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강해
(2001-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진노 중에 깨닫는 하나님의 성품(시6:1) 2001.10.10 수요예배 1
2. 목숨을 건 참회(시6:2-3) 2001.10.17 수요예배 16
3. 죄를 범한 신자의 마음Ⅰ(시6:4) 2001.11.7 수요예배 32
4. 죄를 범한 신자의 마음Ⅱ(시6:4) 2001.11.14 수요예배 50
5. 죄를 범한 신자의 마음Ⅱ(시6:4) 2001.11.21 수요예배 67
6. 침체 중에 잃어버리는 것들Ⅰ: 주를 기림(시6:5上) 2001.11.28 수요예배 81
7. 침체 중에 잃어버리는 것들Ⅱ: 감사(시6:5下) 2001.12.5 수요예배 94
8. 참회 중 신음하는 이유(시6:6上) 2001.12.12 수요예배 103
9. 신음 중 지친 이유(시6:6中) 2001.12.19 수요예배 119
10. 밤마다 마주하는 하나님(시6:6中) 2001.12.26 수요예배 132
11. 회개의 깊이와 관계의 회복Ⅰ(시6:6下) 2002.1.2 수요예배 145
12. 회개의 깊이와 관계의 회복Ⅱ(시6:6下) 2002.1.23 수요예배 164
13. 참회 중에 받는 고통(시6:7) 2002.1.30 수요예배 176
14. 사죄의 은혜를 경험할 때(시6:8) 2002.2.6 수요예배 188
15. 다시 하늘 문이 열릴 때(시6:9) 2002.2.20 수요예배 198
16. 하나님과의 화목: 대적을 이기는 길(시6:10) 2002.2.27 수요예배 209
1. 진노 중에 깨닫는 하나님의 성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6:1)
시편 6편이 어떤 종류의 시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시편6편은 시편51등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참회의 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참회의 시의 특징은 자기의 죄에 대한 고백이 나오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회개가 나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시편6편은 분류상, 참회의 시라기 보다는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깊이 있는 고백이 안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전형적인 참회의 시로 분류하기가 좀 어려우므로 이것은 아마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병상에서 이 시를 묵상함으로서 많은 위로를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단연코 이 6장이 참회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다윗이 이 시의 저자라는 이유 때문이고, 물론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다윗이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누워서 이렇게 몸이 수척해지는 그런 육체의 어려움을 맞이한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윗의 생애에서 이렇게 비춰 볼 때에는 이것은 다윗의 시라는 점에서 볼 때에 51편 등과 함께 분류될 수 있는 참회의 시라고 보는 것이 다윗의 생애에 훨씬 더 어울리지 않겠느냐 이렇게 봅니다.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은 없지만 두 가지가 여기에 나오는데 그 죄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은 없지만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암시는 여기에 충분히 나옵니다. 그렇죠? 예를 들자면 1절에 나오는 비로 이것, “주의 분” “주의 진노”“견책, 징계” 이런 것들은 모두 이미 이 시를 지은 저자가 무엇인가 잘못된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징벌하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뒤에 나타나는 그 육신의 곤고함과 고통, 환란,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결국은 그러한 죄의 결과에서 오는 그 비참함이라고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편에 가면 “행악하는 너희는 나를 떠나라 하나님께서 나의 곡성을 들으셨도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고백은 뭔가 이렇게 육체의 고통에서 병이 낫는 과정을 보여 준다 라기 보다는 영적인 회복의 과정을 묘사하는데 오히려 적합한 그런 묘사라는 점에서 6편을 저는 아주 전형적인 참회의 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앞에 보면 조그마한 글씨가 나오는데 “표제어”라고 하는데 거의 해설을 안 하고 넘어갑니다 마는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 표제어가 1절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과 한글 성경은 표제어가 달린 시편일 경우에는 항상 한절씩 히브리어 성경이 뒤로 가고 한글 성경이 한절씩 앞으로 옵니다. 그런데 이 표제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하여튼 이 표제어 자체를 성경본문의 한절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권위 있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다윗의 시” 이것은 다윗이 저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장으로” 그랬죠.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 그러는데 이 영장은 오늘날 우리들로 말하자면 그저 성가대 지휘자 정도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다윗의 시라고 나왔는데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 보면 “다윗에게 속한 시”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6편 같은 시는 다윗이 직접 지은 시지만 그러나 어느 가문에서 그것을 보존하고 내려올 때에 시를 지은 사람은 알 수 없어도 그것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러나 다윗이 지은 시라고 그렇게 여겨집니다. 영장은 성가대 지휘자와 연결되고 현악 스미닛. 그런데 스미닛이 뭐냐가 이제 논쟁인데 이 스미닛은 히브리어에 8이라는 데서 온 것입니다. 그것이 8번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8번째가 도대체 뭐냐? 그래서 이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그것을 뭐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다 말씀드려서 여러분들을 혼란스럽게 할 생각은 없고, 한 가지 가장 유력한 견해는 음악적인 부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악기의 부호라고도 보는 사람이 있고, 이것은 8번째 날인데 부활과 생명과 기쁨을 의미하는 8번째 날에 부르는 노래라고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소수의 견해이고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은 이것은 옥타브를 표시하는 음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은음자리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8음계에 맞춘 노래는 약간 밝고 경쾌한 노래가 아니라 약간 음울한 그런 노래입니다. 회개와 통회, 자복, 고통, 이런 것에 대한 노래이니까 뭐 이렇게 신나는 곡에다 맞추어서 불렀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편6편은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중에서 이것이 두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부터 7절까지가 이 시인의 죄 가운데 드리는 탄원이고 8절부터 10절까지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이제1절부터 7절 사이에서 시인이 상세하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데 1절에서는 1절부터 7절까지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총론적인 탄원을, 간구를 하나님 앞에 드린 후에 2절서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2절 3절, 호소하고 5,6,7, 넘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시인의 영육간의 곤고한 형편을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아뢰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늘 첫 절에서 이 시의 총론이기도 하고 또 1절부터 7절 사이에 하나님의 향한 간구의 총론이기도 한 이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 암시하느냐 하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그리고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거기에서 그 자신의 육신까지도 망가지는 그런 아주 곤핍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한 성품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시고 불의한 것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성품을 시인이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며 깨닫게 된 하나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성품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 속에는 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할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에 그 성품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초청이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얼마나 이 죄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한 사람이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수없는 싸움을 통해서 죄와 더불어 승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죄에 대한 견해가 매우 희박하고 아주 불명확하거나 혹은 죄라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나 부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깊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왜냐 하면 죄에 대한 참다운 이해 없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약에 제대로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반드시 죄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 역사를 보고 오늘날 우리와 함께 동시대에 신앙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들이 부러워할 만한 탁월한 영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영성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는 그 일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암시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도 한때 죄에 대해서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한 견해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매우 특별하게 역사하고 있을 때, 그 때에는 항상 죄에 대해서 진지하고 그리고 죄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른 마음을 유지하며 살수 있을 때 여러분들 중에 그 누구도 죄를 가볍게 생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신앙생활이 형식 속에 굳어지고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직업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죄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영적인 경험의 약화와 함께 퇴화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죄에 대해서 넉넉히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죄에 대해서 넉넉히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 없이도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되는데 익숙해져 간다라고 하는 표현과 동일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는데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일 수 없고, 부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실 만한 마음의 자리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라진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에게 익숙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죄에 대해 익숙해진 경험이 훨씬 더 관습적으로 따라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신발을 신고 다녔던 것처럼 발에 잘 맞은 신발처럼 익숙하게 그 죄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탁월한 인식과 영광을 체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계시에 대한 경험을 가졌던 우리와 어떤 의미에서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경험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다윗의 신앙의 경험이 우리를 능가할 정도로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오랫동안 죄 가운데 있었던 적이 있었음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이 시인은 우리와 똑같이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영광에 대해서 이렇게 둔감해져 가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둔감해져 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과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신앙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마음입니다. 동일한 자리를 두 실재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삶을 산출해 낼 수 있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짐승처럼 막 살아갑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은 그것이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아무거나 막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삶을 산출해 해는 공장과 같은 질서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은혜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은혜?” 그리고 예수쟁이들을 미워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한순간에 확 밀려들어옵니다. 주님의 은혜가 밀려들어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막 밀려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은혜를 받아봤어야 알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확 들어올 때 그 최초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프지요. 이제야 “아, 맞다 진짜 그렇다.” 동의되죠? 하나님의 은혜가 처음 밀려들어올 때 아프지 않습니까? 굉장히 아픕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 깨어짐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니까 맨 처음에 깨어짐이 있고 그 다음에 기쁨이 오는 것은 그 은혜가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때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심하기 직전의 상태 기억하세요? 막 불어나면서 하나님 앞에 확 매달려서 펑펑 울고 싶기도 하고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기도 한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내 인격의 문을, 마음의 문을 부스고 있는 느낌이 들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에 아직 굴복하지 않았을 때 그 직전의 그 마음, 고통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자기가 뭔가를 경험하면 좀 잘 생각해서 분석하고 그래서 그것을 다 이렇게 후일에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자료로 삼아야합니다.) 그런 경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은혜가 확 들어옵니다.
그 때 은혜가 들어오면 자신 속에 있는 죄악된 질서와 막 싸우는 것입니다. 투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하나하나 굴복하면서 다 무너지고 그 다음에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꿀과 같이 달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이해가 안가는 것이 뭐냐면 연말에 성경 많이 읽었다고 교회에서 상주는 것, 이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갖다 내고도 한번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책 두께만큼 돈을 갖다 내고 읽으라 그래도 진짜 읽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속히 속히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주 순간입니다. 아주 빨리 생깁니다. 저 산등성이에 있는 판자촌은 허물기가 힘듭니다. 보상 문제가 있고, 싸우고, 데모도 하고, 충돌도 생기고 하는데 허무는 과정이 힘들지 다 허물고 나면 그 다음에 짓는 것은 한 몇 달 동안, 한 1년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 동네가 변했네?” 이렇게 됩니다. “야. 이것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었네?” 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우리는 그렇습니다. 회심의 역사도 똑같이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를 하면서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올 때도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은혜의 질서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옵니다. 쾅쾅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확 밀려들어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죄에 대해서 저항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죄가 쫙들어오면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그 죄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받는 세상, 죄에 의해서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지는 그 사람의 인생의 비극이 어떠한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참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어거스틴서부터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별히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는 불타는 사랑을 내포한다.“ 그것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말장난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은 제 설명을 들으면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죄가 가지고 있는 그런 강력한 파괴적인 성격, 그리고 그 죄를 내버려 둘 때에 그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완전히 다스리고 교회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릴 때에 그 비참함이 얼마나 놀랍도록 큰지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진노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뭐냐 하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에 보면 멸망 받기로 예비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진노하시는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 이 시인이 정말 그 일생을 보면 그 하나님과 정말 동행하면서 살았지 않습니까. 요즘 사실 제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우리가 다윗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렇죠. 참 이상합니다.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다윗 속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없는데 하여튼 이상하게 설교하려고 본문만 찾으면 다윗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를 가만히 보더라도 사실 그 사람만큼 순전하게 하나님을 따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죠. 진짜 다윗은 그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그냥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표준입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이 결국은 이 다윗의 인생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당신 편에서 정말 이 세상에 다시없는 훌륭한 자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토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다 결정 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살고있는 사람도 너무 자만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11장까지 다윗이 얼마나 잘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12장이 찾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못산 사람도 너무 절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완전히 죄악의 나락, 영혼의 어두움의 구덩이까지 들어갔던 사람을 하나님이 건져내셔서 다시 그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주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간직하고 증언하면서 사는 정말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켜주신 것을 우리는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간에 이 모든 과정에서 시인이 뼈에 깊이 깊이 사무치도록 깨달은 것은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저는 이 6장을 보면서 필연적으로 이 시는 다윗의 생애에서 볼 때에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 그것과 연관이 있는 시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천국가면 여쭈어 보아야 알겠지만 그러나 그저 이렇게 제가 이야기하면 천국에서도 다윗이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고 있는 같습니다. 하여튼 그런 생각이듭니다. 그런데 잘보면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렇게 순결하고 진짜 우리모두 흠모하고 본받고 싶은 그래서 미국사람들에게는 이 데이비드가 수없이 많습니다. 데이비드를 얼마나 좋아하면 술집 이름도 데이비드라고 지어요. 얼마나 데이비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그렇게 순전하고 아주 깨끗하고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삶과 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살아온 삶도 아닌데 눈물이 납니다. 정말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예수님의 제자의 입장에 서 있는데도 참 이 사람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되요. 범죄하면서 죄가 확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안에 오랜동안 유서깊게 쌓아올려졌던 은혜의 질서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에 산산이 모두 무너져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다윗은 아마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의 자녀도 그렇게 되어버리게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한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 속에 남아있는 은혜의 영향력입니다. 그가 아무리 죄가운데 지배를 받으면서 비참하게 짓밟혀서 자기 생각에는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은혜의 질서가 깡그리 무너진 것 같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죄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아무 희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질서가 남아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왜 이 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 희망적으로도 보지 않고 너무 절망적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희망적으로도 보지 않는 이유는 뭐냐 하면 매일매일 싸워야될 실재이기 때문에,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수시로 져요? 안 져요? 지잖아요. 그리고 그 죄가 우리보다 훨씬 그 죄의 영향력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다라고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수없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도 않는 이유는 뭐냐 하면 한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속에 심겨놓으신 이 중생의 원리, 중생한 신자에게 심겨놓으신 하나님의 이 생명의 놀라운 능력,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 이 시, 이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아도 강력합니다. 보세요. 포항에 언제한번 집회를 갔는데 또 내일 포항을 갑니다. 밤중인데 기도원에서 집회를 하다가 저는 잠자리가 바뀌면 하여튼 잠을 잘 깹니다. 그런데 잠을 탁깼는데 환해요. “아이고 큰일났다. 강사가 새벽기도 인도하는데” 그리고 시계를 보니까 2시에요. 이상하다 이 새벽이 산이 이렇게 밝을까. 그러면서 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하늘이 빨개요. 이것이 웬일인가. 그랬더니 그 포항제철 굴뚝에서 나오는 그 불길이 온 도시를 그렇게 마치 석양노을처럼 그렇게 나는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 불이. 그러니까 쇳덩어리도 집어넣으면 스르르 얼음처럼 녹아서 쇠끓는 물이 되지 않습니까. 그 불도 맨 처음에는 조그마한 불꽃으로 지핀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불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온 것이 아니라.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핏들었는데 그 불이 한번 꺼지면 다시 붙이는데 30억인가 든다고합니다. 그러니까 그 불을 안꺼뜨려야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가 많이 떨어지고 그래서 우리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은혜생활을 잘못하면 떨어집니다. 속에 은혜의 불씨가 조금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남았는데도 아주 꺼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어떤 죄가운데 들어가도 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뭐예요. 그 불씨로서는 있으나 마나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몇십 년만에 영하30도의 강추위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촛불이 하나 풀풀풀 타고 있습니다. 바람에 꺼질 듯이 나부끼면서 사실 이불만 가지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나무를 다태우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불씨만 가지면 쇠를 녹일 수 있는 불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냥 불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촛불하나를 가지고 영하30도의 그 추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갖다놓고 불을 잘 살려서 그래서 이 은혜의 영향력이 죄의 영향력을 이길 수 있게끔 만들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죄에 대해서 우습게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 고해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진지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순수하게 살다가 죄를 지으면서 죄가 확 밀려들어와서 다윗의 은혜의 질서들을 거의 모두 파괴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다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그 불길이 이 다윗을 사르면서 신앙의 양심을 죽이고 거룩한 삶을 파괴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사랑을 더럽히고 하면서 막 벗어나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다윗이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서 은혜의 질서들을 파괴하는 그 죄의 불길을 끌 수 있는 소화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회개의 눈물입니다. 그 이후에는 무엇으로 끌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참회의 눈물, 그것은 마치 불붙는 산불의 현장에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와 같은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막 태백산맥이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뭘 어떡하겠습니까. 소용없습니다. 헬리콥터로 물을 뿌린다. 그러는데 애들 장난입니다. 그렇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아마존 같은데 6개월씩 1년씩 그렇게 불이 타지 않습니까. 인도네시아 같은 곳 말이죠. 어쩔 수 없이 그냥 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모두 손놓고 아연실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 같은 굵은 비가 한 이틀동안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사 끝이죠. 회개의 눈물은 바로 우리의 은혜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밀려들어오는 죄악의 불길을 끌 수 있는 유일한 소화입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눈물은 그것이 마음자체에 떨어져서 죄의 불길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된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한 성품을 새롭게 발견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순간에 항상 죄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을 묵상한다는 이야기는 불결과 더러움에 대한 생각 없이는 거룩에 대한 묵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불결한 마음에 대한 인식 없이는 그런 기도가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충성스럽게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때에 불충성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그 비참함과 그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게 해달라고 매달릴 수가 없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 시인은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합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곧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그 죄를 극복하게 하시는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안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이 정말 핍절해 가고 그리고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져있을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이상하게 공허하게만 들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렇죠. 곤고하고 고통에 처해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하나님이 너를 많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해주시는데도 이상하게 그것이 내 마음에 위로가 안되고 곤고함의 목마름을 끌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 없이는 죄로 말미암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지한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시인이 그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함께 죄의 불이 들어와서 자기의 은혜의 질서들을 마구 태우면서 지나갈 때 그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전에도 물론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겠지만 직접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면서 아주 처절한 정도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이 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정말 심령이 곤고하고 여러분 자신이 해결의 길이 없이 여러분들이 깊은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원인도 알 수 없는 그런 깊은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은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장시간을 지난다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을 고사시키고 여러분들을 계속해서 난관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그런 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사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대해서 진노하시는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사랑에 호소하게된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 시인의 기도가 얼마나 모순인지 한번 보십시오.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견책과 징계 이것은 모두 시인 자신이 이 기도를 드릴 때에 자기에게 무엇인가 중대한 범죄와 실패가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시라기보다는 아주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죄를 불결하게 여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의하면 어떻게 해요. 죄를 지었으면 견책을 받아야죠. 잘못했으면 징벌을 받아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간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을 어떤 사람으로 묘사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악한 존재로 태어나고 죄책과 오염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고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 바탕자체가 악하고 악한 뿌리에서 돋아난 열매와 같은 존재들이 인간입니다. 그 인간은 생내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 표현이 무엇입니까. “죄인”입니다. 죄와 사람이 합쳐졌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야기 없이는 인간을 말할 수가 없고 인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반드시 죄에 대해서 거론을 해야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관점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하자면 의로운 성품으로 그들을 아주 정직하게 대하시면 그러면 그들은 징벌을 받아야하고 심판을 받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소망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결국 진노아래 살다가 진노 속에서 죽어간다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은 그 죄인들에게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 죄인들에게 의미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 그 하나님도 또한 어떤 의미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성품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운데서 자신에게 사죄의 은총을 탄원하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불공정하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죄를 지은 인간이 모두 하나님 앞에 징벌과 견책을 받아서 멸망을 하거나 커다란 심판을 당해야하는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을 거두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두가지 성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죄에대한 진노는 아주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하기 때문에 종종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과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경험한 모든 성도들에게는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그 태도와 죄인 자체는 불쌍히 여기시는 그 태도가 이것이 구분되어서 느껴집니다. 즉시는 못느낄지 모르지만 회개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다음에는 하나님이 죄에대한 진노가 곧 자신의 인간에대한 진노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성숙하면서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자 할 때에 인간들이 그런 것을 못느낍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서 그것을 깨닫게됩니다. 보세요. 여러분 자신의 경험의 세계속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죄가운데 있으면서 커다랗게 고통을 받고 이 시인처럼 극도의 혼란과 고통을 경험하게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여러분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진노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거의 못받으며서 그런정도야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의 죄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확 밀려오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은 순간적으로 확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힐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것이 뭐냐 하면 죄에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과 죄인을 향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그렇게 나뉘어져서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뉘어져서 처음서부터 느껴진다고 할 것 같으면 회개할 사람이 없죠. 그렇죠. “아 저렇게 화를 내셔도 나 때문에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니까 죄만 박살내실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안든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회개할때는 그런 생각이 안들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홍과 같이 붉은 죄의 구덩이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를 말갖게 씻기시며 우리에게 다시 의의옷을 입히셔서 당신과 교제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떠났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을 대면할 수 없었던 이 서먹함과 적대적인 관계는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아 이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씻어주셨으니까 이제 다시 죄를 지어도 괜찮겠구나”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죄에 대해서 깊이 돌이킨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그 죄에대한 강력한 혐오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 마음속에 있었던 죄에대한 혐오감이 그 화해와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죄인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니 왜그렇게 이해를 못하는 표정을지어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죄인이 죄를 짓고 그 곤고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자녀가 고통당하면서 사는 것을 보니까 죄가 그를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해서 아주 혐오하는 ( ? ) 가지고 있습니다. 혐오함 강력한 미움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죄 네가 감히 나의 자녀들을 저렇게 망가뜨리다니” 가지고 있지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그 인간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안가지고 있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커녕 “오, 내 친구, 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죄와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죄에대한 혐오감이 이 용서받는 죄인의 가슴속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결국은 용서를 통해서도 죄에 대해서 당신이 그 죄를 자기의 자녀들 속에서 몰아내고 새롭게 그 죄로부터 자기의 자녀를 지키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이런식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죄에 대해서 한사람이 완전히 돌이켰다라고 말할려고 자기의 예전에 빠졌던 그 죄에대한 혐오감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이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일시적으로 신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진노하시는 그 모습이 마치 자기를 파괴하기 위해서 다가오시는 것같은 그런 공포를 느낄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방금 아주 기가막힌 비유가 생각났는데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어떤 동리가 하나있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어느날 동리에 있는 이웃사람하고 대판싸웠습니다. “이자식 저자식하면서 멱살을 잡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싸워서 원수가 되다시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싸우는데 그중에 싸우게된 한편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그 동리에 있는 외과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말이죠. 도시까지는 아주 길이 멀고 산속에 있는 작은 동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외과 의사가 가지고 있는 병원이 단 하나의 병원입니다. 모든 진료과목을 통틀어서 그런데 이 대판거리 싸운 이 사람이 밤, 새벽 사이에 급성 맹장염에 걸린것입니다. 그래 성질같아서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나랑 멱살잡고 싸운 그 나쁜자식에게는 내가 수술을 안받겠다. 그러고 싶은데 그럴러면 가다가 산을 넘다가 죽어야됩니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서 할 수없이 갔습니다. 그런데 딱 들어갔는데 급한 환자입니다. 그리고 응급실에 들어왔는데 뭐 직원들이 ”뭐요. 뭐요.“ 그러니까 간호사들이 와서 급성맹장입니다.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급성맹장인 것 같으니까 빨리 수술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수술준비를 막하는데 아직까지도 의식이 이렇게 남아있는데 거기에서 그 사람이 까운을 입고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는 말이죠. “아이고 이렇게 아프셔서 어떡합니까. 지난번 당신에게 멱살잡히고 당했는데 당한 내가 참 미안합니다.” 이렇게 하고 화해를 하고 수술을 할줄 알았는데 예전에 자기를 향한 감정이 가시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쪽에서 시퍼런 칼을 더움 속에서 번쩍이는 칼을 들고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재키더니 이렇게 딱 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사람은 순간적으로 “이것이 도대체 수술을 할려는 칼이냐 나를 죽이려는 칼이냐. 옆구리를 찌를 칼이냐. 가슴을 찌를 칼이냐. 구별이 안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지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누워있는 의사하고 대판거리 싸운그 사람과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 죄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수술하듯이 끄집어 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건강한 영적인 성장, 그리고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합당한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소명, 성화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눕혀놓고 하나님이 칼을들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렇게 하나님과 모든 화해가 이루어진 상황이라면 이렇게 누워있을 때 칼을들고 오시면 “아, 하나님 여기가 아픕니다. 여기에 죄가 들었는데 여기만 살짝 도려내 주실줄 믿습니다.” 그러는데 전혀그런 화해가 안이루어졌습니다. 그래 하나님 뵈올면목이 없고 여러분 중에서도 예수 잘 안믿는 사람이 나보고도 가끔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내가 이렇게 살다가 한번 혼나지요” 그래요. 그렇게 잘 알면서 돌이키지 누구 목사 놀리는 것입니까. “목사님 두고 보십시오. 내가 이러다 한번 혼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라고 그런 사람 돌보라고 보내주셨는데 나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래요. 그러는 상황인데 “하나님이 이러다가 나를 가만히 안내버려두시지” 그런데 어느날 칼들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에대한 엄습하는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두려움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우리를 돌이키게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하는 인격적인 감화가 돌이키게 만들지 그렇지 않으면 돌이키지 못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다가옵니다.
그 때에 느끼는 여러분들이 그 멱살잡이라고 싸운 그 사람이라고 한번 생각해보고 아직까지도 진짜 한판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싸움한 그날이라 그러면 더 좋겠군요. 싸움한 그날 실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실컨 두들겨서 여기에 피가 난것까지 보고갔는데 아니 이 친구가 자기에게 얻어맞은 자국을 보이면서 칼을 딱들고 이렇게 있는데 수술대 불빛에 비치면서 번쩍하고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세요. 그럴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시인이 말하자면 일종의 처음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탄원하기전에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된 존재의 모습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엄습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의 분으로 견책하지 마옵시고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징계라는 단어가 ”야싸르“라는 단어인데 히브리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거의 ”징계“ 경책하다” “책망하다” 이런 단어로 나왔는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들을 책망하시거나 혹은 그 나라를 책망하시거나 경책하실때에 얼마나 쓰라린 일들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단어가 아닙니다. “주의 진노로 나를 징벌하지 마옵소서” “징계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을 동반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거기에서 엄습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로 이르게되는 신앙은 그런 속에서 그 두려움을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구하면서 극복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자살에 대해서 가룟 유다의 경우 보세요. 예수님을 은 30에 판 것이 대해서 후회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뼈져린 후회였습니까? 아니면 형식적인 후회였습니까? 아주 뼈져린 후회였죠. 그러면서 뭐냐 하면 자기의 받은 돈을 던졌습니다. 그 뼈져린 후회를 했는데 그 뼈져린 후회의 경험 속에 필연적으로 따라왔을 것이 뭐냐 하면 자기의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죄 지은 자 된 상태에 대한 절망입니다.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절망 때문에 어떻게 했습니까? 목매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떨어져서 배가 터지면서 장자가 나와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앞부분만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뒷부분이 나와서 함치면 그런 스토리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봅시다. 물론,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새벽 닭 울때 눈물을 흘리는 그 베드로의 회개를 충분한 회개라고 볼수 있느냐는 여전히 의문이 납습니다. 의문이 남지만 그러나 한번 이렇게 봅시다. 베드로도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난 다음에 새벽닭울 때 그 느낀 그낌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말 절망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졌구나. 내가 죄에 졌구나. 그리고 내가 그 좋으신 주님을 배반했구나.”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보면 그사람은 돌이키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또 지난 여름 수련회때 새벽에 감깐 다루었습니다만 다시 돌아가는 요한을 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똑같이 부인하고 도망가죠. 그렇죠. 그리고나서 결국은 후에 어떠한 심경의 변하를 일으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전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유일한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어느 한순간에는 굉장히 자책하는 가운데서 괴로워하다가 돌이켜섯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것도 역시 절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항상 죄에 대해서는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절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절망적인 인식이 있을 때에 신앙은 그 위에서 그 인식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한분을 바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신앙으로 오직 그것 하나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 못한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그런 고백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자기가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라고 하는 절망적인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시면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의 실체를 보면서 절망했지만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면 견책을 받고 죄를 지었으면 징벌을 받아야지. 그런데 무대보입니다.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왜?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용서해야되느냐. 네가 나에게 나쁜짓을 했는데 왜 내가 너를 징벌할 수 없느냐? 이렇게 물으면 할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말없죠. 고백이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징벌하실수 있고 우리의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심판하실수 있으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왜 그 용서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6편의 3절을 해설하면서 탈무드가운데 ( ? )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랍비들이 이런 하나님의 진노하셨으나. 그러나 깊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을 이런식으로 묘사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느 한 임금이 있었는데 이 왕자가 말이죠. 아주 천인공로할 못된짓을 한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왕명을 내리기를 “내가 저놈을 이 바위로 쳐죽이리라.” 그런데 거기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저 바위로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가 저 바위로 저 못된 녀석을 치리라” 그런데 이 아들이 말이죠.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아버지의 그 진노하시고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돌이키며 회개하면서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바마마 잘못했사옵나이다.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리고나서 부르짖으면서 용서해달라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벌써 만조백관이 보는 가운데서 “이 바위로 저놈을 치리라” 그랬는데 어떡하느냐고요. 저놈을 안치면 “저 왕도 존재자체가 뻥이구나” “저 임금의 말을 믿지마” 이럴거란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가슴아프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돌맹이로 던져서 치고 왕의 위엄을 세우겠습니까? 아니면 “야, 내가 어떻게 내 자식을 치겠느냐. 한번만 봐요.” 그렇게 할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 그런데 그 왕이 너무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한 죄와 그리고 저렇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아들을 용서해줘야할 사죄의 필요성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느날 와서 “얘들아 이 바위를 잘개 부수어라.” 잘개 다 부숴서 하나 이렇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랍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우습게 묘사했습니다. 다 부셔서 몇일을 두고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이것이 우리는 웃고 지나가지만 그러나 이 랍비들이 얼마나 고민하면서 그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탄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서해야하는 아버지의 은혜 사이에서 고뇌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랍비들의 그 묘사는 웃기는 것이고 애들 장난이고 우리는 결국은 무엇을 보느냐 하면 그런 정도가 아니라. 유치하게 “돌맹이로 죽이이라.“ 그래놓고 그것을 다 잘게 잘라서 요만한 성량으로 만들어서 던지고 있는 유치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저희를 멸하리라.“ 죄에 대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시는 하나님은 결국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한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주 정나라하게 짓이기듯이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의 죄에대한 진노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죄인을 용납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에게 옮기시고 그 죄를 대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그 엄위로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시인보다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시인은 구체적으로 자기의 죄가 어떻게 용서받을수 있는지 잘몰랐습니다. 희미하게 메시야를 기대하고 알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이 구속의 사상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정말 희미하기 짝이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리고 주님이 진노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칼을 들고 다가오시는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목격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즉시 우리의 이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그 비상하고 놀라운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지은죄가 흉악하나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피할 바위요. 산성이 되시며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하나님 앞에 죄의 징벌을 받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할 수있으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하신 그 보혈로 공로를 통해서 이루어놓으신 그 사죄의 인신처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든 죄인들은 죄의 용서를 구하며 십자가 그늘아래 피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견딜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믿을 때 무작정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그의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했습니다. 자신은 죄를 지었지만 분내지 마시고 자기를 견책하지 마실것이며 자기는 불순종했고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지만 진노를 거두시고 자기를 징계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무작정 때를쓰며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렇게 죄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드리심으로 십자가에 구원의 놀라운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 그늘을 죄인들의 피난처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인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속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 어느 한순간에 은혜가 식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다른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택한 것이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시인을 산산이 파괴하고 시인을 어둠속으로 몰아갔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졌습니다. 자기와 같은 이름없는 사람을 주님이 기름 부으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예언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주요 훌륭한 역사적인 도구로 사용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나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며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바로 하나님과의 그 화목한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산해진미와 왕궁의 영화와 수많은 여인들과 그리고 수많은 이 세상의 쾌락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찾아오는 영혼의 곤고함을 보충해 줄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채워질수 없는 그 공허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지은 죄를 뉘우치며 죄에대한 진노를 죄인에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시인은 오늘 경험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오늘 자기가 잠자리에서 자기를 만져보니까 수척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뺨은 야위고 눈을 쑥들어가고 그리고 그의 두볼은 눈물로 얼룩졌습니다. 그의 마음의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던 그 고급의 좋은 화연은 모두 줄이 끊어졌습니다. 어두움속에 깊이 떨어지게 되었고 눈물은 그의 음식이 되었고 탄식은 그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흐르는 그의 눈물은 침상을 띄우고 요를 두루 적식정도로 그렇게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어두운 밤들을 지냈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터널을 지내야했습니다. 그의 인생중에서 언제 그런 때를 지냈습니까.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거나 혹은 대적들에게 둘러쌓여서 위협을 받을 때에도 시인이 이렇게 낙담하고 괴로운적은 없었습니다. 환난과 적신과 위험과, 칼, 그 어떤것이라도 파기할 수 없었던 그것을 죄는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죄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는 것만이 시인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절하도록 면목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 호소하면서 죄의 노를 거두시고 그리고 주의 견책을 내게서 거두시고 나를 향한 진노를 푸시고 그리고 하는 향한 하나님의 징벌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호소를 염치없는 청구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의 부르짖는 탄원으로 여기셨습니다. 자기를 이 죄에서 돌이키게 해주시고 그리고 주의 진노를 거두시고 주의 분을 거두셔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하는 이 시인의 간절한 탄원 속에서 죄와 그리고 죄인을 향해 가졌던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풀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결국은 다시 하나님께서 죄지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운데 건져내서 자기와의 화목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죄를 지은 자기의 자녀들이 용서를 구할 때 차마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것이 그 성품이 오늘 시인처럼 자주 죄가운데 빠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성화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목숨을 건 참회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6:2-3)
시편6편을 시인이 병상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2절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2절에서 시인이 병상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몸이 수척하였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쳐주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시편6편이 병상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시편6편에서 시인이 병상에 자신이 있는 것같은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반적인 질병에서 오는 그런 병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시편6편 2절에서 시인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우리의 육신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육신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세계와 육체적인 세계는 함께 육체의 그릇속에 영혼이 담겨있기 때문에 영혼이 어떠한가 하는 상태에 따라서 우리의 육체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너무나 이상한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기초로 오늘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두가지 사람이 죄가운데 있을때의 육신의 상태와 그리고 사람이 회개할때에 육신의 상태 이것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자합니다.
