소로서의 사랑하는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 시인처럼 뭔가 물리적인 환경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가지 못하면 안타깝고 그리고 슬픈 마음이 드는 그런 교회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서 만나는 지체들이 보고싶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함께 예배드리던 시간을 그리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시인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성전 생활이 있었기에 그 성전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면 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분들이 사랑 할 교회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교회 생활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깊이 사랑 할 교회가 없을 때에는 여러분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교회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런 교회를 깊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정착된 교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건강하지 못한 여러분들의 영적생활이 더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를 잘 섬겨라든지,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하라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없는 교회를 향한 충성이 정말 충성일 수가 있을까요? 정말 여러분들 속에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럼 왜 내 마음 속에 그렇게 가슴 깊이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렇게 애절하고 절실한 그런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랑이 내게는 없는가. 왜 내게는 그런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시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마음 속에 있었던 성전 신앙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인생에 모든 문제를 어디서 해결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해결을 했습니다. 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주님께서 그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백성이 이곳에서 나를 향해서 기도하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죄가 있으면 용서해줄 것이고 재앙이 있으면 그 재앙을 물러가게 할 것이며 은혜를 베풀어줄 것이라”고 하는 약속을 하나님이 그 성전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크고 거창한 국가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신상에 개인적인 문제도 한계에 부딪쳤을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집에 와서 아버지 앞에 기도함으로서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수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해결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잘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하는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에 충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런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르게 된 그 관계 속에서 주님이 내려주신 축복들이 교회에 대한 사랑과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떡을 해가지고, 무슨 쌀을 머리에 지고 그리고 절간에 올라가서 그것을 공양하고 복을 비는 그런 식에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거기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실제적인 삶에 경험들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동반될 때에 그 교회가 자기에게 특별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그는 교회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정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단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집을 깊이 사랑하게 되리만치 주님이 교회 속에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인생을 간섭해 주시는 은혜의 경험들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집을 깊이 사모하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받았던 무슨 물리적인 대우나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걸고 주 앞에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던 때, 그리고 수많은 지체들을 섬기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던 때, 거기에서 그의 생활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정착된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인의 마음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집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도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사랑해서 쇠약하게 되었노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너무나 사랑이 깊었고 그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애타는 시인의 마음에 그 상태를 표현해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인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접근할 수 없는 예배생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집에서의 독특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실제로 쇠약해져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같은 저자의 시로 여겨지는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나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라고 합니다.
시인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장소를 초월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만약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 생활 속에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방인들 앞에서 눈물을 머금으면서 그 눈물을 자기의 음식으로 삼았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복된 교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에는 쇠약함이 옵니다.
여러분, 성수 주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사가 당직에 걸려서 응급실을 지키느라고 교회에 못나왔는데 그것이 주일을 어긴 것입니까? 아닙니까? 허긴 주일날 안 나왔으니까 안 나온 것입니다. 또 119 구조대원인데 주일날 근무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믿는 사람들이 다 교회에 가고 구조 대원으로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남들 예배드리는 시간에 위험에 빠진 인명을 구조했습니다. 그러느라고 예배를 못 드렸습니다. 그것이 주일을 범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좋은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동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이 만약에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다 팽개치고 교회에 갔다면 여러분들도 교회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약국 같은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다 문을 닫아버리면 당장 약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지정해서 한 동리에 하나씩은 돌아가면서 약국을 열게 합니다. 그래서 당번이 되어서 약국을 열었습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합니까? 심장에 무슨 문제가 온 사람은 당장 약을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것을 놓고 격렬하게 토론을 벌입니다. 주일을 지킨 것이냐. 범한 것이냐. 아니냐. 주일을 범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켰다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주일을 범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주일을 안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는 형벌이 문제가 아니라 이유는 타당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주일날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 생활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피곤해지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는 어쩔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가끔 예배드리면서 기도할 때 “주님, 믿음이 연약하여 여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많은 지체들이 있는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가로를 열면 놀러갔든지, 골프장에 갔든지, 장사를 하고 있든지 가로 닫고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같은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마나한 기도를 합니까. 오지 않았는데, 말씀을 이렇게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헤아리면서 하나님 앞에 효도하는 자녀에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여러분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에 가서 놀러다니고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고 얼마든지 교회에 나올 수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같은 은혜를 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또 그런 기도를 합니다. “아직까지도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는 꿈 속에라도 찾아가서 은혜를 주시옵소서.” 너무 하나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일 문제에 있어서도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너무 생각이 율법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토론의 현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어떻게 주일을 범한 것이냐. 한쪽에서는 범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 그럼 직업을 옮겨야된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주일을 범한 것이면 뭐하고 안 범한 것이면 뭐하겠냐는 것입니다. 주일을 범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실 것도 아닌데, 범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아무리 “그래 너는 특별한 사정 때문에 안 나왔으니까 나도 너를 주일을 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어째든 영혼에 유익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그게 문제가 아니냐 했습니다. 물론 너무나 영적으로 뛰어난 나머지 그저 예배 생활이 직장 생활이고 직장 생활이 예배 생활같이 된 사람, 아주 심오한 영적인 세계 속에서 들어간 사람이라면 또 모를텐데, 그런 사람은 사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 논란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집에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이 못가게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 다니거나 아니면 주일날 예배도 안 나오고 놀러가 버리는 사람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고백은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뒤에 넘어가면 “힘을 얻나이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게 어디에서, 지금 “쇠약해집니다”는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유리 된 가운데 나온 고백이고 “힘을 얻나이다” 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성전 속에서 토해내는 고백입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이 신약에 시대에는 주일을 지키냐. 안 지키냐는 그 관점이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교회생활을 우리에게 만들어 놓으신 것은 “내가 너를 구원해주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되잖아. 그리고 우리에게 의무로 얽어매기 위해서 교회 생활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가 “내가 너를 낳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 말을 듣고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해야 된다. 이게 네 의무다. 일평생” 그것이 아니잖아요. 낳아 논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잘 돌보기 위해서 따뜻한 이불에 쌓아서 그래서 여름이면 땀이 흐를새라, 겨울이면 추울새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이면서 그러면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시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낳아놓기만 하고 이로써 부모의 사명은 다했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짐승이지, 그것이 아닙니까?
교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의무의 측면에서만 생각하지를 말고 그것도 물론 생각해야지만 의무의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정착함이 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정상적인 교회의 생활을 해야지만 우리들이 영혼에 유익을 얻을 수 있고 원기를 얻어서 세상을 이길 새로운 힘들을 공급받으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무디 선교사에게 어느 사람이 와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는데 난로 조개탄들이 타고 있었는데 집게로 하나를 꺼내서 바닥에 던져서 조금 후 시간이 흐르니까 시 뻘겋게 타던 조개탄이 까맣게 식어버리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교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요즘은 조금 덜하는지 모르는데, 한때는 익명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아주 인테리들의 교회 생활인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서 살며시 예배드리고, 그리고 자기의 의무로 헌금을 내고 그리고 자기가 알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목양도 없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들이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교회 사랑을 알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것은 여기에서 우리를 의무로 얽어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우리를 만들어가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 생활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니까 부딪치는 곳이 참 많습니다. 그럴 때는 짜증이 납니다. 집에서도 매일 이것 때문에 시달렸는데 이래야 되는가. 교회에 와서 그래야 됩니다. 교회에 와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 부딪치면서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는 가운데 무엇을 배우는가 하면 “야, 인간들이 참 험하다”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야, 진짜 내가 진짜 부족하고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진짜 내가 막되먹은 인간이구나”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번에 열린 하늘 신문에 나온 만화를 가서 깊이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가시가 여기에 너덜너덜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난리가 납니다. 한번 쓱 스치고 지나가면 주르륵 상처가 납니다. 사람들이 다 피해주니까 자기가 굉장한 줄 알고 이러고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를 만나는가 하면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느날 오셔사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말씀으로 딱 붙드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온 몸에 가시를 돋고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찔르면서 살 때는 세상에서 살던 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말씀이 하나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쁘기 전에 어떻습니까? 아픕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나보고 이것을 고치라고 그러시는데 그러면서 가시가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아픕니까?
그러니까 좋은 그리스도인일수록 많이 아팠던 그리스도인입니다. ‘원래부터 자기는 태어낳을 때부터 제품이 틀리다’고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원래 족보도 없는 제품을 팔 때에 장사꾼들이 그렇게 합니다. 이게 원래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틀리기는 뭘 틀립니까. 다 죄악된 세상에서 교회라는 동산에 옮겨심은 가시 나무들인데 뭐가 틀립니까.