우선 시인도 이러한 것들을 경험했겠지만 죄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곧바로 우리의 육신적인 생활에 아주 영향을 주게됩니다. 하나님은 전혀 믿지않고 또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마음의 상태가 육체 미치는 영향이 아주 놀랍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인정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계속해서 자극을 받으면 사람이 죽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음향공학을 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특정한 소리를 가지고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리를 긁는 끽하는 소리있죠. 벌써 기분나쁘죠. 간헐적으로 규칙적으로 한 30분 동안만 긁어댄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또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아주 딱딱한 스폰지 같은 것을 유리창에 긁는소리. 한번 생각해보세요. 쇠와 쇠사 긁는소리. 벌써 안좋은 느낌이 온몸에 전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묘사만 해도 그러는데 실제로 그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에 영향이 미쳐진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제가 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에 사실 정신적으로는 목회보다는 덜 신경이 쓰여지지만 육체적으로는 좀 힘들었습니다. 강의가 아침부터 밤까지 몰려있으면 정신을 못차립니다. 그런데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몇백명씩 기다리고 있는데 팔자좋게 “아, 나 오늘 아파서 수업못한다.” 그리고 뭐 분필던지고 갈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뭐 세계적인 학자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좀 폼이 나겠지만 안되거든요. 그런데 게보린을 몇알씩 먹어도 안나아요. 그러면 방법이 있습니다. 학교 뒤에 뒷산이 있거든요. 차라리 약먹지않고 뒷산에를 올라가는 것입니다. 깔판하나 매고 교수가 윗도리 벗어놓고 그리고 성경가지고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한적한 곳에 가서 펴놓고 그리고 누워요. 그리고 심호흡을 쭉하고 한30분 편안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생각을 내쫓아요. 그리고 일어나서 성경 한두장 읽고나면 게보린 먹은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또 거기에서 말씀을 읽다가 너무 은혜를 받는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릎꿇으면 곧바로 산기도가됩니다. 그렇게 하고오면 쉼을 얻게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원수진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같은 그런 분위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육신적으로 영향을 안받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꽃이 이렇게 있는데 이 꽃을 보는 사람하고 사이가 안좋으면 이 꽃이 빨리 죽습니다. 안믿으시는 눈초리인데 진짜입니다.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화분에 두 개를 어떤 사람이 나무를 심어놓고 하나는 이쪽에 하나는 저쪽에 놓고 똑같은 나무를 심어놓고 아침마다 가서 “야 정말 예쁘다” 그러면서 자기도 자꾸 말을 반복하니까 정말 그 나무가 사랑스러워서 “야, 정말 예쁘다. 야, 어쩜 이렇게 예쁜냐. 값은 싸게 사왔지만 얼마나 예쁘냐” 그리고 저쪽에 가서는 “야, 나무가 뭐 이렇게 생겼냐. 너는 왜 이런 모양이냐.” 물을 줘도 똑같이 주는 것입니다. 여기줄 때는 살짝 주는데 저쪽에 줄때는 확끼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빨리죽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거의 의심이 안되죠. 그렇죠. 사실입니다. 그렇게 영향을 받습니다. 식물들도 그렇게 영향을 받는데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가운데 그렇게 죄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때 그의 육체가 정말 영향을 안받는다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럴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그럴수가 있느냐고요. 그럴수가 없습니다. 물론 잠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럴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자신이 돌아갈수 있는 품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싫어요. 그리고 내가 돌아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안기뻐하신다는 것이 느겨져요. 그 때에 그 이상의 스트레스가 어디있느냐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매일 마주보면서 사는 부부사이에 아주 심할 갈등이 있는 사람들 있지않습니까. 방배동에 전철만 내려도 벌써 스트레스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모님 하고도 사이가 나빠져서 트러진 그런 가족들있지 않습니까. 제일 싫은 것은 명절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부모님들 만나고 동기간들 만나야되니까.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을 명절 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그 품에서 말씀의 젖을먹고 그리고 그 품에서 사랑과 은혜를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기가 영적인 안식처이고 정신의 고향이고 우리의 육체의 쉼을 얻는 곳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영혼에 그리고 육체의 인생의 보금자리가 깨뜨려졌는데 그런데 정말 거기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깨뜨려졌는데 그래서 영혼이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었는데 그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안나타날 수 있습니다. 차츰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순간에 확 나타납니다. 제가요즘며칠 여기 동네에 있는 앞을 못보시는 교인에게 뼈마추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갔는데 한 한시간 하는데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 차이가 뭐냐 하면 집에서 식구들이 주물러 줄때는 사정을 봐주는데 그 사람은 사정을 안봐줍니다. 아프거나 말거나 확확합니다. 무지무지하게 아프게 하면서 “조금 아프죠.” 그럽니다. 그런데 이제 얘기를 하는데 “왜 이렇게 몸이 망가졌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몇 년전에 글을썼는데 너무 글이 잘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자세로 앉아서 거의 점심도 안먹으면서 8시간을 썼습니다. 그런데 글이 끝났는데 못일어 나겠어요. 그 다음부터 이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튕글어지면서 연세작용을 일으켜서 내려앉아서 내 몸이 지금 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도 많이 나오고 그런다. 그랬더니 그 양반이 나에게 잊혀질수 없는 교훈을 하나주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목사님 생각에는 그날 그렇게 잘못된 자세로 8시간을 앉았기 때문에 튕글어졌다. 이렇게 표현하셨는데 사람의 몸은 아주 탄력있게 되어있기 때문에 8시간정도 그렇게 앉아있다. 그래서 그렇게 튕글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뭐냐? 그랬더니 그분의 해석은 뭐냐 하면 수십년 동안 당신은 잘못된 자세로 생활을 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자세가 잘못된 자세를 점점 편하게하고 점점 편하게 하는 동안에 계속 잘못된 것이 누적되었다가 그 때 땜이 터진 듯이 탁 터진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무너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자마자 곧바로 병원에 실려갈 것 같으면 정말 철야기도에 사람들이 늘 넘치겠죠. 새벽기도 안나올 사람들이 누가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오늘밤에 앰브런스에 실려가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별일없는 것 처럼 살아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누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이 왔을 때에 이 시인처럼 몸쳐눕는 상황이 오게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아니 그러면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몸져 눕습니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차이는 뭐냐 하면 그것이 뚝이 터지듯이 어느계기가 나와서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것이 시인처럼 몸이 수첫하도록 드러눕는 질병이 되느냐? 아니면 그 균열이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느냐? 그런 차이일뿐입니다. 이 속에서는 골병들고 망가지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미국에서 몇해전에 통계를냈는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훨씬 오래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몇가지 원인이 뭐냐 하면 우선 미국에 술먹고 담배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인이면 음주 흡연할 확률이 뚝떨어집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요인보다도 더 큰 요인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무형의 만족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오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만족이죠. 좋은 사람을 만났다. 만족이잖습니까.) 그런종류의 만족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막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래 금요기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올때는 진짜 속에근심 밖에 걱정,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와서 찬송 부르면서 한없이 눈물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나면 새벽이 훤하게 밝아올 때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믿는 사람들은 그런 무형의 공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수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아, 물론 영적생활을 똑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똑바로 해서 장수하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살다가 죽겠지만 어쨌든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고 죄가운데 있을 때에 그 때 우리의 육체는 반드시 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상하게됩니다. 그런데 한번 잘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체를 주셨는데 그 왜 우리에게 육체를 주셨습니까.? 오늘도 왜 우리가 몸이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고가 그러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단순히 아프기 때문에 달려간다. 그러면 그 예수믿는 사람의 정답이 아닙니다. 왜그렇습니까.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듭니다. 막 이렇게 몸이 힘들고그러면 낙심이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드느냐면 그래도 좀 더 써야될터인데 기계가 벌써망가지면 안되지않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래도 해야될 일들이 남아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잘 관리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다고 할것같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가운데서 살고 죄가운데 살때에 몸이 심하게 압박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육체적인 커다란 고통들이 나중에 나타날 수 있도록 서서히 그런 나쁜 영향들이 거기에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은혜가운데 살고 죄가운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이라고 스트레스를 덜 받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받습니다.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를 받지않습니까. (예를들자면 안믿는 사람들은 누가 좋은집 사고 좋은 옷입고 다니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학교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못난이가 지금은 부자집 사모님이 되어서 뻥치면서 다닐 때. 그 때 얼마나 성질나겠습니까. 그렇죠.) 스트레스받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받으면 스트레스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도대체 우리 구역원들은 왜 이렇게 속을썩이나. 그리고 아, 나는 도대체 구역장이라고 집사라고 살아서 자기 식구들도 못돌보고 뭐하고 앉아있나. 목사라고 앉아서 오늘 주일설교, 그것도 설교라고 하고 오늘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앉아있나. 별생각이 다들지않습니까. 그것이 다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전자의 사람들은 그것을 풀어버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원수맺는 것은 풀지를 않습니다. 못풀어요. 그렇죠.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은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건강한 사람의 몸에 난 상처와 같습니다. 상처가 되기는 되었는데 금방 아무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나면 새 힘이 돋아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어제까지는 막 울음이 깃들어서 잠자리에 눈물로 배갯이를 흥건히 적시면서 그렇게 괴로움 속에서 잠이 들어서 “하나님 차라릴 오늘밤에 내 영혼을 취해주시옵소서” 그럴정도로 잠이들었는데 은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간절히 기도하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한 사랑을 그 속에서 보면서 다시 놀라운 위로를 얻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밤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오늘 아침에는 은총이 깃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말하자면 영적인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베겟이를 적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고민했던 것들이 넓은 하나님의 섭리의 바다에서 보면 잠시 떠가는 가랑잎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시하번 믿음의 경주를 달리기 위해서 구두끈을 매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순발력이 은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지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식으로해서 소생함을 받는것입니다. 조금만 몸살기운같은 것은 아주 너무 많이 만나서 반가운 친구들과함께 만나서 웃고 떠들면서 차 한잔만 마셔도 낫습니다. 두통은 그것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시인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가운데 있어본 사람입니다. 산 높은 곳에는 항상 골이깊습니다. 그래서 난 오늘 정말 애통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왜 침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까. 침체라는 것이 있습니까. 침체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계속 다닥을 기어가는 것은 그것은 침체가 아닙니다. 침체라는 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침체이지. 계속 낮은 포복으로 20년동안 한번도 일어나본적이 없는 것, 그것은 침체가 아닙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영적인 침체속에 있데요.” 그래서 “얼마나 되었느냐” 처녀때에 처음 은혜를받고 계속 침치되어있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침체가 아니라. 죽은것입니다.“ 침체라는 것은 그래도 몇주전에 은혜로왔는데 좀 떨어진 것이 그것이 침체고. 그래도 좀 최소한 몇 달전에 충만했었는데 가라앉는 것, 그런 것이 침체이고. 또 좀 양보해서 1년전에 충만했었는데 가라앉은 것이 침체지 예수믿은 이후로 올라가본적이 없고 계속 낮은포복으로 무릎으로도 못기고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교회에 다니는데. 나는 침체를 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가 잃어버렸습니다. 목사님 나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정말 내가 무엇을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속에 들어갈수 있을까요? 내 영혼은 명백한 침체에 있습니다. 나는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 것이 있느냐고요. 우리는 묘사를 그렇게 그것은 침체도 못되고 낮은포복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기어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하지만 자기들은 꾸준하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관점의 차이입니다. 꾸준하다는데 그렇죠. 꾸준하죠. 공동묘지에 죽은 사람들이 꾸준히 묻혀있습니다. 영적인 침체와 고향은 말이죠. 이것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수준높은 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그 기록들을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있습니다. 세상에 뭐 인생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 그것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그러나. 그것이 배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그 수렁과같은 한계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건져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간에 죄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런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도 이렇게 아주 고양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 속에서 산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틀림없이 우리와같이 평범한 신앙의 사람들이 다해아릴수 없는 그런 깊은 침체도 이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육신이 상해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회개와 관련지어서 육신의 상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2절의 요점이라고 저는 여겨집니다. 여기에보면 뭐라그랬느냐 하면 “나의 몸이 수척하였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두 번째로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의 뼈가 떨리오니 고치소서” 그랬는데 여기 “뼈”는 히브리 성경에 “뼈들”이라고 나오고요. 그다음에 “긍휼히 여기소서“는 ”한네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동사에서 온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하면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말이죠. 시인의 철저한 회개의 상태에서 오는 어떤 육신의 연약함이라 이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뭐냐 하면 금식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쇠약해진 그 장면은 시인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금 우리들이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실제로 금식을하게되면 이렇게 몸이 아주 이불 속에서 수척하게 느껴집니다. 한7일정도만 해도 아주 충분히 수척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이 자기의 육체를 상해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시편6편이 만약에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을 통해서 범하게된 그 죄에대한 회개였다고 할 것 같으면 실제로 이 사람이 이렇게 금식하면서 기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후에보면 아이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다윗은 자신의 영적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금식을 활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 그 예가 있지만 만약에 없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안되는 것이 금식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죄가운데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시 영혼의 회복을 간구하며 나아가는 아주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괴롭게하며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금식기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그 마음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육체의 쇠약함일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에 아주 몰두하면서 그러면서 거기에 간절히 집착하게되면 정신은 그 한가지를 향해서 강하게되고 정신이 어느 한가지에 대해서 강하게 고정될때에는 항상 육체적으로는 손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놀이에 미쳐서 밥을먹지 않습니다. 그렇죠. 어른들이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면서도 밥안먹고 잠도 안자고 그러면서 화투놀이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것입니다. 그렇게 한가지에 정신적으로 모두 쏟아붓게 될 때에 육체는 항상 이렇게 등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집안에 애들이 병아리 강아지 이런 것 가지고 오는 것을 질색합니다. 제발 저에게 강아지 갖겠느냐고 그런 제안을 하지마세요. 거절하는 것도 저는 일입니다. 벌써 몇번을 거절했는데 저는 안받습니다. 그러니까 선물로주실 생각은 하지마세요. 원하지 않습니다. 왜 원하지 않느냐 하면 동물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동물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특히 강아지말이죠. 계속 강아지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어린 아이들에게는 못할 짓입니다. 그러니까 감수성이 한참 예민할 초등학교때 말이죠. 그렇게 좋아하고 따라다니고 진짜 서울에서 형제도 없이 혼자있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보자마자 같이 뛰어다니고 끌어안고 그렇게 사이좋게 그러다가 죽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쥐약을먹고 죽습니다. 쥐잡는다고 놔둔 것, 그것을 개가 먹고 죽습니다. 그러면 하여튼 몇일동안 울고 이러느라고 이 아이가 마음이 상해서(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갈피를 잡지못합니다. 강아지 하나가 죽으면 어떤 충격이냐 하면 서울서 공부를 하고 방학때 집에를 내려갔거든요. 시골에 부모님들이 계신데. 할머니 집에 있다가 방학때 부모님 집으로 가면 거기에서 길어봐야 10일 그 때는 또 중학교 시험까지 봐야되었으니까. 길어봐야 보름내지 열흘이었습니다. 짧으면 닷새만에도 돌아와야 되었습니다. 그러면 돌아와서 한 일주일동안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 진짜 못할노릇입니다. 아이가 말이죠. 신나게 놀다가 내일쯤 떠나야된다. 그러면 벌써 방에들어가서 울기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하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 싫고 동생들하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차위에 올라가서 차에 탈때에는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다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에 돌아오면 오는 동안에 계속 울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그냥 그렇게 마치 군에 입대한 애들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냥 잠깐동안 있었는데 사실은 여기 서울이 고향이고 거기는 일년에 그저 보름이나 한달 갖다오는데 그런데 그 사람과의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할머니가 그렇게 잘해주고 그래도 하여튼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한 3일동안은 밤이면 달처다보면서 “우리 가족들도 지금 저 달을 쳐다보겠지” 그리고 여러분은 우습지만 저는 지금도 그 생각하면 눈물이납니다. 그렇게 해서 울고 밥도 잘 못먹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똑같이 아끼는 강아지가 죽었을 때 1주일이상 갑니다. 일주일이 뭐에요. 어떤때는 한달 가까이갑니다. 그렇게 괴롭고 그날은 밥도 못먹습니다. 눈물이 나고말이죠. 그런데 나는 그래도 개를 어떻게 목장의 넓은땅에다 묻어주고 여기에다 “우리 강아지 죽었다”고 표시라고 꽂아주고 싶은데 꼭 그 죽은개 사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끌여먹을려고 말이죠. 그러니까 더 속상하고 괴롭죠. 그것이 싫어서 이제는 여러분하고 만나고 가족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마음이 안맞아서 그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죽음을 통해서 나를 떠나고 하는 것도 내가 견디기가 버겁고 힘든데 내가 무슨 개하고도 작별해야합니까. 나는 그것이 싫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느낀 것이 뭐냐 하면 그 강아지가 그렇게 죽었을 때 사람이 죽은것하고 똑같습니다. 다를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이냐 동물이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관계를 맺고 정을 주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외국에 가보면 그 동네 딱 한복판에 항상 강아지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예쁘게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죽했으면 그랬어요. “여기는 개들은 죽어도 개팔자구나” 그랬습니다. 파란 잔디밭에 빨간돌 회색돌, 그다음에 하얀돌, 돌모양도 가지가지로 해서 그렇게 예쁘게 했습니다. 국립묘지도 그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못한다. 그러는데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동물에 대해서 유별난 생각에 동의는 하지 않지만 이해는합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에게 "동물인데“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관계를 안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내가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어쩔줄모릅니다. 한번 자기 유산을 강아지에게 물려준다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꽤 많은돈인데 아예 유언장까지 써놔서 변호사에게 맡겨놓았습니다. 강아지가 병원에 가면 자기도 병원에 갑니다.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강아지는 개병원에 가고 자기는 사람병원에 가고. 그런데 충분히 이해가갑니다. 내가 본문을 읽으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오웬이란 사람이 자기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뵈올수가 없어서 병에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상사병입니다. 그런 상사병이 걸려서 자신의 육신이 연약해질 정도로 질병상태에 들어갑니다. 상사병이라는 것이 그것이 정신으로만 병든 것이 아니라. 육체도 벌써 맛이간 것 아닙니까. 상사병걸리면 상사병 걸렸는데 근육이 튀어나오고 이러고 야호, 이러면서 다니는 아주 씩씩하고 당찬 그런 사람을 생각하세요. 눈은 게슴츠레하고 피죽도 못먹고 비실비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뵈올수 없는 그 하나님 때문에 상사병에 걸릴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자체가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한 나머지 그런 상사병에 걸려있거나 혹은 걸렸던 사람들이 쓴 기록들인데 이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상사병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와 악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뵙고싶어요. 그리고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살고싶어요. 그 은혜 속에서 살고싶어요. 처음 사라으이 때와같이 연애하던 때와 같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계시가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에 있어서 그분께로부터 부어지는 독점적인 사랑에 자기의 가슴이 녹아 내리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자기의 죄왁 악함으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지금은 못누리고 있지만 예전에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누렸기 때문에 아주 생생하게 그것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실요즘 말이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의 잃어버리고도 사실 사랑하던 동물이 죽은 것 만큼도 애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겁니까? 우리 안에 정말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면 우리가 정말 그를 향한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있을 때 말이지 뭐 아, 잘하고 말이지. 알랑알랑하고 이러는 것은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한없이 허전하게 느껴지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없이는 자신의 인생에도 기쁨이 없는것처럼 느껴지고 그런 것이 정말 그를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가 그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러한 갈망, 그러한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퍼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떨벌어진 상에서 그냥 꾸역꾸역 먹어서 먹고나서 배를 불룩내밀고 하품을 내밀면서 물마시고 가서 교회가서 무릎을 꿇고 가난한 마음으로.. 안되잖아요. 뭔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찾고 매달리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에관한 것들을 소홀하게 여기게마련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내 몸이 수척했으니까 살좀 붙여달라는 그런 것 아닙니다. 내 뼈가 떨리니까 빨리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달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다시 살이붙게 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없이 자기의 뼈가 다시 힘을얻는 것, 그런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왜 수척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까. 왜 자신의 뼈가 떨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까.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아쉬워서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누렸던 그 행복과 그 축복, 그리고 주님이 자기 안에 자기가 주님 안에 있던 그 연합의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너무나 의미가 없어서 지금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육체를 돌보기 못해서 이런 상태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혹은 금식으로, 혹은 그런 몸부림으로서 수척하게 되어간 것입니다.
사람이 얼굴이 빠작마르고 기운이 없어보이면 우리는 항상 만나서 “무슨 고민이 있느냐?” 이렇게 묻죠.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입고 마시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몸을 추수리면서 살아가는데도 그렇게 눈이 쑥들어갈 정도로 깊이 고민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내가 가보지 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예전에 경험해보았던 하나님과의 참 사랑과 그 연합의 축복을 잃어버려서 이제 그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어서 그것에 목말라하면서 더군다나 그것이 자기의 죄와 악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회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달라고 몸부림 칠때에 육체에 무엇인가 이런 영향들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시인속에 있는 회개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회개의 강도는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복하고자 하는 이 시인의 간절한 열망과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몸부림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우리의 몸이 수척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이 시인처럼 고민하고 있습니까. 죄에 대해서 지고 그리고 패배한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그리고 내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스렸기 때문에 잃어버리게된 하나님과의 사랑, 그리고 알고보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부음바되었던 그 많은 연합의 축복과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도록 매달리며 아버지 앞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이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정말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지식으로 가는 나라도 아니고 그리고 인간의 의로움으로 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냐? 마틴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의 성도들이 천국을 가다보면 천국문에 쭉 팻말이 걸려있데요. “아무나 오라” 그래서 그냥 아멘하고 쑥 들어갔더니 뒤를돌아보니까 들어와서 보니까 다른 팻말이 붙어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회개한자만 들어오는곳” 이렇게 써있더래요.
아무나 부르시죠. 하나님께서 아무나 부르시죠. 누구든지 하나님을 멀리떠나 죄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당신과의 관계가 깨뜨려져서 인생을 사는 참된 행복을 거의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관계의 회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친 사람들, 자기가 계속하고 있는 자기속에 계속되고 있는 악과 그리고 불순종을 버리는 아픔을 오히려 하나님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서 살아가는 아픔보다 훨씬 작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아픔을 택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이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말이죠. 신앙생활에서 이런 참회의 정신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웅주의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드리기 위한 그런 삶도 아닙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예증으로서 내가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참회는 이 시인이 깊이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큰죄라고 하는것도 상대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서 사라지고 자기멋대로 살아갈때는 엄청나게 큰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그러나 은혜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주 작은것도 그것을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마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죄입니다. 죄 자체는 상대적이 아닐지 모르지만 어느것이 큰것인가. 느끼는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상대적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있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지었으니 그렇게 회개할만하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뜻과는 거리가 먼것입니다. 이 시인은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지금 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순수함으로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지금 육신이 수척할정도로 그리고 자신의 뼈가 떨릴정도로 하나님 앞에 아파하면서 회개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말이죠. 이런 참회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자신이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은 더많이 깊이 참회해야합니다. 이 참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더참회의 정신 속에서 살고 더뉘우치는 그 회개의 정신 속에서 살면 살수록 아주 작은 죄도 점점크게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들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헌신되고 그리고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 거칩니다. 횡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처럼 살지못하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나 포용심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이냐 하면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을 잘 섬기면서 확신있게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것이 정말 정결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그가 더 풍부한 참회의 정신 속에서 그 헌신적인 삶을 이어가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살면서도 그렇게 살지못하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소유하게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 우리 속에서 참회의 정신이 싹 사라지게되면 그다음에 쌓이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는 상당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회가 없기 때문에 바리세인들이 그렇게 사는것입니다. 자기 의에대한 자부심들이 그래서 그렇게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감동을 끼칠수 있을 정도의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뉘우치는 깊은 참회의 삶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리 사람과 하나님께 감동을 주는 엄청난 섬김을 다하면서 살아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참회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만 하찮은 존재인지 알거든요.
그래서 제가 엊그제 새벽에도 제안을 하고 요번에 인터넷 신문팀도 제가 불러서 이야기를 했는데 홈페이지가 개편되었는데 거기에다 참회의 장소를 하나 만들자, 통곡의 사이트를 하나 만들어서 그리고 거기에 클릭해서 들어가서 담임목사와함께 참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뭐 이름은 거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들어와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또 그다음 사람은 참회하고 그다음 사람이 참회하고 왜냐 하면 그러한 진실한 참회의 삶이 밑바닥에 깔려있을 때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열열하게 살아도 자기는 상당한 사람이다. 제법 산 사람이다. 그런 것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왜? 사도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렇게 깊이 참회 하면서 그러면서 아버지 앞에 뉘우칠 때에 육체에 영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깊이 회개하고 가슴을 찢는것처럼 회개할 때 그것 조심해야합니다. 잘못하면 쓰러집니다. 쓰러지는 사람들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이 왜그러느냐 하면 보세요. 막 회개하죠. 땀이 흐르죠. 콧물이 나오죠. 눈물이 쏟아지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체액이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체액이 빠져나오면 피가 농도가 진해집니다. 더 끈적끈적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되요. 혈관속을 원활하게 돌아다니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격렬하게 울면서 회개하고나면 숨이차면서 뒤골이 당기는 것같은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 저는 회개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필사의 씨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어떤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애타하는 가운데 말하자면 우리 표현대로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회개하며 살이 빠지고 삐가 마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살을 깍는 것 같고 피를 말리는 것같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실제로 그런 쇠약함들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이 시인에게 중요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에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어니 있느뇨. 내가 밤낮으로
눈물 흘리니 주여
어찌합니까
정말 그런 참회입니다. 이 벌레같은 인생을 위해서 이렇게 우리를 향해 한없이 사랑을 배풀어 주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이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은혜를 시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세계에 대한 욕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정말 샘날정도로 정말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죠. 무명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짐승이나 키우면서 살다가 시골에서 죽어야했을 그 다윗을 하나님이 그 주인의 집에 새로운 임금으로 삼으시고 그리고 그 다윗으로부터 대대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하나님이 약속해주셨습니다. 가는곳마다 그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상처입고 고통받고 그리고 마음이 깨뜨려진 수많은 상심한 사람들을 그 앞에 모으게 하시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며 그의 품에 기대게 만들어주셨고 그렇게 상처받고 고통받았고 마음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윗을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 일에 있어서 정말 놀랍게 충성된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살게 해주셨는데, 그렇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런데 그는 그만 범죄했고 그리고 그가 범죄하는 그 순간에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을 버렸을 때에는 주님을 버리고 죄를 택한 것이 그에게 기쁨처럼 느껴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가지 않아서 금방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이 빠졌고 그리고 뼈는 말랐습니다. 그리고 가죽은 살에붙었고 그는 식음을 잊은 사람이 되었고, 슬피 우는 새와 같았습니다. 무엇이 이 시인에게 위로를 줄수 있을까요? 무엇으로서 이 시인의 아픔을 달랠수 있을까요? 무엇으로서 이 시인의 육신의 질병을 가져올 정도의 상심한 그의 마음과 그리고 무너진 영혼을 위로할 수있을까요. 세상에 있는 어떤 쾌락이나 세상에 있는 부,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좋은 평판, 사랑하는 친구들이나, 이웃,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시인의 이 무너진 마음과 이런것들을 채워줄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대치할 수 없는 절대적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고 난리를 쳐도 소용없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실험을 했느냐 하면 분명히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초토화 될 것 입니다. 지금 현제있는 핵무기가 지구를 25번을 파괴하고도 남는데요. 그러니까 언젠가 하여튼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완전히 초토화되고 나면 승자도 없도 패자도 없을텐데 굳이 승자를 찾는다면 자기 종족의 씨를 이 땅에 남겨둔 그 종족이 승자가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지하를 판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파서 수십만 명이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기껏해봐야. 두어달이고 많이 쌓아놓고 몇 명이서 산다고 하면 몇 년은 살 수 있을지 모르죠. 그런데 안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연구했느냐 하면 지하를 몇층으로 파놓고 그런 수십만을 수용할 수 있는 수십만 수백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예비를 실험을 해본 것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첨단 공학을 모두 동원해서 지하100미터 200미터 내려갔는데 거기에 빛이 들어올 수는 없지않습니까. 그런데 빛이 들어오면 해의 영향을 받으니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 수 백미터 내려간 속에서 첨단공학을 이용해서 조명장치 등등 다른 모든 과학적인 도구를 활용해서 그것을 식물을 기르고 동물을 기를수 있는가? 그런 실험을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나왔습니다.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 동안은 하나님의 얼굴빛에서 비취는 그 은혜말고 다른 것으로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같고 자신의 영혼이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동안에 그 때에 하나님은 이미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수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감각이 없으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갈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 피로 구속하셔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그 백성들은 그래서 한번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맛을 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행복해질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그 지하에서 식물과 동물을 길러서 인간이 자급자족 할려고 했지만 실패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비추는 그 은혜의 빛, 하나님과의 그 화목한 관계 속에서 온 그 은총과 사랑의 빛,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행복합니까? 정말 행복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지 못합니까?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못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관심을 쏟고 이것이 가장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그것, 정말 우선 순위 맞습니까? 정말 우선 순위 1번 맞습니까? 정말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우선 순위의 1번입니까? 사실 진짜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직면하면 사실 그것보다도 더 시급한 1번의 문제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주님의 사랑의 문제.
주님의 사랑이
내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 그것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대한 궁극적인 해결입니다. 왜 이렇게 인생을 사는 문제가 복잡해지느냐 하면 그 궁극적인 해결말고 다른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하니까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두운 세상을 이기면서 살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시인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시련의 길을 걸어가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내 마음에 칼을 꽂고 떠나도 거기 주님이 계시면 우리는 이길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오해를 받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고 계시다.라고 하는 확신이 있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이런 관계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수많은 대적들이 나를 에워싸도 여호와 하나님은 내 편이시오 나는 그분을 의지하리로다.“ 그런 고백이 중심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리고 그런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것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으실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 우리 인생의 문제의 근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의 결국은 본질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디인들 고통이 없겠으며, 무엇을 가지고산들 완전한 만족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우리의 완전한 만족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뭐가 없었겠습니까. 자기가 범죄했지만 아니 뭐 한나라의 왕인데 왕이면 다 자기것인데 자기 왕궁에 있는 한 여자쯤 한번 같이 잤기로서니 감히 누가 뭐라 그럴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만 이 시인은 이런 체험을 통해서 처절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이 행복, 그 행복을 누리며 살때는 몰랐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나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많은 재산, 그리고 우리의 많은 명예, 그리고 우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과 인정,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타고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그렇죠. 내가 살고 있는 편한집, 기도 끝에 응답받고 사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사랑하며 함께 살고있는 사랑하는 내 아내, 내 남편, 눈물로 기도한 끝에 하나님이 만나게 주셔서 산 사람들입니다. 내 앞에서 곰살 곰살, 나를 기쁘게 하며 뛰노는 이 어린아이들도 눈물의 기도와 항복 끝에 하나님께서 수셨다고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받은 자식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모든 직분,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감사함으로 받는 여러분들에게 주신 직분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리는 것이 옳지않은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타고 흘러들어온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여기 수없이 등이 많지만 한 배점반에서 전원이 들어와서 쫙 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많은 것들이 있는 것 같지만 한번의 불이 나가보세요. 칠흙같은 어두움이지 않습니까. 형광등이 무슨 필요가 있고 전구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카세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안돌아 가는데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왕이기도 하고 역전의 승리를거둔 늘 어디가든지 이김을 경험했던 그런 승리한 장수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고 하나님 깊이 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어진 임금이기도 하고 뭐도하고 뭐도하고 많이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일시에 빛이 나가면서 이 시인의 세계는 칠흙같은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왕관도 왕위의 명예도, 왕년에 하나님이 늘 함께 해주셨던 승리한 용사라고하는 그 모든 칭호도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위로를 줄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어디가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이 시인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까지 자신의 인생이 행복할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수척해지도록 뼈가 떨리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회개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도 가슴에 다가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의 근원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의 날이 지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그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깨뜨려 졌었는데 그랬는데 한번도 시인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내가 한때는 주님께 범죄했고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지만 침체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나는 목마르고 그 사랑으로 내가 돌아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몸부림과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탄원, 이것을 한번도 못해보고 인생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체 두려움속에 떨며 인생을 마친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이러한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육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회개를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다시 하나님을 찾는 마음, 생명을 걸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하는 결단을 우리는 이 시인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이중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는 고치소서. 긍휼히 여기소서는 말씀드린바와 같이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읽으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용서를 빌지만 용서받아야할 가치가 있는 죄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는 용서해실 의무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용서를 받아야 살수있는데 하나님이 만약에 자기를 용서해 주신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격이 없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빈다.라고 하는 뜻으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재로 이 시인이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이 죄를지고 하나님 앞에 이제 사단의 칼에 맞아서 쓰러져서 가사상태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 순간에 보면 이 사람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해보였습니다.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남의 아내를 소유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그렇게 충성스러운 우리야를 죽이고 그 죄를 은폐하고 그러기 위해서 수많은 병사들을 죽이고 하는 이런 악에 악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만 놓고보면 이 사람은 정말 아무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그 사람이 그랬습니까. 그의 전생애를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사람 만큼 산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보다도 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에 꿈이었고, 사랑이며, 기쁨이며, 그 인생의 목적이었고. 그리고 삶의 이유였습니다. 왜 원수들의 박해를 받으며 광야를 헤매고 남의 나라땅에 망명을 떠나고 미친 시늉을 하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고 하는 그 치욕스러운 삶을 이길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왕이 되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때문에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수많은 원수와 대적들에게 에워쌓여 말한마디도 못하고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에 이 다윗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전체를 꽉채웠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갔을 때 다윗은 이전에 행한 모든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는것, 주님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기름부어주셔서 왕이 된 사람이라는 것,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오직 단 하나이니 하나님 앞에 머리를 풀고 그리고 티끌을 무릎쓰고 배옷을 입고 그 재위에 엎드려서 그 재바닥에 자기의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흘리는 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쓸어버리셔야 마땅한 그 죄인의 모습, 그것이 시인의 마음에 있는 전부다 였습니다. 그 속에 있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이 치욕을 무릎쓰고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라도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나에게 다시한번 은총을 회복시켜주신다면 하나님 없이 이 긴 생애를 어둠 속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다가 죽는편이 낫겠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이 이 범죄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전과는 비교될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인생을 살았다고 나는 굳게믿습니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주홍과 같이 붉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의 죄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처럼은 죄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수십명을 살인한 사람이 있습니까? 남의집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습니까? 시인처럼 부도덕한 잘못을 한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후에 악을 더하여 그 손에 살인의 피를 묻힌 사람은 아마 없을것입니다. 여러분과는 비교될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악을 저질러서 하나님이 말씀하실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 내 마음에 합한자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 이렇게 평가를 받던 그 사람을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의 소위가 심히 악하니라.” 다윗을 향해서 그렇게 관용스러우시던 하나님도 그렇게 평가하실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도 결국은 그 어둡고 긴 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와서 다시 빛가운데로 들어가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와져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그 은혜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시를 남겼습니다. 진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대부분 이 시인이 이 범죄이후에 쓴 시들입니다. 이시도 얼마나 감동되는지 모릅니다. 6편 51편 22편 쭉읽어보세요. 그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것은 죄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회개를 한적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정말 주님을 만져보고 싶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흉악한 죄인이라고칩시다. 그 죄인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밖에는 돌아갈때가 없습니다. 시인은 보십시오. 그는 넘어졌고 살인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보였고. 그리고 그 주위에는 수많은 악한 세력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몸이 상하도록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지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거는 기대는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해주시는 죄가운데 경험하게된 모든 상처들을 치료해 주시는 온전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고싶은 것, 그리고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은혜를 구하는 것, 이외에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에게 새로운 회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 가을이 가기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이렇게 씨름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러분의 마음 가득히 눈물이 고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인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내가 어떻게 받았는데. 정말 하나님 일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들이 이렇게 당신과의 관계를 붙들고 씨름하며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싶어하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죄를범한 신자의 마음①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4)
시인이 제2절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고통을 받으며 주님 앞에 탄원할때에 어쩌면 금식기도 속에서 자기의 육체속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변화를 말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4절은 3절과함께 자신의 영혼안에서 일어난 범죄한 자의 그 상태를 묘사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서 4절을 생각해보고자합니다.
우선 첫째는“슈바 아도나”이라고 되어있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라는 그 첫 번째 구절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슈브”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실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이고 5000번 이상이나 구약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슈브” 즉 “돌이키다”라는 단어는 신약의 “메타노에오”라는 그 ”회개하다“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깊은 죄에대한 슬픈, 죄에대한 인식, 그리고 죄에대한 깊은 슬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되겠다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모두한데 어우려져서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태도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전존재적이고 전삶을 포괄하는 획일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을 감히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역이 여기에서 이렇게 ”돌아오소서“라고 번역이 되었으니까 그렇지. 다른 곳에서는 ”돌이키라“ ”회개하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이 단어의 선택이 재미있습니까. 사실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항상 불변하시고 자기의 곳에 계신데 시인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엉뚱한 길로 갔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와주십사 하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수있는바는 무엇이냐 하면 범죄한 신자가 첫 번째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첫 번째 진리는 범죄한 신자는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범죄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첫 번째 아주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절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주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이 죄를 통해서 오는 차가운 거절감,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이 멀리 떨어져있다고 느끼게 되는 이 엄청난 거리감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고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깨달을 때에는 죄의식을 느끼죠. 그래서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든 안 느끼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좀 이렇게 정신이 없이 사역을 하다보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 자동차는 1년이나 혹은 2년에 한번씩 검사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검사를 안 받으면 벌금도 크거니와 벌이 매우 큽니다. 그래 이제 취지는 안전하게 그 차를 운행하는 것이 본인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사서 몇 년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교통위반에 걸렸는데 조사를 해보니까 뭐냐 하면 이 차, 검사받지 않은 차량이다. 그래가지고 그 자리에서 면허취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면허증도 뺏기고 더 이상 운전을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분이 그런 제도가 있는 줄을 알았더라면 검사 기간을 넘겼을 때에 “나는 이제 이 차량이 수배되었을 터인데 이제 나는 범법자일터인데” 하루하루 운전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가책을 느꼈겠습니까. 그렇죠. 비유가 엉성하기는 하지만. 내가 무슨 설교준비하면서 비유까지 연구를 하겠습니까. 그 때, 그 때 떠오르는 것으로 하는데 가슴에 선명하게 안다가오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으세요. 그런 것입니다. “아, 나는 면허가 취소되었다. 나는 이것을 몰고 나가면 불법이다.” 그것을 알고 운전할 때와 전혀 모르고 “그런 제도가 있었나” 그리고 그냥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러면서 달릴 때하고 그 차이는 굉장히 클 것 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죄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크기는 굉장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법적인 사실은 차이가 없습니다.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차이가 없습니다. 어쨌든 지간에 잘못된 것입니다. 효력은 없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부산으로 집회를 내려갔는데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제가 하여튼 서울역에서 밤차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해가 지나서, 저녁기차를 타고 새마을 칸에 들어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오더니 “자리좀 비켜주세요.” 그래요. 나도 돈 내고 표 사서 왔는데 왜 나보고 자리를 비키라고 하나 그러면서 다시 좌석을 대조해보니까 딱 맞습니다. 그러더니 “아, 거기 내 자리입니다.” 그래서 거기 자리가 몇자리 있었는데 그래서 “아니 여기 내 자리인데요.” 그랬죠. 그래서 혹시 몰라서 다시 대조를했습니다. 어 이 양반표가 내표하고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차장을 불러서 따질려고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이 사람표가 어제표였습니다. 이 양반이 착각을 한것입니다. 어제타야되는데 어제표를 끊어놓고 안타고 있다가 그다음날 와서 탄것입니다. 표모양이 똑같으니까 차장이 끊어준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탓는데 내가 앉아있으니까 굉장히 기분나쁜 것입니다. “비키시오.” “나는 비킬수가 없다.”그래서 표를 보여주니까 “봐라“ 그러면서 가방부터 먼지 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저씨 이것 어제표입니다.“ 그러니까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지는 것이었습니다. 보더니 시계를자꾸 들여다보더니 그 때서야 뭐가 생각이 난모양입니다. 그러더니 이제 그다음에 저쪽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더니 그다음서부터 이제 이 사람이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아저씨 여기 내자리인데요.“ 그러면 저쪽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아저씨 여기 내자리인데요“ 그러니까 또 비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산갈 때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막힌 비유가 생각이났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차를 탔을 때 얼마나 당당했겠습니까. 그 표를 보이면서 제가 앉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나쁘고 저 사람을 쫓아내야지 그러면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가 하루 전표거든요. 기차표 뒤를 뒤집어보면 ”기일 경과 및 도중하차 전동무효“ 이렇게 나왔습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기일이 지나거나 도중에 내리거나 바꿔타면 무효다.” 거기에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그렇게 쓰여있거든요. 그러니까 무슨말이냐 하면 말이야 많지만 간단하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표는 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기는 어제 열차를 놓쳤기 때문에 오늘 여기는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 빈칸이 많아도 서울에서부터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계속 자리를 옮겨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대구에서 탈수도 있고 대구에서 탈수도 있고 용산에서 탈수도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계속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눈물이 나올정도로 불쌍했습니다.
그래 나같으면 떳떳하게 차장에게 가서 “어제 표를 샀는데 놓쳤는데 얼마요?” 그리고 돈을 내고 자리를 달라그래서 앉은터인데 이 아저씨는 그 표가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을 활용할려고 무임승차를 한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 표가 저에 의해서 “아저씨 어제표입니다.” 그리고 확인을 받고 자기는 그 표는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느낄때나, 저렇게 느낄때나 상관이 없이 그 기차는 그 사람을 거절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에 가도, 돈을 내도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그 죄를 인식하고 있든지 인식하지 않고 있던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의 차가운 거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이죠. 우리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하나님의 거룩과 그 친밀함을 느낄수 없게되지 않습니까. 죄인들은 그런데 죄인들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굉장히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내 죄에대한 깨달음 그것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후회 이런 것들이 실재적으로 내 삶에 커다란 내마음에 영향을 주지만 그러나 죄를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사실 아무런 영향도 안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말이죠.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굉장히 불행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그런데 이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은 따라서 말이죠. 우리들이 거꾸로 유추해가는 것이 굉장히 유익합니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이나지를 않고 자기 생각에는 자기 행위가 다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이무한한 거리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무한한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 꼭 죄때문은 아닐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느끼는 무한한 거리감이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 같은 것들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죄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나 환견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때는데 가서 열심히 박수치면 다시 다시 뜨거워질수 있다.“ 이런식으로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절대적인 생각들은 진지하지를 않고 그리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것 자체가 신앙의 경향성의 문제일뿐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죄를 뉘우치는 것은 사람이 좀 멜랑꼴리하고 늘 감정적이기 때문에 그렇고, 자기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이 진중하고 또 뭔가 이렇게 무게가 있고 그리고 뭔가 이렇게 신중하고 동요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잘못된 접근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 이외에는 그 어떤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무한한 거림감을 느끼게 만들거나 그 친밀함을 잃어버리게 만들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성경이 어떻게 보고있는가 하는 것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 이 문제들을 따져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죄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아주 지루할정도로 긴 세월동안을 원인도 알 수 없는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거꾸로 유추한다는 말이 무슨말이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려고 애를써도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차가운 거절감이 있으면 우선 확신하세요. 자기가 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먼저 확신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신념을 가지세요. 그다음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느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은사로 받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 앞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수시로 이렇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무슨말인지 아세요. (예를들자면 우리가 갑자기 커다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안믿는 사람이 볼 때 “야,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네가 그렇게 열심히 믿을려고 그러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느냐? 네가 예수 안믿을 때에는 잘 나가더니 예수믿고나서 되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뭐가있느냐?” 그런 의심하게하는 회의하게 하는 요소들이 이렇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확신이 워낙 강하면 설명을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그러는데 내게 왜 이러한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게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확신을 폐기하게 만들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라그래요. 사람들이 물어보는거에요. ”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그러면 왜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변명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찬송하며 나가요. 아니면 더 활기차면 “눈에는 아무증거 아니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 늘 걸으면“ 그러면 찬송을 부르면서 갑니다. 나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 떠오르는 이 많은 사실들이 사실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확신을 내게서 앗아갈수가 없다. 그렇게 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도 확신이 필요합니다. 아직 말씀의 빛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슨죄냐? 그것은 잘 몰라요. 그러나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한없이 먼 거리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이런 차가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훈련과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하나님과의 이 친밀함을 이렇게 잃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면서 거기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하나님이 안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보여주시옵소서.” 이러면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은 사람이 깨달아 지겠습니까. 아니면 “죄, 있을 리가 있나.” “여러분 돌이켜야됩니다.” 그러면 “나야 옛날에 돌이켰지” “죄, 내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듣는사람과의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비켜가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죄에 관한 강론정도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기의 의로 똘똘 뭉쳐집니다. 그러면서 삶의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당히 흉내내 가는데 내적으로는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그냥 스쳐지나가지만 말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내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것뿐만 아니라.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도 죄가 없다는 것, 그것은 거짓말이죠.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내 속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만약에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안 그렇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그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지금 그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깊은 죄에 빠져서 자신의 육신까지도 피폐해져 갈 정도로 금식으로 매달리며 하나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다윗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 그 사람의 결정적인 표지는 뭐냐 하면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니께서 친구와같은 친교를 나눈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모세는 아예 친구와 같이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하니까 하나님과의 그런 친교였죠. 구약에 나타난 탁월한 선지자들의 내면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친교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의 하나님과의 친교의 결정적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아주 풍부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교를 누리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내내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사셨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사신분 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에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이된 수 많은 사도와 그리고 집사들을 비롯한 일군들이 모두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표징입니다.
스데반같은 경우를보면 그는 사도도 아니었지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보여주었던 그 탁월한 모습이 결국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있습니까? 고난을 참는 어떤 인내, 이런 것 보다도 그 모든 사랑과 관용, 이런 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를 통해서 흘러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결정적인 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막 이상한 소리하면서 뭘 내쫓고 능력을 행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것을 이 범죄를 통해서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는 한없이 멀리 떨어진 것을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죄와 그리고 불순종의 그 결과들입니다. 그것을 확신해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거의 잃어버린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의 죄와 그리고 악함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내 안에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해결하는 길이다. 라고 하는 확신이 생겨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그것을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받기만 좋아하지 죄를 지적받기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살면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가 무엇입니까.? 확신은 하는데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내 속에 들어왔고, 내 속에 지금 어떤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 아주 반드시 하나님이 보여주셔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달라고 하는 기도는 가끔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적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보여달라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응답해주십니다. 왜냐 하면 정말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고 기도이고 주님을 향한 전존재적인 갈망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좋아서 죄를 보여달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간절히 보여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이 정말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심리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싶어하는 마음을 간절히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요즘 뭐가있느냐 하면 의사 선생님들에게는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 약간 희귀한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희귀한 병이 아니더라도 요즘 어떤 움직임들이 인터넷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병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납니다. 왜냐 하면 의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우리 교회의 어떤 자매하나는 아이를 가졌는데 의사가 유산하라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기형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글썽글썽하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믿지마라. 그리고 나는 그 의사말고 다른곳 세군데를 가서 검사하면 좋겠고. 그것도 힘들면 최소한 두사람 이상에게 더 권위있는 사람에게 정밀하게 진단하고 결과를 보고 판단을 하자 그랬더니 두군데서 진단을 했는데 누가 그렇게 진단했냐고 정상이라고 그만큼 힘든일입니다.
몸이 나파요. 아픈 것은 확신해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픈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약국에 가서 말씀해보시라고 해서 다 이야기를 했더니 “신경성인 것 같네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자기도 잘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동네의 작은 병원에 갔더니 청진기 가지고 툭툭해보더니 “별 이상이 없는데” 배를 꾹찌르면서 “아파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병원에 가면 보통 진단을 설렁설렁 받으실래요. 아니면 정밀진단을 받으실래요. 그러면 어느쪽을 택하겠습니까. 그렇죠. 자기가 아프니까 정밀하게 진단을 받고싶어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요즘에 어떤 것들이 생겨났느냐 하면 그런 것들을 잘 신뢰할 수 없으니까 병을 고치는 방법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뭐 예를 들어서 희귀병이 있다 그러면 전세계 사람들이 접속해서 그 사이트에 모여서 서로 병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나누면서 자기 스스로 공부해가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의사들이 들으면 무식한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맡겨서 치료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자기가 이 연구를 해서 그렇게 해서 환자들과 다른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스스로 치료해서 진짜 희망이 없는 불치의 병에서 이겨낸 사람들의 수기같은 것도 인터넷에 많이 올라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말이죠. 우리가 만약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한한 거리를 내었고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려고 해도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게 한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말씀을 해다는 태도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 매순간순간이 자신의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줄수 있는 엑스레이를 찍는 시간일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엑스레이에 까만 점하남 나타나도 이것이 뭐냐? 계속캐고들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다시 찍어보자. 그것도 안되면 M.R.I를 찍자. 그것도 안되면 C.T촬영을 하자. 그러면서 계속해서 정밀한 진단을 할려고 할것아닙니까. 아니면 조직검사를 해보던지말이죠. 그렇게 달라질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 이런 단절의 상태에서 회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아주 진실한 욕구를 가진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여러분들의 실재적인 삶속에 적용시켜보세요. 여러분들 중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과의 친교가 회복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경회를 하면 그렇게 펑펑울면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다는데 아무 감각이 없고,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변화를 받았다는데 나는 읽어보니까 모든 사실에 대해서 흠잡을 수 없고 동의할 수는 있고 거기에 대해서 반대도 하지 않는데 내 영혼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저런 훈련을 받고 이렇게 저렇게 기도를 해서 변화를 받았다는데 아무리 해도 나에게는 하여튼 이 은혜를 가져다 주는 방편으로서의 기능이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자신의 이러한 영적 무기력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무한한 거리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차가운 거절감, 이런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이 자신 속에 있는 죄때문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철저한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확신을 갖지 않으면 그러면 아주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맹장은 제때에 수술을하면 별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데 내버려둬서 그것이 터지면 치명적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아주 큰교회를 하시는 목사님이신데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 하나도 직장 다니면서 배가아프니까 약국에 가서 “아저씨 배가 너무 아파요” 그러니까 가스 활명수 하고 소화제하고 주었습니다. 그것을 계속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아프니까 진통제까지 먹고, 그러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것이 복통일거야” 그리고 화장실만 부지런히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저히 아파서 못살겠어요. 그리고 병원에 실려가보니까 의사가 진단해보니까 “이런 그래도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래 생각이 이정도밖에 없나. 빨리 수술해라. 시간이 별로없다.”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수술하라 그러니까 왜그러느냐 맹장이 터져버렸데요. 맹장이 터지면 내장을 싸고 있는 벽이 굉장히 굉장히 연약한데 거기에 백히면서 곪아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급하면 창자를 다 꺼내가지고 마이신 가루에다 묻여서 집어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그 목사님은 그렇게 했는데도 결국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분은 어떤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설마 이것이 맹장이랴. 복통이겠지.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잘못된 확신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릇된 확신을 갖지말고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교리를 분명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면 성경도 우리에게 증거를 대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랴.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정사나 권세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가 없다.” 절대로 끊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끊을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직 하나는 그런 끊을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치 느낄수 없게끔 만들어줄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엄이나 칼이나 그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죄는 그것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이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신에게 한번 적용시키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으면 만약에 제가 말씀드리는 이 성경적인 원인 이외의 다른 요인, 말하자면 죄 이외의 다른 요인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가지고 와보세요. 아마 그것이 뭐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성경을 다시써야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성경에 제시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그것을 탐사해 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그러면서 이 영혼의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전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게 만듭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면서 고통받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범죄로 인해서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과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러면 이제 어떤 생각이 들게 되느냐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느끼고 있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실한 신앙생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거리감, 그리고 차가운 거절감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불편하게는 생각하지만 아주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이 교리에다 그것을 딱 맞춰놓고 보면 이것은 정말 심각하다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됩니다.
사람들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친교 없이도 살아가는 비결들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리고 쾌락에 빠지고 그리고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고 그리고 신앙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그것에 굉장히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면서 거기에 몰두되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멀리 떠나가신 것 같은데서 오는 그런 거절감 거기에서 오는 우리의 이 불행하고 우울한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느냐 하면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자신으로서만 진정한 만족을 얻을수 있고, 하나님 자신으로서만 우리의 영혼은 진정으로 피어나는 꽃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무엇일까.? 나의 이 무기력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거절감, 이런 것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그것을 가지고 아주 치열하게 파들어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이 그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깨닫는 어떤 빛이 들어올 때 그 때 비로소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죄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런 혐오감이 들어올 때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할 그런 강력한 욕구를 마음속에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다 설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런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 )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좀 우스운 질문인지 모르지만 아니 자기가 돌아가면 되지 왜 하나님보고 오라 그래요. 사실 하나님이 떠나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언제가 거기 계신데 자기가 스스로 고무신 거꾸로 신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멀어져서 저 혼자 살고싶어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각기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가 돌아가야지. “오, 하나님 내가 돌아갑니다.”그래야지 왜 하나님 보고 “내게 돌아와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여기에서 두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돌이킴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시인이 무엇을 고백했느냐 하면 “당신의 인자함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물론 자신의 무가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여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것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오웨 같은 청교도는 회개를 말함에 있어도 절대 인간의 역할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과대하게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킬 힘을 주심으로서 그가 돌이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녹이셨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 회개했다라는 자랑보다는 그렇게 되면 회개 자체가 하나의 의가되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끊임없이 죄인으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돌이키도록 말하지만 그러나 돌이킨 죄인은 항상 자기가 죄에서 돌이킬수 있었던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도 회개한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항상 결국은 완악하던 내 마음을 녹이셨던분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때가되면 녹이시겠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은 진정으로 돌이킬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아와달라고 시인이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입니다. 결국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나서시는 장면도 보여주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로 찾아가는 장면도 보여주고 그 두가지를 다같이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은 전체를 종합해서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슈바” “슈브” 그 자체가 돌이키라.그런 뜻인데 돌이키십시오. 돌아오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런 뜻인데 바가붙으면 ㅏ가 뒤에붙으면 연장형이라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아주 간절한 탄원이나 혹은 기대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쓰여진 용법이 어디있느냐 하면 창세기에 보면 그 종을 세워놓고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가면서 “우리가 가서 하나님을 제사하고 돌아오리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 때에 이런 형태를 씁니다. 명령어는 아니지만 ”나슈바“ 그것도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와 함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지금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인에게는 너는 여기 있어라. 제사지내러 간다. 그리고 돌아오리라. 그 때에 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간절한 소원은 ”나슈바” 우리가 돌아오리라. 그런데 사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가서 죽여야되는데 돌아오면 혼자 돌아오는데 아슈바가 되지 어떻게 나슈바가 되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아브라함속에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간절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아이를 죽여서 제사를 지내려고 가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나와함께 돌아올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여튼 나는 간절히 원한다. 그런 강력하고 애절한 소망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용법입니다. “아“가 그래서 ”슈바” “하나님 제발“ 우리말로 번역하자만 ”하나님 제발 돌아와 주시옵소서“ 그것은 화자의 마음속에 깃들어있는 간절한 애원이 거기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간절한 애원과 소망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간절히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상태입니까. 죄 가운데 빠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우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이 시인의 어려움보다 가중되는 것입니다. 시인보다 죄가 작을지라도 그 어려움은 가중됩니다. 자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느끼고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돌아가야 해요. 그래도 이 시인은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가 왜 이렇게 사는 지도 모릅니다. 내 속에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별로 없어요. 어려움은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거의 죽음 속에서 신앙의 감격이 없는 속에서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항상 낯설고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야기하면 항상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의 핵심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친교와는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흐르는 그 자체가 친교라는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심장부에 와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것이니다. 돌아와달라고. 그러니까 이것을 통해서 이제 이 시인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철저히 무능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벌써 다윗의 시에 보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에 대한 교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이 뭐냐 하면 이런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잘못해서 지은 죄였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기원이 무엇인지 깊이 뿌리를 캐고 들어가니까 마지막에 뭐가 나왔느냐 하면 “나의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자신속에 결별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욕구 그리고 숙명적으로 자신속에 파고 들어와 있는 죄의 뿌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돌아와달라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에빠진 사람이 그 물에 허우적거리면서 도와달라고 얼마나 필사적으로 애원하겠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필사적으로 애원하면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속에 있는 깊은 죄, 우리속에 있는 깊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쌓여진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과 같이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우리의 피부색을 고칠 수가 없고, 표범이 그 반점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해도 자기 자신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늘 제가 말씀드렸지만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발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불순종과 죄의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교와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고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슈바를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돌아와 주십시오. 내가 주님을 버렸으나 나는 나의 힘으로 주님께 돌아갈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를 돌아보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은 사실 인간의 무능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능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한없이 감격하고 그런 이유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총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가 믿었지만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그 기반이 없었더라면 네가 아무리 믿어도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야할 의무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믿음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바가 무엇이 있냐 이거죠. 그런데 내가 믿을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시고 그래서 그 믿음을 통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하셨으니 믿음은 우리의 공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민 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손을 내민 공로 때문에 선물을 받았다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거저 주셨다. 거저 받았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지금 도저히 하나님 앞에 자기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을 향해 슈바를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백번 양보해서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죄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지 못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어떻게 여러분속에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수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는지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면서 탁월한 친교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므로 그 하나님이 고난중에 우리의 위로가 되었고 어둠가운데 우리의 빛이 되었으며 우리가 시련이나 환란을 당할 때에 두려움을 이길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한순간도 우리의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친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예전에 느끼던 친밀함은 사라지고 무한한 거리감과 거절감을 느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보면 이것도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런 범죄, 그리고 이런 불순종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무한히 멀어진 처지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불쌍한 것이고 정말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지만 그러나 하여튼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이런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처럼 일평생을 순결하게 살아오고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주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한 것이 없는 삶을 살았던 이 사람도 한때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친교를 잃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과 같은 높은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보지 못했던 우리들이 얼마 안되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탄식하는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격는 일입니다. 할 수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갈망하고 그리고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에게만큼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기를 하나님 앞에 힘쓰며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어떤 의미에서 신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어서 도저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이 친교를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돌아와달라고 애원하고 탄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에 주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돌아와달라고 애원하는 이 탄원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마지막 증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은 비록 범죄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참다운 친교를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전존 재적인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 돌아와 주시옵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주님이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가 주님을 떠났지만 이 시인의 표현대로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에게서 떠나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팔요한지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님과의 참다운 친교를 잃어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님과 화목하고 주님과 그 친교만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폭풍이든 흙암속이든지 어디든지 헤치고 지나갈 용기를 얻게됩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주님이 나와 친밀함을 보여주셔서 그 은혜의 빛 그리고 그 쏟아부어지는 사랑의 교제 속에서 1년을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100년을 사는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쏟아 부어주는 친교 속에서 그 은혜를 누리면서 고난을 받으며 단 하루를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이런 친교가 없는 철저한 단절의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며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일생을 사는것보다 훨씬 신자들이 선택하고 싶은 삶 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시인은 오늘 자신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도 한번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은 마치 이렇게 죄와 불순종에 빠진 인간의 상태는 올무에 걸린 들짐승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발을 콱채어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면서 그 덫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러나 나무에 매어놓은 그 쇠들이 나무를 긁고 긁고 또 긁어서 껍질이 다 벗겨지고 하얗게 될 때까지 몸부림쳤지만 몸부림 치면 칠수록 그 덫이 살을 찢으면서 그 핏줄을 끊으면서 뼈까지 맞다아서 움직일때마다 뼈가 갈리면서 소리를 내는 그래서 결국은 몸부림 치면 몸부림 칠수록 더 깊이 살이 찢어지고 그 올무가 날카롭게 파고들어와서 뼈가지 맞다아서 소리를 내는 그런 멧돼지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도와줄수 없는 전적인 무조력의 상태, 끊어질수도 없고 어떠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인자한 사람 누가와서 그 덫을 놓은 사람들을 욕하면서 그 덫을 풀어주어서 그래서 싸매어서 그래서 자유롭게 너 가서 살아라고 권해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돌아와 주시옵소서” 그런데 참 성경을 보면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찾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떠나가는 것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과 그리고 욕망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서 자신이 더 행복해질수 있다고 믿으면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고 자기 자기에 서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고 찾아나서시는 것입니다. 돌아올수 없는 그 죄인들을 찾아나서시는 것입니다.
마치 양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목자가 직접 산넘고 물건너 찾아나서서 그래서 그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기쁨가운데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찾아나서십니다. 그냥 울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돌아와 주시옵소서 나는 돌아갈수가 없는 존재이니 나를 찾아주시옵소서 내가 주 앞에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처음 하나님의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찾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인간이 신자가 범죄했을 때에 두가지 고통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먼저 보여주는데 신자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제일먼저 찾아오는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늘 말하기를 “돌아오소서 그리고 나의 영혼을 건져주시옵소서” “하라쯔”라는 단어는 구출해내는 것입니다. 아까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렇게 덫에 걸리거나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이나 혹은 동물을 건져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라쯔”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건져내달라고 말하느냐 하면 “나의 영혼을 건져내 주시옵소서” 혹은“목숨, 영혼,” 어떤식으로든 번역이 가능한데 여기에서는 영혼입니다. “나의 영혼을 건져내 주시옵소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즉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엄청난 거리감, 그다음에 두 번째는 자기의 힘으로 돌아갈수 없다는 사실, 세 번째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영혼의 고통,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고통,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것 따로, 정신의 것 따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다가 고난을 많이 당하면 우리의 육신의 고난은 우리의 마음의 고난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고통은 어느정도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유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영혼을 건져 주시옵소서“ 마치 그 영혼이 견디기 힘든 고통의 상태에 있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가지를 구해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통증을 느끼는 상태를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것, 이것이 다가아닙니다. 그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어떻게보면 한 사람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한 과정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느 한순간에 죄를 짓고 그리고 불순종이 쌓여서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의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게되면 그러면 물론 그 전에도 죄를 지으면서 고통이 있지만 여기에서 지금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회복으로 나아가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그 때에도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죄를 짓는 그 순간에 고통이 기쁨보다 훨씬 크다면 죄를 지을려고 하다가 말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엄마 지갑에서 이렇게 돈을 꺼내려고 하는데 엄마가 어떻게 맥가이버같은 머리로 백원짜리 동전을 전기에다 연결해 놓았습니다. 그럴 때 백원짜리 동전을 만지면 찌르르 하고 전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피를 말리는 것 같은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거죠. 무서운 엄마죠. 두 번째 손을댔는데 막 견디기 힘든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순교의 각오르 가지고 꺼내면 꺼낼수 있을 같아요. 줄을끊고. 그러나 그 아이가 바보입니까. 그렇게 하겠습니까. 한번 그러면 기절하지 그리고 그런 짓을 하지않죠.
그러니까 경험해보면 그렇지가 않고 뭔가를 잘못할 때에는 오히려 즐거움이 고통보다 훨씬 큰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하는거죠.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히 멀어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오히려 고통보다는 무감각이죠. 감각이 별로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그것과 두 개를 비교해보면 비로소 내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슈바”라고 외칠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돌아와 주시옵소서 내게 다 필요없습니다. 나는 돈도, 명성도, 건강도, 내게 있는 많은 친구도 내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자의 참다운 행복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없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슈바를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돌아와 주시옵소서“ 간절히 외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뭐가 시작되느냐 하면 영혼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 이것 때문에 깊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죄를 지을 때 마음이 아파요.? 회개할 때 마음이 아파요? 회개할 때 아픕니다. 죄를 지을때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너무너무 아픈것입니다.
시인이 그 고통을 이기지를 못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운수대통하게 해주시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뭐냐 하면 그 죄와 그리고 그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성령이 역할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없이는 누구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확신을 갖거나 더욱이 그 죄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또 그 결과를 자신의 삶 속에서 인지하면서 깊이 아파하고 뉘우치는 그런 것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그런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처절하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구출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으면 그러면 이제 이 죄에 대한 인식, 죄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까요. 자기가 이것이 죄다.라고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졸도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한 인식이 밀려오면서 거의 기절하는 상황까지 올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회개가 죄를 인식하고 슬퍼하고 돌이키는 것인데 그런데 그 깊이는 다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깊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회개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자기가 지은 그 죄와의 결별이 보다더 완벽해집니다.
이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슈바를 외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서 슈바를 외치면서 결국은 이 시인이 뼈져리게 경험하고 있는 그 영혼의 고통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사람의 영혼은 항상 고통이 따릅니다. 시인이 그것을 인해서 깊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하고 경험한 이 아픔은 이 시인이 하나님을 떠날 때 느꼈던 즐거움을 능가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인은 처절하도록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용서해달라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구출해 주시옵소서“ 내 영혼이 뭔가 이렇게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죄의식과 그리고 이 죄가 가져다준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느꼈던 그 충만한 생명과 교제의 기쁨대신에 죄가 가져다준 이 사망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뒤집혀질 정도로 그런 아주 격렬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를 구출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주의 자녀답게 살다라고 하는 당부는 하나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 결과가 당신의 형상을 가진 그 인간들에게 그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을 하나님이 홀로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간절히 탄원하시면서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애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참된 행복, 그리고 진정한 기쁨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명예나 이 세상에서의 어떤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그 물리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신자의 참다운 행복은 그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사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때에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도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것은 그 아들의 미끼로 우리를 종 삼으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심으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과 누렸던 가족관계로서 그 친교를 회복하시기 위하신 것이 주님의 구속이 그 목표였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일 시키시는 것이 목표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죽기 직전에 심령의 부흥을 경험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은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그런 친교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에 거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정결함을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에는 항상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누리고 있다면 무한한 감사를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 누리는 이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이 기쁨이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오래간만에 내가 얻은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그 화목과 평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그 행복과 그 친교의 축복을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애서처럼 한 그릇의 팥죽에 팔아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많은 참회하는 죄인들은 생명을 주고라도 얻고싶어했던 그런 축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그 화해와 기쁨이
새벽기도 나와서도 너무 사랑스러운 교인들은 누구냐 하면 그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친교를 느끼면서 기도하는 지체들,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부분에서 자기도 흐느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분에서 자기도 소망이 넘치며 기뻐하고 기도속에 하나님과의 친교가 배여있는 그런 지체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되게 하실려고 돌이킬줄 모르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피를 주고 살을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무엇과도 바꿀수 없다는 찬송을 우리는 많이 하지만 정말입니다. 무엇과도 바꿀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화목의 놀라운 사랑, 그 교제의 친밀한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신자의 아름다운 행복, 무엇과도 바꿀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악마가 무엇을 달라고 하더라도 다 줘도 나를 죽이고 빼앗아 가기 전에는 내 안에 이 하나님과의 화해, 주님의 얼굴앞에서 사는 이 친교의 참된 기쁨을 주지않으리라. 무엇과도 내가 바꾸지 않으리라. 그런 고백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불행히도 만약에 그러한 친교를 잃어버리고 오늘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예전에 나누었던 그 탁월한 친교, 마음을 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런 것들이 생각났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애석한 일이기는 하지만 오늘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슈바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돌아와 주시옵소서,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처럼 “주께서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서 주님을 버리고 내가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은 주님 자신으로서만 내가 만족을 얻을수 있습니다.라는 이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해야합니다. 그것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단 하나의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단 하나 그길 이외에 하나님 앞에 진정한 돌이킴을 통해서 주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그 참된 평화를 회복하는 것 이외에는 또다른 길이, 제삼의 길이, 또다른 가능성이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돌이키는 사람들을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니까 이 시인도 하나님 앞에 애원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컸습니까. 오죽했으면 이 시인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 “내가 너에게 안준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내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총과 사랑을 입었습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일은 일어났고 그리고 시인은 어느덧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친교 속에서 멀어져서 차가운 침묵이 흐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슈바를 외치며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시인의 마음속에 스쳐갔던 이 죄,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넘어졌던 이 범죄는 시인속에 일어났던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사실은 그 밑바닥속에 하나님 없이 살수없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 그 속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시인과 같은 경험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주님보다 세상이 더 좋아서, 잠시 하나님보다는 내가 사랑스러워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안목에 옳은 것을 택해서, 불순종하고 범죄했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말씀 앞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흐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다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여러분의 속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그 참된 은혜의 속으로 돌아가기전까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미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납하고 그리고 쓰러진 죄인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그 친밀한 교제속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는 것 이외에 우리의 인생의 또다른 대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혼의 깊은 고통을 면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죄를 범한 신자의 마음②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4)
지난 수요일에는 이 4절을 토대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이 구절을 가지고 세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잊어먹는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다시해도 모르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데 설교시간내내 설교를 배끼는 것은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강의실에서나 하는 것이지 예배시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테입 사다놓고 집에가서 풀어서 하세요. 그렇지만 골격, 혹은 새로 발견하게된 교리, 그리고 나의 영적생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깨달음, 이런 것들은 간략하게 메모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장부책을 대조해보면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범죄한 자게에게 찾아오는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을 설명했습니까? 그 거리를 좁히기 이한 인간의 한없는 무능, 그래서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는데 하나님 보고 돌아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적반하장이지. 그런데 그것은 결국은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돌아갈 힘이 없는 죄인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영혼을 구원하소서” 그랬을 때에 그것은 범죄한 자에게 찾아오는 영혼의 고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다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그냥 싸매서 그래서 지난 수요일날 10시10분에 마쳤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실 이 사절을 한꺼번에 해야합니다. 한꺼번에 하면 한 3시간되니까. 여러분들이 그다음주부터 수요예배 안나올까봐. 할 수없이 두토막으로 나누어서 하는 것입니다. 12시에 끝나봐요. 그러면 오겠습니까. 다시 안오지. 우리는 언제나 시간 관념을 모두 떠나서 그래서 한없이 한번 말씀에 접근할지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에 대해서 좀더 풀면서 그러면서 네 번 다섯 번째로 넘어가면서 오늘 4절을 가능하면 마무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범죄한 자에게 찾아오는 최초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범죄했을 때에는 즉시 영혼의 고통을 못느끼죠.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범죄로 말미암는 즐거움이 영혼의 고통을 잊게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매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매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범했을 때 즉시 영혼의 고통이 시작이되죠. 영혼의 고통이 시작되는데 그 고통을 느끼지 않을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범죄할 때에 즉시 찾아오는 그 성취감과 기쁨이 영혼속에 있는 깊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마취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죄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즐겨하는 말이 뭐냐 하면 “평안하다. 나는 참 평안하다.? 물론 그들이 ”내게 강같은 평화“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평안하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평화를 얻으려면 둘중에 하나를 해야지만 완전히 평화를 얻을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완전히 죄를 이기든지 아니면 죄에게 완전히 지든지. 그러면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은혜로 죄를 거의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것은 신령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항복하면 패배로 말미암는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욕구가 남아있고 그것을 성취하지 못할 때 마음에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그 때에 신자의 영혼에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순간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지은즉시 영혼에 고통이 시작되는데 그 고통을 느낄수가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이 시인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냥 간곡하게 탄원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때에 그가 그러면 죄로말미암는 그 처절한 고통은 언제 느꼈느냐.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갈때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가 굉장히 힘이든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런 고통의 과정을 통과해야합니다. 가지도 모르는 사이에 잠자고 일어났더니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된 그런 꿈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반듯이 이 과정을 통과해야합니다.
그렇게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면 죄가운데 거하시는 쉽고 벗어나는 것이 굉장히 좋은 일인데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치열한 고통을 치루어야합니다. 그런데 아직 은혜로 말미암는 참된 평강이라든지, 기쁨, 승리의 환희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것을 자기가 승리할지 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죄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가운데로 들어오기가 그렇게 힘든것입니다. 오랜세월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죄된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고통이 시작되면, 그 죄로 말미암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죄로말미암는 고통이 있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갖을 확베든지 그러면 밤새도록 잠을 못자지 않습니까. 후근후근하고 아리고 견딜수 없지않습니까. 그것은 왜그렇습니까? 균이 침투할려고 하고 온 몸이 균과 더불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세균과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고름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하면서 부딪히는 칼과 칼이 부딪히면서 열을 내기 때문에 팔목이 뜨끈뜨끈한것입니다. 비유를하자면 그런데 와전히 싸움이 끝나고나면 어떻게됩니까. 고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염증이 진행이 안되면 아프지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죄를 이길 때 까지는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제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제 완전히 죄가운데 엎드렸던 죄인의 영혼이 짓밟혔던 영혼이 하나님 앞에 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경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복을 하는데 회복할 때 찾아오는 것이 뭐냐 하면 영혼의 견딜수 없는 고통입니다.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따먹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선악과를 손을댄것까지는 잘못이 아니죠. 그런데 하여튼 벌써 그 마음은 범죄했죠. 그렇죠. 그래서 그것을 따서 배짱도 좋게 그 할머니가 한입 콱 베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지만 특별하고 신비한 과일은 아니고 그냥 과일이었다고 우리는 보거든요. 그런데 콱깨물으니까 그것이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지만 예를들면 사과비슷한 것이라면 그 시고 달콤한 맛이 온 입에 확 베면서 이 과즙이 혀바닥을 타고 입속으로 넘어갈 때 이미벌써 범죄한것이죠. 과즙을 먹었으니까 하여튼 범죄한 것이죠. 고통을 느낄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못느꼈죠. 만약에 그것을 먹는 순간에 무엇인가 견딜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어서 뒤집어 졌더라면 남편에게 그것을 주었겠습니까. 그 때까지는 사랑하는 사이었는데 그렇죠. “여보 나를 본받지마.” 그리고 혼자서 죽었겠지.