그래서 스펄젼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청년이 와서 “우선 저는 완전한 교회에 좀 가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하여튼 말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혹시 돌아다니다가 그렇게 아주 순전한 교회가 있거든 거기는 형제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찾고 있다는데 가지 말라고 그러니까 “왜요?” 물으니까 “당신이 들어가면 금새 순간 그 교회가 문제 투성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게 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서 편의적인 그런 태도를 가지면 안됩니다. 엄마, 아빠가 자식을 낳아서 동기간들이 여럿이 되어서 성격들이 제 각각이고 제 멋대로입니다. 어렸을 때는 매일 “오빠가 나를 때려. 오빠가 빼앗아 갔어” 매일 그럽니다. 그리고 좀 커서는 “형이 나를 때려 그러면 동생이 나를 놀려” 그리고 매일 싸웁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씩 다 죽여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좋기도 하겠습니다. 고아입니다. 그런 것이 교회 생활이 아니면 그런 아픔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아픔을 느끼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저 인간이 못 되어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구나’ 그러는데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한번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교회 생활을 하시면 상처를 받으셨겠습니까? 대답을 못합니까? 완전한 사랑, 자기가 정말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 생활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듬으실 뿐 아니라 교회에 와서 거룩하고 신령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자기가 정말 제대로 된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그것을 수시로 자극을 받으면서 자기를 고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학생이고 또 우리 모두가 스승입니다. 목회자만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지체들 중에서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고 배워야 할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시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을 했으면서도 참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없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제조업체가 없는 인스턴트 식품과 같은 것입니다. 메이커 없는 유통식품입니다. 제조 기일도 없고, 유통기간도 없고, 그냥 하얀 비닐 봉지에 먼지가 새카맣게 낀, 이 교회, 저 교회에 다니면서 먼지가 많이 묻었습니다. 그런 봉지에 담겨서 그냥 왔다 갔다가 살면서 난 제품이 원래 틀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모함이 시인이 느끼고 있는 그런 사모함이 있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수시로 쇠약해질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교회 생활로부터 원기를 얻고 신령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 생활 속으로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건강한 교회 생활이 없이는 건강한 영적인 생활이 존재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교제를 통해서 공급되는 생명과 진리의 양식을 먹지 않고 여러분들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성경을 다시 써야 할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멀리 떠나있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에 쇠약함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쇠약해진 자신의 영혼을 환경에서 이유를 찾거나 물질에서 이유를 찾거나 여러분들의 마음의 고통을 주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쇠약해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어차피 어떤 사람의 인생이든지 평탄한 인생은 아닙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보지 않은 인생을 산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인생에 있어서 상처가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해독해 줄 수 있는, 뭔가 은혜를 가지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데 그런 해독을 시켜줄 수 있는 건강하고 좋은 신앙의 세계가 건강한 교회 생활을 통해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유리하고 방황을 해서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자신이 대단한 신앙의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정처 없이 다니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정착함이 없는 목양도 없는 떠돌아다니는 학원생활과 같은 교회 생활을 통해서 그들 속에 쌓이는 것은 쓸데없는 교만과, 거짓된 자기의식, 위선 이런 것들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정말 우리의 영혼에 풍요로움을 경험 할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인데도 그것을 오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깊이 사모하고 있고 싫어서 그 집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영혼이 쇠약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오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짜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서 방탕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 생활이 없는 그런 종교생활을 하는 그런 방만한 신앙생활들을 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얼마나 고달프고 핍절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벌써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자기 교회에서 받은 말씀에 은혜를 자랑하고 인격적으로 자기를 만나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그리고 자기가 섬기는 지체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토해놓는 그런 고백과 간증이 있는 성도들은 비교적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교회도 없고, 자랑할 성도들도 없고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시들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쇠약해진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꼭 범죄냐고 하면 아니 범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범죄다 아니다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기독교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아주 건강한 교회 생활로 돌아오고 그리고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아서 주님을 만나고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깊이 체험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때에 여러분들의 영혼에 핍절함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배 중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강팍함을 다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경험해서 새 힘을 얻습니다. 괴로움과 시련이 너무나 커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플 때에 우리는 종종 우리의 지체들에게 우리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의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무엇이 참된 길인지를 모르고 방황할 때, 목회자를 통해서 도움을 받고 그리고 혼란 속에 휩싸였을 때, 예리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갈라내는 충고들을 받으면서 한번 잘못 딛었더라면 큰 일이 났을 인생의 위기에 골짜기들을 함께 기도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지납니다. 비가 오면 나무에 피하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 동굴에 숨고, 물이 불면 다리를 놓고 건너가는 방법을 배우고, 벼랑을 만나면 위에서 끌어주는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늘 나라까지 가게 되어 있는 것이지 구원받았다는 확신 하나 가지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는 그런 나그네와 같은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인생을 진짜 행복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쓰디쓴 고통과 외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짓되고 방만한 신앙생활을 그것도 하나의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사랑하는 것도 문제지만 올바르게 믿고 사랑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교회 생활을 하라고 가르쳐주시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오늘 안녕합니까? 강건합니까? 새 힘을 얻고 있습니까? 인생에 수많은 문제들을 헤쳐 나가기에는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한 힘과 새로운 능력의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들의 교회 생활이 어떤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깊이 돌아보십시오.
자신의 영혼이 쇠약해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통해서 늘 영혼의 유익과 충만함을 누리지 않고는 여러분들이 결코 어떤 좋은 환경에서도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일날 낮 예배, 누구의 교회인지도 모르는 교회에 달랑 들어와서 한번 예배 드리고 그리고는 그 다음 주일 어느 교회로 갈까 하고 계산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영혼의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할 수 있으면 교회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면서 늘 교회에서 기도하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그럴 수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집에는 가끔 못 들어가도 교회는 매일 한번씩 올 수 있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도시화가 되다 보니까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이사를 오려고 해도 전세가 많이 올라서 집이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면 또 있던 사람이 나가서 생깁니다. 생기는데 그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회에 멀리 떨어져서 생활할 경우에는 거리가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겠끔 신앙생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이 제주도에 있어도 나는 “됐어. 오케이” 괜찮습니다. 제주도에서 매 주일 올라오고 수요일 날도 올라오고 새벽 기도도 비행기를 타고 올라올 수 있으면 무슨 거리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교인들 속에서도 거리가 꽤 먼데도 거리가 교회 생활에 거의 문제를 안 불러일으킬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대신 좀 대가를 많이 치루어야 합니다. 한 5년 교회 생활에 길거리에 허비한 시간을 합하면 아마 엄청난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이야기를 했더니 그래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올 때 테이프를 듣고 오기 때문에 낭비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누가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간직하고 날마다 자신의 영혼이 쇄신될 수 있는 교회 생활을 우리의 신앙에 중심부에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혼자 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이 알아가는 복된 신앙생활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제 너무 먼 곳에 사는데 교회 생활이 부실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생활이 부실합니다. 그래서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라고 그러니까 “아멘”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몇일 있더니 “목사님 안 되겠어요.”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변두리에서 방을 네 개나 쓰고 사는데 사당동에 오니까 그런 집을 얻으려면 세 배는 줘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맘보 가지고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하냐. 아니 당연하지 저 경기도 시골 한적한 곳에 방 네 개라고 해 봐야 돈이 얼마나 가겠어요. 그런 집을 여기서 얻으려고 그러니까 그 집을 서너개 팔아도 안 되지. 