그런데 얼마나 맛이있었으면 아담에게도 그것을 주었겠으면 그 바보같은 아담 할아버지는 그것을 또 부인이 준다고 그것을 먹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성경 이외의 자료에보면 그 부분을 어떤식으로 해석했느냐 하면 아담은 끝까지 안먹기를 바랬데요. 그런데 하와가 먹었다.이거죠. 그것을 아담이 보면서 주님이 정녕 죽는다 그랬는데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신없는 세상 내가 살면서 뭐하랴 같이 먹고죽자” 그리고 먹었다고합니다. 그때 벌써 삼류소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쨌든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말하자면 죄가 가져다준 놀라운 효과입니다. 가장된 생명력, 위장된 생명력입니다. 갖다주면서 확 그 과즙이 입안에 번져가면서 쾌감을 느낀 그것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 자신이 낯설어지는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이 되어있는데도 그것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이후로부터는 죄가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도 신문에보니까 저는 5분만에 신문을 다 보니까ㅑ 자세한 내용은 다 모르겠지만 마약의 문제가 어마어마하게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애들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20만명정도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산하는데 실재로는 그것보다 훨씬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우리나라는 마약 강국입니다. 그래서 골치거리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 )시켰다고 그런데 그것이 생각해보세요. 5섯번만 맞으면 그것이 중독이 된답니다. 그런데 그 중독의 효과는 가장 약한 마약이 담배중독의 200배라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못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것을 왜 맞아요. 그것을 맞는 어떤 여자애가 그러더래요. 목사님이 ‘야, 너 그것 왜맞냐? 제발좀 하지마라.“ 그랬더니 그 여자애가 하는말이 ”목사님은 맨정신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번져가는 죄악들이 이렇게 창궐해가는 죄와 이런 문화들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것을 양식으로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속에 하나님 없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들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잊고 그리고 다시 목마르거든 다시 또죄를 범하고 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런 악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안되니까 문제입니다. 시인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그 죄를 어떻게 해결을 해야될것인가. 잠시 그 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동안에는 아마 괴롭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영혼의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 그 때에는 그것을 두가지로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봅니다. 잊어보려고도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다음에 극복해보려고도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55편같은데 보면 그 시인이 그런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행한 여러 가지 방식들이 나타나있습니다. 시편51편 같은데보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소나 양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것이다.” 엄청난 통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것도 단순히 깨달은 진리가 아니라. 왕궁에 얼마나 재산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최고의 제사를 드려서 그 제사로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율법을 통해서 배워왔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미 주어진 제사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볼려고 굉장히 많이 몸부림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죄에 죄를 더하고 악에 악을 더하면서 잊기도 하고 그래도 이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나누는 탁월한 교제의 기쁨과 친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절실하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죄했을 때 그가 즉각적으로 느낀위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령을 거두시는 것 같은 그런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의 선임자인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실 때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비참한 말로와 성령이 함께하실 때 그 영광스러운 그 군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함께 다 본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딜수 없는 두려움속에 떠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왜 일반적으로 주어진 제사나 이런 방법을 가지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볼려고 노력해보지 않았겠습니까. 노력했죠. 그런데 결국은 자신의 영혼의 고통을 덜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즐거움으로서는 더더욱 덜수 없었고 그리고 율법적인 제사의 방법같은 것으로도 전혀 자신의 이 고통을 덜어낼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죄로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 곤고한 삶을 살게되면 정직한 태도를 하나님 앞에 갖지않고 부정직한 자세를 배웁니다. 부정직한 자세를 배운다는 것이 무슨뜻이냐 하면 아주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회피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피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자기의 죄를 지적받고 그것들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희망이다라는 생각을 안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식으로든 그것을 피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노출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다루려고 애를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죄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죄로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친밀함을 잃어버렸으니까 일이나 열심히 하자” 그래서 맘에도 없는 과도한 헌신을 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방향을 확돌려서 이제좀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어두고 그리고 세상적인 것에 몰두해보는 것, 돈을버는 일에 몰두해서 돈을 열심히 번다든지 아니면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돈이 있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번 해봄으로서 어떤 성취욕을 갖는다든지 예를들면 거액을 들여서 얼굴을 다시 재개발해서 정돈을 한다든지. 그렇게 하고 무엇인가 그러한 육신적인 일들에 몰두하면서 하나님과의 그 문제를 회피해보려고 하는 심리가 죄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시인은 그렇게 할려고만 마음먹으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렇죠. “얘들아 풍악을 울려라. 매일매일 잔치를 하자.” 그랬을수도 있고 그리고 “각국에 있는 산해진미를 요리해서 바쳐라.”할 수도 있고. 그렇죠. 사냥을 다닐수도 있고. 한 나라의 왕인데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서 그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한때 하나님과의 탁월한 평화와 교제 속에서 살았던 이 시인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만족을 대치해줄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세요. 왜 이렇게 눈만뜨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나요. “얘들아 이른 아침부터 풍악을 울려라.” 그래서 막 풍악이 울리고 그 전날 밤새워서 준비한 음식들이 들어오고 대소실료들이 와서 절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껄껄거리고 궁녀들이 와서 그 앞에서 춤을 추면서 그렇게 즐거워하고 그렇게 껄껄거린다고 쳐요. 마지막에는 결국에는 자기 혼자 남을것이 아닙니까. 풍악도 끝나고 대소실료들도 돌아가고 음식을 차리는 궁녀들도 설것이 하러 가고, 그리고 자기 혼자 그 커다란 왕궁에 덩그라니 남을 것 아닙니까. 그 때 그 연회가 흥겨우면 흥겨울수록 그 후에 밀려오는 그 견딜수 없는 공허감 말이죠.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니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이 성경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범죄하고 즉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어느 한순간에 무엇으로도 도저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차가운 거절감과 그리고 그 잃어버린 친밀감을 복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지금 엎드려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돌아와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비로소 회복을 위한 영혼의 진정한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죄가운데서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신의 죄의 문제를 청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돌아올 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쾅쾅 와서 꼿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교인이 있었는데 벌써 몇 년전입니다. 요즘 신앙생활을 잘한다. 그러는데 심방을 가니까 “요즘 열린교회에 나와서 어떻습니까?” 아, 주일날 교회만 가면 갈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데 가기만 하면 막 속이 발칵 다 뒤집힌데요. 그래서 나는 교회의 누가 언짢게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누가 그렇게 뒤집어 놓느냐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그것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회심 이전에는 반드시 이런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할 때 고통없이 회개하는적 있습니까? 살살살살 웃으면서 회개한적 있습니까.? "하나님 히히히“ ”죄를 지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껄껄걸“ 그러면서 회개해본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회개는 그것이 큰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항상 우리에게 찌르는 아픔을 가져옵니다. ”그랬을까?“ ”좋으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항상 선을 베푸셨던 하나님, 신실하셨던 하나님, 아침마다 새로운 그 성실하심으로 나를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면서 견디기 힘든 영혼의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하는 것이 회개에는 반드시 영혼의 진통과 고통이 따르는데 이 고통과 두가지입니다. 율법적인 고통이 있고 복음적이 고통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고통은 율법적 회개와 관련이 있고 복음적인 고통은 복음적인 회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테판 샨옥이라고 하는 청교도가 말하기를 “율법은 신자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만 복음은 신자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였던 그 근원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 율법적 고통은 뭐냐 하면 고통이 확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렇게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없어지느냐 하면 죄에 대해서 느끼던 감미로운 맛이 달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김이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양심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그치기 때문에 그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다만 두려움에 떨면서 그 죄를 그만두게 만들거나 혹은 복음적인 회개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면에서는 유용하지만 그 자체로서만은 그를 범죄하기 이전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그것은 이 율법적이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를 포기하는 죄의식 속에서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강하게 율법과 더불어 송사해서 복음적인 기대를 갖지 못하도록 과도하게 그 양심을 향해서 양심이 송사하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고도 무슨 용서받을줄 아느냐? 너는 끝났다. 봐라.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듣잖아. 그리고 너 가서 몇번 눈물뚝뚝 흘렸다. 그래도 되는게 뭐가있냐? 하나님은 너를 잊으셨어 네가 아무리 돌아오라고 소리질러도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어. 이제 하나님은 결코 너에게 돌아오시지도 않고 너는 더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갈수가 없어. 그나마 네가 위로를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나, 죄아함께 화해를 하면서 여기에서 살면 약간의 위로라도 받는 것이 너의 최선의 선택이다.” 이런 식으로 외곡된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수도 있다는 점에서 율법적인 회개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율법적인 고통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적인 고통은 뭐냐 하면 그것을 뛰어넘어서 그다음에 뭐냐 하면 자기가 이렇게 잘못했고 하나님 앞에 멀리 떠나서 죄를 지었고 그랬는데 하나님은 참 선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나의 이 범죄는 진짜 우리 하나님에게 너무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때가 되면 그 사람속에 일어나는 이 죄로말미암는 고통이 심판과 진노로부터 오는 자기 불편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했다라고 하는데서 오는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심판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는 정도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될 것이 뭐냐 하면 두 번째 복음적인 고통은 율법적인 고통의 토대위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큰 문제는 뭐냐 하면 너무 복음적인 나머지 물론 그것은 복음적이 아닌것입니다. 너무 복음적인 나머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아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인간이 무슨죄를 짓든지간에 어린아이가 배 갑판에서 오줌한번 갈겼다고 해서 태평양이 오염되겠느냐?” 그런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염안되죠. 그렇죠. 30억이 다 서서 오줌을 누어도 오염이 안되겠죠. 태평양이 얼마나 큰데. 얼마나 컸으면 태평양아닙니까. 그렇게 큰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바보같은 것입니다. 왜 바보같으냐 하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않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변증될수 있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다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하나만 생각하면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데 내 입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크다. 내가 죄를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의 죄 정도는 문제가 안된다. 그런것도 포용못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교리를 세울 때 그 교리가 신자의 영적생활이나 삶 속에서 입증되는가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 속에서 친교를 누리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죄로 인해서 뭉개지는 것이 무엇이고 사죄의 은혜를 통해서 그것이 다시 놀랍게 복원되는 그 회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게 회복되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바보같이 얘기해서 사람들을 혼란시키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율법적인 고통이 고통을 처음에 느껴서 죄를 그만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제 자기를 움직이는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할때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기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할테니까 들어보세요. 진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애통하며 진정으로 회개할때에는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형벌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이야기냐 하면 형벌을 안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다라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형벌을 받고 안받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벌을 받더라도 차라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라고 하는 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회개와 회복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하면서 ”내 영혼을 건져주시며“하면서 자기의 그 영혼의 극도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3절에보면 ”어느때까지니이까“ 했으니까. 그 고통이 굉장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긴 시간동안 실재적인 시간이 얼마였는지는 알수없지만 이 시인의 마음 속에서는 견디기 힘들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강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이 고통이 어떤 고통이겠습니까. 복음적인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가지의 결정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죄에 대한 미움, 회개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던 죄에 대한 미움,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형벌을 받고서라도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기꺼이 원하는 마음, 그 두가지가 참된 회개자에게 있는 마음입니다.
이 시인이 그 속에서 고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율법적인 고통보다도 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은 복음적인 고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그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부른 그 471장에도 “그 사랑 감당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고통의 눈물입니다. 왜 주님은 이 쓸데없는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을까? 날마다 나를 향해서 성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 실수가 없으시고 일평생 내게 대해서 단 한번도 악을 행하시거나 언약을 저버리신적이 없는 그 하나님을 내가 왜 배반했을까? 거기에서 자각에서 오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 그 복음적인 고통이 사실 율법적인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고통은 그냥 공포를 동반한 무서움이지만 복음적인 고통은 사람의 심령을 깊이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번 보았습니다. 회개 하다가 졸도한다니까요. 그것이 너무 찌르니까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 대해서 안좋은 소식을 듣거나 하면 혼절하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율법적인 회개가 아니라. 복음적인 회개에서 일어날 때, 사람들이 혼절하게 됩니다. 한없이 진액을 짜내면서 통곡하다가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의 기력이 다해서 혼절하는 것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까무러치는 것, ”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어 자기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는데 내가 왜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렸을까? 내가 왜 하나님과의 화목을 저버렸을까?“ 그런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지금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입니다. 그것한번 적용해보세요. 여러분들에게 이런 복음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아무리 바쁘게 살아간들 뭐가 남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이 하는 그 일은 작은 일이라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찮은 사람이 하는 그 일은 아무리 그 일이 큰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되든 여러나라의 제왕이 되든, 그런 것이 하나님께는 그렇게 크고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 시인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속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정말 가슴을 찢으며 주님이 일평생 나에게 어떻게 대해주셨는지, 날마다 짐승같은 나에게 어떻게 당신의 성실하심을 보이시고 그의 은혜를 내게 베푸셔서 그 사랑을 힘입어 여기까지 걸어오게 하셨는지. 내가 그분 앞에 잘못하다니 뉘우치면서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해서 아파하는 그런 복음적인 고통이 여러분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다윗을 아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 이유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이런 시련과 범죄들을 통해서 그 3천년전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해박한 영적인 지식들을 소유한 것입니다. 벌써 이때가 10세기인데 10세기때 벌써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했던 것은 그 후에 3세기가 흐른 다음에도 선지자들이 선포했을 때 그 신학을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사람들이 선지자를 핍박하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벌써 300백년전에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 일에 있어서 주님이 받으시는 것이 진심으로 깨뜨려져서 주의 얼굴을 구하는 상한 심령이고 깨뜨려진 가난한 마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지라도 그 징벌을 회피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행복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갈망하는 그 마음이 이 시인속에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윗도 보지 못했던 이 복음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이러한 회개의 교리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심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묻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속에 이런 것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적이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사모하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과 “하나님 지금도 제게는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 심지어는 내 앞에 남은 생명, 그리고 내가 이루어놓은 인생의 업정, 사람들로부터 받은 좋은 평판,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셔서라도 내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내가 다시 보고 나를 향해서 베푸셨던 그 처음 아하바의 사랑으로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나를 위로할 수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리 많은 것들을 주셔도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의 회복을 그리워하면서 흐르는 내 눈물을 멈추게하지는 못할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탄원,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시인이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까. 그렇죠. 언약 공동체 안에서 밧세바의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자기에게 가장 충성스럽고 그리고 이방인의 씨로서 그 신앙이 얼마나 돈독했으면 이스라엘의 공동체속으로 들어왔겠습니까. 우리아가 헷사람이었습니다. 역사속에 나오는 힛타이트 족속이었습니다. 이방사람이었습니다. 그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한 지체를 살인하는 그가 지은 죄가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렇게 빌어요. 우리는 이것을 확신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다윗아 네가 그렇게 나와의 관계의 회복을 원한다면 조건이 있다. 너 목동으로 다시 돌아가면 내가 너를 회복시켜주겠다.” 그러면 다윗이 그럴까말까 하고 망설였을까요? 안망설였을까요?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요. 그 호화로운 궁궐에서 누워서 자는 것을 버리고 다시 건초더미위에 지팡이를 들고 벌러덩 드러누워서 하늘의 별을세며 그렇게 궁핍가운데 지내도 시인은 절대로 그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적인 회개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인식이 그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님과의 평화를 원하는 것은 거듭난 본성이 시키는 것입니다. 모두 원합니다. 모두 바랍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하는 말과, 갈망한다라고 하는 말은 다릅니다. 갈망하는 것은 거의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것은 다 포기하고 버릴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굉장히 중요한 통찰하나는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왜 하나님이 사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형벌을 당하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매를 몇대맞고 하나님이 다시 관계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방법이다. 그런 생각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힘든 방법을 하나님이 통과하게 하실까? 그래서 결국은 율법적인 회개에서 복음적인 회개로 그래서 결국은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습니까. 그런 절차를 밟게하실까. 이것이 굉장히 궁금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죄가운데로 들어가는 과정과 그 죄가운데서 돌이켜 회심하는 과정이 똑같습니다. 무슨뜻이냐 하면 은혜가운데 있는 신자가 죄가운데 들어갈 때 죄가 딱 떠오를 때, ‘와 저거다.’ 돌결 그래서 죄의 품에 팍 안기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항상 어떨까? 한참 쳐다보면 보암직합니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다가 한참 지나면 먹음직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멈칫멈칫하면서 그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올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죄가운데 있으면서 그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중요한 두가지 원인이 있다그랬죠. 하나는 뭐냐 하면 죄에 대한 집착과, 그 죄를 떠날때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두려움, 그 두가지가 발목을 잡고 안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자기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여기에서 서서히 서서히 발을 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는 과정과 회심하는 과정이 아주 기가막힌 유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서 범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거든요. 처음에는 목욕하는 한 여자를 보았을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휘말리면서 쭉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은 살인에까지 이르게됩니다. 그리고 이제 바닥까지 다 내려가게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상황을 개선해볼려고 몸부림 치다가 결국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시편6편입니다. 몸도 다 상하고 이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하면서 복음적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이 배신으로 갚은 것에 대한 뼈져린 아픔을 느끼게하면서 그러면서 뭐냐 하면 결국은 범죄하는 것은 사람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면서 고착되어 왔던 것들을 그런 율법적이고 복음적인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다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랑을 배신한 자신의 처사가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고통을 드렸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통해서 그 자기로하여금 죄를 짓게했던 그 사랑의 동기에 대한 전체적인 점검을 하게 하면서 그것을 인해서 아파하게 하면서 그러면서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고 그길로 다시 휘돌아서 나오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기간동안에 상당한 내적인 투쟁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은혜안에서 살때에는 회개에 있어서도 순발력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즉각적으로 가슴이 너무 아프고 그래 내가 좋으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잘못해서 주님의 마음을 너무 쓰리게 해드렸구나 하는 마음 때문에 깊이 아파하면서 즉각 그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순발력이 있는데 은혜가운데 멀어진 신자에게는 그런 순발력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 들으면서도 여러분들이 “아, 진짜 내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그렇게 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시인처럼 아프지는 않는 사람있죠. 그렇죠. 그리고 얼른 설교를 덮고 마무리 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있죠. 그렇죠. 아직멀었습니다. 그런데 더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동안에 죄에 대한 사랑은 식고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로 들어가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그런 율법적인 고통과 복음적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속에 자리잡은 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그 죄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마음속에 있는 그런 죄에 대한 사랑과 경향성들 그것들이 가져다 줄것에 대한 기대감들을 접게 만드시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소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외에는 자기에게는 소망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인간을 죄에서 다루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그 죄는 고통을 많이 가져다 주었는데 그런데 죄에 대해서 많이 씨름한 사람일수록 어떤 의미에서 죄에 대해서 많은 고통을 느낀 사람일수록 마지막 도달되는 결론은 뭐냐 하면 그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간의 죄로 덮어버릴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사도바울이 역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얼핏들을 때에 오늘날 내가 은혜가 떨어진 것은 죄를 적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고백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죄가 가지고 있는 그 파괴적인 본질적인 깊이 다루어가다보면 결국은 마지막에 회피할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이 크신 사랑, 그것을 뼈져리게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죄인은 더 고통스럽죠. 그렇죠.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하는 절규 속에서 우리는 이런 교리들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평화속에 살면서 누렸던 그 기쁨과 복락, 주님과 평화 속에서 살았더라면 하나님께서 행하셨을 축복된 일들과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손실과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 그리고 마음속에 계속되는 그 죄로말미암는 고통들을 대조하면서 그러면서 다시한번 신자의 진정한 삶의 대안이 오직 하나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해야합니다.
숨질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보다도 더큰 숙제는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전도자의 말처럼 모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로지 신자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그분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이것이 본분입니다. 시인이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과외비를 지불하면서 이것을 깊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여진 단어는 앞에 나온 “건지소서”라고 하는 단어하고는 다릅니다. “호세미”라고 되어있는데 “미”는 “나를”이고 “호세”는 “건져주십시오.”라고 하는 탄원입니다. “호세”는 “야샤”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것인데 여기에서 예수라고 하는 이름도 거기에서왔고 호세야, 여호수아, 다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구약에서 “야샤‘라고 하는 단어는 많이 쓰이는 단어이면서도 그 의미가 아주 깊은 단어입니다. 그 복잡한 과정을 제가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구약에서 이 ”야샤“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도 구원이고 그렇죠. 어떤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도 구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야샤“라고 하는 단어는 전포괄적인 하나님의 구원, 이런 의미가 큽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야샤가 있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행동이 있는 그곳에서는 단지 사람이 고통 속에서 구출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특권에 대한 긍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인에서 오는 그 행복감, 그리고 하나님이 그 구원의 행동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반응, 그것이 항상 뒤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굉장히 이 야샤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날에.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위기에 처합니다. 그렇죠. 그 속에서 영혼도 고통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원망도 생겨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심도 생겨나고 그리고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야샤로 이름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고통 속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고통에서 건져줄뿐만 아니라. 그들의 심령속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사는 우리의 선택된 백성들의 행복은 얼마나 큰것인가” 그런 놀라운 감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구출이 아니라. 아주 포괄적인 하나님의 구원. 요즘의 우리로 말하자면 어떤 전인적인 구원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보세요. 신자가 죄를 범해서 죄가운데 빠지면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간계가 깨뜨려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겨나는 변화말고도 현실적인 변화가 많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뭐 오랫동안 하나님 떠나서 살던 탕자가 아버지와의 관계만 깨졌겠습니까. 술먹고 돌아다녔으니까 위는 빵구가 났을 것이고. 그렇죠. 여자들하고 난잡하게 다녔을터니까. 무엇인가 병원에서 치료를 요하는 질병들도 있었을 것이고. 돼지 우리에서 그 비위생적인 곳에서 돼지 쥐염열매나 먹으면서 살았으니 심각한 영향실조를 비롯해서 그리고 그 인생 밑바닥에서 거러지처럼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동안 몸에 베인 그 하층인들의 생활습관 같은 것도 남아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진정한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셔야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일차적인 문제이지만 환경과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환경적으로 쉽게 유혹받을수 있는 환경속에 있다면 그를 진정으로 완벽하게 고치시기 위해서는 그 환경까지도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든지, 바꾸어 주셔야할 그런 필요가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멀리 떠나간 사람들을 하나님이 고쳐들어가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먼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접근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서 이런 사고 저런 사고 나서 쳐박혀서 뭐 사업도 어려워지고 건강도 어려워지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은 뒷전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서 아부라도 해서 우선 자기가 급한 문제부처 해결할려고 하는 그런 심사를 인간들이 얼마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항상 교회는 정직하게 그것이 돌아가는 길이고 질러가는 길은 바로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와서 철야기도 몇번하면 다시 사업도 부흥하고 집나간 자식도 돌아오고 당신 병도 기도하면 낫는다는 식으로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 시인이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죄의 결과들을 일생동안 두고 당했습니다. 당장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영혼의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이것이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이 죄의 성향들이 뻗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 마음에서 시작된 이 죄가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내 영혼을 파괴시키고 그래서 그것을 먼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을 때는 내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항상 내가 하나인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의 갈등이 시작되면 그러면 내 안에 뭐고 또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말 안듣는 내가. 그러다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것을 꽉누르면 내 안에 내가 하나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곧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은 단일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죄가 많이 일어난고 은혜가 많이 떨어지고나면 그다음에 내 안에 둘이 있는 것 같은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로마서7장에서 고백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런 투쟁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완전히 지게되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완전히 육적인 자기만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자기 속사람이 거의 죽은 것 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경향성들이 있지않습니까. 자기를 잘못된 방법으로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도 이것도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너무 학대하는 것,
예날에 제가 교회다닐 때 어떤 형제하나는 3000원짜리 밥만먹고 오면 하루종일 우울해요. 왜그러느냐 하면 “자기는 3000원짜리 밥을 먹어서 너무 괴롭데요.” 그렇게 살필요없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대 얘기했나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단 지나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없어도 이 세상이 이렇게 신나고 좋구나“ 그럴정도로 누리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방종입니다. 그리고 영적생활에 반드시 저해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모든방면에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먹는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입는 것이든지, 엇그제 신문보니까. 1200만원짜리 술이 들어왔다는데 요만한 것, 그것먹으면 창자에서 불이나요. 그런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학대하는 것,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다 자기 자신과의 불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혼에서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는 그런 것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과의 관계에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정말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의 은혜로 자기를 다스리고 자기와의 관계속에 있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관계속에 자기속에 있는 것들을 흘려보냄으로서 그런 관계들을 치료하는 피스메이커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깨뜨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 구원이 단지 영혼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정도가지고는 안되고 이렇게 깨뜨려진 것들을 모두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은혜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과의 화해를 잃어버리고 죄가운데 살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죄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많은 돌이킬수 없는 영향들이 뻗어나갑니다. 여러분들의 밖으로, 그 때 여러분 자신은 어느 순간에 죄를 지적받고 깊이 뉘우치면서 거기로부터 돌이켜서지만 여러분들이 죄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삶의 일그러진 상황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처럼 그렇게 순발력 있게 뒤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알겠습니까.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들자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때에는 굉장히 상처가 많은 가족들을 내가 섬기면서 살아야된다는 은혜의 의무감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선교사로 자원하고 그 가족들을 자기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주님을 알려야되겠다. 그런 희생적인 마음으로 산닙니다. 범죄해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져요. 자기 자신의 무게도 허덕여요. 그래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들이 모두 고갈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자기가 지고 있는 이런 짐들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막 대하고 신실함이 없어요. 그리고 사회생활도 막 때깨뜨려지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뜨려져요. 그러니까 가족들의 마음에도 예전과 같이 섬기지 못함으로 인해서 가족들에게도 신자로서 실망감을 끼쳐요. 그리고 옛날의 육적인 기질과 성품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말이죠.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고 사람들하고 늘 부딪치고 죄도 행하니까 나쁜짓도 해서 처벌받아야할 사람으로서 오르내리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는 것도 알려져서 하나님의 명예도 실추시켜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깊이 회개하면서 자기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는 그렇게 뉘우쳐서 순식간에 회심을 해서 하나님께로 돌이켜섰는데 자기가 오랫동안 죄가운데 있으면서 필연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 엄청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이 삶의 상황들, 그것이 변하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쏙빠져나가서 자기가 이제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아무도 얼굴도 모르고 자기의 좋은면만을 기억해주는 사람속으로 들어가서 가족관계나 모든 사회 관계를 단절하고 살수는 없지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소명이라고 부를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보고 다시 그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돌이켜서는것만큼 그렇게 돌이켜서면 되는데 안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여러분들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믿지않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핍박을 받기도 하고 괴롭힘을 당하기도합니다. 그런데 저녁때 은혜를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제 내가 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승복이 없고 막되게 살아서 하나님이 나에게 가시를 하나 주셨는데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고 핍박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주님만 사랑하고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눈물흘리며 돌아왔다고 해서 집에가면 남편이 말이지 눈물흘리면서 “여보 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줘” 그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도 그 남편은 그냥 그대로입니다. 왜 오랫동안 뿌려놓은 씨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또하나의 기적들을 필요로하는 영역들입니다. 자기 영혼안에 행하신 이 놀라운 기적에 버금가는 또다른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하나님이 일으켜주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탕합적인 사고를 갖지않고 나만 이렇게 돌이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그런식으로 결별이 안되지않습니까. 그러면 그 삶의 현장에서도 자기가 책임을 지면서 이렇게 시인처럼 하나님의 회복을 구해야됩니다. 전포괄적인 구원을 구해야합니다. 그런 사실을 여기에서 엿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또 하나의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놀라은 은혜의 손길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호쇠니”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환경들을 하나님이 치료해주십시오.” 그래서 시편에보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회개한 자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유의 은총과 더불어서 그것은 소극적인 면이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의 자신속에 있는 패역을 고치고 그다음에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을 치료하고 그렇게 고치시는 그런 능력있는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간증들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래서 그렇게 망가진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들을 하나님이 역사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그들을 고치는 그런 포괄적인 구원의 은혜의 역사,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 축복의 근원으로 다시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물들이 흘러가고 다시 하나님의 명예가 드높임을 받고 다시 우리들이 그들을 향해서 베푸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이런 섬김을 통해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는 그런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포괄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켜 서는 것은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것은 우리 자신만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가운데 있으면서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향을미쳤던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수많은 관계,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삶의 상황, 이런것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돌아가야할 삶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기도원에 갔더니 어떤 중년분이 기도를 많이 하고계셨습니다.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15년, 20년 전입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는 제가 젊었으니까. 굉장히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렇게 기도하니까 자기가 굉장히 좋다.”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데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는데 사업을 했는데 잘못된 방법으로 사업을 한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이 가만히 두실 리가 없죠. 그래서 이제 어려움을 당하고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나서 결국은 알거지가 되다시피해서 그 기도원으로 사실은 빚쟁이를 피해서 도망을 온것입니다. 도망을 왔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난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자기가 뉘우치고 그리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되잖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이제는 자기가 돌아가서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회개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제 내가 내려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할터인데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셔서 자신이 다시 새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10일을 금식하고 저를 만나는날 금식을 풀면서 흰죽을 떠먹는 그 광경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뜨리고 무너졌을 때에는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고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시기만 하면 자기는 금방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됐지만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고 이 세상에 더 살려두시잖아요. 그래서 자기는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뭐냐 하면 이제 정신이 들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셔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살게하신 것 정말 감사한데 내게는 남아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전포괄적인 구원이 필요합니다. 나의 삶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상황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 구원을 구하면서도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인자를 인하여” 히브리 성경에보면 “당신의 인자하심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소서” 그부분은 다음주에 할려고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것만해도 너무나 감사한데 이 삶의 상황까지 하나님 앞에 해결해 달라는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해요. 그렇게 하나님이 다시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셔서 다시 자기를 그 삶의 자리에 세워주시지 않으면 용서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삶의 이유이고 다시 이제는 그 모든 과거의 실패와 어두움을 딛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래서 그 사람들속에 이방인의 등불로서 이방인의 소금으로서 그리 하나님 앞에 살아야될 사람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 포괄적인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가 얼마나 기가막히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이야기 하는 값싼 은총은 주장하면서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해놓고도 그런 것은 다 덮어버리고 그리고 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이나 해결해 달라고 하는 그리고 해결해 주시면 다시 마음이 변신해 버리면서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 버리는 그런 야바위 같은 거짓된 회심자들과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그런 진실한 회개의 순서를 밟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라도 이러한 복음적인 도리를 깨닫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리에 세워주셔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랑 속에서 그러면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마치 많이 잘못했고 주님의 마음을 못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다시 돌이켜서 다시 세우셨을 때 그 죄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은혜를 사람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으로서 다시 세움을 받아서 주 앞에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식의 완전한 회복을 하나님이 정말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죄를 범한 신자의 마음③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4)