전세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방을 네 개를 쓰던 사람이 두 개로 줄여가지고 오더라도 지상에 살던 사람 지하로 오고 이층집 살던 사람들이 단층집에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런 생활에 불편함보다는 하나님의 교회 가까히 신앙생활을 하는 행복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라는 선교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와야지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주셔서 똑같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도둑놈 심보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큰 집이 아니고 좋은 아파트가 아니어도 늘 주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것에 만족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 그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계속해서 능력과 힘을 공급받는 건강한 영적생활이 이루어질 때, 그때 쇠약함을 모르는 건강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그 연약함을 극복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강함이 없이는 우리는 정말 온전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 그동안 주님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아무렇게나 살다가 ‘아!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주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용서를 비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회복과 은혜를 주셔서, 그때에는 반드시 그런 은혜와 그런 회복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반드시 새롭게 맺는 교회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여러분 가운데도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특별한 사정에서 오늘 참석하신 분들이 아니고,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신앙생활 한지가 꽤 오래된 분들, 그래서 전에 다닌 교회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세요.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간다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동기간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습니까? 깡통 들고 주일이면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이 말씀 저 말씀을 줏어 듣는 사람들에게 형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 형제지’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다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향해서 여러분들이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주님이 아버지 되심을 알았으면 교회가 어머니의 품인 것을 경험하고 그 속에 안겼을 때, 언제나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이 어머니 밑에서 무릎을 꿇고 배우면 아버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 사랑하는 동기간들과 함께 기쁨과 설음을 함께 하며 한 상에 먹고 마시는,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어
기쁨과 설음도 함께 하니
항간에 초가도 낙원이라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깍아주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위해서 다듬어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직업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믿음의 배경도 다른 수많은 알록달록한 지체들을 모아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시면서 서로를 다듬어서 교회를 한 작품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지를 배워나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 지체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방황이 신앙에서 끝난다면 신앙생활의 방황은 정착된 교회 생활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몰랐을 때는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정말 정착된 교회 생활을 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쇠약해지지 않고 끊임없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시인은 말하기를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이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교회의 생활이 없다고 해서 주님을 전혀 못 느끼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을 그렇게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성전을 갈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육체와 영혼이 하나님께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쇠약해져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착된 교회 생활을 안 한다고 해서 ‘모든 은혜가 끊어지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꽃에도 약간의 연기가 있고 시커멓게 꺼져 가는 연기 속에서도 약간의 불꽃은 있는 법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가 없어도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교회가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면서 좋은 일을 하면서 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생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분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자기들을 매우 사랑하시고 자기들을 위해서 일하시던 현장이 있습니다. 장면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 생활을 해 나가면서 이렇게 살아갈 때가 있고 무거운 것을 든다든지 어려운 일을 할 때 특별히 힘을 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하나님은 일하고 역사하시지만, 어떤 특정한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눈이 둥그래질 정도로 하나님이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을 이 사람들은 생존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신앙을 깊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강력한 힘과 능력, 그것을 보여주시는 때, 그런 때를 염두에 두고 자기에게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도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자기가 도저히 그리워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성소로 갈 수 없게 된 이런 형편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자신의 이런 상황을 타개해 주시고 기적과 같은 역사를 일으켜주셔서 원수와 같은 인간들을 몰아내 주시고 그 성전을 자기에게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예수 믿는 사람이 점을 보러 갔더니 한참 보더니 예수를 믿느냐고 하면서 손금상으로 볼 때는 일찍 죽게 되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차피 팔자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면서 예수나 열심히 믿으라고 했다는 이야기.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운명에 순종하고 그저 그렇게 아프기 때문에 아파하고 보기 싫은 인간이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살고 이렇게 살면 안 믿는 사람들보다 틀린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 틀리지 뭐가 틀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량식품을 때묻은 누런 봉지에 집어넣은 놈이나, 때깔 고운 빨간 봉지에 반짝반짝하게 집어 넣은 것이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고 어차피 쏟아놓으면 다 불량식품인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상처가 있으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체험해서 그 상처를 회복으로 바꾸고 미움이 있으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경험해서 자기가 그 미움을 극복하고 불쌍한 인간들을 사랑해야지 운명적으로 자기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그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꼭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젼을 따라서 이 길로 가려고 하는데 이 길이 막혔으면 그까짓껏 산 하나 들어내고 가버리면 되지, 이쪽 동리가 믿음이 훨씬 좋습니다. 이 동리는 요즘 이상해졌습니다.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은 것이 간증이 많지. 주님을 안 믿었으면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신앙의 힘으로 사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그 어려운 일들을 생존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해주셔서 길을 내고 가는 것입니다.
진짜 놀라웠습니다. 영동 고속도로 요즘 새로 수리했는데 큰 산이 있어서 진짜 한참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뚫어버렸습니다. 뚫으면 3.2킬로입니다. 100킬로로 놓고 한없이 달려도 굴이 안 나옵니다. 아니 사람도 산을 넘어가다가 넘어가다가 그런 방법 밖에 없는가 뚫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뚫고 지나갔는데 아니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되고, 이것은 이러니까 우리들이 할 수 없고, 저것은 저러니까 할 수 없고 그리고 피하면서 걸어가는 그 길이 전부다 타협으로 얼룩진 길입니다. 고민은 많이 했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열렬하게 기도하면서 이제까지 내가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이 삶을 청산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큰 꿈을 가지고 살아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 식에 모험정신이 없는 신앙생활에 이면에는 바로 뭐가 있었습니까? 그런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너진 교회 생활, 회복이 없는 신앙생활,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의 뵈옵지 못하는 신앙생활, 그래서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그런 신앙생활,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이 바르게 되면 진짜 생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배웁니다. 왜 믿음이 없는데 이렇게 와서 쭉 보면 정말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환경을 개척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꾸고 심지어는 저 인간은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기가 품질보증을 했던 사람들이 변화 받아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는 자기의 삶을 보면서 그런 모험정신을 갖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야, 저 불한당 같은 인간이 변해서 저렇게 성도가 됐다면 나도 희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찾아가서 너는 나에게 희망을 준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너도 변화됐으니 나야 얼마나 잘 변화되랴.“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여튼 그런 희망의 증거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 등록을 하면서 심방을 가면 ”목사님, 저 같은 사람도 고쳐질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진짜 그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우리 교회 누구, 누구를 봐라. 이게 품질보증하던 인간들인데 다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됐는데 그것에 비하면 너는 얼마나 낫냐.“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런 희망의 증거를 교회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 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환경과 악조건들을 극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변화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희망의 증거가 아닙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성질 못되고, 급하고, 쉽게 토라지고, 낙심 잘하고, 유리 그릇같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시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됩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일해주셨다고 하는 그런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교회를 처음 세우면서 하나님이 제게 주셨던 비젼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진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은 너에게 보내줄 것이다.” 난 그런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진짜 망가질대로 망가지되 상 망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셨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희망의 증거가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조금만 고쳐줘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공장으로 보내고 그리고 진짜 많이 고쳐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인간들 모여라. 그래서 우리 모두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자.