신자가 죄가운데 있을 때에 영혼이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혼이 고통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삶도 함께 파괴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불화하게 만들어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죄에 지배된 상태는 마음 안에 남아있던 모든 은혜를 축출하고 급기야는 그 죄의 영향력을 그 사람의 성품과 그리고 그 사람의 삶에까지 확대하여 미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의 쌓여있는 그 죄와 악으로부터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을 살아가고 그렇게 지은 죄는 더더욱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고 그리고 그것은 더더욱 그로 하여금 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각성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돌아오는 자가 경험하는 죄로말미암는 예민한 고통을 뼈져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어찌나 큰지 먹고 마실수도 없게 만들고 때로는 잠들수도 없게 만들어서 그의 몸을 수척하게끔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망가진 영혼, 그 속에서 느끼는 뼈져린 고통을 경험하고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나님과 불화한 가운데 만들어놓은 돌이키기 힘든 많은 삶의 무너짐, 그런것들도 함께 회복되지 않으면 자신의 이 회개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전인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에 그러면 이제 이 시인이 그 거룩하고 놀라운 사랑, 그리고 완전한 순결을 가지신 그 하나님과 그리고 그 바닥에서 죄를 짓고 그리고 그 죄 가운데서 정죄되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기 자신, 그 사이의 그 격차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감히 하나님 앞에 자기의 구원과 그리고 회복을 기도하고 있는지.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제목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에 우리를 책망하고 나무라시는 분이 하나님 한분이시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죄와의 싸움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한분이 우리를 책망하시고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리는 신자가 죄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 이외의 많은 대적들을 만나게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지은자를 원수처럼 여기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불화하다는면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적을 많에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첫째는 그 범죄한 신자의 마음을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의 세력의 영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결한 신자의 마음의 상태, 이미 신자의 마음의 순결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의 마음에 순결한 상태는 공백으로 비어있는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신자의 마음이 가득차있는 상태, 그것이 순결한 상태입니다. 그런 순결한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의 세력이 그 사람의 영향을 끼칠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작습니다. 물론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워낙 순결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악한 영들의 세력에 의해서 유혹을 받거나 악한 영들의 세력에 의해서 눌리거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끔 여러분들중에 어떤분들은 영적인 눌림을 경험하면서 시달리는 것들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무슨이야기냐 하면 밤에 자기만 하면 심하게 가위가 눌리는데 그것이 일상적으로 몇 년에 한번씩 있는 경험이 아니라. 수시로 그런 경험이 있다. 예전에 제가 가르치던 학생가운데 하나는 밤만되면 잠을 못자는데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잠들때쯤 되면 시커면 어떤 사람같은 것이 자기 웃목에 앉아있는 것이 보이고 또 자기가 잠이들라치면 항상 와서 목을 누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그것이 거의 매일 반복되다시피하니까. 그다음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잠을 청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것들의 가장 탁월한 치료책은 소위 예기하는 은혜자들, 기도원에서 불받은 사람이 안수기도 해주는 것이 직통이라고 생각하는데 NO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기도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그가 어떤 평정을 회복하고 영의 영향력으로부터 약간 자유로와 질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집에 쥐와 바퀴벌레들이 많지않습니까. 그런데 쥐들이 들어왔을 때 계네들을 불러놓고 야단을 쳐서 내 쫓으면 안들어오겠죠. 그런데 쥐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그 공간이 갖추고 있는한 언제든지 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통신판매에서 이만한 것 전기에 꼽아놓으면 삐비빅 하는 사람 귀에는 안들리는 초음파가 나와서 그것이 쥐들 귀에는 기차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온다고 하는데 그것을 붙인 사람들이 경험이 뭐냐 하면 한두달동안 효과가 있답니다. 갖다놓으면 다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환경이 적합하니까. 공해가 심해도 서울에 이렇게 모여사는 것처럼 한번씩 들어와서 시끄러운데 고막으로 막다가 그것이 계속 반복되니까 그다음에는 할만하니까. 그다음에는 데리고 와서 좀 참고살자.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일처음에 여기 이사왔을 때에도 거의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차가 지나 다니는 소리 때문에, 제가 예민하거든요. 그런데다가 새벽에 잠이드는데 새벽5시에 1부 새벽기도 하지 않습니까. 누구라고 말안하는데 어떤 교역자는 올라가면 어떻게 크게 찬송을 부르는지 또 깹니다. 5시에 또 깨서 기다리면 6시15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돌겠습니다. 그래도 어떻해요. 건물을 나에게 적용시킬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참자, 참자 요즘은 썩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냥 잠니다. 차가 지나가고 끽하고 붕하고 지나가도 그냥 잡니다. 왜냐 하면 저도 지났죠. 익숙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받은 사람이 해서 내 쫓아주었다. 그런데 악한 영의 세력이 와서 영향을 미치기가 아주 좋은데, 거기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결한 마음과 삶입니다. 깨끗한 신앙생활 마음에 정결한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불받지 않아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수천명이 모인 그 틈바구니에 가도 진짜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자신이 순결하게 가득차 있는 사람들은 기도원에서 불받은적 없어도 그 한가운데 가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범죄한 신자가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때문에만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누가 고통을 받느냐 하면 악한 영들의 세력이 그의 마음에 다가와서 영향을 끼칠수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이 말이죠. 양심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감화를 받았을 때에는 이 양심이 성령의 훌륭한 도구가됩니다. 양심이 없으면 죄를 어떻게 깨닫겠습니까. 양심이 없으면 어떻게 죄에 대해서 느낀 것에 대해서 아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조명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감화되지 않은 그런 육적인 양심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여주셨는데도 “너는 희망이 없다고” 내 속에 있는 또다른 내가 되어서 나를 탄액하고 나를 송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가운데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서 상담해보면 무슨 문제냐 하면 어떤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이미 용서하셨는데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용서도 않하셨는데 자기가 먼저 아주 훌륭하게 용서를 한 사람들이 훨씬 더많습니다. 그런데 또 그런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아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은 말이죠. 회사에서 무슨 업무상 일을 하다가 자동차를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실수입니다. 완전히 실수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충만한 은혜운데 살았으면 그런 것들을 다 극복했을것인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뭐냐 하면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용서하셨거든요. 실수고 그랬는데 어떻게 해요. 가슴아픈 일이지만 어쩔수 없지않습니까. 용서하셨는데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날 실수해서 자기 직원을 차에 치어서 죽이게한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여태까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의 목록 중에는 제일 밑에 있는 하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의도적인 죄가 아니라. 실수죠. 구약에서도 보면 "저놈을 죽여야지“ 그리고 몇일 동안 계획을 짜서 죽인 사람은 용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죽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돌맹이를 이렇게 들고 가재를 잡다가 밑에서 친구가 잡는데 ”여기 있어“ 그러니까 ”어디있어“ 그러면서 돌맹이를 놓았는데 떨어졌다. 소를 몰고갔는데 그 소가 콱 받아서 사람을 죽였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 도피성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쪽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 쪽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딱 들어가서 문이 닫히면 누가와도 못 잡아 갑니다. 거기에서 심사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실수로 사람을 죽였는가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실수로 죽였으면 그 도피성에서 그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벌써 그런 은총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이론이지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러면서 가셔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육적인 양심이 죄 가운데 있는 신자에게 도전해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기도할 때 ”야,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냐?“ 그런 속삭임들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양심의 이런 송사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준 율법, 그 율법이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그런데 보세요. 죄에 대한 확신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 죄에 대한 확신만 있고 그렇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와 은총 앞으로 다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역사가 그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율법이 그 사람을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고 짐승처럼 사는 상태에 비해서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낫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적들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부수적으로 다양한 것들이 많습니다. 죄 가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에 의해서도 다 영향을 받으며 도전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렇게 죄에 의해서 철저하게 공격을 받으면서 그 결과로 말미암아 육적인 양심이라든지 율법이라든지, 영들의 세력이라든지, 아니면 죄책감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의해서 강하게 눌림을 받고 영향을 받아서 점점더 자신이 그 죄와 씨름해서 이길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그 때에 그가 그 거룩하고 순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용서와 은혜를 받을수 있을 것이냐라고 하는 것은 아주 좁힐수 없는 엄청난 격차를 빚어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 높은 격차를 건너뛰도록 만들어 주는 그 연결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인자입니다. 여기에 ”인자하심을 인하여“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당신의 인자 때문에“ 혹은 ”당신의 자비 때문에“ 헷세드입니다. 헷세드의 동시어가 아가페라고 말씀드렸죠. 당신의 아가페의 사랑, 당신의 그 헷세드의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고통받는 영혼을 건져주시고 그 죄로 말미암아 망가뜨려진 자기 자신의 전인적인 삶을 구원해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데 그 죄의 경험들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죄지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시금 그들을 돌이켜서 새롭게 해주셔야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뼈 져린 자각을 경험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할께요. 이 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이 시인은 밑바닥까지 자기의 죄성을 발견하고 그리고 죄와 결별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어떤 전적인 부패와 타락을 뼈 져리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른 곳에서 고백하기를 “모친이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백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이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니까. 이 죄는 내가 어느 순간에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는 나의 순결한 몸에 묻은 검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죄를 경험하고 보니까 사실은 여태까지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내가 죄를 경험하고 죄 속에서 들어가보니까. 사실은 나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고 그리고 내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사악한 본성이 뼈속깊이 사무쳐있었고 내가 은혜 안에서 사는 동안에 순결하게 사는 동안에는 그것이 그야말로 뼈속에만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 후에는 그 뼈 속에서 그것들이 모두 우러나오고 흘러나오면서 자기를 모두 더럽혔는데 알고보니까 주님의 은혜가 자기를 놓으신 그 순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해보니까. 자신의 정체는 진짜 본질상 죄인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죄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던 그 때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갈수 없는 어떤 절망들을 느끼면서 밑바닥까지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가 내려가면서 아주 그 속에서 죄인의 본질적인 바닥에 깔려있는 성향,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지 않을 때에 다다를수 있는 그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처절하도록 뼈져리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용서를 베풀어주시고 다시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속으로 불러들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그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입에발린 고백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속으로 들어가는 경험, 하나님이 자기를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당신과의 매우 특별한 관계속으로 불러들이시는 친교의 경험이 있기전에는 항상 이처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수 없는 인간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용납하셔야할 의무도 없다라고 하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절망감 없이는 그런 경험속으로 들어간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들이 살펴봅고 있는 이 다윗의 경험은 그것은 너무나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예를들자면 누가있느냐 하면 이사야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6장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자 가운데 내가 있고 그러면서도 내가 주님을 뵈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자기를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경험이 그것아닙니까.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해서 고기가 배에 가득실을 정도로 잡힌 후에 베드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저 평범한 한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을 때에 제일먼한 고백이 뭐냐 하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뼈져리게 느낀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납해주실만한 어떠한 선한것도 자신에게는 없다라고 하는 이 뼈져린 자기의 죄인됨에 대한 아주 절실하고 아주 간절한 고백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깊이에 거의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맛보았다고 하더라도 단지 은혜의 그 경험이 정말 은혜의 밝은면들만을 경험한 것이라고 할것같으면 그 은혜의 경험들은 매우 값싼 것들입니다. 오히려 이 밝은 은혜에 대한 경험은 죄가운데서 내동댕이 쳐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인의 처절한 숙명,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얼마나 차갑게 거절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 그런 것을 하나님이 직접 거절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죄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죄인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절망감, 이런 것들에 대한 어두운 경험들이 함께 동반될 때에 그때에 그 은혜가 진정으로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은혜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여기에 보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기의 철저한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절망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의 참된 사랑도 잃어버렸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감, 그리고 자기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그 처절한 경험들, 제사도 드려보고 그랬지만 소용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들, 그리고 영적인 어떤 눌림의 현상들, 그리고 양심의 송사들, 율법의 송사들, 그리고 죄의 강력한 영향력의 지배들, 이런것들로부터 철저하게 억압을 당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를 다시 용납해주셔야할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꼈을 때에 그가 경험하는 것은 철저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절망이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도 사실이고 자기에게 아무 희망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 위해서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중에서도 또한 다시 죄가운데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향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을 용사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지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의 어떤 거룩하심에 비춰서 본다고 할것같으면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이 용납해주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인자한 성품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한 성품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인자’라고 하는 이것은 이미 이 자체가 이런 ‘인자’ 즉 ‘헷세드‘ 곧 ’인자‘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대가를 기대하면서 베푸는 그것은 이미 헷세드가 아닙니다. 이 헷세드는 일방적인 시어입니다.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는데 동기 자체는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의 어떤 의로움이나 심지어는 내가 이런 헷세드를 베풀면 저 사람이 나에게 값아줄 것이다. 아니면 이런 헷세드를 베풀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이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베푸는 것이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베푸는 사람, 이 속에 있는 이 인자한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이 사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내적인 인자의 영향력에 의해서, 자비함의 영향력에 의해서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해서 이 사람에게 어떤 헷세드를 베풀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생소하죠. 왜냐 하면 그런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베푼 경험이 별로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적있습니까.? 이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저 인간은 인간도 아닙니다. 막말로 얘기해서 갈아마셔도 시원지 않습니다. 좀 험악한 이야기지만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내게 대해서 시종일관 나를 해꽂이 하고 나를 괴로게 하고 나를 망가뜨리고, 나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 장본인입니다. 진짜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저걸 죽여버려” 그러다가도 이상하게 그 사람만 보면 너무 불쌍해지는 경험있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중에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어떤 합리적인 생각이 나로 하여금 “원수 갚을려고 하지 말고 저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복을받지“ 그런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자신속에 주신 어떤 인자하신 성품을 성령으로 자극하시니까. 그러니까 그가 자기 앞에서 자기의 도움을 받아야할 상태까지 망가지고 비참한 상태가 될 때까지 걸어온 그의 발자취는 하나도 안보이고 지금 저러고 있는 상태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그 마음,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안나고 그 사람의 비참한 상태 하나가 나의 자비한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 하면 여러분과 제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경험을 굉장히 많이 하십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자체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에 그것이 요한 사도가 갑자기 생각나서 갑자기 새로운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것이 히브리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전해내려오는 “하나님은 헷세드이시다.”라고 하는 구약의 그런 사상은 배경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냐죠.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자비하신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전에는 믿음으로서 유추할 수 있게끔 나타났는데 지금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과거의 구약은 라디오 연속극을 통해서 겨우 들려오는 것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아주 생생한 연극을 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없으면 신약에 대한 이해가 온전해질수 없습니다. 항상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헷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인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알기 쉽게 풀자면 죄는 자기가 지어놓고 아주 비참한 상태까지 내려간 다음에 이제 자기 자신은 아무 희망도 없고 자기 자신이 그 죄에서 극복하고 벗어날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향해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호소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주의 인자 때문에” ( ? ) “당신의 헷세드, 레마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입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 때문에 아니라. 왜 자기 때문이라고는 얘기를 안해요. “나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버려두세요.” 이런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자신의 헷세드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셔야됩니다“ 그것이 무슨뜻이냐 하면 자기 때문에 아니라. 자기는 죄도 자기가 지었고, 하나님과 언약도 자기가 파기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이 돌아와 달라고 호소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제는 눈을뜰 수 없는 그런 짓밟힌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하나님 나같은 사람 지금 없애버리시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내게 재산이 얼마나 많은데. 나를 이렇게 은혜를 주시면 이것중에서 조금이라도 좀 드릴까 하는 마음도 있는데’ 이러면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마땅히 자기를 구원해 주셔야할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나의 가치를 가지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만약에 가치로 따진다면 하나님의 잔치집에 차려놓은 그 아름다운 식탁에 아주 많이 상해서 냄새나는 생선회와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것들은 조금 맛이가도 먹을수 있습니다. 사과가 조금 시들었다든지, 그리고 술이 알콜성분이 좀 날아갔다든지, 아니면 찌개에 고춧가루가 조금 더 많이 들어갔다든지, 차가와야할, 음식이 약간 따뜻하다든지, 그런 것은 먹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멋있게 차려놓은 생선회인데 냄새를 맡아보니까. 구린내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분하셔서 치워버리시는 것이 당신의 식탁에 품위와 위생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존재이지만 그러나 나의 어떠한 선행, 내가 어떤 하나님 앞에 내 몫을 해내는 가치,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주님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오직 그것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주님께 있지않습니까.? 그것을 인해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합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여자 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와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를 시체실로 보내달라 그래서 시체실로 보내주니까 자기는 거기에서 자야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혼자놓고 어떻게 가느냐”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러시면 안됩니다. 가셔야됩니다.” 그러니까 거의 엄마가 실신상태에서 “이 아이 혼자 무서워서 어떻게 혼자 있느냐고” 간호원이 “죽은 사람이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요”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마음속에 자비한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아이는 죽었는데도 그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은 죽지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그 하나님을 이제껐까지 경험하고 살아오면서 어떠한 상태로 자기가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가 놓아서는 안될 마지막 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 그 속성에 호소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신앙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나는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될 때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아주 놀라운 논리로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들이 마음속에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죠. “봐, 예배시간에 나와도 하나님이 별로 은혜도 안주시잖아. 기도해도 차가운 거절감밖에는 느껴지는 것이 없잖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아무 깨닫는 것이 없잖아. 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잖아.”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안도와주셨잖아“ 이런 것들을 수없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얻을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삶을 마구잡이로 살아버리고 난 다음에 마지막 도달되는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도달되는 종착역이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 앞에 시름하고 있는 그 지점에 다시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 ? )시켜버리고 그냥 행복하게 이 세상에서 양심의 가책없이 살다가 쾍하고 죽어버릴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시인은 비록 범죄했지만 정말 기가막히게 신자로서 붙잡아야할 마지막 끈을 붙잡은 것입니다. 비유를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산에서 혼자서 등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들어서 날이 컴컴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발을 헛디뎠는데 갑자기 쭉 굴러서 떨어졌는데 떨어지고 나서 보니까 옆에가 경사가졌는데 여기는 벼랑인데 얼음이에요. 얼마나 잘 미끄러지겠습니까. 자자자 돌면서 미끄러지면서 으-아 그러면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옆에는 나무들도 있고 하는데 몇번 잡아볼려도 하는데 다 놓치고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얼음이 팍하고 깨지면서 하체가 벼랑아래로 떨어져서 쫙 미끄러져 내려가는데 마지막으로 딱 하나를 붙잡았는데 나무뿌리를 하나 붙든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것을 붙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붙든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왜 이렇게 구약성경을 펴기만 하면 이 하나님의 인자, 하여튼 자비라는 말을 빼놓고는 구약성경을 페이지를 넘길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송, 인자하심에 대한 갈망,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호소, 이런 것들이 그렇게 계속 구약성경 속에서 가득히 나오는 이유는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그것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살아갈수 있는 마지막 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내 신앙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그렇게 고백을 안해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는 그 확신이 자비에 대한 믿음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자기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서 주의 징계도 받았고 견책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혼이 터지는 것 같은 고통도 경험했고, 망가지는 자신의 육신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가슴이 황폐하게 되는 것도 보았고 주님의 이름만 높이며 어린아이처럼 뛰놀던 자신의 육체가 더러운 정욕에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마지막 도달한 결론이 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영적인 성숙을 보고 그리고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면에서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커다란 원인이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성장이 없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큰 영향력 가운데 하나는 뭐냐 하면 돌이킬수 없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그 자책함과 후회 속에서 절망하는 것,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이상의 회복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발목에 족쇠를채우고 기다란 쇠사슬을 막뚝에 걸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교회를 못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밥을먹고 잠을 못자겠습니까. 우리가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구역장을 못하겠습니까. 아니면 교사를 못하겠습니까. 아니면 청년부 임원을 못하겠습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일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갈려고 하면 어김없이 자기의 이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죄가 자기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올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피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남겨두고는 우리들이 어떠한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그 회복의 깊은 은혜속으로 들어갈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개가 개줄을 묶어놓았을 때 아프지 않게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냥 뭐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일어났다. 앉았다만 하고 밥주면 먹고 안주면 가많이 있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결별시켜버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생이 어떠한 위기속에 처해있어도 두가지만을 가슴에 새기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사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그의 행사는 완전
그의 길은 형통
그래서 하나님을 이 반석에다 많이 비유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신실함입니다. 우리 이사올 때 집꼭대기에 돌맹이 이만한 것 열몇개씩 있었지 않습니까. 청년들이 밤새도록 애써서 아 옮겨서 자리잡아 놓았습니다. 1센치도 이동한 돌맹이 없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누가 그것을 옮길 엄두도 안나고 몇 개 놓여있는 위치가 마음에 안들기는 했지만 한번도 그것을 제가 힘들여서 허리다칠 각오하고 옮겨본적 없습니다. 더군다나 깊이 뿌리박혀있는 이 반석을 누가 옮길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그 반석에 비교하는 것입니다.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이신다는 사실입니다. 두가지를 명심하면 어떤 속에서도 나락에 떨어지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겠죠. 그런데 얘기하는 것 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되는 노릇도 없는데”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불만족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가 매우 미숙하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내 방에는 아랫 서랍에 항상 막대기 사탕이 다섯 개쯤 있습니다. 누구든지 작은 아이가 내방에 들어오면 또 어떤 녀석은 문을 열고 계속 들어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들어오느냐 그러면 나 김남준 목사님에게 인사하고 가야됩니다. 그러면서 들어오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아이들은 이제 그 막대기 사탕을 꺼내서줍니다. 그러면 영원한 팬입니다. 그것도 불량식품말고 빠리바게트에 가서 사다가 200원짜리를 사다가 넣어 놓았습니다. 하나씩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제 예를들자면 목사님이 그것을 먹어라고 주었는데 엄마가 보더니 “안되“ 그러면서 빼앗았습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그 아이가 이가 너무 약해서 충치가 심해요. 그래서 빼앗았습니다. 그 아이는 그 엄마에게서 어떠한 선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거 날이면 날마다 주는 것도 아니고 한번 껍질 까서 맛을 볼려고 하는데 탁채면서 ”안되“ 심지어 아빠가 주라고 해도 ”안되“ 그러면서 쓰레기통에 넣어버릴 때 그 아이가 엄마에 대해서 어디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엄마의 존재자체가 고통이지, 그렇죠. 그리고 먼훗날 이가 썩어서 눈물을 펑펑흘리면서 치과에서 몇번나오고 나면 그 때 비로소 그 심오한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선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때 엄마가 확 낙아채면서 뺏은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 아마 이가 하나도 안남아 났을 것이다.“ 이것이 성숙과 비성숙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해지고 성숙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성숙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선하시다라고 하는 그 확신의 깊이 깊어지는 것과 영적성숙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한번에 폭발해서 뒤집어지고 펑펑울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성숙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성숙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숙을 입증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성숙은 뭐냐 하면 그런 극적인 경험을 통해서 단시간내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통해서 영적성장을 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이해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고 하는 성숙의 정도만큼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제시한 그 반론에 대해서는 그런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선하심을 느낄수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영적인 미숙과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불완전함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많이 성숙해지고나면 하나님 앞에 불만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인을 보세요. 자기가 죄를짓고 잘못하니까 하나님이 견책하고 그를 징계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견책과 징계, 그것이 그로 하여금 다시 생명되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고통 속에서 자기몸이 수척해지도록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매달리며 다시 그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시인이 잘못해서 범죄해서 죄를 많이 짓고 엉망이 되었는데 영혼의 고통도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책망하셔서 어려운 일도 하나도 안일어나고 그야말로 악인의 승승장구함이 있고 마음도 살찌고 기름져서 어떠한 고통도 못느낀다고 할것같으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할 이유가 있느냐고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데서 오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징계도, 하나님의 견책도, 몸이 수척하도록 금식하며 하나님 매달리는 모든 것들도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그를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수 있습니다.
굳이 시인의 경험을 안들더라도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보더라도 사실 기쁜일이 있었을 때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법은 별로없습니다. 그렇죠. 제가 최근에 복권에 하나 당첨되었습니다. “아, 저 목사님이 드디어 이제 타락했구나. 복권을 사기 시작했구나. 교회짓는다. 그러더니” 그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 신용카드로 구입을 했는데 찍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축하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 상금 1천만원 이렇게 쓰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진짜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운 교회 건축의 사정을 보시고 복을주셨구나.“ 그리고 이런 당첨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총장으로 입금됩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만자가 없어요. 천원이었습니다. 예를들자면 10억쯤 당첨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좀 그래도 쓸데가 있지않습니까. 너무 기뻐 그런데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듣는 순간에 갑자기 인생이 무상하게 느껴지고 나는 아무 희망도 없고 기쁜일도 없고 이제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이 들겠느냐고요. 안들지않습니까. 대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낮추시는 일이 있고 가난하게 하시는 일이 있고나서 그 죄인이 자기의 죄를 성찰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런 마음이 가난해지기에는 대게 기쁘지 않은일, 때로는 너무 슬픈일,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 때로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일, 또 너무 가벼운 일을 만나도 마음이 잘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집에 갔는데 “여보 밥좀줘” 그랬는데 “아이고 어떡하지 점심밥을 애들이 다 먹었는데” 갑자기 인생을 살기싫고 말이죠. “역시 아무도 믿을수 없어.” 그리고 교회당에 내려와서 펑펑울고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 그래 가서 사먹고 오지” 그리고 나가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자기의 힘으로 쉽게 극복하기 어려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의 사람들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낮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리보니까 결국은 처음 하나님이 “너 왜 이렇게 했니?” 하면서 하나님이 교통을 끊으시고 더 이상 응답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징계하시고 삶속에 어려운 일들이 닥치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맨처음 맞닥뜨리면서 앞으로 향해서 바라볼 때에는 그 하나하나가 견디기 힘든 시련이요. 고통, 그리고 재난, 하나님의 징계, 피비린내 나는 견책, 이런 것들은 느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제 나의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없이 살수없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그렇게 뉘우치고 자기의 죄인됨을 철저히 고백하면서 주님이 배풀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구하며 믿음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러한 자세,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유일한 희망은 바로 “아무 가치없는 인간을 향해서 베풀어 부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난 다음에 뒤를 이렇게 돌아볼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어떤분들은 죄가운데 있으면서 막 뼈저리게 죄의식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버림 받았다. 그런 생각,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제 찬송가를 펼치면 항상 거기가 펴집니다. 왜냐 하면 그 옆에장이 하도많이 울어서 눈물에 쩔어서 울퉁불퉁 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그렇게 놓고보면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이제 희망이 없다. 나는 버림받았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들어주시는 것도 사실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당신의 인자를 인하여 나를 구원해 주셔야합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소망을 걸고 그분앞에 매달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신앙,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소망, 그것을 통해서 이 시인이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소생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얼마나 곤고해졌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이 세상은 말이죠. 훌륭한 사람도 없고 희망이 없는 죄인도 없습니다. 누가 주의 일을 훌륭하게 감당하면서 잘산다. 라는 소식을 들으면 옛날에는 그 사람이 너무 위대해보였습니다. 만나고 싶기도 하고 뭔가 도움을 받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그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도 결점이 많고 그리고 더러운 사람이지만 저 사람에게 베푸신 그 은혜가 나에게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한 주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다 박살이 났습니다. 사람 사람이 집을 잃고 거리를헤매고 이방인 군대들의 말발굽아래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된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이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 즉 주의 신실하심이 크도소이다.” 그리고 그 심판 속에서 그 심판이 가져다 주는 재앙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면서 오늘 우리들이 당하고 이 뼈져린 심판과 국가적인 이 엄청난 재앙과 수많은 선택된 백성들의 죽음, 주의 성소가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히는 이 유린된 이 심판을 통해서 결국은 우리가 주님이 자비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뼈져리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고백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마치 어두운 구름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믿음처럼, 그런 신앙을 가지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 그의 거룩과 그의 신실하심, 그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면서 사는 것 말고 죄가운데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제3의 방법이 있으면 한번 찾아보세요. 뭐가 있습니까.? 아무 방법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향해서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버리실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시인인 다윗이 초년보다도 말년이 너무 멋있습니다. 말년에 신앙을 보면 굉장히 많이 흩어져서 나오지만 그중에 한 신앙이 뭐냐 하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조용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도망을 가니까. 버선발로 재를 무릎쓰고 도망갈 때 왕의 그 비참함이 죽어버렸을면 좋았을 것입니다. “법괴를 가지고 갑시다.” 그것이 왕통의 정통성에 대한 싸인이었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마치 우리로 말하면 옥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갑시다. 그러니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과 놔두고 가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놀라우냐면 그것을 놔두고 다윗이 도망가면 원수들이 와서 그것을 차지하면 하나님이 사울을 싫어하셔서 다윗을 갈아버리신 것처럼 다윗을 갈아버리셔서 새군주가 여기 있게 되었다. 그러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가면 계속해서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이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를 대적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오명을 씻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두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그분을 뵈오리라“ 그래서 무엇을 배웠느냐 하면 자신의 인생전체를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맡긴 것입니다. 젊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앙의 깊이입니다. 도망갈 때 막 흙을뿌리고 돌맹이를 던지면서 ”네가 사울의 집안을 말아먹더니 이네 하나님이 너를 말아잡수시는구나. 이 나쁜놈아“ 그리고 욕을욕을합니다. 그 때 ”단칼에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 그랬더니 ”내버려 두어라.“ ”왜요?“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를 욕하시는줄 누가 알겠느냐“ 그러니까 사람도 눈에 안들어오고 왕궁도 눈에 안들어오고 오로지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살고싶은 그 거룩한 신앙으로 다져간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죄가 있었습니까. 그 때 방금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반란을 당하거나 욕을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등졌습니다. 정말 그렇게 역사 속에서 실정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그 다윗의 신앙이 더 순결해져 가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그런 신앙으로 다져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신앙이 순결한 신앙이 되기까지 이런 혹독한 시련과 절망감들을 느꼈지만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뭐냐 하면 반석이신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악을 행하실수 없는 선하신 하나님, 그것을 평화롭던때 보다도 더 그것을 시련과 역경 속에서 “그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찬송하며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선하신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악을 행하실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누구든지 당신 앞에서 당신의 얼굴을 구하며 당신께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셔서 그래서 그들을 다시 자기 앞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깊고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러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침체 중에 잃어버리는 것들: 주를 기림①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우리가 오늘 5절을 보려고 하는데 5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히브리 성경에서 읽겠습니다. “사망중에서는” 그랬는데 그 앞에 “왜냐 하면”이 빠졌습니다. 왜냐 하면 사망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그렇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야지만 정확합니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망“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 히브리 성경에는 정관사 더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망“입니다. 의미심장하죠. 그렇죠. ”나를 구원해주시옵소서. 왜냐 하면 그 사망중에서는 주님의 기억이“ 이것은 목적격이겠죠. ”주를 기억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되고 ”왜냐 하면 그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억함이라는 것이 쟈카르라는 동사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기억은 그냥 기억이 아니라. 우리말로 ”기리다.” 무슨뜻인지 아시죠. 한글 “기리다” 전혀 모르신 모양인데 기리다는 영어성경에서 대게 “프레이즈” “찬양하다”로 되어있습니다. “기리다” “그대의 선한행실을 우리가 오리도록 기리도록하자.” 그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나 꺽어지고 그다음에 음부 안에서 이것이 스올입니다. “스올 가운데서 누가 당신께 찬송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완전한 번역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4절부터 연결해서 보세요.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왜냐 하면 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음부 속에서 누가 주께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앞부분에서 시인이 돌아와 내 영혼을 건지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다가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는 5절이 나오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6편을 전체적으로 읽으면 5절은 괄호속에 집어넣고 읽으면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계속하다가 푸념비슷하가 무엇인가 이어지는 것이 끊어지면서 무엇인가 이렇게 확 이야기를 쏟아놓고 그다음에 다시 6절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5절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보세요. “여호와여 돌아와 내 영혼을 건지시고 그리고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호소한 다음에 “왜냐 하면 그 사망중에서는”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시인은 지금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가운데 있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본것입니까? 그렇죠. 죽음이라고 본 것입니다. 사실 이 교리적으로 보면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별것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죽음은 불신자들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신자에게는 심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 죽었는데 가서 장례집에서 기도하라 그랬더니 “오늘 이렇게 장례가 났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성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다 완전한 당신한 친교속으로 데려가시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리문답할 때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성화의 한 과정입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왜그러면 그런식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분투하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거룩해 지려고 노력하죠. 그렇죠. 인간의 죄와 부패, 그리고 오염으로부터 성령께서 진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계속 씻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성품과 우리의 삶의 행위들이 정결해 지도록 순결해 지도록 씻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일평생 그렇게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경건하게 노력해도 마지막에 주님을 자신이 이룩한 성화의 결과로 주님을 곧바로 대면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끊임없이 거룩해질려고 노력해서 경건하게 산 사람과 그리고 생각도 없이 짐승처럼 막 산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문제가 오늘날 경건이 쇠약해지는 이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교리적인 오해들 때문에 이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드리고 그다음에 이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이 무슨이야기냐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인간의 의는 아무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지배적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배워왔잖아요.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그런 것을 아주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는 낳느냐 하면 사람들이 이 도덕적인 생활에 대해서 신경을 잘 안씁니다. 성결하게 살아가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가 몇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예를들자면 한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안심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번 얻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촉진하기 위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교리인데 마음놓고 타락하기 위해서 쓰는 받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의로움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구원이 쓸모없다라는 사실을 많이 강조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모두 무엇을 두고 하는 이야기냐 하면 그것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할 때에 쓸모없다는 것이지 구원얻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것과 짐승처럼 막사는 것 사이가 어떻게 그것이 마찬가지 일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같은데 보면 “우리의 의는 넝마와 같고 헤어진 옷과 같고”라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왜그러느냐 하면 우상숭배로부터 떠나지를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산다고 예기를 하니까 하나님이 보실때는 그것이 필요가 없는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신상태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가 쓸모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바리세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책망하신적은 없습니다. 항상 문제로 삼으신 것은 뭐냐 하면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공로로서 의를 이야기할때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이런배경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이 무조건 모든데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한번얻은 구원은 취소될수 없다. 그런 주장과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인간의 의는 다 쓸데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절대 쓸데없으면 하나님의 의를 덧입기 위해서 갈망하고 그러라는 것이지 다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택한 인물들의 머리를 이으면 성경의 역사가되는 것입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해서 이루신 역사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아니 우주 공간에 별이 백만개가 모여서 충돌을 해서 뭐 지구를 수억번 없애고도 남을만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죽었으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 구원의 역사는 모두 인간을 사용해서 하신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사용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간 사람치고 아무렇게나 막살면서 이렇게 막사는 것이나 의롭게 사는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산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 대충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모세, 노아, 하나님이 쓰신 선지자들과 다니엘과 세례요한과 그 예수 그리스도, 그뒤에는 사랑하는 주님의 사도들, 쭉 이어보세요. 그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간 사람들을 찾을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인간의 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속의 은총 앞에서는 우리의 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야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것은 굉장한 차이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면해서 산 사람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산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산사람이고 한 사람은 어두움의 자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허물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하찮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성화의 삶을 살기위해서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직접대면하는 천국으로 막바로 갈수 있을정도로 완전할정도로 거룩하고 순결해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는수없이 하나님이 죽음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님을 대면하여 뵈옵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처럼 신앙에 있어서 무임승차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러면 어차피 다 못타고 마지막 해결해주시는 것은 주님이 해결해주셔서 우리를 천국에 가서 하나님 대면하면서 살게해주신다면 그러면 어차피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차피 우리가 다 못하는데 그 얘기는 참 맞는 이야기죠. 그렇죠. 구원받은 다음에 짐승처럼 산 사람도 결국은 하나님이 죽음을 통해서 그를 완전히 성화시키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고 애써서 많이 성화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서게하십니다. 그런점에서는 결국은 주님의 손을 빌어야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고 또 뭐 예를들자면 그래도 많이 분투하고 애를쓰고 기도생활하고 말씀에 은혜받고 순종해서 많이 성화된 사람은 일주일에 하나님을 두 번됩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짐승처럼 살던 사람은 그냥 먼발치 야구장으로 말하자면 웨야석 정광판 아래서 예수님 먼발보습이나 한번 보게해주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멀리서 아주 간신히 들어간 사람은 소외의식을 느끼고 그래서 괴롭고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가 천국일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차피 결국은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뭐 주님이 하시게 내버려두시지 어차피 마무리는 주님이 하시는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평생을 가망가운데서 살아야합니다.
지금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애원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면서 몸부림치는 처지가 된 이유가 무엇때문이었습니까? 범죄해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속에 들어가지를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한없는 교제 속에서 자기 수준에 맞게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인의 마음속에 기쁨이었고, 그리고 시인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속에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 연합의 삶,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된 친교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있어서 무엇이었습니까? 생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으로 나의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
무슨뜻입니까?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입니다. 그 인자는 경험되는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헷세드, 곧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살기 위해서 만약에 내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된다면 그렇게 지불하고도 그 하나님의 헷세드를 누리는 그 인자 속에서 사는 것이 자신은 훨씬 낫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생명이란 말입니다. 영적생명입니다. 그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누리는 영혼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을 주고도 얻을만큼 귀한 것입니다.“ 이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던 행복을 생각할때에 지금 자기가 놓여있는 이 영혼의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관사 더를 붙여서 그죽음 속에서 주를향한 기림이 없기때문이옵나이다. 그러니까 그런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는 주님을 기리면서 살수가 없기 때문에 빨리 돌아와서 내 영혼을 건지시고 그리고 나를 구원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이 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기를 치열하게 목말라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육신을 위해서 소유하고 있던 작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과 누리고 있던 친교를 잃어버리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을 믿어도 기쁨이 없죠. 제가 다 알고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죠? 그러니까 전도도 안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막 은혜받은 사람들이 싫어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흠을 잡아서 그것이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시기심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신자는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향유하며 살아갈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특권,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삶을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슴아픈지 모릅니다. 그렇죠.
정말 여러분들은 영적침체를 죽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이, 죽음은요. 제가 요즘 조금 힘들어서 그렇지. 죽음은 무슨죽은, 뭐 그렇게 살벌하게 누가 안믿는답니까? 아, 나오잖아요. 수요일날도 나와서 앉아있는데.”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명목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가 문제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타락이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큰 죄를 범하고 교회도 떠나고 치리를 받고 감옥속에 들어가고 생난리를쳐서 온 교회에 소문이 나서 얼굴을 못들고 다닐정도가 되어야지만 우리는 타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타락이란? 어제보다도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를 덜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요. 그리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타락은 그런식의 물러감이 시작이 되어서 마지막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은 명목상의 풍성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생명입니다. 범죄하고 죄가운데 살아가는 이 시인에게는 예전에 그렇게 가득찼던 그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상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그것은 놔두셨습니다. 신자가 범죄하는 순간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깡그리 무효로 돌아갑니까? 안돌아갑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할께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말씀의 세계의 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충만한 은혜 속에서 은혜를 많이 받고 심령이 은혜충만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사람처럼 덜컥 지었을수도 있지만 야금야금짓다. 나중에는 결국 마치 슈퍼의 외상값이 몇백만원 된 것처럼 잔뜩 큰죄가 되어서 영적인 감각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 죄에 눌려서 사는 그런 상황이 올수도 있지않습니까. 기도 안하고 뺀질대고 그러다가 그렇게 될수 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서서히 침체가 와서 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크게 범죄했습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속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설렁설렁 넘어가는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이제 만족하는 그런 상태로 돌아갈 것 같죠.?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안되는 것입니다. 졸아도 제대로된 말씀을 들어야지만 졸수가 있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이것은 다 임상실험을 걸친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열린교회에 나오다가 지금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나오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본인이 받았다니까 받았는지 알지요. 그러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그래요. 그러더니 무엇에 삐졌는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더니 얼마있더니 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다른데 가서는 말씀을 제대로 먹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러더니 와서 계속자요. 그러니까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잘들어보세요. 굉장히 미묘한 이야기입니다. 한번 하나님이 어떤분인지를 알아서 하나님의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깡그리 날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시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생명력은 빠져나가도 예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그 만남의 경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에게 가르쳐준 삶의 방향, 이런것들에 대한 이지적인 판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도 원래 이렇게 사는가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원래 가난해서 한방에서 7-8식구가 모여살면서 방겸 부엌겸해서 쓰면서말이죠. 화장실도 방안에 있습니다. 꿀단지 같이 생긴 것, 그것놓고서 그렇게 살던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큰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망해서 거기 온 사람들은 살다가 몇일있다가 밖에 가서 목멥니다. 그것이 왜그렇습니까. 예전에 이 풍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고통이 배나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이전에 깊이 만나고 그 생명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주님을 찬송하고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기리면서 그렇게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노래부르며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범죄하고 나니까 자신의 영혼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으로 죽어있는 가운데는 뭐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기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카르”라는 동사는 구약에서 아주 유명한 동사입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굉장히 많이 나오잖아요. 특히 신명기에보면 많이 나오죠. 잊지말라는 말과함께 많이 나옵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잊지말라는 말보다 기억하라는 말은 훨씬더 적극적입니다. 자 그러면보세요. 설명을 여러분들에게 아주쉽게해드리겠습니다.