그래서 정말 고쳐졌습니다. 새롭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건강한 교회 생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살아 있는 교회 생활이 없었더라면 일평생 내 운명이요. 팔자려니 하고 짊어지고 살아 갔던 우리의 인생의 수많은 문제와 내 자신 안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높은 벽들을 건강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뵈옵고 생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그 크고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을 고치시고 우리 앞에 운명을 바꾸어 놓으시는 이런 역사를 보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놓으시고 교회에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복된 교회 생활 속으로 돌아오십시오. 나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이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 자신의 교회로 돌아가도 나는 괜찮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잠깐 동안은 괜찮지만, 그러나 오래도록 정착함이 없는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간증이 있는 신앙생활, 자기 경험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고쳐지지 않는 자기 자신을 그럴듯한 교회 생활로 포장하겠다는 그 심리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여러분의 가정에 첫 번째 열매로 부름을 받았거나 그 가정에 목자로 부름을 받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여하에 따라서 가정을 향해 미치는 축복이 달려있을 수도 있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생명이 함께 결탁되어 있는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고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늘 뵈옵는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제 여러분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러분 주위에 딸린 수많은 영혼들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사람이 바르게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떠도는 나그네와 같고 방황하는 방랑객과 같은 신앙생활을 이제 청산하고 그런 거짓된 낭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기쁘게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한 교회에 소속되어서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여러분들이 해야 하고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이런 신앙에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여러분들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할 때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우리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참 약합니다. 우리는 항상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사람처럼 나타나고 어떤 때는 매우 약합니다. 어떤 때는 승리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패배하게도 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런 인간의 양면성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신앙생활에 한 과정에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해도 참 대견스러울 정도로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나 혼자 살아갈 때에 대부분의 나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까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는 드러내기 싫은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열심만을 가지고 측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는 이렇게 자기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는 자신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면서 정확하게 어느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인지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 앞에 그런 모습을 보충하는 길이 무엇인가 혹은 고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 구도자의 영적인 깊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강함과 약함을 수시로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아주고 있는 동안에는 때때로 우리들이 강합니다. 무엇인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동안에는 우리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외적인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확히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풍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이것을 Scrutlnlze 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번역하면 “정사”입니다. “정밀하다”라고 할 때의 “정”자와 “살핀다” 할 때의 “사”자입니다. 정밀하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피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읽고, 읽히고, 배우는 그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꼼꼼히 살피면서 자기도 속기 쉬운 자기의 본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게 살아가는데 어떤 방해를 주는지를 찾아내서 그것을 고치는 그런 노력이 없이는 우리들의 참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상실하고 있는 거룩에 이르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 중에 하나인 “정사”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이런 정밀한 자기 점검과 자기 반성, 이것이 지금 우리들은 거의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없이 교회에 가고 정신없이 집에 돌아와서 다시 정신없이 살다가 보니까 또 주일이 다가오고 언제 우리들이 한번 정직하게 무릎을 꿇고 단 10분이라도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명상하고 또 생각하고 성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 동양의 성현도 “일일 삼성이면 명견지수와 같은 마음을 유지한다”고 했거늘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도로 생각하고 걸어가는 구도자들의 생애가 자기 성찰이 없다고 해서야 어떻게 자기 부서짐이 있겠으며 자기 부서짐이 없는 신앙생활이 어떻게 정결하고 거룩해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신앙에 한 기술, “정사”라고 하는 자기 성찰을 가지고 우리를 꼼꼼히 보면 우리들이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진실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허위와 거짓, 위선, 거품, 교만 이런 것들을 걷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자기 교만, 위선, 거짓, 허위, 진실치못한 이런 것들은 머리위에 떠있는 두터운 먹구름이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의 신앙이 깊어지기를 원하면 진실한 자기 성찰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진실한 자기 성찰을 가지고 우리를 보게 되면 정말 우리는 연약한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화) 예전에 비해서 사법고시가 쉬워진 요즘을 말씀하시면서 제자 중 한 사람이 변호 사로 계시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사법고시 시험을 본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이 되지만, 그 사람들이 낸 답안지를 보면 법을 모르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도 웃을 수 있는 답안지가 많다고 하는데 그만큼 공부할게 많고 시험범위가 넓다는 뜻일꺼라는 이야기.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또 자기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그럴듯한 신앙생활, 제법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아주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씩씩한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굉장히 대단해 보이지만 그런데 사실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출발 그 자체가 자기 혼자 힘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신앙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서 절망해본 사람만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음의 밝은 빛을 받고, 그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인간들인가 하는 것을 또한 경험하게 됩니다. 가끔은 우리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의 모습에 도취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만 그러나 어느 한순간 진리의 빛이 비추고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참 모습 앞에 절망한 것만큼 이제는 자기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긍휼과 은혜를 깊이 경험해서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자포자기하면서 살았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며, 교회가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았을 사람들이 그 교회 속에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하고 연약한 인간이고 그 인간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모든 지체들과 함께 경험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참새도 주의 제단에서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운율시에 있어서 전형적인 평행시입니다. 여기에서 참새가 무엇이고, 제비가 무엇이고 그런 식으로 따지는 것은 히브리 문학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서 우리에게 동일한 사상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새와 제비가 동의어이고 주의 제단에서 집을 얻은 것이나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은 것이나 같은 말에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제비에 대해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참새는 몇번 나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주님이 그런 하찮은 참새들도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 이 세상의 역사는 더더욱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라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앗사리온이 500원쯤 된다고 하니까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이었으니까 지금 물가로 따져서 참새 한 마리에 250원 정도가 되는 그런 것입니다. 250원이라는 돈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굉장히 대단한 돈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은 참새가 얼마나 가치없고 의미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말씀하실 때에 “잠깐 있다가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사랑하시지 않겠느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들풀 같은 것들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들풀을 가치 없는 것인데 그 들풀도 그렇게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그리스도를 값주고 사셔서 구원하신 너희들을 하나님이 어찌 돌보시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정답이 나옵니다. “참새도 주의 제단에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긍휼히 얼마나 넘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있고 씩씩하기만 하면 훌륭한 인생을 살아갈 것 같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씩씩하고 확신에 가득찬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았습니까? 자기가 인생을 가장 잘 알고 자기가 인생을 가장 주체적으로 씩씩하게 잘 산다고 생각하던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아픔을 겪었습니까? 고집이 세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아버지 때문에 당한 자녀들의 아픔이 있고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 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남편 때문에 당하는 아내의 설음도 많습니다. 반드시 확신이 없어서 우리의 인생이 비극적인 인생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슬픔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줘도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애심과 자존 감이 없는 사람들은 비굴하며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자기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하고 포기하는 사람들, 때로는 자만심과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들, 이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도 망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의 인생도 힘들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인생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어떤 확신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성패는 만물의 주관자이시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 모습이 참 모습인데 그 참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는 사람들만이 인생을 살되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알고 어느 시점에서 절제를 해야 하는 것을 배우고 어느 시점에서 용기를 내야 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근거 없이 교만해진 주체성이 강한 자기를 믿는 인간이나 근거없이 낙담하고 좌절하는 불쌍한 인간이나 모두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볼 때에는 어떤지를 깊이 깨닫고 주님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라의 자손이었습니다. 아마 고라의 자손이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시인은 특별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즉 가장 가치없는 참새와 같은 인간, 그리고 제비와 같은 인간, 오늘 우리 문맥에서 통용되는 표현으로 하자면 벌레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자기의 집에 용납해주시고 거기에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아마 이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조상들의 과거에 대해서 돌아보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고라는 원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을 때에 반역을 했던 무리들입니다. 광야생활 도중에 하나님 앞에 모세의 지도권에 고라의 자손들이 반항합니다. 그들이 당을 이룹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항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고라 자손들이 진을 치고 있는 땅을 지진이 일어나게 하셔서 입을 벌리고 그리고 그들을 그 속으로 쓸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그런 재앙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모든 고라의 자손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일부의 씨를 살려두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스라엘 사회 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낙인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저 고라의 자식들 저 놈들은 근본이 되먹지 못한 놈들이야. 하나님과 우리 지도자 모세에게 반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조상들이 다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그런 자식들이거든’ 그런 오명을 간직한 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손들이 퍼져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때에 이들이 복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로 다윗의 특별한 배려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참새도 주의 제단에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찾았나이다”라는 이 고백이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고라 자손들 자기의 고백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낙인찍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들의 가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과 같은 성군을 만나서 이제는 하나님께 대적하던 반역의 무리가 이제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그런 자리로 뽑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라의 자손인 시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이 고백이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하는 그 자리에 자기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노를 당해야 했던 모든 고라를 비롯한 선조들과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후손까지도 함께 이 자리에 서서 지금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고라 그 자손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본명은 성도가 아니라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취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 우리의 취미였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전도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인생에 도리를 알려주어서 우리와 함께 발 빠르게 범죄하고 손이 함께 피를 묻히는 그런 악한 일에 종사했던 것이 우리의 옛 모습이었고 이것이 바로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 시인이 회상하고 있는 가슴아픈 과거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런 쓰라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반역의 과거를 가진 누구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 이 흉악한 죄인들인 고라와 고라의 자손들이 오늘 어떻게 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일꾼들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공로가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하나 있었다면 흉악한 죄인들을 용서하셔서 반역했던 자들을 용서하셔서 그들의 심판을 긍휼로 바꾸심으로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히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요 핍박자요 포행자인 죄인 중에 괴수인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나 같은 죄인을 통해 일체 오래참음을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보는 것입니다. 고라의 자손과 같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종약에 대적하여서 성도로서는 있을 수 없는 반역적인 일들을 했는데도 바로 그 사람을 뽑아내어서 그들을 주의 성전에서 일꾼 삼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하셔서 오늘 상사병이 나도록 두고 온 하나님의 집을 그리워하는 사모하매 사무치도록 만드신 사실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게 경험되는 곳입니다. 교회 밖에서 지은 많은 죄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 허락하시니
그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와 그리고 오래도록 계속된 불순종으로 마음에 하나님을 느낄 수 없도록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죄의식에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 날들이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따뜻하신 손길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혼자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숨이 막힐 듯이 쓰러질 듯이 고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여러분들을 도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아픔을 혼자 곱씹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버지의 집에 그러한 죄인과 상처받은 인간들, 버림받은 영혼들이 깃들 수 있는 넓은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전한가 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아비가 자기 자식을 알고 어미가 자기의 자녀를 아는 것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죄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틈새에 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낱낱이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해도 주님의 판단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시련을 주실 때면 어느때 까지 우리가 참을 수 있는지를 아시고 고난을 주실 때는 어느 지점까지 우리가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처럼 아십니다.
저는 지난 한주간 동안에도 생활하면서 몇 번씩이나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저 자신의 나약함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와서는 우리가 그런 위선과 허위가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 앞에서는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진실을 모두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힘듭니다. 때로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주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런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성품을 하나님의 한 가족된 지체들이 함께 경험하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런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를 온 성도들이 함께 경험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셨지만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고 한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허리를 굽혀서 지체들을 섬기고 또 그 지체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면서 사랑의 빚을 주고 사랑의 빚을 지면서 그렇게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게 편리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지만 자기의 백성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구속주가 되시고 통치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배울 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풍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우리의 강함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약함 때문에 범죄하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서 불순종의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상에서는 종종 착각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우리 참 모습을 말씀의 빛 앞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두터운 교만과 거짓, 위선, 허위, 가식, 잘난체하는 것, 이런 모든 먹구름들을 걷어버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지금 지극히 연약한 한 하나님의 자녀요. 길잃은 어린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흔히 애들을 때려서 길르는가, 말로 길르는가 논쟁을 많이 하는데 때려서 길르는 애들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다 잘못되는 것도 아닙니다. 안 때려서 길르는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려서 길르는 애들이 교육에 실패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하면 징계는 있고 긍휼히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때려도 그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징계보다 훨씬 크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인 나를 때리시는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라고 하는 자각이 있기만 하면 그 자식들은 때린다고 해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징계가 그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 어머니의 참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몽둥이로 때리지 않고 말로 상처를 준다고 하더라도 말로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아픔이 말에 아픔을 능가하는 긍휼히 그 관계 속에 없으면 그것이 그대로 상처가 되어서 쌓이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삽니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올바르지 않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방종한 욕심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사랑을 시시때때로 느끼는 교회생활의 감격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다가 마침내 자신 안에는 가시나무로 가득찬 사람처럼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그 사람의 인격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없고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을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느낄 수 없는 황폐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헤치며 걸어온 사람들이 모두 거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평탄하게 인생을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아무리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많이 겪고 고난의 아픔을 많이 겪고도 아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상처보다 큰 하나님의 인격적인 은혜, 그리고 죄와 실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풍부하게 경험하면서 살면 그런 인생에 있어서 마이너스 요인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진실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풍부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우리의 고집대로 살기를 원한 방종한 마음, 그리고 성격적인 결함, 인간관계의 결함, 또 사회의 왜곡된 구조, 이런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가기 힘든 것을 너무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정확하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어떤 원동력을 늘 간직하고 살지 않으면 세상이 우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항하고 거기에 항거해서 세상에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도답게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가 있는 교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함께 예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시시때때로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치없는 인생인가, 그리고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그런데 이런 인간을 향해서 주님이 베푸신 긍휼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와 같이 가치없는 미물도 하나님의 제단에서는 용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비도 새끼를 둘 보금자리, 히브리 성경에는 이 새끼가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낳은 많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긍휼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었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예화) 어릴 때, 봄이면 처마밑에 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짓는데 그러면 제비집이 있는 그 밑에는 지저분한데 그래도 아무도 제비가 집을 지을 때 좇거나 그러지를 않는 데 제비들도 그런 것을 알아서 인심이 좋은 집에 해마다 찾아와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라 나의 기쁨이 저희에게 있도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은 물론 여러분들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주님의 자녀답게 사자처럼 씩씩하게 시련을 믿음으로 이기고 여러분들을 유혹하려고 하는 세상의 유혹들을 단칼에 잘라내며 피범벅이 되어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지어놓은 이 집에 갈 곳 없는 제비새끼와 같고 참새와 같은 상처받고 고통받은 수많은 인간들이 실패하고 낙담한 수많은 죄인들이 아버지의 집에 와서 조그맣게 라도 집을 짓고 살겠다고 매달리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한번 그 마음을 깊이 새겨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마음입니다.
일주일 동안도 승리하면서 살다가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는 일평생 하나님을 거스르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았던 날은커녕 하나님의 가슴에 못박은 날만 이력서에 가득한 그런 고개를 들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주님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하신 그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큰 보람은 죄인들이 깃드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는 것이 목표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죽 했으면 제비가 안 오겠습니까? 얼마나 인심이 사나우면 제비가 안 오겠습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하나님을 거스르고 제 좋은대로 살아가고 주의 긍휼과 자비를 육체적인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가던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세상 밖에는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을 수시로 버린 흉악한 죄인들이 주님과 같은 분은 없고 주님과 같이 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까? 그것은 단지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통해서는 교인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빛나는 전통으로 그저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한 습관으로 교회생활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런 소망의 경험이 없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어두운 세상을 자기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나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에는 자기의 죄와 강팍함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너무나 높은 담을 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실되게 참회하고 자기의 무가치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용서해 주시고 방황하는 자신의 인생을 거두어 달라고 하는 고백을 통해서 주님의 크신 긍휼을 맛보게 될 때에 그런 성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받는 인정과 인간들에게 받는 수많은 박수갈채가 곧 하나님께도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 넘치는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을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받으면 우리도 이 시인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래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죄악된 나날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자기가 너무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의 손에 피가 묻었기 때문에 그런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마십시오. 복음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앞에 죄가 너무나 많아서 문제가 된 사람들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절망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과 은혜를 경험하고 참새와 같고 제비와 같이 무가치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없이 여러분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제나 나와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 앞에서 내가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일 뿐이라고 고백하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감격하는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비록 너희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참새나 혹은 제비와 같이 무가치한 인간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도다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자기를 용납할 수 없는 뼈저린 범죄 속에서 비참함 눈물을 흘릴 때, 그런 범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아직도 여러분들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그런 확증을 여러분은 어디서 경험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모두 고갈되었을 때에 우리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셔서 고갈된 이유를 따지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주의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전하심을 입을 수 있는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사망의 골짜기에서 쓰러져 있을 때에 생각나는 교회가 있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서 수시로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왔던 수많은 동기간들이 생각이 나고 거기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살아왔던 여러분들의 전 생애가 (?)처럼 스쳐 지나가서 그 교회 당에 엎드렸을 때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그런 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너무 깊으니까 존재로부터 접촉할 수 없도록 격리되었는데도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예화) 어느 애가 백혈병으로 죽어서 시체실에 넣어 두었는데 밤에 엄마가 와서 자식을 찾아서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니까 들어가게 해달라고 해서 안 된다고 하 니 컴컴하고 추운 곳에 그 아이가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어떻게 하냐고 그러니까 옆에 있던 간호사가 죽은 사람이 무엇이 무섭냐고 했다는 이야기.