기억하라라는 말을 “잊지말라”라는 말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기억하라”는 말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십다. 성경을 폈는데 모세가 쓴 글에 가장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너흐를 에굽에서 종되었을 때에 건져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 때에 그 기억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느낌이 어떤 느낌입니까? 또 “홍해를 가르고 너희를 인도하신 여호와를 기억하라” 광야생활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시고 그 많은 왕들을 멸하시고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렇게 성경이 말할때에 ”기억하라“라고 하는 그 말을 성경이 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오는 느낌이 있죠. 어떤느낌입니까? 잊어먹지 말라는 말이 아니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애굽의 포로되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커다란 감동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자기들을 위한 구원행동에 대한 기억이 감사와 찬송을 불러오고 오늘 그 하나님을 위해서 그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결의를 다지게 만들고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자신들의 선택된 처지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하는 그러한 것을 함께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제 이해가가죠. 그래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지모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범죄하고 영적인 침체속에 깊이 들어가게되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향한 찬양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도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범죄로인한 영적침체 속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버리면 예수믿는 사람들은 아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도 없는 사람이 제가 전도사때 학생들을 데리고 진짜 다 쓰러져가는 어느 기도원이 하도 싸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쪽으로 가라. 그래서 갔는데 진짜 다쓰러져갔습니다. 노인네 두분이 거기에서 진짜 사찰처럼 일하고 있는데 뭐 기도원이 번듯하면 사찰집도 좋을것인데 세상에 그 시절에 불떼서 밥을 해먹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노인네들이 꼴같지않죠. 얼굴을 시컴해서 뭐 나무하러 간다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해오고 그런데 내가 갔는데 그 불을떼던 그 할머니가 할머니는 안되었고 아주머니는 훨씬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왔다.” 그러니까. “아, 그러느냐고” 그래서 “여기 몇일있으면서 수련회를 할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아, 그러시라고” 그런데 아, 나는 바빠죽겠는데 자꾸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들은체도 안하고 덜렁덜렁 하는데 나를 쫓아오면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그래서 “왜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 서울대학교 다녀요” 아니 그것이 나하고 무슨상관이 있습니까. 누가 물어봤나. 그런데 마당까지 쫓아나오면서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맨처음에 제가 “뭐요?” 그러니까 “아, 우리 아들 서울대학교 다닌다고” 그래서 “잘하셨네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엄마는 자기는 여기와서 이렇게 나무를 하면서 헐음한 기도원에서 이렇게 농부비슷하게 가난한 생활을 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그 아들 자랑하고 싶어서 죽겠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가 있는 것입니까? 이 엄마의 마음에 아들에 대한 기림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이야기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삶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농부처럼 일하면서 몇푼못받고 이렇게 살아도 거기에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니들보다 낫다. 우리 아들은 서울대 다닌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기림이 있습니까? 그림말고. 뭐에요. 생각만하면 너무 자랑하고 싶어서 죽겠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기림의 제목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 건조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영적침체속에 깊이 들어가면 기림이 없습니다. 가끔 기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제 영적침체에 빠지고 죄가운데 들어가면 기림거리가 은혜가운에 있을때와 달라집니다. 은혜가운데 있을때에는 기림거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 내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맺게해주신 전도의 열매, 주님을 알아가는 이 기쁨, 그런 속에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기림이 매일매일 새롭습니다.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기림이 계속 이 속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간증하라 그러면 날마다 새로운 간증입니다. 왜 그 기림이 날마다 날마다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영적인 침체속에 깊이 들어가게되면 기림의 제목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제 주님이 더 이상 자기에게 기림의 제목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기림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에요. 자랑하는 것이 너무 세상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 자기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축복, 이런 것들을 자랑했는데 이제는 말이죠. “아, 몇평에 살아? 32평. 아, 그렇게 답답한데서 어떻게 살아? 우리도 옛날에는 그렇게 살았지.”요즘 김장하지 않습니까. 남의집 김장하는데 가서 아휴, 김장 열심히 하네. 사다가 열심히 김장하는데 “어휴, 우리도 김장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막먹을 것 이렇게 담궜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이집에 잘 담그는 김장이 자기는 막김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렇게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기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기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것들을 기리면서 살 때와 주님을 기리면서 살때는 다릅니다 주님을 기리면서 살때는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것들을 기리면서 살때는 자기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큰평수 산다는 것을 자랑할 때 사람들이 “아, 좋겠다. 그러면서 침을 이렇게 흘리면서 그래 나도 한번 집구경 갈게” 그럴때에 순간적으로 자기가 으쓱하면서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 사람 떠나가고 혼자남으면 다시 가슴이 한없이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을 향한 기림이 없으니까 무엇을 이렇게 다른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것을 기릴려고 해도 영혼의 참된 만족을 가져다 주지를 않고 퍼석퍼석 한것입니다. 그리고 허무합니다. 왜? 이 시인에게 뭐가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영화를 누렸지 않습니까. 그 부귀영화를 누렸지 않습니까. 왕국이 다 자기의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궁궐, 그 어마어마한 궁녀들, 그 많은 후궁들, 뭐든지 다 있고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 사람처럼 영광을 누리면서 산 왕이 없습니다. 솔로몬과 더불어서 이 이상의 영광을 누리면서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만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안에 하나님만 안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해요. “사망중에서는 내가 주님께 대한 기림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든 것이 있어도 이 사람의 인생을 위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우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이 시인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에 전부인가 하는 것을 아주 뼈속깊이 뼈져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은생애동안 그 경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산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흔히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복음송가에 귀에 더덕이 남도록 많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뭐 밖에는 없습니다.” 말로만 말고. 진짜로 주님이 전부라는 사실을 시인이 정말 난생처음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잃어버리고서야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전부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기릴수 없을 때 그 때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안합니다. 주님을 향한 기림이 우리의 마음속에 없어도 돈이좀 넉넉하면 주님을 향한 기림이 없어도 그것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적으로 잘 나가면 주님을 향한 기림이 주는 행복을 그것으로서 어느정도는 대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주님을 향한 기림을 마음속에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않고 세상 속에서 살때의 그 허무감을 떨쳐버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연합한 가운데 그분의 친교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가장 커다란 행복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죄로말미암는 침체가 그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그 상태는 가히 영혼에 죽음의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아주 엄청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지만 그런 죄가 있었기 때문에 더 심오한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 있는 사람들이 그러면 심오한 은혜속에 들어가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죄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보면 벌써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이런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이, 내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죽어버릴거야.” 그리고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들은 그냥 죄가운데로만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가운데로만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죄가운데 떨어지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왜그랬는지는 이제 별도의 문제이고 어쨌든지 사망가운데서는 주를 향한 기림을 잃어버립니다. 성도는 주님을 향한 기림을 잃어버리고나면 그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제일먼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밤에 잠들 때 마지막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마음의 문을 닫습니까? 깊은 밤 뒤척이다가 잠이 깨었을 때에 제일먼저 누가 생각나나요? 주님이 여러분들의 의식속에 주님이 기림이 되지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죽음가운데 있는 인생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실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주님을 자랑하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향한 기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메마른 벌판을 지나는것과 같을 것이며 요즘 여러분들의 마음은 풀한포기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채 긴 사막의 길을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은 처지가 이미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의 아름다운 찬양은 멎었을 것이고.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속해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보여주어도 요동치지 않을정도로 이미 굳어버린 마음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기림을 잃어버린 인생은 사실상 모든 것을 소유했어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때에라도
내 할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살아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은혜로운 구원의 행동들을 기리고 죽어서는 마지막에 주님의 품에 안겨서 주님을 찬송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특권이며 행복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기림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고 기릴수 있는 기림의 제목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것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견딜수 없이 그것을 자랑하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 그 기림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런 기림의 제목들이 언제나 살아서 역사하고 입을열면 주님의 자녀된 행복한 간증,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은혜에 대한 증거,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속에 늘 있어야합니다. 진짜 우리들이 은혜가운데 있을 때는 그렇지않습니까. 타박타박 더운 여름에 땀을 흘리면서 길거기를 걸어가다가도 찬송합니다. 찬송하다보면 눈물이 확쏟아집니다. 곤고하고 어려운일을 만나도 주님을 의지하기 되기 때문에 주님을 기립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우리의 마음을 복받치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일상적인 삶입니다. 그런 기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죄가운데 있어서는 침체가운데 있어서는 이런 기림의 제목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자기를 자리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크게 2번째로 “음부에서 누가 주께 감사하리이까?” 이것이 “스올”인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음부는 신약에서 이야기 하는 음부와는 좀 다릅니다. 다르다기 보다는 구약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사상이 명백하기 제시되지를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물론 암시는 충분히 나오지만 신약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아주 극명한 묘사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의 날카로운 대조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지식을 보여주실 때에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을 이렇게 보자기로 덮어놓고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이렇게 보자기를 이렇게 잡아당겨서 조금씩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조금, 신약에는 완전히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진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과정속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으로 볼때에 구약에서는 아직 인간사후에 천국과 지옥이라는 아주 명쾌한 이야기가 덜 나오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생각이 있었는데 사후에 대한 생각도 가만히보면 두가지로 이렇게 교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천국이라는 사상은 없는데 그 하나님을 뵈오면서 주님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어떤 행복에 대한 기대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욥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육체밖에서 하나님을 뵈오리라”라고 하는 욥의 고백이 나오는데 이것을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욥기의 무대가 연대로 따지면 어느정도냐고 보는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인 견해는 아브라함 시대쯤이라고봅니다. 아브라함 시대때에 통하는 용어와 일치된 용어들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시대는 주전2000년대입니다. 굉장히 이미 오래전서부터 그런 상당히 분명한 대세에 대한 생각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섬기던 사람들이 죽으면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사는 어떤 행복이 있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는 동시에 악한 사람들이나 혹은 그렇게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훌륭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을 때에 스올로 내려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냥 스올이라고 한곳도 있습니다. 요나서에보면. 거기에서는 어떤 적극적인 심판이라기 보다는 아주 기분나쁘고 음산하고 그리고 생명이 거의 없고 희미하게 기력이 없는 그런채 겨우 목숨이 붙어있는 것 같은 아주 기분나쁜 그런 상태를 염두해두고 음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를들자면 야곱에 애굽에 있을 때 배냐민도 데리고 가는 상황이지않습니까. 만약에 그 아이가 거기로 가면 야곱이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제 요셉에게 가서 배냐민의 형들이 얘기하는 것이 “우리 아비가 슬피울며 음부로 내려갈까합니다” 그것이 무슨이야기냐 하면 그렇게 비참하고 그러니까 어떤 살아있는 기쁨과 소망 이런 것들이 다 끊어진 그런 상태속으로 가는 것을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음부에서 누가 주께 감사하겠습니까.“ 그 얘기는 결국은 뭐냐 하면 시인이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잃어버리고 물론 죄때문이죠. 타락해서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들어가게된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죽음보다도 이 스올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모든 것의 단절이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음부는 그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되는 아주 음습하고 고통스러운 그런 상태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시인이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가 잃어버리고 경험하게 되는 그 치열한 고통의 상태를 기가막힌 단어를 선택해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살마들의 가슴속에 확 스며들 수 있는 최적의 단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럴정도로 이 스올, 즉 음부라고 하는 이 단어가 성경 속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하자면 고통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스올 속에서 그 음부 속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아주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침체속에 있는 사람들은 감사안합니다. 그런데 영적침체에 들고나면 헌금도 잘 안합니다. 헌금은 누가합니까? 돈많은 사람이 한다고요. 아닙니다. 절대그렇지 않습니다. 돈많은 사람이 절대하지 않습니다. 누가합니까? 은혜받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은혜받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헌금을 합니다. 물론 그것은 형편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저는 처음 회심하고 나서 그 때 실직자였습니다. 실직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집에서 노는 청년이었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나니까 내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옛날에는 가난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뭐냐 하면 누군가를 너무나 많이 사랑하는데 아무것도 줄수 없을 때. 그 때 진짜 눈물이 앞을 가려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놀라운데 이 쓸모없는 자를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데 뭐 있어야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분명하게 나는데 세례받는날 입고 갈 옷이 없어서 하얀 추리닝 빨아서 입고갔습니다. 정말입니다. 왠츄리닝 그러는데 진짜 가난해서 없어서. 그런데 뭘 드릴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피라도 팔아서 무엇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드릴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몸밖에 드릴것없어 이몸바칩니다. 그러는데 그것도 나에게는 해당이 안되요. 교사를 할라니 무엇을 알아야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할려고 그러는데 찬송가를 몇장 아는 것이 있어야지, 그러니까 몸도 드려봤자. 하나님이 쓸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때에 느끼는 그 고통은 말이죠. 정말 죄가운데서 느끼는 그 고통하고는 다른 고통이지만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데 그분이 결국은 아무도 구원해 줄수 없는 처지에서 나를 구원해주셔서 내게 생명주시고 내게 그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살게 하셨는데 아침에 눈을뜨면 그분의 사랑이 생각나고 밤이 되면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가? 이런 기쁨과 은혜가 있는데 생명이 있는데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끼는 견디기 힘든 고통, 그것이 생명의 상태에서 느끼는 것이지 죄가운에서 져서 영적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서 스올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음부의 상태속에 들어가서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견딜수 없는 감사의 마음,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랑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지않습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고난도 이기고 박해도 이기고 세상에서 왕따를 당해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러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한없는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의 분투하는 모든삶의 최선의 동기는 뭐냐 하면 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차선의 동기는 뭐냐 하면 의무감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이 거룩한 삶에 최상의 이유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최상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배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래서 내가 주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까? 그러는데 하나님이 “너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행하라” “이런 사람이 되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넘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상입니다. 그것을 못하면 그다음에 무엇이라도 발동해야되요.?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의무감이라도 발동해야합니다. 그 의무감이 역사하는 곳에 하나님이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 의무감이 의무감에 그치지 않고 다시 주님의 은혜로 가득차서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채우셔서 이제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받은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생명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속에서 예전에 주님께 감사하며 살던. 그러니까 이 시인이 감사시를 굉장히 많이 적었습니다. 그 수많은 감사. 이것이 자신의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는 것과 같이 죽음의 상태로 변하니까 하나님을 향한 그 아름다운 감사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수 있는 근본적인 모든 힘들을 완전히 소진당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제 이것마져 거두어 가시고 나면 저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로 남을 것입니다. 생명을 걸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너무 안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이런 침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덮어두고 그냥 대충대충 살아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행복하지 않아요. 하나님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얻을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선택은 최악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경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소망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간음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의 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은혜를 거의 모두 소진했습니다. 사실 버림받은 자와 거의 다름이 없는 상태에까지 이 사람이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한가지태도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다시 주님의 그 생명의 은혜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생명의 은혜가 나는 필요하고 그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의 영화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연장은 나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그 생명을 다시 돌려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천사가 와서 왕위를 내려놓고 다시 네가 예전에 이새의 집에서 짐승의 똥이나 치우던 목부의 상태로 내려가면 줄 수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망설였을까요? 안 망설였을까요? 망설이지 않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떠나고나니까 자기는 죽음속으로 들어갔고 음부 속으로 내려간것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이유였던 주님을 향한 기림도 사라지고 자신의 삶의 노래의 제목이었던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언제나 옆에 있어서 즐거운 소리를 내며 주님을 위해 노래해주었던 아름다운 수금의 가락도 멎었습니다. 어떤 감사시도 하나님 앞에 적을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분과 사귀며 사는 것이며 그분을 기리고 그분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이고 이것이 없는 그 모든 것은 아무의미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자꾸 회피만 하지말고 정면으로 하나님과 맞닥뜨려야합니다. 수요일날 와서 매일 듣고 눈물몇방을 흘리고 가면 뭐합니까. 이 시인은 자신의 생애를 걸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에게 다시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만약에 천사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이 다윗에게 “네가 무릎으로 예루살렘까지 걸어가서 피투성이가 되면 내가 다시 그 생명을 주겠다” 그러면 그것을 마다했겠습니까? 모든 것, 이 사람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럴정도로 모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생명을 원합니다. 그리고 침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도 알고,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스올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을 상실하고 기림의 제목을 갖지 못한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줄 알아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시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고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건 것은 아닙니다. 원하기는 하지만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이 경험했던 위대한 회복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제껏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불행의 이유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의 고통의 이유가 여기있고 저기 있다고 막 핑계대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흙암의 그늘아래 앉아서 사망의 쇠사슬에 메이는 것은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 속에 기림의 제목이 없는데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는데, 위로도 되지 않는 그런 교회생활 속에서 우리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죠. 버리지도 못하죠. 그러니까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전부이며 그 생명을 내가 되찾는 것이 내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숙제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그 완전한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기쁨 속에서 나를 살게 하신다면 내 생애가 절반으로 줄어도 나는 행복합니다." 그렇게 절반이 아니라. 지금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자기를 다 건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그 어마어마한 죄의 구렁텅이에서도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죄 때문에 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침체 중에 잃어버리는 것들②:감사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下)
지난시간에는 죄로말미암는 영적 침체에서 신자가 할 수없는 것 두가지 가운데 주로 첫 번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림이 없으며 그러니까 주를 기억함이 없으며 음부에서 누가 주께 감사하리이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기억한다라고 하는 것은 기린다 그런 말씀을 제가 지난시간에 설명을 드렸죠. 그러니까 죄로말미암는 영적인 침체가운데서는 주님을 기리며 살수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주의 설교중심이었습니다.
사실 성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기림,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높이고, 그리고 주님을 찬양하는 그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그 신자의 삶은 너무 삭막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 신자가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아름다운 기림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 마음속에 있는 기림의 정서가 그로하여금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데 그것이 죄를 범해서 침체에빠진 신자의 마음속에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통하던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처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늘 살펴볼 것은 “음부에서 누가 주께 감사하리이까.” 그랬습니다. 똑같이 사망과 음부는 평행법상에 반복되는 단어가 되고 있는데 음부는 신자가 죽은후에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구약에서 음부는 아직 적극적인 지옥의 의미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여튼 죽은후에 신자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어떤 교통이 사라져버린 죽음과 음습함이 가득한 그러한 상태를 음부혹은 스올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속에서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자가 누가있습니까. 죄로말미암아서 신자가 영혼의 침체속에 빠지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신자의 마음 속에서 거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속에서 이 감사가 사라지고나면 당연히 그 감사에 대해서 반응하는 헌신이 함께 사라집니다. 대부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이 헌신은 한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유지할 때 헌신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은 곧 하나님께서 가치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대한 감사를 항상 동반합니다. 은혜에 감격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말과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에 넘쳐서 산다라고 하는 말은 항상 그런 의미에서 동의어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감사의 문제를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침체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성령충만하게 살때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죠. 마치 사람들이 영적인 침체가운데 빠져서 신자가 죄의 어둠속에 있고 그렇게 살아갈때에는 하나님이 그를 복수하러 쫓아다니시는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한없이 하늘의 창고를 풀고 복을 내리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은혜 충만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해나갈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시고 그리고 또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이 더 확실하게 응답을 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누리게 하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합니다. 대체로 하나님이 그렇게 복주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가만히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영적인 충만함속에 살지못할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늘 기도 속에서 은혜충만하게 살때에만 어려움과 큰환란을 피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채 살아도 하나님이 어려움을 면하도록 우리를 적절하게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살아왔을지라도 그것이 곧 육적인 최악의 상황과 연결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서 오늘 은혜 많이받고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돌아서서 죄의길로 돌아서면 그다음날 사업은 부도나고 직장은 짤리고 그러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고 하나님이 적절하게 그를 보호해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런데 그러면 문제는 뭐냐 하면 신자가 죄로말미암아 영적침체 속에 들어갈때에는 하나님이 많은 것을 주셔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감사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큰 것을 주셨다고 해서 사람들이 크게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작은 것을 주셨다고 해서 작게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이 감사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축복의 양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축복, 신자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공급해 주시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그 속에서하나님을 예민하게 느끼느냐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감사가 클수도 있고 작을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는 신자들이 은혜가 떨어질때에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을 주셔도 항상 입이 부어있습니다. 그렇죠. 24평 A.P.T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마련하면 32평 A.P.T를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그렇죠. 32평 A.P.T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구해서 집 하나 사서 이사갈수 있게 만들어 주시면 그러면 "감사한게 뭐가있나? 어떤 사람들은 뭐 아파트 당첨되어서 프리미엄도 안주고 아파트를 통째로 먹고 또 어떤 사람은 뭐 무슨 경품잔치에 들어가서 아파트를 안채씩 받았다 그러는데 아니 내돈주고 내가 샀는데 무슨 감사할것이 쥐뿔이나 뭐가있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셔서 우리가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거의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의 숨길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 속에서 전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인데 어느날 주일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고 청년부 모임이었는데 청년들에게 설교를 하고 그리고 나서 그날 새로운 친구들이 두세명이 나와서 인사를 하면서 예배를 함께 드리는 그 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도 아마 감사에관한 설교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많이 울면서 회개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그랬느냐? 그랬더니 ”자기의 죄가 생각났는데 그 죄는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줄을 몰랐다는 것, 옛날에 처음 주님을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살때에는 만원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기도했데요. 우선 두가지 기도제목이었는데 하나는 이 큰돈을 주신 제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했고 두 번째는 하나님 이 만원을 어디에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도가지 기도를 항상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직장도 다니고 넉넉한 생활이 되었는데 지금 가많히 생각해보니까.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 더많이 감사했고 더많이 기쁨의 생활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을 느낄수 있었기 때문에 감하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내 영혼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혜를 받고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싶다고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정말 느라마틱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이 살아온 모든 삶을 이렇게 보면 시종일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들때에는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수 없는 그 진설병에 손을대고 그것을 먹어야할 정도로 그렇게 주리고 배고픈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왕이 되고난 후에야.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지만 자객을 풀어서 자기를 쫓는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다닐때에는 혈혈 단신이었고 그리고 그는 이런 배고품의 굶주림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의 나라를 일으킬때에 다윗의 주위에 많이 모였던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자기 수족을 온전히 놀리지 못하는 병든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다위 주위에 많이 모여서 그 사람들이 다윗으로 하여금 나라를 건설하는데 훌륭한 후원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 주위에 그렇게 가난하고 병들고 눈멀고 다리절고 한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예수님의 고임을 받고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런점에서 다윗의 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으로 베푸시는 그 주님 주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돌보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예표라고도 우리는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살면서 그의 모든 희망, 그리고 그의 모든 미래는 자기의 형편을 알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후원하고 따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귀족이나 훌륭한 군대의 장관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울의 교만한 치세아래서 소외되었던 백성들, 고통받고 아파하던 그 무리들이 었습니다. 그들을 목자처럼 끌어안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은 사울에게서 받을수 없었던 하나의 임금의 백성되는 돌봄을 다윗으로부터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다윗으로부터 받은 그 큰 돌봄과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일평생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마 이 다윗은 자기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를 따르는 그 한량한 무리들, 고통받는 그 무리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기 이해서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의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공급해주시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한 삶을 살수가 있었고, 제왕이 되고난 후에도 하나님께대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왕이 되어서 쓴 많은 시가운데 곳곳에 배어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도 더 어려운때 왕위에 있는 때와는 비교되지도 않는 고통과 가난, 추격과 협박, 죽음의 위협과 모함, 이런 속에서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인생길을 살면서도 그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띠끌만한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고 심지어는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못하는 진설병을 먹도록 하나님이 공급해주셔서 그 작은 떡하나 물 한모금, 포도주 한 잔 속에서 그 다윗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심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작은 것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해오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 위로, 이런 것들을 아주 뼈저리게 느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감사의 세계도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까짓것을 먹고 뭘 그렇게 감사하나”
제가 신학대학의 선생일 때 제가 선물을 많이 받는 교수중의 하나였습니다. 정말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어떤 것들은 정말 아주 귀한 선물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있는지 잘 모르지만 집에 어디 있을 것입니다. 금장으로된 회중시계. 고급 향수. 향수같은 것은 한 2년전만 해도 거의 쓰지도 않고 거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누어주고 그랬는데 뭐 하고 다니지도 않은 ( ? )이런 것,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회하면서도 진짜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선물들을 참 많이 받았고 분에 넘치는 섬김을 여러분들로부터 많이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감을 느끼실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설교자로서 사역하고 나서 제가 받았던 가장 감명깊은 선물이 하나있습니다. 사탕입니다. 그 때 이제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이제 불이 붙어서 성경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런데 그것도 막 주체할 수 없이 하나님이 쏟아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교회가면 붙들고 펑펑울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어떻게 사냐?” 그러면 이제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느낀 것이 많으면 말이 많은법아닙니까. 그렇죠. 그때서부터 이렇게 길게 설교할것이 예고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40분 정도로 시작했는데 45분 60분 90분 100분 180분 막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를 받는 사람들은 너무 좋다.하고 3시간을 설교했는데 언제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는데 변화받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싫은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와서 우리 평화로운 공동체를 박살낸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항상 반이 쫙갈라졌습니다. 반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하고 그리고 그렇게 주일을 사모하는데 반은 입이 대발은 나와서 그 정도가 아니고 설교하는 도중에 벌떡 일어나서 뒤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집회실문을 뻥 차고 나가요.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요. 설교 한 70분 동안에 서너번씩 그래요.
그리고 쥐털만한 녀석들이 설교가 끝나고나면 뺑둘러싸서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냐고? 다 죄인이지. 그리고 살아왔는데 그러니까 너무 힘이들었습니다. 그리도 설교하러 올라가면 비장한 각오를주셔서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도 예외없이 터줏대감같은 선생들 몇 명이서 돌아가면서 나를 요즘말로 갈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뭐 굉장히 직선적이고 말이죠. 나쁘다고 하면서 ... 그리고 있는데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가을이었는데 햇빛이 쫙 내리쬐는데 설교를 하고 이제 자기들은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이렇게 나갔습니다. 나갔는데 하늘이 정말 서럽도록 파랗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 옆에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까이를 다가가서 나무를 이렇게 붙들고 이제 설교시간에 기운을 소진해서 이렇게 쉬고 있는데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요. 쬐그마한 고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가 이렇게 걸어와요. “전도사님 너무 힘드시죠.” 그래요.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부스럭 거리고 꺼내는데 사탕이었습니다. 그것도 둘도 아니고 딱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전도사님 너무 힘드시죠. 저는 전도사님 마음 알아요” 그것을 받고 돌아서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나를 이해해줘서 감격한다라기 보다도 그것이 마음에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사탕하나 밖에는 없지만 그것을 예배시간 내내 얼마나 줄려고 가지고 있었던지 캔디는 캔디인데 녹아서 비닐종이에 사탕이 붙었습니다. 그것을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 체온을 느꼈습니다. 왜? 그 건네주는 사탕 하나는 별것이 아닌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수 있었기 때문에 눈깔사탕 하나였지만 하늘만큼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이 감사의 크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그 신자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살아있는 심령의 상태의 그 품질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해서 그가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공을 던졌는데 벽에다 던져서 공이 튀지않습니까. 그런데 그 통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벽이 얼마나 단단하냐에 따라서 그 공이 많이 뛰기도 하고 적게 뛰기도합니다. 아무리 작은 공이라도 스폰지 같은데다 던지면 바로 밑에 떨어지지만 아무리 큰 공이라도 단단한 쇠벽같은데다 던지면 멀리 띵겨나갈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자기가 죄로 말미암아서 영적인 침체속에 들어가면서 감사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감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다.라는 생각을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좀 없어도 감사를 많이 해야지만 주님이 좋아하시지. 감사를 잘안하면 하나님이 참 섭섭해 하신다. 그렇게 생각을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 감사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게하는 훌륭한 경건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신앙의 선배들은 매일매일 정사의 작업가운데 아주 중요한 작업가운데 하나가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찾고 그래서 그것을 더 묵상해서 잊고 지나갔던 감사의 내용들이 자기의 가슴속에 스며들도록 그래서 그 스며든 감사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도움을 얻는 그런 일들이 정사의 작업가운데 아주 중요한 한부분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감사를 잊어버리기 쉽고 무감각해지기 쉬운 자신을 경계하고자 감사하는 법칙을 만들어놓고 자기의 생활에 지속적인 규칙으로 삼으면서 감사생활을 했던 것을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음부에서 누가 주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말은 시인이 죄로말미암아 영적인 침체속에 들어가니까 도저히 하나님을 향한 이 감사를 통한 영혼의 회복이 불가능해진것입니다. 많은 것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머리로 계산을 해보면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이것도 주셨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속에 예전에는 거기에 묻어서 느껴지던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 죄로말미아마 무뎌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들속에 깃들여져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거의 느낄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있어서 깊이 고통하는 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도 다른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작은 것에도 늘 하나님의 숨길을 느끼면서 감사하고 살아갈 때에는 그것이 자기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특권이며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인가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로말미암아서 침체 속에서 그것을 잃어버리고나니까 이 시인은 자신속에 사라진 감사를 인해서도 견디기 힘들어하며 고통하는 장면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함께 관계를 지속하며 친교 속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최고의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필요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공급해주시고 그러면 우리들이 그것을 공급받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요즘은 선물같은 것도 많이 배달로 옵니다. 그렇죠. 어떤때는 무슨 홈쇼핑 같은 것을 보고 우리들이 뭐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시는 분들도있죠. 그래서 카드번호를 불러주고 그리고 내게 침대가 필요하다. 뭐가 필요하다 그리고 삽니다. 그것을 사면 거기에서 사이버상에서 결제를 해주고 그것을 예쁘게 포장해서 몇일후면 집안으로 날아옵니다. 그리고 펼져보면 그 속에 선물처럼 예쁘게 싸여있는 제품들이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돈주고 내가 샀기 때문에 그 선물 속에서 아무도 느낄수가 없습니다. 그런 선물을 예를들지말고 한참 시집갈만한 나이에 있는 사람들 받기 좋아하는 장미꽃 100송이를 생각해봅시다. 내가 내돈주고 통장에 입금을 시키고 내 집으로 보내라. 그래서 장미 100송이가 날아왔다고칩시다. 그것 감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이고 뭐가 이렇게 비싸” 그렇겠죠. 그렇지만 만약에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뜻밖에도 그 장미 100송이를 포장해서 예쁘게 해서 만약에 배달로 보내왔다. 뭐 요즘은 어디 말들으니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돈만내면 뭐 완전히 까만 양복에다 낵타이를 정장한 사람이 무스까지 바르고 세 사람씩와서 문을열고 거기에서 그 보내는 사람을 대신해서 율동하면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면서 그 꽃다발과 와인이 담긴 바구니를 전해주고 그것을 사진까지 찍어서 준다고하니 말이죠. 그렇다고 하니 그러한 서비스를 받았을 때에 그가 한없이 감격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겠습니까? 그가 만약에 그러한 섬김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모르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집에왔는데 오밤중에 문을열고 안녕하세요. 여기 누구씨댁이죠. 그렇게 해놓고 그냥 생일축하한다고 난리를 치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서 누군가를 느낄수 있을 때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 한없는 관계의 증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침체 속에서는 이것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죄로말미암는 영적인 침체속에 들어간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따뜻한 찬양이 없습니다. 이 감사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작은 것들을 통해서라도 그 안에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다시 그로하여금 은혜의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속에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리고 주님 앞에 잘못살아가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죄지으려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 거스리려고 했던 그런 것들을 이 은혜의 작용들이 그것을 쓸어가는 역할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제표현대로라면 은혜의 자정작용들이 신자가 죄를 범하고나니까. 급속히 거의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는데 그 상황이 사망과 음부와 같았습니다. 왕궁도 그대로 있고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그대로 있고 자기를 존경하는 신앙의 동지들, 자기를 깊이 신뢰하는 백성들, 그리고 자기를 신앙적으로 깊이 사모하는 그런 신앙의 동료들이 많이 있고, 부하와 모든 것들이 그대로있습니다. 범죄하는 그 순간에 국경이 무너져서 오랑캐가 쳐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평화로운 태평성대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마음 속에서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 다윗을 다윗되게 만들었던 주님을 기리면서 사는 그 삶,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기림의 정서가 사라졌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되게 만들었고 욕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평생을 살아오게 만들었던 다윗 안에 있던 끌어오르는 넘치는 감사의 정서를 거의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왕관도 왕국도 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제물도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예전의 다윗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그 하나님의 사람일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은혜의 사라짐과함께 감사의 마음도 사라졌고, 그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주님의 그 따뜻한 숨결을 느낄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 하나하나 사연이 깃들여있고 그리고 어떤때에 주님을 만나서 주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고 공급받는 그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은혜와 사랑을 느꼈는지 낱낱이 느낄수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은 하루 아침에 생명이 없는 차가운 것들로 모두 변해버렸습니다. 그 때에 이시인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될수 있었던 것이 사실은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범죄하는 그 순간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통해서 그런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기림과 감사의 정서가 산산이 부서지자 그는 왕국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살면서도 그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부엉이 처럼 당아새 처럼, 참새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슬피우는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 있는 것들이고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중요한 것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니면 주실수 없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티끌같이 작은 선물하나에 담겨진 하나님의 태산과 같은 은혜를 느끼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돑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그리고 그 은혜의 감격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셔서 충만할 때나 고갈될 때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나 반역할 때나,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게하심을 고백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그분을 위해서 섬기며 살려고 하는 감사의 마음, 그 감사에서 비롯되는 자기 희생이 있는 헌신의 마음, 그런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행복인 것입니다.
저는 요즘, 제가 보기에도 어떤 취향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제가 옛날에는 새것만 좋아했습니다. 헌 것은 모두다 버렸는데 그런데 지금은 자꾸만 골동품같이 오랜 손때ANE은 그런 것들이 좋고 그런 것들이 없이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그런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손때많이 ANE은 그런 것을 보면 갖고싶고, 그리고 손때많이 묻은 가방, 그다음에 손때많이 묻은 안경집이나. 그런 것이 이상하게 잘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나이먹는다는 증거일지 모르는데 옛날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면 별로 가치도 없는 것을 그냥 부둥켜안고 다니시면서 애지중지 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것같습니다. 그것도 심리적으로 좀 분석해봐야 되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눈에 이렇게 만져지는 것들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전에는 진짜 떡하나를 가지고도 그런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감사가 있었는데 이제는 왕국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하나님께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황폐해진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살려달라고 밤마다 눈물로 요를적시며 그리고 밤마다 침상을 띄우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주에 하겠습니다만은 왜 하필이면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는 것이 밤마다였느냐? 왜 밤에만 그렇게 울었느냐? 밤이나 낮이나 그렇게 울지. 왜 밤에만 울었느냐? 혼자있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를 잃어버렸느냐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혼자있을 때. 그러니까 이 시인이 자기가 사람들에게 섞여서 살때는 몰라도 혼자 있을 때는 자기의 가슴속에 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져리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을 느낄수 있는 감사가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아주 큰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들을 ( ? )하셨을 수도 있고 또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저 작년처럼 직장다니고 그저 작년처럼 사업하고 특별히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저 그냥 그냥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말할지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절대적인 선물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다윗처럼 왕국을 갖지못했고 면류관을 쓰지못했고 유명한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리는 장군과 같이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 마른떡, 그리고 거친 포도주 한잔, 물한모금, 이런 것들을 공급받으면서도 감격했던 이 시인처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실재적으로 주신 것이 적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풍부하게 느끼며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러분들의삶의 이유로 삼을수있다면 바로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큰 축복 속에서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침체 속에서는 이러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온세계를 다스리게 그의 손에 홀을 쥐어주고 온 나라의 우두머리를 삼아도 그가 기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기쁨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 은혜를 갚으며 살도록 만들어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버릇없거나,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건강의 상태를 점검해보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주님이 주시는 작은 것들 속에서 주님을 크게 느끼면서 천국과 같은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제목인 것입니다. 탐욕과 많은 탐심으로 자기를 더럽히고 그리고 자기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일들도 결국은 감사가 사라진데서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는 항상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만족을 느끼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고 그래서 우리속에 있는 욕망을 제거함으로서 하나님을 더 풍부히 느낄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침체 속에서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혼이 살아있어야할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감사하며 작은 선물을 통해서라도 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며 살 수 있는 비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범죄하지 않고 은혜가운데 사는 것이 바로 이렇게 살아갈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불행하게도 죄가운데 있어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주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은혜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좋은 것들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할것같으면 오늘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수있도록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새롭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고통까지라도 장미와 같은 나무에 가시같은 고통이라도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의지하며 그렇게 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공급해주신 작은 것들을 통해 당신을 크게 느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일 할 때에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어떤때는 아주 작은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이 많이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하는 일은 괄목할만한 엄청난 일이 아니지만 그 작은 섬김 하나 속에서 하나님이 그 작은 섬김 하나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느끼실수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작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없이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또 우리를 도와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마음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왕이시지만 물량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실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깨어있고 이런 시인이 빠졌던 침체가운데 들지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작은 선물에도 크게 하나님을 느끼고 그래서 수시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고. 우리의 본분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섬기고 감사하면서 살아야할지를 배우는 그런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행하여야할 일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인 충만함을 누리면서 이런 은혜속에 살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참회 중 신음하는 이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시6:6上)
사실 이 6절은 5절에 이어지기 보다는 4절에 이어지는 것이 문맥상으로 어울립니다. 그래서 이 5절은 사실 ( )안에 넣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시인이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해달라고 탄원하는 가운데 자기의 비참한 형편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4절에 이어지는 6절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고백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6절속에 이 회개와 관련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이 회개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이 금주 한주뿐만 아니라. 다음주 그리고 다음주 가능하면 2주나 3주에 걸쳐서 오늘 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먼저 6절을 한번 다시한번 상세히 살펴보고 그리고 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6절입니다. 연필을 가지고 어느부분이 부족한 부분인지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히브리 성경하고 차이가 나는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에 “탄식하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번역해도 되겠습니다만은 원래 성경의 대부분에서 이것이 “신음하다”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신음함 속에서 곤핍하여 이것이 “야까”라는 단어인데 지쳤습니다. 원아웃되었습니다. 나는 다 기력이 진해버렸습니다. 내가 나의 심음함으로 인하여 지쳐버렸습니다. 그렇게 끝납니다. 그다음에 “눈물로“라는 말이 여기에 나오는데 사실 이것이 앞이 아니라. 뒤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모든 밤에“ 그러니까 이것은 둘다 가능한데 밤마다 밤마다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고 밤새도록 이라고 말을해도 말이됩니다. 어쨌든 밤마다 혹은 밤새도록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습니다. ”나는 밤이면 밤마다 밤새도록 내 침대를 흐느낌으로 뜨게하며 그다음에 이제 나의 눈물을 내 덮을 것을 적시나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시입니다.
“내가 나의 신음함을 인하여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나는 밤이면 밤마다 혹은 밤새도록 내 침상을 흐느낌으로 띄워보내며 나의 요를 눈물로 적십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몇단어 탄식하다와. 신음하다는 좀 차이가 나고. 곤핍하다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거의 안쓰는 단어인데 완전히 지쳐버려서 원아웃 되어버렸다. 그런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은 “내가 신음함으로 지쳐버렸습니다.” 이부분을 해석하면서 이 참회의 교리들을 접근해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셔야 한다고 간절히 탄원한 다음에 5절의 ( )속에 들어갈만한 푸념 비슷한 말을 한 다음에 6절로 이어지는데 그 6절에서 제일처음 고백하는 말이 나는 신음하다가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결국은 우리들은 신음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지기에 앞서서 우선 이 신음의 상태는 고통의 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고 그리고 견딜수 없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비롯된 신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여기에 나와있는 시인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신음이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고통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이 시인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좀더 특별한 측면에서 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시 세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이 시인의 고통은 은혜안에 있던 신자가 죄가운데로 들어가는데서 비롯되는 고통이고 특별한 측면에서 이 고통은 그 원인이 크게 3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첫째는 죄의식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데서 비롯되는 고통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로 돌아가고자 하나 자신의 의지의 무능함을 경험하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음의 마지막 결과는 뭐냐 하면 지쳐버렸습니다. 곤핍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문제는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첫째 시인이 지금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 첫 번째 커다란 이유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이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은혜안에 있던 신자가 죄가운데로 들어가는 그런 경험에서 오는 그런 고통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아주 질이나쁜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를 경험했고 무엇보다도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그런 큰 자비를 경험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준높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던 신자였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믿는 일에 은혜가운데서 생활했습니다. 한 신자가 은혜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말은 죄가 없다든지 아니면 완전히 순결하다든지 하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신자속에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죄의 대부분이 고의적인 범죄로 가득찬 죄악된 생활과 또 죄와결별할 수 없기는 한데 고의적인 범죄는 현격히 적고 살아가면서 자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짓는 잘못들로 이루어진 그 죄된 생활은 같을수가 없습니다. 다시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어느정도 신앙의 상태에 도달하게되면 결코 고의적인 범죄는 하지않는다. 이렇게봅니다. 말하자면 성화에 있어서 완전성화설이라고 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신학적으로도 옳지않고 경험적으로 옳지않습니다. 아무리 성화된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이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죄된 본성들이 있고 죄에 대한 친화적인 성격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것이 남아있는한 사실 신자는 고의적인 범죄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수 있다. 그렇게 믿을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똑같이 죄와결별할 수 없는 죄를 어느정도 지니고 있는 상태인데 한 신자는 죄의 대부분이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로인해서 가득찬 죄된 생활입니다. 한 신자는 그렇지가 않고 그런 고의적인 죄는 아주 현격히 적고 그리고 대부분이 무지하거나 혹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거나 실수하거나 하면서 짓는 우발적인 잘못들입니다. (예를들자면 사람을 이렇게 상대하다가 욱하고 화가 나서 말을 막하거나 혈기를 부리거나 하는 것은 고의적이 아닙니다. “내일은 만나서 한번 혈기를 부려봐” 이러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같은 죄된 생활이라고 할지라도 그 양과 그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 다윗이 말하자면 그가 완전한 생활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까말씀드린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훨씬더 가까이 있는 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은혜안에 있는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있게되면 고의적인 범죄는 현격히 줄어듭니다. 오랜동안 두고 하나님을 거스릴 그런 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안에 있어도 혈기부릴 때가 있고 때로는 잠깐 눈이 어두워서 거짓말을 하거나 그러는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등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배되는 영적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인해서 한순간에 죄의 지배아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건한 신자들이 겪는 그 고통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파격적인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세계에서 죄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그 고통을 굳이 고통의 감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하면 서서히 죄가운데 빠지는 그 고통이 오히려 한순간에 은혜의 세계에서 죄의 세계속으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들어가는 그 고통과는 비교도 될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것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때에 이제 이 시인이 아주 수준높은 신앙의 생활, 은혜의 세계속에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범죄하고 그리고 죄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낀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설교를 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반론을 제기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당신이 주장하던 범죄의 교리와는 차이가 있다. 뭐냐 하면 목사님이 항상 이야기 할 때에는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신자가 타락하거나 범죄하는 것들을 신앙에서 깊이 미끄러지는 것들을 한순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이 준비된 가운데 이루어진 결과이지 순간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자주자주 설교 속에서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여기에서는 신자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속에 있다가 단번에 죄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 반론에 답을하고 그다음을 지나가는 것이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제 어떻게 설명될수 있느냐 하면 이렇게 설명될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마음의 죄와 실재의 삶에 있어서 죄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마음속에 있는 그 인간의 마음의 상태가 선과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도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수가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을 열매를 맺을수가 없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수가 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가 그 삶의 열매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가지가 떨어질수 없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범죄와 실제 행동으로 이루어진 범죄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자마다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실제로 간음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으로 간음했느니라." 무슨말씀이냐 하면 여전히 실제로 간음한것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동질의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이 언젠가는 반드시 간음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죄가 없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없다라고 하는 생각은 바리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나 둘사이에 하나는 실제로 간음한 것이고 하나는 마음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마음의 범죄는 치료가 쉽습니다. 무슨말씀인지 아세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이 거룩한 생활을 가로막는 패역을 이야기할 때에 그 패역은 순수하게 마음의 불순종에서 패역이 생겨난다라기 보다는 마음의 불순종이 오래쌓여서 삶을 낳고 그리고 그 삶이 죄를 낳고 실제적인 행동을 통해서 범죄하고 불순종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혼과 성품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생성되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마음에 그리고 육신의 그 경향성을 총칭해서 우리들이 도덕성과 관련지어 말할 때 그것을 패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것입니다. 미움은 곧 살인하는 것인다. 미움과 용서 시리즈에서 그 문제를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미움과 살인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살인은 미움보다 훨씬 큰죄입니다. 예를들어봅시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깊이 마음으로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 미움의 올무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을 행동으로 옮겨서 사람을 죽여서 살인을 했습니다. 살인을 했을 경우에 이것은 문제가 커지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가볍게 치료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마음으로 범죄했을 때는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면 그 용서를 내가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있는데 행동으로 옮겨졌을 경우에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용서해도 자기 자신이 그 죄의식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제가 아는분 한분이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치어서 죽였습니다. 그러면 사실 그 사람도 예수믿는 사람인데 무슨 원한이 있어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막 가다가 치어서 죽었습니다. 직사했습니다. 그 사람도 잘못한 것입니다. 사실은 신호를 위반하고 건너다가 치었으니까. 직사했는데 다 끝났습니다. 보험도 끝나고 합의도보고 모든 것이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감옥에도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법적으로 모든 책임이 다 면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그 사람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인 사람이다.” 그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범죄한 것과 실재의 삶에 있어서 범죄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인도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은혜의 세계에서 떨어져서 죄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놀라운 영혼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에 분명히 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이 약해지고 그 경건한 마음, 삶속에 죄에 대한 저항력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그래서 마음이 그런 죄를 짓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변해가는 내면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 것이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아직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는 아주 쉽게 정복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볼때에 비록 그가 마음으로 그 여자를 보면서 끊임없이 음욕을 품고 그리고 번민하는 날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실재로 그가 그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 들어가게된 그 죄의 세계 속에서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커다란 맥락에서보면 그가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다음에 실제적인 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해외 여행을 제일먼저 해본 것이 필리핀이었습니다. 시작을 그렇게 후진 나라로 갔습니다. 그것도 이제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가라. 그래서 할 수 없이 지도교수가 되어서 갔는데 학생들이 경비를 줄인다고 가서 어느 교회에서 그냥 갔습니다. 나는 교수라고 강대에서 제워주고 자기들은 바닥에서 자고 그런데 그 교회도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필리핀에 있는 최고 빈민촌속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밥을 푸면 밥이 까맣게됩니다. 왜냐 하면 파리가 와서 다 달파붙어서 젓가락으로 집어도 파리가 도망을 안갈정도로 그렇게 담대한 파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날은 푹푹찌는 여름이고 견디기 힘든 정도의 여름이고 음식은 입에 하나도 안맞고 잠은 제가 잠자리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그런데 그 강대에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습기차고 그런 곳에서 이불도 하나 없이 꾸부리고 엎드려서 기도하다 잠이들었는데 하여튼 너무너무 힘이들었습니다. 그런데 뭐 평생 거기에서 그렇게 사는 선교사도 있는데 뭐 힘들다. 그러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게 그냥 지내고 왔는데 3일째쯤 되어서는 도저히 못견디겠어요. 목욕을 하지 못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인에 들어가서 소변보는 변기는 있는데 문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저기 앉아서 오줌누는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쳐다볼수 있는 그런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거기 있는 선교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기 목욕탕 없습니까.? 내가 목욕좀하고 와야되겠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45분이나 1시간을 차를 타고가면 있는데 이 근처에는 목욕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가 외국에 비하면 그렇게 잘사는 나라도 아닌데 그런데도 그 나라에 갔을 때 그렇게 견딜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길거리 지나가면서 뭐 사먹는 것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 밤에 너무 배가고프면 이 건너편 태평백화점 앞에 가서 오뎅을 사먹습니다. 혼자 가서 길거리에 오뎅집이 쭉있는데 거기가서 오뎅을 사먹을려다가 “가다가 아마 우리 교인만나지” 그래가지고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뎅을 사먹는데 누가 벌떡 일어나더니 “목사님 어서오세요.”
그런데 우리 나라 길거리 음식은 그래도 먹을만합니다. 그런데 거기는 말이죠. 도저히 눈뜨고 먹을수가 없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도성인신”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아무 일 하지않고 그냥 이 세상에 계신다는 그 자체가 그분에게 있어서 견딜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뭐 중국이 더 좋은데도 있지만 중국에 가보니까. 그렇죠. 샴푸도 있고 비누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우리 전도사님 한사람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중국은 한국에 있는 것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뭐든지 다 똑같지를 않습니다.” 맞습니다. 비누가 새숫비누가 빨래비누 같기도 하고 하여튼 있기는 있는데 다 달라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곳으로 옮겨가도 그렇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불편함을 느끼는데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살던 성도가 죄속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은혜에서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죄의 지배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느냐 하면 은혜의 세계의 무미건조함을 강조하고 그리고 죄의 세계의 그 달콤함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은혜에서 마음이 점점 멀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신자의 참된 행복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정말도 그가 유혹하는대로 은혜의 세계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죄의 세계 속에서 약속된 그 놀라운 기쁨, 항상 그것을 제시할 때에는 그 기쁨뒤에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안하죠. 그리고 그것을 제시하면서 우리를 그 죄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고나면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있을 그 때에 우리들에게 있었던 모든 행복들이 사라져가고 그리고 죄의 세력속으로 들어가면서 신자는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그런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가 아주 지나치게 될 때에 정신이상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이상이 된 사람들이 모두다 극도의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지만은 물리적인 요인도 있고 심리적인 요인도 있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하여튼 신자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서 은혜의 질서 속에서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죄로 인해서 이제 죄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 때에 그 신자의 영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죄에 대한 탁월한 인식, 즉 이전에 한번 실패를 통해서 경험한 죄가 주는 고통을 죄의 유혹이 가져다 주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른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 또는 자기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모닥불을 경험해본 사람은 산불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신자는 작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큰 하나님의 은혜, 자기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은혜에 대해서 사모함을 갖게 되듯이 똑같이 자기가 경험해본 작은 죄를 통해서 고통을 맛본 사람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큰 죄속에 담겨져 있는 견디기 힘든 그 고통을 미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 죄에 대해서 자기 절제력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르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고통의 신음을 내도록 만든 전체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제 좀 특별하게 말하면 여기에서는 시인이 신음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세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죄의식.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죄와항거하는 자신의 무능함 세가지 입니다.
우선 첫째 이 시인이 신음하고 있는 이유는 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는 이렇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이 전적으로 누구에게도 핑계할 수 없고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는데서 오는 철저한 죄책감이 이 시인으고 하여금 하나님 앞에 신음하며 울부짖도록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 죄의식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라고 하는 인식에서 오는 것인데 이 죄의식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죄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멈출 줄 모르고 범죄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자기가 그 죄에 대해서 깊이 고통을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그 죄가 본성적으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죄의식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깊이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인이 지은 그 죄에 있어서는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죠. 자기자신이 욕심에 이끌려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지은 죄였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를 핑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자기가 이렇게 죄를 범했을 때에 즉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거절감을 자기 자신이 잘못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더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깊이 고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라고 하는 차가운 거절감을 동반했기 때문에 시인은 자기의 죄의식 속에서 자책감 속에서 더더욱 괴로워하면서 고통하는 가운데 신음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나면 제일먼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자책감입니다. 그리고 그 자책감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책망하게 만들고 그래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길을 찾게할때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경우에 이 자책감은 하나님을 향해서 갖는 기대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고 자책하는 이 마음이 훨씬 더 커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자책감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 자책감이 어떤때에는 그 자책감이 자기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 그래서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시인과 같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그런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동기도 되지만 그런 믿음이 역사하지 않을 때에는 이 자책감은 사람을 한없는 파멸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자책감이 가중되면 죄에 대한 경계심이 오히려 풀어지고 내가 어떻게 더 나빠질수 있으랴.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면서 그러면서 더 깊이 죄에 대해서 자기를 방임해버리는 그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책감은 반드시 자기를 깊이 뉘우치는 가운데 자신은 이렇게 잘못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가 지은 이 잘못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게는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다시 살려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 라고 하는 이 믿음,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정직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 피로 우리를 씻어주셨다. 라고 하는 그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자는 결국은 이 죄 속에서 오히려 더 자책감 때문에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무엇이 더 나빠지랴. 하는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더 악한 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의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지금 신음하고 있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자기가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자책감을 느꼈고 그는 오히려 그 자책감 속에서 더 방종하고 타락하는 대신에 그 자책감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자기의 그 절망적인 영혼의 상태에서 다시 회복을 위한 몸부림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책감 속에서 이 시인은 고통하고 있고 그 고통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신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시인이 신음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입니다. 신자가 은혜의 세계 속에서 죄의 지배로 들어갈 때에 나타나는 눈에 띠는 가장 첫 번째 현상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가운데 있다가 갑자기 죄의 지배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갑자기 신앙생활 자체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아니면 교회에 나오는 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다 내팽개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혜 안에서 살았던 신자들이 범죄할 경우에는 더더욱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그 신앙의 형식이 타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유지되고 있지만 그러나 신앙생활의 형식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하나님과의 참된 친교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는 이미 경건의 세계가 무너졌고 하나님과의 어떤 아름다운 교통도 경험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간헐적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몸부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금 죄에 의해서 지고 있는 신앙생활을 한순간에 되돌려 놓아서 은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그 이유 때문에 지금 하나님 앞에 신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잃어버리고서 비로소 자신의 왕위도 아무 의미도 없고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깊이 신뢰하였던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던 그 제사도 의미가 없고 제물도 하찮은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시인이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한 시대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거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제사가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100%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나 그 모세의 율법전수속에 담겨져 있는 그런 깊은 영적인 비밀들이 그렇게 심도있게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전해졌다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복음을 받았고 그리고 복음에 기초해서 교회가 신앙을 고배하지만 그 고백하는 신앙을 우리들이 의미를 거의 모르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많이 있듯이 복음에 있어서 그런 것이 많이 있듯이 구약에 있어서 율법을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 그 율법을 전수받으면서 그 율법과 친숙하게 살아가면서도 사실 그 율법속에 진정으로 깃들여져있는 그 율법의 정신과 참된 의미에 대해서 어느시대의 사람들이든지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여튼 낮선가운데 살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대에도 종종 하나님이 강력한 은혜로 역사해 주셔서 놀라운 회개와 함께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주시는 부흥의 때가 있다 이겁니다. 그 때에는 그 율법속에 담겨져 있는 깊고 심층적인 의미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놀랍게 살아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사실은 이 제사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해결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 이 제사가 유용할 수 있는 것은 쪼개어 드리는 제물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가지고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제사드리는 사람의 내면에 자기 깨어짐이 있기 때문에 이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진다 라고 하는 영적인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가운데 이 율법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신학적으로보면 이 구약의 종교는 신약의 종교와 아주 정확하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구약의 종교의 깊이를 이해하면 신약의 종교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인이 이런 범죄를 통해서 그런 형식들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경건한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제사하고 율법을 가르치던 많은 사람들, 주님을 찬양하던 많은 사람들, 모두다 세웠고 그리고 그 나라가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죄의 지배속으로 들어오기전에 은혜의 세계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랑과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해서 이 시인이 견딜수 없이 고통스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있는 그것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신음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대게 이 신음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매우 깊어지면 언어를 잃어버리고 신음이 터져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우리들이 지금 기도 속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신음하는 그런 종류의 신음이 아니라. 이 시인이 은혜의 세계에서 멀어져서 죄가운데 들어감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경험하는데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깊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 생명의 근원이시며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모든 힘의 원천이십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친교 속에서 신자는 고난을 이길 담대함을 얻고 유혹을 뿌리칠 용기를 갖게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난을 받으면서 주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기를 포기하고 죄가운데 살면서 이익을 누리는 삶보다 훨씬 더 즐거운 삶이라고 택할 수 있는 용기도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오랜동안의 신앙의 생활을 통해서 경험하게됩니다. 한 신자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날마다 그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와 동행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 하나님과의 친교 때문에 감격할 수 있는 신자는 모든 것을 가진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주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주님이 그에게 주시고 싶으신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자신의 그 한번의 범죄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교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만들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 그 범죄는 곧 해결될수 있을것이며 그리고 제사와 그리고 많은 제물, 정성스럽고 성대한 그 속죄의 제사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어둠속을 걷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빛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 어둠 속에서 경험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데서 즉 하나님과의 사랑의 감각을 잃어버린데서 비롯되는 고통이었고 그 고통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깊이 신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조용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의 고통의 이유를 다양하게 말합니다. 때로는 사업의 어려움이나, 직장의 어려움, 가족들과의 관계의 어려움, 물질적으로 궁핍한 삶, 이런 것들이 마치 우리의 이 신앙생활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때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지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때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때를 은혜가운데 지날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던 때, 주님의 사랑이 늘 느껴지던 때,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던 영적생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던 때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도 이기고 그리고 슬픔도 견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이 고통의 문제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가질것이 요구됩니다. 그 새로운 시야라는 것이 무엇인고하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모든 고통과 슬픔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망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우리를 끊을수가 없으며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들이 이런 모든 것들을 이기고 넉넉히 이기고 남을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신앙이 우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깊이 신음하고 고통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아파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뇌하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이 있습니까? 그냥 하루하루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은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낫겠지. 하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신앙적인 희망이라기 보다는 요행을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거의 어떤 진보도 볼 수 없는 가운데 가는 것입니다. 차이는 뭐냐 하면 이 시인은 그것 때문에 시음하듯이 고통스러워 하며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시인이 지금 신음하고 있는 또 하나 세 번째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속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철저한 죄인의 무능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탄식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말이죠. 생각이 참 중요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옳다하고 믿어도 옳은 대로 인간들이 모두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어거스틴을 아마 아실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아주 걸출한 성자였습니다. 그 젊이었을 때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이던 마니교 철하게 깊이 빠져서 방종하는 생활로 흘러갔고, 그 어머니 모니카여사가 그를 위해서 일평생 기도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죠. 그렇죠.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어머니가 울부짖으면서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그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깊이 회심을 경험하게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거기까지만 여러분들은 아시죠. 그런데 다시 타락합니다. 그의 기록을보면 다시 돌아왔다가 한 2년정도 뒤에 다시 타락하게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제 그 회개가 부족했겠습니까. 정말 여기 기록된 대로 흐느낌으로 자기의 침상을 띄워보내고 눈물로 자기의 요를 적시는것 같은 그런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오랜동안 이 방탕한 젊은이 속에 쌓였던 이 더러운 죄의 성향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범죄하게 됩니다. 그 얘기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있죠. 그러나 하여튼 그렇게 범죄하고 미끄러지게됩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성자와 같은 크리스챤이됩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에 있어서 최대의 주제가 뭐냐 하면 물론 성경이지만 그 최대의 주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서 개신교 신학을 수립하는데 큰 빛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마틴루터와 칼빈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자기들이 성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그 어마어마한 저작을 보면서 그 신앙의 세계에 감화를 받고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 성경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해야지만 옳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은혜가운데 있다가 죄속에 빠진 신자들의 가장 강렬한 소원은 뭐냐 하면 한시바삐 그 은혜의 세계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히 그 은혜의 세계속에 살았을 때에 죄의 세계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를 자극했던 충동만큼이나 충동적입니다. 그래서 빨리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금식기도도 하고 중대한 결단도 하고 하는데 그러나 그런것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렇게 특별한 죄가운데 빠졌던 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너무나 쉬운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의 철저한 무능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능은 특별히 두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데서 오는 죄에 대한 무능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제 이렇게 이 시인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타락하고 난 다음에 경험하게 되는 자기의 육신이 죄에 대해서 익숙해지는데서 오는 그런 무능입니다. 하나는 은혜로부터 멀어지는데서 죄와 더불어서 싸울 수 없는데서 오는 무능이라면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 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빠져버리는데서 오는 그런 무능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죄는 자극을 받으면 촉진됩니다. 뭐냐 하면 엊그제 고등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기를 하도 괴롭히니까. 칼을 가지고 와서 친구의 엎드려있는 등을 찔러서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습니다. “왜그랬느냐?” 그랬더니 “친구”를 48번인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영화 칼로찔러죽이는 그 영화있지않습니까. “친구” 그래서 그 영화의 대사를 전부 외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끊임없는 암시를 가져다주면서 뭐냐 하면 살인에 의한 죄책감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항상 죄가 그런식으로 일어나게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지금 막 은혜받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어쩔 줄 몰라서 펑펑 울고 있는 사람보고 “너 빨리 가서 간음해봐” 그러면 간음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작동을 안 합니다. 환경을 만들어주고 계속해서 유혹해야지만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 같은 죄인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에 펑펑울면서 감사하고 내가 이제 모든 나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겠다. 그랬을 때 칼을 들려주면서 “ 날에 너 돈 떼먹은 사람인데 가서 찔러죽여” 그러면 죽일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충분히 여건히 형성되고 갖추어져서 신자로 하여금 신앙의 무장해제를 다 시키면서 그러면서 무능해진 가운데 죄가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경건생활이 약화되는 것은 마치 에이즈에 걸리는것과 비슷합니다. 에이즈가 무슨뜻인지 아시죠. 후천성 면역결핍증입니다. 그러니까 무슨이야기냐 하면 그AIDS “아이고 이제 다 살았구나” 그런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병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있는 형제가 하나있었는데 에이즈는 아닌데 무슨병인데 모르는데 그것 겁나는 병이었습니다. 결국은 장가갔다가 부인이 못살고 이혼했는데 감기만 걸려도 무균실로 들어가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균실이 뭔지아시죠. 균이없는 병실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겠습니까. 15년전에 무균실 사용료가 하루에 30만원인가 냈데요. 치료하는 사람들도 무균복을 입고 들어가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어떤 병원체에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의사들 이야이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몸에 암세포를 안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가지고 있고 여러분들도 다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스스로 살아가면서 이겨요. 그런데 이제 그것이 10만개가 넘어가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백개 있는 것은 그저 그러다가 건강하면 이기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기 속에서 계속 끊임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건생활하지 않으면 그런 점에 있어서 모든 저항력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여러분들을 무너뜨릴 때 제일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의 헌신된 경건생활을 어떤 식으로든지 약화시켜서 그런 죄에 대한 저항력을 모두 해제시키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은혜받고 펑펑우는 사람보고 “살인해봐” “간음해봐” 그러면 안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마귀도 너무 잘압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해제시키고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무장들을 모두 해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화된 가운데 범죄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이제 그런데서 서서히 자기가 무장해제되고 그리고 죄가운데로 들어가서 죄가운데로 들어가고나니까. 그다음에는 전에는 기도생활이 하기싫어서 안했는데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은혜의 세계에서 죄가운데로 쑥들어가버리고나면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전에는 스스로 말씀의 은혜받기를 마음을 닫고 거절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수 없었는데 이제 이렇게 신자가 죄가운데 들어가고나면 마음을 열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해도 그 말씀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그런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되니까. 이 시인이 철저한 자기의 무능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을 회복하고싶죠. 신자가 죄를 범했을 때에 왜울어요? 그의 소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다시 주님의 그 은혜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죄된 삶에서 돌이키는 것, 그것이 신자가 원하는 가장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속에서 시인이 철저하게 몸부림 치면서 신음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바로 바울이 고민했던 대목이고 후에 종교개혁자들이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그 대목입니다. 이 다윗의 시속에 아주 놀라운 복음의 뿌리들이 내재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죄에 대한 깊은 경험, 그 속에서 오는 전적인 죄에 대한 무능을 경험한데서 오는 탄식, 그 속에서 오로지 은혜로 자기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온 덧입혀진 그 사랑의 의,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람의 이런 죄에 대한 체험, 이런 것들을 통해서 발견하게된 인간의 전적인 무능, 이런것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또다른 사랑의 의를 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종교개혁자들의 눈을 열어주는 훌륭한 복음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약 속에서도 그런 풍부한 경험들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깊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죄가운데서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셔서 새로운 회복의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몸부림 친 덕분이 아니라. 사실 그렇게 몸부림 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참회를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에게는 항상 자기과시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참회를 단 한번이라도 깊이 경험한 사람은 이점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자신의 참회 때문에 그 참회가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자신도 극복할 수 없는 죄의 상태에서 몸부림치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이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깊은 참회를 경험한 사람들은 항상 겸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밑바닥속에 내제하는 깊은 이 죄의 경향성들과 이 비참함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고 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무엇인들 안해보았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로서 그런 죄의 상태에서 자기가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벽, 이라고 말하죠. 도벽이라든지 거짓말 하는 습성같은 것을 벽이라고 말합니다. 성벽, 그럴 때 “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벽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경향성입니다. 지속적인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제 시인이 저지른 이런 죄같은 것은 더더욱 그런 벽들을 굉장히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처음에는 자기가 선택해서 죄를 저질렀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죄가 자기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운전하다보면 너무 과속을 하고 운전을 난폭하게 하게되면 어느 순간에 그 차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있죠. 핸들을 이쪽으로 틀었는데 미끄러지면서 차가 반대편쪽으로 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돌기 시작하죠. 그런 것도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어느순간에 인간이 차를 통제할 때에는 그 안에 있는데 사실 그 차의 성능과는 어울리지 않게 과도하게 속력을 낸 것은 사람의 선택이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도 처음에 인간이 선택하는데 선택한 그 후에는 인간이 그 통제력을 그 죄가 벗어나기 시작하면 그다음에 그 죄가 인간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세계에서 멀어져서 죄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반대의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그렇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들이 맨처음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삶을 선택하죠. 물론 더크게보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선택하지만 신자는 순간순간 은혜안에 살기 위해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러니까 선택하는데 처음에는 자기가 그 은혜를 선택했지만 그러나 은혜속으로 더깊이 들어가면 깊이 들어갈수록 그다음에는 자기가 은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내 안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그 은혜안에서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여기에서 정반대의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나 자기 자신이 돌이킬수 없는 철저한 무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시인이 깊이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영혼의 침체가 거의 일반화된 가운데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영적인 회복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알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와서 영혼의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10년만에 회복을 경험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20년만에 경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자기가 침체속에 빠졌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높은데서 살아봤어야지만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기도도 기도가 막힌다. 막힌다. 그러는데 뚤려봤어야 막힌줄을 알지. 그저 이러는가보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을 누려본사람입니다.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 옛날에 말씀의 맛을 본사람이니까. 그런데 아예 그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시작할때부터 처음부터 계속해서 시종일관 침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침체가 일반화된 이런 시대 속에서 영혼의 회복을 보기 힘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목사들이 몇 명모여서 이제 이런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가운데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왜그렇게 열심히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가? 높은 수준에서 말하려고 하지말고 오늘날 침체가 일반화되어 있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왜 은혜를 받으려고합니까? 우리들이 밤새도록 토론하면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자기가 불편해서”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내가 가만히보니까. 진짜 사실입니다. 왜 은혜받으려고 합니까? 은혜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참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식의 생각만을 가지고는 실제로 하나님이 정상적인 은혜를 주셨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나타나는 특성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도 어쩜 그렇게 신속하게 그 은혜를 잃어버리는지 말이죠. 마치 은혜를 반납하기 위해서 받는것처럼 말이죠. 주신 은혜를 오랫동안 간직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받은 즉시 반납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구하는 그 궁극적인 동기는 성경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되어냐되느냐?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행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가 그 은혜 속에서 새로워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생존의 소명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그래서 내가 더 주님을 닮고, 주님을 섬기고,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된 행복은 신자안에 있는 은혜가 가져다준다기 보다는 그 은혜가 그를 끌고가는 그 삶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한번의 은혜로 족한 것이 아니라. 늘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을 여기에 남겨두신 것은 바로 그런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 은혜를 남겨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서만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에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이런 회복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드물게 일어나고 그리고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 은혜가운데서 회복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영혼의 침체, 죄가운데 눌려서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은혜의 세계, 그의 자비로움과 은혜, 그 놀라운 사랑, 그분과의 친교, 거기에서 오는 행복, 그 기쁨, 그 비할데 없는 사랑, 이런 것들을 말할 때에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패역한 상황까지 가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과의 이런 탁월한 교제, 그리고 그 은혜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주님의 자녀, 주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이렇게 자기 죄의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합니다. 그리고 그죄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됩니다. 더더군다나 앞으로 영적인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사람들은 더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에서 영혼을 돌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그냥 아름다운 해변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철로역정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놀라운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알고 죄가 우리를 위해 어떻게 역사하고 신자가 어떻게 넘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들을 쓰러뜨리는지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영혼들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자질을 갖출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인 동시에 또한 우리들에 의해서 돌봄을 받아야할 다른 영혼들의 문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싶으면 죄에 대해서 배워야합니다. 그러면 은혜에 대해서 알게되고 그렇게 되면 그 죄 가운데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길을 배우게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이 죄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 죄 속에서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해질수 있는지를 배우면서 걸어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미끄러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다음에 견딜수 없이 고통하며 하나님 앞에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구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며 신음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친교 속에서 떨어진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돌이켜 다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기에 너무나 무능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절망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자극하여 이 사람에게 범죄한 시인에게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진정한 탄식, 작은 것을 작게보지 않고 깊이 고뇌하며 아버지 앞에 이렇게 몸부림치는 이런 죄에 대한 깊은 몸부림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비록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신음 중 지친 이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시6:6中)
지난시간의 내용을 약간 간추려야지만 오늘 내용들이 쉽게 전달될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이것은 히브리 성경에 “내가 신음함으로 지쳤습니다.”이렇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밤마다” 혹은 “모든 밤동안에” 그러니까 밤마다도 되고 혹은 밤새도록, 모든 밤마다, 밤이면 밤마다. 밤새도록 내 침상을 띄우며 눈물로 내요를 적십니다.“ 이렇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신음은 결국은 죄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시인의 고통이고, 그리고 그 궁극적인 고통의 이유는? 고통의 이유를 세가지를 거론했는데 하나는 견디기 힘든 죄의식이었고 다음에 두 번째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고통 그리고 세 번째는 돌이키려는 자신의 의지의 무능함을 철저히 자각하는데서 오는 고통, 이런 것 때문에 시인이 신음하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 뒤편에 이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신음함으로서, 신음하기 때문에 지쳤습니다.” “내가 신음함으로 지쳤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웁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곤핍하여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말하자면 여기에 쓰여진 단어가 ”약가“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원아웃되는 것입니다. 다 소진해서 기력이 없이 낙아떨어져서 그래서 살았으나 죽은자처럼 온 힘이 다 빠져서 소진되어버린 상태,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음함으로 즉 죄의식,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통, 그리고 돌이키고자 하지만 자신의 철저한 무능, 이것을 인해서 깊이 신음하는 동안에 이 시인은 결국 어떤 해결을 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신이 소진되어버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말 성경에서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흔히 쓰지않는 ”곤핍“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곤란하고 그리고 결핍된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곤핍이라는 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지쳤습니다.” 아니면 “내가 신음하기 때문에, 혹은 나의 신음으로 인하여 나는 지칠데로 완전히 지쳤습니다.” 더 실감나게 번역할려면 “내가 신음하다가 신음하다가 죽은 것 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훨씬 가슴에 다가오죠. 그렇죠. 그래서 이 시편은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시인이 되어야지만 이 시편을 잘 이해합니다. 누구든지 은혜받으면 시인이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밤에 잠이안오지 않습니까. 초롱초롱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속으로 들어가야합니다. 겯가지로 나가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라. 묵상하라. 그러는데 묵상할려면 뭘좀 알아야지 묵상을하지. 그렇죠. 그러니까 성경은 특히 시편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만님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면 은혜가 증폭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방위나 갔다오고 공익근무한 사람에게 군대갔다온 사람이 옛날 군대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책으로 썼다고칩시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냥 그러니까 그러나보다. 이렇게됩니다. 또 면제받은 사람에게 6.25때 화염병들고 탱크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그런 것 쓴 역정의 용사들의 자서전을 읽으면 그것을 이해하겠습니까? “바보같이 왜 슈르탄을 들고 탱크속으로 들어가“ 이해가 안가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는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점점더 풍성하고 없는 사람은 그것마저도 고갈됩니다.
그런 번역입니다. “내가 신음하다가 신음하다가 지쳐서 이제는 죽은자 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곤핍이라는 말이 이렇게 지칠대로 지쳐서 모두 소진된 상태를 보여준다고 하면 왜 시인이 그렇게 소진되어 버렸느냐? 그 이유를 크게 세가지를 들수있는데 하나는 집중. 또 하나는 사모함, 또 하나는 시간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집중입니다. 시인이 범죄하고 나서 이 깊은 영혼의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무엇에 집중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그 문제에 자신은 범죄하였고 그래서 은혜를 떠나서 죄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유혹의 순간보다도 천배나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 하나만 온전히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시인은 집중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소진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이죠. 아무리 양심에 화인맞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맛을 본 사람들은 자기가 죄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까요? 안할까요? 합니다. 아무리 방탕한 길을 걸어가도 어느순간 딱 복잡하던 삶이 멈추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납니다.
신자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악한 신자, 지금 아무리 죄가운데 있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잊을수가 없습니다. 수없이 받는 편지입니다.만은 오늘도 편지한통을 받았는데 요즘은 답장도 못합니다. 인터넷을 저는 더 이상 손을댈수 없다.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갈망합니다. 그런데 죄가운데 있습니다. 자기안에 두 개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안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각합니다. 그것도 자주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 정도가지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자가 죄가운데 있으면서 어느한순간에 진실한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녹듯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쉽게 회복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뭐가 필요하느냐? 집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게 의미가 없으며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갖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행복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단 하루만이라도 살수있다면 나의 남은 생애의 백년을 그 하루와 바꾸겠다.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서 백년을 왕궁에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단 하루를 지옥의 불길 속에서 살겠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 그리고 거기에 집중하는 마음,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쉽지를 않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종류의 죄에 빠진 사람들은 이 시인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밧세바의 죄에 빠져있는 경우에는 아주 뼈속깊이 그 죄악된 경향성들이 파고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굴복하며 살지않을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이따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깊이 자기의 고통을 아뢰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정도가지고는 회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신자의 마음은, 죄인의 마음은 그런 속에서 반복적인 실패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많이 쾌락에 탐닉하고 그리고 자기를 방탕한데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러 성경도 안읽고 일부러 기도도 안하고 그리고 일부러 예배에도 참석안하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전부 죄인의 심리에서 보면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은 나를 안돌아보신다.” 그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싫어하는 죄인의 방탕한 기질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그런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포자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나빠지면 뭐가 나빠지겠는가. 그러면서 더큰 악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담대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다시 그 은혜로 돌아오기 더 먼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번의 진실한 회개면 하나님께로 돌아갈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이 죽기직전에 진실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능히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시대는 수천년이지만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을 성경은 딱 한사람을 보도하고 있다. 그대가 어찌 그 한사람에 해당할 것이라고 추측하느뇨.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회개를 미루고 있느뇨” 한 사람이 그런 사람 있었는데 어떻게 그 한사람에게 신앙을 거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멸망하고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얻었는데 그 어떻게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거느냐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글이 아주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글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이 바로 뭐냐 하면 그런 집중입니다. 금식을하면 실재로 기도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뭐 한 일주일정도 굶어보세요. 그러면 정말 정신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도 제대로 안나옵니다. 그리고 막 정신이 혼미하면 먹을것만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대신 금식하면 뭐가 있느냐 하면 24시간 주님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기력이 다운되니까. 그다음에 육체적인 욕망도 죽는 것은 아닌데 잠시 기력을 같이 잃게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금식의 힘입니다.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기도중에 우리를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신음중에 지쳐서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렸던 이유는 거기에 깊이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어떤지모르지만 저도 한때는 좋아했습니다만은 요즘은 별로 그렇게 열정이 다 식었는데 옛날에 보면 사람들이 철야기도 나오라. 그러면 안나와도 월드컵한다. 그러면 밤새지 않습니까. 4시경기 보기위해서 밤새도록 술먹고 그리고 간식먹으면서 기다리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월드컵 경기하나 끝나고나면 여러명 죽었다고 신문에 나오지않습니까. 그것 왜그래요. "슛골인“ ”으악“ 그리고 죽는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너무 집중한 나머니 뇌출혈로 죽던지 뭐 그 죽은 사람이 축구팀의 감독이라. 그러면 이해가 가요. 아무 상관도 없고 ”대한민국 만세? 그러다가 죽은 것입니다. 집중입니다.