그 차이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그냥 없는 것입니다.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가 사라져도 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물건 하나만 봐도 그 물건은 기억이 안 나도 그것과 연관된 그 존재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시인의 심리가 그런 것입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할 수 없고 경배하고 싶어도 경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참새와 같이 쓸모없고 제비와 같이 아무 가치가 없는 나같은 인간들이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었는데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느낄 수 조차 없는 것이 아니라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에 넘쳤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더 풍성하게 경험하고 이것이 바로 성도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할 교회에 대한 사랑이고 그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교회의 이름이 그리움이 되고 있지 않으면 아마 하나님도 여러분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정처없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결코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정상적인 성도의 생활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된 영구한 신앙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이런 긍휼히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풍부한 긍휼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풍부하게 경험합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쓰레기같이 살아온 나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대우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들은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은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자기의 풍부한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거기에 우리를 섬기는 지체들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탁월한 영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하나님 한분과 스스로 대면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하나님 한분과 대면하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유익을 개인적으로 무릎을 꿇는 개인적인 경건을 통해서 공급받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기대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께 대한 헌신으로 가득찼을 때도 우리는 함께 기대며 사는 지체들이 있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켜 보아도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일반적으로 자녀가 많은 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사회성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는 경험도 했지만 동기간과 함께 살아오면서 양보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지 형제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회 속에서 아이들이 경험하면서 살아가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융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편에 서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혼자서 자란 사람은, 물론 그런 것들이 신앙의 의해서 극복된 사람들은 다릅니다만, 극복될 수 있는 기회를 별로 못 가진 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굉장히 독선적이고 사회성이 약합니다.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푹 빠지기는 하는데 적이 참 많습니다. 상처도 참 많이 받고, 생각하는 것이 좁고 그렇습니다.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은 정말 고매한 삶입니다. 왜, 성도의 삶이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들이 함께 신앙생활 해나가는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회 속에서 함께 배우고 익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죄인들을 끌어안고 눈물흘리는 인간들의 눈물을 씻겨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품일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속에서 함께 나와 똑같이 주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깊이 경험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늘 참회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해나가기 위해서는 단지 자기가 뜻을 세우고 이제는 교회생활을 착실히 해야지 그런 결심만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교회의 일원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점이 좋아서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고 그 주님 때문에 교회생활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교회에 모여도 모이는 동기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를 따라 왔다가, 어떤 사람은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내려다가, 또 어떤 사람은 고된 시집살이가 서러워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연애 당이라고 하니까 한번 와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로 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한 가지 사건만 경험하면 됩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우리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그분이 나의 구주 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이 사람의 중심 속에 있게 되면 그런 수많은 동기를 가지고 사람들이 왔어도 모두 이 속에 와서 함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과 만난 진실한 만남이 선행되지 않으면 교회는 모임만 있지 진정한 성도의 교통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얼마나 귀한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달은 사람들의 눈에 만 성도가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예수쟁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자기에게 낙담하는 이 쓸모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들이 경험할 때에 그때에 우리의 눈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깊고 짙은 신앙의 사연들을 가지고 오늘 여기 서 있듯이 저렇게 힘없어 보이고 낙담해 보이는 것 같은 지체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런 추억들을 가지고 여기에 서 있겠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해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고 연약한 지체들을 서로 섬기는 어떤 사람을 붙들어줄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에게 기댈 때가 있고, 어떤 지체를 용서해줄 때가 있는가 하면 다른 지체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지극히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들 속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찮은 인간들을 향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만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함께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교회생활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지체들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희망이 없던 죄인이고, 진짜 완고한 죄인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포기했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했는데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붙드십니다. 우리는 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여전히 역사 하시면서 그를 성도다운 사람으로서 세워 가시는 일에 열심의 불을 끄지 않으시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거기서 우리는 또 한번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에 와서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풍성히 받고 그래서 나같은 죄인을 이렇게 선대해주시는 목매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섬기면서 살고 싶어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그렇게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는 아직 들지 못했지만 밖에서 슬피우는 양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기도 하고, 우리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없기 때문에 늘 낙담하고 쓰러지는 영혼들을 추스려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서로 아파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에 넘칠 때는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시련의 터널을 통과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시련 끝에 주실 신비한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면서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어두움의 때를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는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중에 모두 혼자 살아가기에 충분 할 정도로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을 수 없도록 무가치한 성도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비록 연약하고 모자라지만 예전에 우리와 같이 방황하고 아파하는 지체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그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보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면서 그들의 영혼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성도의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대들의 이름은 성도입니다. 그대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대들의 별명은 하나님의 교회의 자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들이 더 깊이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죄와 강팍함을 주께 고백하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참으시는 인내와 긍휼, 우리의 방종에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우리들이 경험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를 맺고 기쁨과 설음을 함께 하며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섬김을 받고, 어떤 사람은 섬기면서 그러면서 이 모진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죄와 어두움이 가득한 벌판과 같은 세상에서 그 혹독한 세상의 바람을 이겨갈 수 있는 신령한 비결을 함께 하는 교회생활 속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에게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긍휼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집에서 복음자를 찾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4.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로다 저희는 눈물의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뜻을 정하고 정착되고 견고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구체적인 축복에 대해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하기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저희가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많은 곳으로 샘의 곳이 되게 하시고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견고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정착된 교회생활이 필요한데, 아무렇게나 정착된 신앙생활이 곧 그의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 가운데 제일 먼저 “주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고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는 그런 신앙생활이 있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착된 신앙생활이 견고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분명한 전제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교회생활이 하나님께 힘을 얻고 마음 속에 시온의 대로가 나있는 것 같은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쉽게 알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나온 “시온의 대로”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 “시온”이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없지만, 번역자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 시편 전체의 정신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충으로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그들의 마음 안에 대로들이 있는 사람들의 행복이요” 이렇게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대로”라고 하는 것은 “멧실로트”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인간들이 걸어 다니다가 저절로 생겨난 길이 아니라 인간이 공사를 해서 일부러 만들어 놓은 큰 길입니다. 그 길이 마음에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당시는 지금처럼 이렇게 건축술이 발달되고 토목기술이 발달된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옛날에 사람들이 인력으로 힘을 들여서 길을 건설한다 라고 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왕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왕이 행차를 하게 되면 이제 제일 먼저 외치는 자가 앞에 지나갑니다. 외치는 자가 “모년, 모월, 모시에 이곳으로 임금님이 행차하시느니라” 라고 소리를 지르고 지나가면 그 뒤에 도로를 보수하는 인부들이 따라 가면서 높은 도로는 두둘겨서 낮추고, 낮은 도로는 높이고 해서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갈 때에 평탄한 길이 되도록 보수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길이 왕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도록 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멧실로트 라고 하는 단어의 뜻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에 “대로”라고 되어 있는 이 길은 더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길,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그런 길, 그런 길이 마음에 나있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얻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복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하나님께서 정착된 교회생활 속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그저 아무런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이 영혼에 어떤 유익도 받지 못하면서 그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그런 교회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 절에서 시인은 “참새도 주의 제단에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받는 말할 수 없는 풍성한 대접과 긍휼을 묘사하고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저들이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이렇게 고백한 다음에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의 대로가 열려진 가운데 교회생활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오래도록 출석하고 그리고 아무런 영혼의 자극도 받지 못하면서 단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눌어붙어 있는 교회생활 그 자체가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전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언제나 이와 같이 망가진 하나님의 자녀들, 주님을 이름조차도 모르는 이 세상의 불신자들이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의 마음을 두드려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험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힘들을 공급해줄 수 있는 교회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교회생활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을 늘 뵈올 수 있는 시온의 대로가 우리의 마음속에 열려있는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와 강팍함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서 스스로 소외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그렇게 마음의 죄와 강팍함으로 인해서 주님의 은혜의 자리로부터 멀어져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고 있지는 않는지 자기 자신을 정밀하게 점검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엄격한 기준으로 자기를 정밀하게 살핀 끝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많은 교회를 옮겨다니고 소문난 교회를 찾아 떠돈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에는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신 속에 있는 악한 범죄의 문제이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며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기 전까지는 비록 사도 바울이 목회하는 교회에 간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살핀 끝에 자신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이 문제는 나 자신의 문제만은 아니다 라는 판단이 되게 되면 두 번째로는 그것이 사실인지를 보기 위해서는 함께 교회에 있는 지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지체들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깊이 고통하고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거나 주님과 대면하는 기쁨이 없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주위에 있는 많은 지체들이 신령한 감격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까 말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위에 있는 지체들을 정미하게 살핀 결과 하나님께 힘을 얻지 못하고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교회생활이 나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다라고 하는 현실을 확인하게 되면 그것은 아마 자기 자신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 번째로 이제 교회를 면밀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속에 죄 가운데 살던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때, 참회하게 하시고 참회의 영혼들을 싸매시는 여호와의 은총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이 교회가 살아있어서 망가진 죄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판단될 때에는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선택해야 할 일은 그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로 고치고 새롭게 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들의 영혼이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도저히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다 드려서 헌신하고 그리고 생명을 걸고 그 교회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힘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제 삼의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길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그 교회가 병들고 망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에 그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려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서 그 교회를 위해서, 목회자를 위해서, 그 지체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기다리며 썩어가는 한 알의 밀 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이 가장 훌륭하고 좋은 길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런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을 하고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주께로부터 힘을 얻는 새로운 능력주심도 없는 그런 교회생활이 지속될 때에 그 속에서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영적인 파괴와 그리고 빈곤해가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들의 태만한 신앙생활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친 여러분들의 죄악이 합력해서 악을 이루어 그런 교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어디로 가든지 항상 여러분들이 그런 병든 교회를 만든 수많은 범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가책을 여러분들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교회생활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한 교회를 선택해서 불쑥 들어가는 음식점을 선택하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신앙의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살아서 좋은 날을 보기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가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고 주의 몸된 교회에서 목양의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에게 베푸시는 은밀한 사랑의 비밀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리저리 떠돌고 편의주의적인 태도로 이 교회, 저 교회를 유리 방황하는 불쌍한 교인들은 제조업체도 없고, 유통기간의 표시고 안 된체 조잡한 비닐봉투에 넣어서 이 시장, 저 골목으로 유통되고 있는 불량식품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쓸모없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귀하게 사용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재능과 재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여러분 자신과 세상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며 주의 나라와 거룩한 일들을 위해서는 별로 쓰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들이 모인 곳에 갈수록 여러분은 가라지로 분리될 것이며, 정직한 성도들이 모인 곳에 다가 갈수록 여러분은 외식하는 사람들로 분류될 것입니다. 참된 성도와 만날수록 여러분들은 물과 기름이 분류되는 것 같은 유리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른 여러분과 같이 조잡하고 이리저리 유리 방황하는 불량식품들과 같은 신자들을 만날 때는 동료의식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연대의식이 아닙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누구의 말대로 예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이 주일에 교회당을 찾고 예배에 나오기 위해서 분주하게 옷을 입는 동안 여러분들은 마음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예배의 의무를 다하고 싶어하십니까? 불행하게도 그런 의무감에서 예배를 참석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 영혼에도 유익이 되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런 식으로 밖에 교회생활을 할 수 없다면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런 식의 교회생활을 강요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이 그런 껍질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만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죄악 덩어리가 되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슴을 두드리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이 훨씬 더 복될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죄 가운데 살아도 세리처럼 회개 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교회생활입니까? 무엇을 위한 교회생활입니까? 무엇을 위한 성실한 교회출석입니까?
우리 교회도 교회를 등록하고, 물론 그분들 가운데는 부득이하게 목회자의 양해를 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등록만 하고 새가족 반에도 안 들어오고 심방도 안 받겠다고 그러고 자기 마음대로의 사람들이 극소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교회에 등록하셨습니까? 저는그런 분들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열린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목양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세례도 줄 수가 없고 집사로 세우지도 않겠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목회하는 동안은 말입니다. 모두 교회를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저 혼자 목회를 해도 그런 사람들을 세례를 주지도 않고 직분을 주고 세우지도 않을 것입니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도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새로운 힘의 능력을 부여받는 것도 없이 교회생활 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가 그들을 그렇게 길렀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배웠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등록이나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묻혀서 대충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목양도 안 받는 신앙생활을 계속 한다면 저는 언젠가 그 사람들을 불러서 태도를 고치라고 거듭거듭 말할 것이며 듣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라고 저는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그런 것들을 배웠습니까?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깊이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더 큰 교회이어야 합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 불러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세례를 주고 교세가 얼마나 되는 것이 교회의 자랑입니까? 중직자를 많이 세우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투를 얹어주면 그것이 곧 교회의 명예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오직 하나, 찾아오시는 주님과 그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의 마음이 있는 참된 성도들, 그것만이 교회의 자랑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성찰하십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교회생활이 왜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십니까? 지친 세상을 일주일 동안 살다가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힘을 얻지 못하는 실패한 신앙생활이 계속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의 예배생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을 합니까? 아니 세상에서 장사를 하다가도 안 되면 왜 장사가 안 될까 하고, 뒤집어 엎어보기도 하고 다시 해보기도 하는데 그렇게 실패한 교회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이렇게 교회생활하는 것이 정말 성서의 가르침인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태만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성경적으로 자신을 목회해주지 않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간섭도 받지 않고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지적하는 영적인 자극도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 끝에 마지막에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망가진 여러분의 인생과 고장난 영혼, 다 부서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파리한 영혼, 여러분들의 인생의 동산에서 길 같이 자라나는 가시나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죄악된 것 외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외식이고, 실패하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누렸던 것을 추억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사연을 지고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범죄했을 때는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용서를 가져다 주었고 대적들에게 시달리고 고통을 받을 때에는 그 만남 속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결핍에 시달렸을 때에는 그 만남 속에서 결핍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체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신령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았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생활입니다.
누구를 믿는 교회생활입니까? 무엇을 위한 신앙생활입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교회생활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이 있고 파리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상한 갈대와 같이 주의 자비로운 손을, 주의 은혜로운 손길을 갈망할 때에 힘주시는 경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된 교회생활의 행복입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물론 우리는 잘못 살 때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후회스러운 일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인생에 어려움에 처해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여러분들의 그런 사연을 다 알아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종류도 너무나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답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힘이 필요없을 정도로 능력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중적입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살 때는 강한 것처럼 행동을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졌을 때는 한없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히 필요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자기 낮아짐의 의식, 두 가지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훌륭하게 인생을 산 사람들일수록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거만하고 죄악 가운데 산 사람일수록 주일에 와서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피곤하고 너무나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힘주시는 그런 은혜없이는 살 수 없는 이것이 정착된 교회생활을 하고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받는 구체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주께로부터 힘을 얻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은 건강하고 정착된 교회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이 오늘 말하기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많은 곳으로 샘에 곳이 되게 하시고” 그랬습니다. 여기에 “눈물 골짜기” 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에매크 박하”라는 두 단어인데 “박하”는 “통곡하다”라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곳을 하나님이 적시신다” 라는 뜻입니다. 언어적으로 보면, 설명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통곡하며 지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그 골짜기를 지나는데 하나님이 그 메마른 골짜기를 터트리셔서 샘을 내게 하셔서 그 메마른 땅이 그 물을 마시게 하고 거기를 지나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 물을 마시면서 소생함을 얻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 건강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철이 없을 때에는 우리 스스로 굉장히 강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인생을 살고 이런저런 시련을 겪고 나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또 불안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구이든지 간에, 어떤 방면에서든지 간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강한 자극을 받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그의 인생 중에서 한번은, 혹은 지속적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정도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불안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끼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깊어지는 신앙생활을 위한 최대의 적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의에 가득차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자신만만한 교만,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경험했던 놀라운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 많은 곳으로 샘에 곳이 되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늘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적인 만남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는데 시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교회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물론 우리는 4층 교회에서만 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에서만 살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예배드리고 하나님 찬송하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 것이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워도 교회생활하려고 사표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직장을 사표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은혜를 못 받았어도 어차피 세상에서 생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난 다음에는 우리들이 이전에 ‘내가 인생을 고달프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안 믿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주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불순종의 연속이었고 그 불순종은 우리의 인생의 길에 수많은 가시와 엉겅퀴가 되어서 우리의 인생을 고달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토해놓은 우리의 죄악과 우리가 뿌린 악의 씨앗들이 스스로 가시가 되어 자라서 우리를 찔렀고 우리의 인생에 걸어 가는 길을 피 길로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야 할 길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통곡의 골짜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화) 전에 다니시던 교회에 자매가 약국을 하시는데 아파서 나오시지 않았기에 ‘약사 도 아픈가?’ 그랬더니 그 자매의 말이 ‘목사님도 영적 침체에 걸리나요.’ 했다는 이야기.
교회 다니고 말만 잘합니다. 구원받아도 여전히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고통스러운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신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죄성, 그리고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불순종의 기질들 때문에 통곡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우리의 마음에는 여전히 옛 사람처럼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범죄를 통해서라도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사악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마음의 소원들을 실행해 옮김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커다란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그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생활 속에서 이렇게 수시로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시온의 대로가 있는 신앙생활에 축복이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늘 드리는 예배 생활인데도 이상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힘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많은 지체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감격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 자신은 그런 은혜로부터 점점 더 차갑게 멀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록 실행에 옮겼을 때에는 우리가 원해서 실행에 옮겨 불순종의 길을 걸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고통스러운 영혼에 아픔 때문에 우리들은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그가 비록 완전히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려서 교회를 떠난다고 아니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의 영혼에 깊은 어두움을 경험하며 통곡의 계곡을 지납니다.
또 그런 불순종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존중심이 마음에 가득찬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고 주님을 위해서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 때문에 때로는 통곡의 계곡을 지납니다. 주님을 위해서 많이 행복했던 사람들은 주님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 때문에 많이 운 사람들이야말로, 주님 때문에 많이 통곡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산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통곡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오늘 보십시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원수들로 인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부터 추방되어 있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 속에서 통곡하고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인을 보십시오.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무엇 때문에 두고 온 성전을 그리워하며 오늘 통곡으로 이 시를 쓰겠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진실한 믿음이 그를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시인처럼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때로는 우리 완악한 인간들처럼 자신의 범죄와 불순종 때문에 갈 바를 모르고 인생 전체가 골짜기가 되어서 아무도 없이 통곡하며 황량한 계곡을 지나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정하고 있는 통곡의 골짜기는 물이 흐르고, 풀과 꽃이 있고, 새들이 노래하는 그런 아기자기한 골짜기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깍아 지른 듯한 협곡 절벽 아래로 난 위험하고 메마른 그런 골짜기 길입니다. 맹수의 위협이 있고 도적의 위험이 있는 그런 골짜기, 인도자도 없고 동반자도 없이 홀로 오랜 광야의 길을 걸어온 목마름에 그 계곡을 들어섰지만,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거친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하는 그런 곳, 광야의 골짜기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울며 그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곤고하고 고통하는 자들을 위해서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묵상해보십시오.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을 찾을 수 없는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좁디좁은 골짜기에서 주님이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바위가 쪼개지면서 쏟아져 나왔던 모세 시대에 광야에 샘물과 같이 어마어마한 양의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물들이 계곡을 흐르며 짐승들의 시체만 뒹굴던 거친 그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풀이 돋는, 꽃피고 새들이 깃드는 그런 생명이 있는 골짜기로 바꾸어 놓는다고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그 골짜기가 통곡하며 지나야 하는 골짜기였지만, 그렇게 샘을 터트리셔서 그 골짜기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골짜기는 쉼이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런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께 기도하면 태산과 같은 우리의 어려움을 물러가게도 하시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꾸시기도 하고, 또 나를 고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환경을 고치고 바꾸어서 우리에게 기적적인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하나님과의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고치셔서 통곡의 골짜기에서 노래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시고 두려움과 시련이 가득찬 계곡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우리는 수시로 목마른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목마름을 해갈해 보려고 때로는 쾌락에 빠져 보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에 욕심을 내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들이 위로가 되었습니까? 무엇을 소유해보셨습니까? 그것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모두 우리의 생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 거기서는 만날 수 있는 액체는 오직 우리의 눈물 밖에는 없는데, 그 눈물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통곡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스러운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생수의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인생을 이만큼이라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이 살만해서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해서 뭐 일평생 제가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이 지친 내 영혼을 살리시는 생수의 은혜 때문에 살아있는 것일거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디 저만 그렇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에 이제껏 걸어온 길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통곡을 하다가 그 기력이 진하면 나중에는 눈물도 안 나옵니다. 눈물도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눈물이 나오는 것이지 이게 완전히 고통이 너무나 진해서 체력 자체가 완전히 소진되었을 때에는 눈물도 안 나옵니다.
여러분, 오래도록 장기간 금식하면 눈물이 나옵니까? 마음은 더 찢어져도 눈물이 안 나옵니다. 기력이 없기 때문에 눈물이 안 나옵니다. 눈물조차 말라서 인생의 어느 골짜기에서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이 쓰러져서 이제는 이곳이 인생의 끝인 가보다 할 때에 하나님이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샘을 터트려 주셨기 때문에 그나마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에 이나마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샘을 터트려주십니까?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에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곤고하고, 도저히 더 이상 걸어갈 수 없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한탄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대들다가 결국은 눈물도 말라서 모두 기진하게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캄캄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영혼을 비집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샘물을 공급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른 땅을 지나는 것 같은 척박한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샘을 터트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샘물을 먹으면서 오랜 동안 통곡하며 걸어왔던 그 골짜기가 사실은 노래 할 이유가 많은 골짜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강하시고, 우리는 병들었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폐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를 살리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말씀의 샘물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교회생활을 통해서 얻는 유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처음에 교회에 와서 빨리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가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1-2년 다녀도 나는 그 사람이 왜 교회에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지 말라고 그래도 또 계속 나옵니다. 그만두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그렇게 살면 세상으로 가라고 그래도 또 못갑니다. 똑바로 살아라 그래도 똑바로 살지를 못합니다.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꾸역꾸역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지 그러던 사람들이1, 2, 3, 4년 그래서 목회자가 거의 포기할 때쯤 됐는데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4년이 차지 않았다고, 아직 나는 변하게 될 때가 멀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죽 했으면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변화를 받겠습니까? 그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이 너무 커서 멸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괴로움이 너무나 심해서 파멸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생수의 샘, 마른 땅에 생수를 터트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의 은혜,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새힘을 얻는 영혼에 새로운 소생과 회복이 없기 때문에 그 골짜기에서 통곡하다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강한줄 알지만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쓸만한줄 알지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많이 망가지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지체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도 그러했듯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도, 앞으로 남은 우리의 인생의 길도, 꽃피고 새들이 노래하고 시냇물이 흐르고 적당히 구름이 낀 경치 좋은 산책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인생이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광야와 같이 죄악 된 세상을 지나면서 뜨거운 뙤약볕을 지나기도 하고 물 한 모금 없는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가 어느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샘물을 터트리시기만 하면 그러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과 만나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이런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 하나님이 터트리시는 샘물과 같은 영적인 소생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어떻게 통곡에 골짜기를 지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겠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님을 섬기며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함과 우리 밖에 있는 악한 영에 권세들과 부패한 세상, 이 모든 것들에 에워 쌓인 원정경기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비록 통곡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거기에서 터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소생의 은혜를 맛보게 해주는 교회생활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능히 이기고 지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터치시는 샘물을 통해서 주님 자신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우리는 이길 수 없는 길을 우리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이기며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 심히 힘들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건조하게 느껴지고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마음을 가질 때, 그때 종종 여러분 앞에 생수를 터트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그런 교회생활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교회생활이 필요합니다. 잠시가 아니라 마지막에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 살다가 마지막에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우리에게는 이런 교회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 보니까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축복들이 비를 만드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축복이 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오고 나면 파종을 하고, 그리고 늦은 비가 오고 나면 결실을 하고, 그 다음에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번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비를 제때에 맞으면 곡식들이 아름답게 영글고 그리고 큰 수확을 가져다 주어서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교회생활을 하고 그 속에서 목양을 받으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 한 사람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때문에 황폐해지고 가물어서 갈라진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에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을 기억해보십시오. 보디발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군다나 보디발의 부인인 그 아내는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못된 여인이었습니다. 그 집에 살던 수많은 노예들과 자녀들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집에 팔려간 한 사람의 노예, 요셉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은혜의 비를 내리셨습니다. 축복의 비를 내리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전히 여러분의 부모가 곤고하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곤고하고,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이 시련 속에서 사는 것이 아직도 여러분들은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동생, 우리 오빠, 애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영원히 신앙의 세계에서 엑스트라나 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들이 비를 만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같이 메말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하나님의 축복은 비를 만듭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똑바로 믿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제대로 된 교회생활, 제대로 된 신앙생활, 제대로 된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고 광야와 같이 메마른 여러분의 가정을 보면서 은혜의 비를 내려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여러분의 가족들이 모두 악해도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의 비를 내리십니다. 그래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악한 사람들의 악한 행실보다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힘이 더 많은 것은 의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앙이 없었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경 몇 구절이나 외우면서 눈 질끈 감고 죽을 때 기다리면서 사는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비가 내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축복이 은혜의 비가 내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쉽지만 84편에 대한 설교를 여기서 마치고 그리고 다 다음주부터는, 부활주일 지나고 나서부터는 다시 이제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망가진 가정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을 보십시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신기하게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풀이나 채소 이런 것들은 다 죽고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이 자랍니다. 물이 없어도 넉넉하게 자라는 것, 가시, 엉겅퀴, 쓸데 없는 잡초들 이런 것들이 아주 모진 것들이 자랍니다.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고 나면, 그리고 수시로 그 밭을 일구고 경작하면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채소들만 무성하게 자라서 밭을 일구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 여전히 망가진 가정을 보면서 고통하고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해결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착된 교회생활을 하고 제대로 인격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진리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변화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예전에는 하찮은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아주 의미있는 기도를 드리는 그런 사람들로 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들을 주셔서 그 축복들이 마른 하늘에 비가 내리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리고 나면 거친 광야와 같은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고 거친 광야와 같던 메마른 교회가 변화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직장과 사회가 변화되는 놀라운 일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제대로 된 신앙생활로 하나님이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84편 강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