시인이 죄가운데 있으면서 신음하다가 거의 죽은 상태가 되어버릴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집중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잠시전에 범죄할 때에는 자기 그죄의 유혹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회복이 될 때에는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난 후에야 일평생동안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온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알게되었습니다. 주님의 그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린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견딜수 없는 고통이었고 나머지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철저하게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리워하며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돌이킬수 없는 자신의 의지의 무능함에 대해서 뼈저리게 통감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지쳐서 죽을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시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하는 그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에 대한 집중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그는 어느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자신을 소진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집중적인 추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것이 무슨 부흥회 나와서 한번 펑펑 우는 것으로 해결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점에서 그 시작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깊이 있는 신앙으로 들어가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면서도 항상 무엇에 대한 깊은 집중력을 가진 그런 사람이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영적인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가질 때 그가 진정으로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왜 멀리 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떨어지게 되었을 때 죄가 어떻게 자기에게 왔고 역사했는지. 자신의 영혼 속에서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화목하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하나님 앞에 이방인처럼 되었는지 그리고 사망가운데 있는자 같이 되었는지. 그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의 회복을 하나님이 약속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것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는 사람들이 어느순간 와서 너무 힘들어서 펑펑울고 돌아간 그 부흥회가 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수가 있겠습니까. 눈물씻으면 그만이지 뭐가 남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깊이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은 좋은데 요는 뭐냐 하면 이 시인처럼 집중적으로 이제는 모든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직 종일 눈물을 머금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을 집중하며 하나님 앞에 메달리는 그런 노력, 그것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에 대해서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는지 한번 보세요. 수요일날 예배드리고 말씀들은 후에 밤이 늦도록 돌아가지 않는 지체들을 봅니다. 특별히 어린 자매들이 수요일마다 그렇게 늦게까지 기도하고 가더라고요. 얼마나 가슴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까. 뭐 그들만 죄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가슴아파하고 기도할 때 마음이 뭐겠습니까? “어떡하면 내 처지가 시편 6편의 시인의 처지와 유사한데 어떡하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무엇을 주고서라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사고싶은데”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도 그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모두는 아닐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루 바쁘게 이일, 저일 하면서 밥 벌어먹고 살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또 이런저런 세속적인 일을 만나고 그러다보면 다시 자기가 영혼의 문제에 집중되었던 그것들이 다 흩어지고 집중이 다시 흩어지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도 안하고 말씀도 안듣고 공예배도 몇번씩 빠지고 이러면서 한 주, 두 주, 세 주, 네 주 건너가버리면 그다음에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나면 그 고민조차도 안되는 것입니다. 저 밑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건조하고 딱딱한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자신의 죄의문제,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힌 문제를 인해서 너무 고민한 나머지 한번 입이 이렇게 부릍터본적 있습니까? 황망히 목숨이나 연명하기 위해서 찬물에다 찬밥넣어서 말아먹다가 몇수가락 뜨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졌는데 그리고 목이메어본적 있습니까?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아, 지금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마음 때문에 길거리에서 잠시 멈추어서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흐느낌을 느껴본적 있습니까? 은혜가 충만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때에 지나가던 길, 섬기던 교회, 섬기던 일, 주님과의 추억이 서린 어떤 물건들을 보면서 주님과의 그 깨어진 관계 때문에 고통하면서 한번 울먹여본적이 있느냐고요? 그런데 연애할때는 그렇게 하지않습니까.
옛날에 아주 잘 아는 자매하나가 있었는데 대단하죠. 신앙으로 똘똘뭉쳐진 자매였습니다. 교회안에서 형제하고 사귀다가 형제에게 채였습니다. 술로밤을 새우더라고요. 여러분 웃는 사람은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개를 끄덕인다고 아느냐. 심각할때는 기도로 신앙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사람이 뭐 형제에게 채였다고 아,무 형제가 그형제 하나뿐인가 뭐 그랬다고 술로밤을 새우나. 그것은 아직 사랑의 아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저 남자에게 채인 자매들은 술이너 퍼먹어라. 그 얘기 아니죠. 잘못되었죠. 그렇지만 사랑의 감정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깊이 빠지면 안됩니다. 적절해야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해서 통제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도가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신자들의 마음은 그렇게 사랑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진짜 그러더라고요. 밤먹다. 밥수가락 뜨다 말고 눈물을 펑펑쏟고 혼자드러누우면 베겟잇을 적시고 같이 걸어가던 길을 보면 주저앉아서 울고싶고, 입술이 다 부르트고 말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집중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죄함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지독한 분이어서 웬만큼 고생하지않고는 절대로 용서를 안해주신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진실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우리들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침묵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더라면 시인이 그것을 깨달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운데 빠져서 막 살다보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하나님 저 너무 힘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러니까 ”오, 그래 무슨 염려가 있느냐. 이리와라.“ 하나님이 단번에 안아주셨더라면 이 시인이 아마 여전히 세상에 대한 사랑과 미련, 그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아보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속에 보면 항상 시인들이 자기의 죄든, 아니면 악인으로부터 받는 정당한 고통이든 그런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공통적으로 모두 경험한 것은 뭐냐 하면 일시적인 하나님의 침묵, 시편2편 새벽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주시는데 거기에서도 시인이 악한 사람에게 계속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니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러니까 지금 금방 기도를 시작하는데 “하나님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심사가 시작되어야지만 통촉을하지 이것은 벌써 깊은 고통 속에서 오래도록 하나님을 바라보아서 그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마음속에 한처럼 맺힌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눈물로 탄원하는 기도입니다. 바보가 아닌다음에야 바로 느낄수있지않습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하가 왕에게 통촉하옵소서라는 말을 쓸때에 “폐항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칼국수를 먹는 것이옵니다. 통촉하소서.” 근방 떠오른 생각을 통촉이 아닙니다. 너무 오랬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응어리철 맺혀져있는데 그 왕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 마음, 그것을 진심으로 토할 때 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마시고 제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이 진심을 주님께서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통촉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다 어디에서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회복하지 못할 사람들은 그 침묵 속에서 좌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사람들은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간절히. 시인이 그렇게 매달리다 매달리다 이제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모든힘을 소진하고 이제는 거의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비춰보더라도 이 시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그 은혜로 이 시인을 살게하신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이 범죄하기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은혜를 떠나 죄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처절하게 몸부림 침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이었고 그리고 죄를 통해서 잃어버리게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이 시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 모두 집중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 중요한것만큼 집중하시나요?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까?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삶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합니까.? 그리고 차라리 그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일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서 하나님과의 화해속으로 들어가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 집중적인 결의가 여러분 속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을 그 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 쏟아부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인이 이렇게 신음 속에서 지쳐 소진할 수 있게 되어버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에 대한 갈망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모함 때문입니다. 집중과 사모함이 마찬가지입니다. 사모함이 없이는 집중이 있을 수 없고, 집중 없이는 사모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자신의 마음을 모두 집중되서 자신의 삶의 모든 패턴까지도 오직 그 하나님의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대해서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할것같으면 이 사모함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불길같은 욕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직 깊이 알지 못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어떤 파괴를 가져오는지 알지못했을 때에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릴수 없고 주를 찬송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죄에 대한 욕망이 이 시인의 마음에 불붙었지만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나자 그 결국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나자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붙었고 그 영혼의 회복에 대한 불길같은 열망은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있던 죄에 대한 욕망을 서서히 태워버렸습니다.
산에 불이나게될 때에 그 불을 끄는 일이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용의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진국들도 이 산불은 굉장히 골치아픈 사회문제입니다. 그런데 제래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산에 불이 막 번져갈 때에 아예 반대편에서 한번 불을 더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쪽에 있는 불길이 넘어와서 더 태울 제목이 없도록 미리 산을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불길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죄를 경험하고 신음하다가 지쳐서 나중에는 거의 죽을정도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결국은 죄에 대한 욕망때문이었습니다. 그 불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죄가 무엇인지를 맛보고 나서는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나누었던 그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의 불길이 이 시인속에 있는 죄의 욕망을 훨씬 능가하도로고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 열망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지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한 욕망이든 혹은 그것이 육신적인 욕망이든지간에 욕망에 사람이 한참 사로잡히고나면 그다음에는 탈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막 기도할 때 집중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나면 끝나고나면 온몸이 확 풀어지면서 탈진이옵니다. 그대신 아주 기분좋고 유쾌한 기도를 다 쏟아붓듯이 하고 드러누으면 몸이 솜털처럼 막 하늘로 뜨는 것 같은 것을 느끼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자기를 신령한 일에 소진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그런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깨뜨려지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망과 죽음가운데서 잃어버린 주님을 향한 기림과 감사 때문에 몸부림 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극도로 영적인 탠션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속에서 이 시인이 깊이 아파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죽은자 처럼 이렇게 낙아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신음하다가 마지막에는 지쳐서 죽은자와 같이 되게끔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진액을 짜내는 그런 회개였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너무 낭만적입니다. “했으면 좋을텐데” 하는 그런식의 갈망이라기 보다는 희망사항입니다. “올해 소원이 무엇입니까?” 첫째도 주님의 사랑을 다시 찾는 것, 둘째도 주님의 사랑을 다시 찾는 것, 셋째 소원은 그 사랑을 찾을수 없다면 주님의 품에서 죽는 것,“ 이런정도의 아주 비장하고 강렬한 사모함,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용서를 포함해서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다.
어렸을 때도 보면 저는 나이들어서 은사를 경험했습니다만은 오히려 저는 그런 은사를 잘 경험하지 못했어도 다른 방면으로 은사를 경험했어도 제가 주일학교 학생들을 이렇게 가르칠 때에 그 아이들을 모아놓고 막 기도하면 그 아이들이 방언받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뭐 초등학교 2,3학년들이 방언받아서 얼마나 신앙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주위에서 중고등부 다니는 언니들도 받고 그러니까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사모함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런 방언을 받고 싶다고 막 매달립니다. 그러면 좀 지각이 있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렇죠. 나는 그 국민학교 2.3학년들이 방언 받는것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눈물을 한번 더 흘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그런 관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내들을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받으면 엄청나게 뭐가 되는줄 알고 그것을 달라고 막 눈물흘리고 초등하고 애들이 매달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죠.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사모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 많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모함을 갖는 사람들에게 이 용서의 은혜를 포함해서 모든 은혜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할 수없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나는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되겠다.”라는 마음에 그런 불꽃을 나는 일으킬수 없다. 주님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으면 난 일으킬수 없다.“ 그것은 다 일어난 다음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는데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으켜주시는 것이다.“ 나중에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을 간절히 갖고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모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그렇게 불붙여 주실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합니다.
여러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윗과 같이 이렇게 소문난 범죄를 통해서 천국을 거니는것과 같은 영혼의 행복,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서 지옥의 밑바닥을 구르는것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떨어진 그런 경우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시인이 이렇게 자신이 지은 죄를 인해서 견디기 힘들도록 이렇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시인의 죄가 유벌났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시인이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렸던 그 행복과 이 은혜의 수준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 시인이 이렇게 깊이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속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한 깊은 고통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시인보다는 훨씬 도덕적인 사람이요. 하나님 보실 때 훨신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의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오는 행복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젊어서 한맺힌 부부가 다 때려치우고 갈라서고 싶은데 자식들 챙피해서 마지못해서 각방쓰고 사는 것 처럼 그런 종류의 부부생활과 같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엄밀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중에 대다수는 한달이 넘도록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도 잘 살아가죠. 여러분중에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씩 기도를 한번도 하지 않아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아주 훌륭하게 살아가죠.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는 주일 낮예배에 와서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 여러분들 아닙니까? 정말 우리들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그러한 간절한 갈망, 그 갈망 속에서 신음한 나머지 마지막에는 갈망하다가 갈망하다가 탈진해버리는 것 같은 그러한 사모함들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읽으실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우리가 정말 주님을 찾는자들입니까? 주님이 보실 때 정말 우리들이 주님을 갈망하는 자입니까? 정말 주님의 그 은혜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아주 단순한 교과서적인 이신앙의 고백이 있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안하고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무섭습니다. 명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도무지 아파할줄을 모르는 여러분들이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될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정말 두렵다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습니다. 무엇이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마음 속에서 사라졌는데도 그리스도인인 것 처럼 가장하며 살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면서도 아주 넉넉하게 살아가면서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것처럼 위장하며 오랜세월을 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은 분명히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을수 있을까요? 그 속에서 몸부림을 볼수있습니까? 그 속에서 범죄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주님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은 어린아이과 같은 마음을 그 속에서 읽을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렵습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신음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의 기억이 그를 고통스럽게 해서 신음했습니다. 돌이킬려고 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돌이킬수 없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신음했습니다. 그 모든 신음의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그런 사랑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렇죠.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 때. 그렇죠. 견딜수 없는 고통이 엄습하면 어린아이처럼 맨발로 주님의 품으로 뛰었습니다. 기도도 잃어버리고 그분의 품에 안겨서 펑펑울었죠. 그리고 나는 하나님 밖에 의지할분이 없다고 고백했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한순간에 우리에게 밀려왔습니다. 무서워서 도망쳤던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갈수 있는 담대함은 그 신적인 평강이 가져다준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보면 대적들은 물러갔습니다. 질것같은 싸움이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받았을 때도 우리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을 때는 주님께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찢어진 속살을 그분에게 내어놓고 아프다고 울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도 더 깊은 고통을 당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보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업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도록 만들어주셨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의 관계가 있을때에 우리들이 살아가던 삶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렇죠.
그리고 이 세상에 가난이나 환란, 시련이나 고통, 그 어떤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있을 때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인도 잃어버렸고 우리도 잃어버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수방관하고 있고 지금이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신음하다가 신음하다가 탈진하리만치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랐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정말 우리는 죄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합니다.
저는 솔직히 최근 몇 달동안 아주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두렵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해도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별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 죄의 위험을 말해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길에 대해서 말해도 쉽게 그 길에 도전하지 않는 그 머뭇거림 그러면서도 여전히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될까요.? 성경이 가르치는바에 의하면 외식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쪽을 택하든지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삶입니다. 신자가 신자일수 있는 그 결정적인 특징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마음이라고 말씀드린 것을 여러분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사모하는 바가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인해서 고통하며 주의 은혜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 마음이 자신에게로부터 멀어진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는 그런 마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엇을하며 일생을 살든지 어떤 지위를 누리면서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살든지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속에 회복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자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화와 같은 것이며 많은 사람이 수많은 재산을 드려서 제물을 가지고 이 사랑을 사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없는 일과 같아서 하나님께 멸시당하시가 일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사모해야할바가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시인을 보십시오. 사모하다가 사모하다가 마지막에는 탈진하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주님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거시는 가장 간절한 기대중의 하나는 뭐냐 하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 앞에 목말라하지 않고 깊이 사모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러분들이 모정의 결단을 내리고 그 사모함을 회복하지 않으면 지금 여태까지 살아온것과 같은 지리멸렬한 삶이 일생동안 계속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세상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도 못하고 주님을 사랑해보지도 못한채, 세상의 즐거움도 맛보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도 못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시시한 인생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알아가면서 날마다 감격하고 그 사랑의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그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고 자랑스러운 인생입니까. 비록 그가 높은 지위와 많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밀월의 사랑의 기쁨은 부귀와 영화보다도 뛰어날 것이며 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받는 은혜의 감화는 그 사람에게 향수보다 더 진동하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인격으로 그를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생 그 자체가 한편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눈을 뜨는 날마다 새로운 날이없고 눈뜨는 날마다 같은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새로운 주님을 알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정말 여러분들의 대치할 수 없는 삶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로 시인이 신음함으로 탈진했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그런 사모함과 갈망이 한순간에 울컥하고 솟아나는 순간의 일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갈망하다가 지쳐서 포기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순간의 감정으로 하나님 앞에 울컥 쏟아놓는 그 일순간의 기도보다는 훨씬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죠.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깊이 몸부림쳤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뭐 저는 그런 것을 경험해본적이 없습니다만은 연세드신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여름에 산사태가 나면 사태가 나서 산이 무너지기전에 몇일동안 운다고합니다. 막 우우웅하는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지질적으로는 속에서 무엇인가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소리일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리고나서 어느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문에는 졸지에 산사태가 났다고 보도가되지만 졸지에가 아니라. 이미 몇일을두고 산이 운후에 그 산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세계가 무너지고나면 죄 속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새로운 세계가 이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가운데를 걸어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가 아니라. 장시간을 두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무너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은혜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모하다가 사모하다가 신음하다가 신음하다가 마지막에는 탈진한 상태까지 오게되는 것입니다. 죄가운데 살아온 날이 몇넌인데 그렇죠. 지은죄와 불순종이 그렇게 많은데 일주일 기도할터이니 하나님 내 이 문제를 다 끝장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닌데 너무 쉬운 접근방법입니다. 그것 뭐 일주일까지 가요. 내가 내일 아침 한끼 금식할터이니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뚫어지게 해주시고 닫혔던 기도의 문은 열리게 해주시고 닫혔던 하늘의 축복은 다시 쏟아지게 해주셔서 첫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지 뭐하러 일주일씩이나 시간을 잡아요.
그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으로 최대한 돌아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보고 배우면서 그렇게 살아갈려고 부단히 싸우는가운데 자신속에 있는 죄 속에서 형성된 죄의 어떤 세계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균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인 회복을 여러분께서 겨냥한다고 하면 그럴수는 있겠죠. 이번 사경회에 하나님이 날 만나주시고 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엄밀하게 말하면 회복이라기 보다는 회복을 위한 계기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너진 기도의 습관, 무너지는데는 순식간이지만 다시 복원하는데는 장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잃어버리는 것은 쉽지만 그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습관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2002년 한해는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해. 2002년에 내 인생에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씨름하며 노력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가장 결핍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모함이나. 갈망, 이런것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오래지를 않습니다. 삶과 죽음을 오고가면서 겨우 빤짝하고 들어와서 겨우 녹아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서 새벽길을 걸어오는 것은 불과 한 일주일정도입니다. 한 열흘정도, 그리고 다시 옛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장시간에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씨름할 그런 각오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런것있죠. 요만큼 기도해놓고 원망은 이만큼합니다. “내가 말이지 3일씩이나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지도 않고”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가운데서 사는 날동안 몇십년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죄를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죄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의 순결한 성품이 우리가 정결케 되기 전까지는 잠시 우리를 홀로 버려두신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원망하는 사람들이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어쨌습니까? 울다울다 지쳐서 쓰러져서 잠이든 시인의 모습, 회개하다 회개하다 주님의 응답이 없어서 탈진해서 흐느끼다가 엎어진 이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그의 회개는 죽을 때까지 회개였고 그의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은 쓰러질때까지였습니다. 그렇게 장시간을 하나님 앞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지쳐서 완전히 쓰러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사모함으로 자기를 찾는 이 시인 속에서 죄를 향한 시인의 열망은 순간이었고 은혜를 향한 시인의 갈망은 영원한 것이었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고 이 시인이 이미 당신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동안에 그의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도록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금보다도 더 귀한 영혼의 회복을 새롭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회복의 은혜속으로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밤마다 마주하는 하나님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中)
세주째 6절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내용을 깊이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두 주동안 한 내용을 잠깐 간추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우선 첫 번째 6절을 처음보던 지지난 주에 "내가 탄식함으로" 히브리 성경에는 엄밀하게 번역하면 "신음함으로"라고 되어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시인이 죄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신음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서 크게 세가지를 들었는데 하나는 죄의식에 대한 괴로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깊은 괴로움이 그로 하여금 신음하도록 만들었고,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고통이 그를 신음하도록 만들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는 돌이키고자하나 자신의 의지의 절대적인 무능함을 인해서 신음하는 그런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은혜가운데 있는 신자가 죄에 떨어질 때에 그 때 그 심리에 대해서 좀 깊이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자세한 것은 테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이 "신음 함으로 곤핍하였다." 그랬는데 사실은 그것이 "곤핍하여" 그랬는데 사실은 그것이 영어로 말하자면 ( ? ) 그래서 자기가 다 소진되어버린 상태, 고갈 되어버린 상태를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시인이 죄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렇게 소진된 이유는 단지 죄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죄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소진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마음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그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친 그것이 그를 완전히 영육간에 소진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진되게된 이유를 세가지로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집중"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그 집중,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그 열렬한 사모함. 목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사모함,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아주 장시간동안의 몸부림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소진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라고 하는 문제를 너무나 가볍게 다루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영적인 진정한 회복을 가로막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까지가 지난주까지의 장부책입니다.
오늘은 이제 "밤마다"라는 세글자인데 히브리 단어도 보면 두 단어로 되어있는 "밤마다"라는 구절을 해설함으로서 이제 우리가 이 시인과 함께 이 체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한번 죄가운데서 신자가 어떤 마음이 되고 또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성경을 보는 깊이를 좌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또 조심해야되는 것이 뭐냐 하면 체험 때문에 성경이 안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든 체험이 아니라. 성경의 한복판을 흘러가고 있는 중요한 성경의 원줄기에 대한 체험을 가질 때, 우리말로 하자면 성경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밎 복음의 줄기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갖게될 때에 그 때 성경에 대한 이해들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어야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렇게 읽으면서 우선은 성경으로 충만하게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그 체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오늘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어느 형제가 쓴 글 같았습니다. 문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아주 상당히 좋은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젊은이 인데 다행히 어떤 순수한 복음에 대해서 일찍부터 눈떴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 연재특강이 계속해서 열린신문에 소개가 나가는데 그 책들이 값은 비싸지 않는데 읽는데 그렇게 쉽지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뭔가 맛을 깊이 느끼기 시작하면 이제 여러분들이 아주 깊은 신앙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물론 1년 내내 소개해봐야 한권도 안사는 사람도 있지만 회개해야됩니다. 뭐 사먹는 것은 잘사먹고 말이죠. 책을 많이 사야합니다. 그래야지 내가 늘 이야기 하지않습니까. 안 읽어도 좋으니까 사는 것입니다. 많이 사서 읽기 싫으면 고물상에 갖다주세요. 그리고 가서 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안 읽어도 내가 그렇게 사주니까 그 책이 계속 찍히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읽게끔 선교적 기여를 한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기여입니다. 사서 다른 사람을 주든지 어쨌든 사야됩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나온 책은 두께가 거의 600페이지인가 그렇게되서 18000원 붙었더라고요. 읽는 것도 장난이 아닙니다. 딱딱하거든요.
그런데 아주 부지런히 읽은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거의 우리나라에서 읽을 수 있는 청교도 관련서적들을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의 간증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상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파헤친 책을 다 읽었는데 그리고 보니까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 이런 것을 다 보고 그러면 틀린 것만 눈에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것은 신앙이 아니다. 저것은 잘못되었어" 그것 밖에는 안 생기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어떻게 인터넷에 들어와서 열린 교회에 들어와서 은혜를 깊이 받고 그리고 나서 그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뭐냐면 자기가 열심히 청교도 서적을 탐독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가득 찼을 때에는 겨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의 신앙이 뭐가 잘못되었나를 조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는데 자기가 정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리고 그 은혜를 알고 나니까 자기가 이제껏 알던 그 지식이 막 살아서 역사하는 것 같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가 지식의 빛과 그 다음에 체험의 뜨거운 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런 풍부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되느냐 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흡사한 경험을 했을 때에 그 성경이 성경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렇게 자기에게 하나님이 직접 쓰신 편지같이 가슴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경을 밀착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6편에 있는 이 시인의 지금 마음과 삶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는 것입니다. 시인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용서의 확증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죄가 좋아서 그 길로 들어섰고 자기의 소원을 성취했는데 죄의 특성상 그것을 손에 넣어도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솜사탕 먹고싶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얀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잖아요. 그 물감이 뭐든지 간에 하여튼 빨간 것, 심지어 파란 것도 있습니다. 그렇죠. 어렸을 때 그 장사만 오고 종을 흔들면 막 가서 그것 하나만 사먹고 싶어서 애들이 사먹으면 또 뛰어가서 그것을 뺏아서 뜯어서 도망가고 말이죠. 그런데 배가 고팠을 때 그 솜사탕이 얼마나 풍성하게 보입니까. 그것을 몇 개쯤이나 먹어야 배가 부를까요? 정말 허무한 것이 솜사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씩 뜯어먹기가 아이들이 짜증이 나니까 성질 급한 애들은 ‘나같은 애들, 그것을 이제 침을 발라서 솜사탕을 뭉쳐요. 그러면 이제 쫙 뭉치면 요만하게 눈송이 뭉친 것처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씹어먹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죄의 소원이 있어도 그 죄를 자기가 직접 취해도 사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시인은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가르고 임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온몸이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뼈속깊이 체험하면서 일생동안을 어린 목동으로 시작해서 그 굽이굽이 많은 인생의 계곡들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한 나라의 왕이 되고 그리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평화로운 왕국을 건설하기까지 그가 걸었던 생애는 그야말로 정말 이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그런 생애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걸어오는 동안에 한번도 하나님과 떨어져 본 적이 없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하나님과 탁월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마치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과 그런 탁월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은 현실에 아주 뿌리박은 그런 영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크게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죄의식 속에 몸부림치고 그리고 다시금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그 예전의 아름답던 관계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도무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부림치는 것은 다 자기의 상식선에서 몸부림 치는 것 아닙니까.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참 훌륭했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뛰어났지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역시 그 시대에 태어났으니까 그 시대의 아들일뿐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참 많은데 신앙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고 나면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제한되어있습니다. 왜? 여러분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그저 간단 간단한 것을 좋아하고 빨리빨리, 즉각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신앙이 깊어지고 나면 죄도 교묘해집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 짓는 죄들은 아주 두드러지고 그리고 흔한 죄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이 그다 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면 돈독해질수록 실제적으로 그의 풍성한 삶을 가로막는 것은 정말 교묘한 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밝은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찬란한 빛이 필요하고, 더 그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런 가운데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주 뛰어난 영적인 삶을 누려서, 다윗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로서 왕으로서 그렇게 뛰어난 영적인 삶을 누리던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 그만한 삶을 누려본 사람이 주위에 별로 없고, 그리고 또 그렇게 떨어져본 사람도 별로 없고, 자기의 어떤 영적인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풍부한 해결책과 말씀을 통해서 보여지는 어떤 길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겠죠. 그 속에서 이제 그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것을 놓고,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죄의식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잃어버린 것과, 돌이키고자 하나 철저하게 무능을 경험하면서 그는 결국은 속까지 타 들어가면서 그는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모두 수척해지기까지 그렇게 그는 깊이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집중하고, 사모하고, 마지막 장시간동안 하나님의 돌아봄이 없는 가운데 몸부림을 치면서 이 사람은 결국은 자신의 영적인 힘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이고 육적인 모든 힘까지도 모두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상태에까지 갔습니다. 그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 시인이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밤마다 눈물로 내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나이다.” 약간 과장법적인 시적 표현인 것입니다. 밤마다 눈물을 많이 흘려서 요를 적시고, 그리고 밤마다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침대가 그 눈물이 뜰 정도로 그렇게 펑펑 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베겟잇을 적신 경험들은 가끔 있죠. 그렇죠. 뭔가 가슴 깊은 곳에 눈물이 가득하여 깊은 밤, 모로 돌아누워서 자면 눈물도 한쪽으로 잘 흐르지 않습니까. 쭉 흘러서 그래서 베겟잇을 적십니다. 잠깐만 울고나면 베겟잇이 아주 풍덩하게 젓습니다. 그것이 뭐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잠 못 이루는 감격때문이든지, 어쨌든 그러한 베겟잇을 풍덩하게 적시는 그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밤마다 내가 너무 울어서 베겟잇을 적시고, 밤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내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표현이겠죠.
그런데 우리들이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왜 밤입니까? 그런데 이 “밤마다” 그랬는데 이 히브리 성경에는 “매일 밤마다” 우리말에서는 에브리 나잇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는 ‘베콜 라일아’인데 베는 인이라는 뜻이고 콜은 모든입니다. 에브리라는 뜻도 있지만 정확하게 번역하면 ( ? )밤새도록 이라는 뜻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둘다 번역이 가능한데 아까 올라오면서도 다른 영어성경은 어떻게 번역을 했나 봤더니 역시 ( ? )밤마다 우는데 온 밤을 슬피 울면서 하얗게 지내는 것입니다. 죄도 차마 삼킬 수 없었던 이 시인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물론 그 죄는 오웬의 고백과 같이 신자가 죄를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신자의 죄를 향한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잠시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을 버렸는데 시인이 죄를 성취하고 나니까, 그 죄의 맛을 보고 나니까 정말 그 죄의 맛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처절한 갈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마치 5편에 나온 그 경험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완전히 집중된 가운데 그 죄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 죄에 의해서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이면 밤이냐? 시인이 밤에만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랬을 리는 없습니다. 밤에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가 너무 심오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제로 회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을 때에 그 사랑이 밤이나 낮이나 신자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똑같이 죄를 지어서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그 회개가 그의 영혼 깊은 심연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낮이나 밤이나 시간과 상관없이 그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눈물이 가득 고인 마음이 되어서 참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자신의 이 신앙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눈물로 요를 적시고 그리고 침상이 뜨기까지 하나님 앞에 펑펑 울었던 이 몸부림의 경험을 밤이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이 밤은 말이죠. 저의 얘기를 문학적 상상력을 잘 동원해서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재미있습니다. 좀더 해설을 하자면 이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 밤시간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타락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이 밤시간이 사람이 고요하게 홀로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성찰하고, 그 속에서 밀려오는 욕구에 대해서 가장 예민해질 수 있는 시간이 밤시간입니다. 증거를 대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씨름하는 장면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이라. 그래서 옛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그 믿음을 내게도 달라고 찬송가에도 나오는데 이미 벌써 제가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서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혈기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그 밤에 혈기를 부렸다고 하더라도 그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던 그 마음은 하여튼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은 지금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쌓여있습니다. 왜? 지금 형이 자기를 복수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너무나 잘못했어요. 형의 축복을 다 빼앗았어요. 그리고 이제 돌아가는데 자신에게는 그 형의 무력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없고, 자기가 이제 다시 라반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이제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데 자기의 인생은 정말 이 형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천사와 붙들고 씨름하는 자체는 혈기였을지 모르지만 뭔가 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해결받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후에 혈기를 부리면서 천사를 붙들고 씨름할 때에는 해결을 못 받았던 그가 이제 깊이 깨뜨려지고 펑펑 울게 되자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리고 그의 어려운 형편을 열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런 고민을 얍복강가에서 홀로 기도하면서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성찰을 갖게된 것입니다. 밤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두개만 더 해봅시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대해서 토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훌륭한 이스라엘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가 밤시간에 주님을 찾아온 것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대인들이 보기에 정통성을 의심받는 예수에게 가서 무엇인가를 질문하는데서 오는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에 대한 손상도 고려를 했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밤에 잠을 청했으나 잠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재미있으니까 하나 더해보겠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나는 사울을 세운 것을 깊이 후회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다윗을 일으켜서 다윗의 뒤를 잇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도 시간은 언제였느냐 하면 깊은 밤에 사무엘이 홀로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그런 음성을 듣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을 쫓아서 자기가 가서 기름부어 세운 그 왕인데, 아니올시다 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니올시다입니다. 저렇게 변해가는 저 왕을 보면서 기름부어 세웠던 그 사무엘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 시국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괴로워했던 시간도 역시 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시편119편에 보면 시인이 밤에 잠이 깨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율법을 주셔서 짐승처럼 살 운명을 면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장면도 깊은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시던 그 시간, 그때에 예수님의 기도는 먹고, 입고 마시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마 평상시에 늘 드리던 주기도문의 그 패턴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기도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와 자기가 그 십자가를 지고나면 홀로 두고가야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공동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 이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시간도 역시 밤이었습니다.
이처럼 밤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홀로 놔두는 그 시간이 밤시간입니다. 그래서 밤에 행복해야지만 진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고,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모여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마음에 깊은 감동과는 상관없이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서 자기 혼자 있는데 그 혼자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그 신자가 정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신자입니다. 일을 통해서 겨우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신자는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밤에 깨는 때가 있죠. 목말라서 깰 때도 있고 오줌마려워서 깨는 때도 있지만 어쨌든 밤에 깰 때 그 때 가슴속에 탁 드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윗필드의 전기에 보면 밤에 잠을 못 이루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밤에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 막 너무너무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것입니다. 밤새도록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놀라와서, 저야 뭐 그 정도까지는 안되지만 가끔 그런 적이 있습니다. 밤에 집에 들어갔는데 완전히 너무 피곤해요. 그래서 그냥 가서 씻고 쓰러지듯이 침대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대화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정말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한데도 주님이 올해도 나에게 복을 많이 주셨구나, 그리고 나같이 온전하지 못하고 쓸모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이루시는 그 일이 나와는 정말 안 어울리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드러낼 때 그 때에 막 빛가루가 가슴에 반짝이면서 쏟아지는 것 같은 그런 기쁨, 그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오관이 모두 쇠락해져서 다시 다 깨어납니다. 정말 육체와는 상관이 없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마음 가득히 감사의 눈물이 가득 고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날은 이제 잠 별로 많이 못 잡니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쇠락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밤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 상태에서 자기 혼자되었을 때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만족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슨일을 시키시고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것 아닙니까. 그것도 좋고, 하나님이 뭔가 기도하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공급해주셔서 그것을 누리니까 또 좋고, 다 좋습니다. 그런 것 모두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나이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내가 여기 있으므로 그 관계 자체에 대한 참다운 행복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것은 언제만 검증되느냐 하면 밤에만 검증되는 것입니다. 밤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밤이주는 의미,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상태에서만 점검될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글을 하나 써서 보냈는데 자기의 고민을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네 교회에서 교인들이 기도를 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자매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새벽기도 하러 올라가면 정확하게 누가 새벽기도 설교를 하러 올라가든지간에 10분이면 나가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기도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고보니까 그런 성도들의 삶이, 그런 교인들의 삶, 교역자의 그런 모든 삶이 너무 불쌍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더큰 생명, 더큰 은혜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 자신앞에 우리가 홀로 설 때 주시는 만족이 이렇게 탁월한데 그런 참된 만족을 모르고 살아가는 건조한 사람들의 삶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교만한 것이 아니냐고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섞여서 예수 얘기를 많이 할 때는 자기가 훌륭하게 예수를 좇아가는 사람인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잘못믿는 사람들을 열심히 비판하다보면 자기가 예수처럼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순간적인 착각에 빠집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지런히 자기를 드리면서 열심히 일하다가 보면 어느순간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자기가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착각에 빠지게됩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은 홀로 있을 때. 그래서 이엔 바운즈가 정말 우리 생에 잊혀지기 어려운 명언을 남겼습니다. “한 신자의 사람됨은 그가 기도할 때 그 사람을 능가할 수도 없고 거기에 못미칠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 홀로 있을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사람됨이 그 사람의 진실된 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라는 것입니다. 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하찮은 사람이면 그가 무엇을 하며 살든지 하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 앞에 중요한 사람이면 그 역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시인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멸을 경험하면서 순결한 영혼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쉬임없이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는데 어떻게 그가 밤에만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올렸겠습니까. 그러나 낮에는 그는 왕이었습니다. 영적침체에 빠졌다고해서 국사를 돌보지 않을수 있을까요? “폐하 적군이 쳐들어 왔나이다.” “적군이 문제냐? 나는 영적침체다” “나 기도원에 갔다고 생각해라” 그럴수 없습니다. 제가 교회를 해보니까.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자기의 영적침체,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여야될 의무적인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한번 안하는 것 정도는 피할 수 있는데 아침이면 떠오르는 그 일반적인 일들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일이 아닌데도, 중요한 일만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소한 일인데도 피할 수없이 떠오릅니다. 그것을 안하고는 안됩니다. 우리도 그런데 다윗은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인데 그렇죠. 얼마나 많은 업무에 시달렸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낮시간에 몰두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또, 국사를 돌보고 혹은 경건한 의무에 힘쓰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당히 뭐가 잘 되갈 것이다. 안해도 될거야. 이런 소망을 주는 일들도 많이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밤시간에 되었습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머리를 조아리며 폐하, 전하, 왕이시여, 하고 부르던 만조백관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시종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고요한 침소에 홀로 들었습니다. 비단금침이 깔렸다고 할지라도 그는 거기에서 철저하게 자기 혼자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전과 같이 자신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시지 않고, 그 속에서 철저하게 몸부림치면서 그러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괴로워 하는 이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시인에게 밤이 없었더라면 그가 하나님께 돌아왔을 리가 없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밤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의 교훈을 들어야했습니다. 밤마다 그는 언제끝날지 모르는 어두운 터널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자기가 철저히 혼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으로 그는 완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떠나가고 죄의 깊은 지배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이 시인은 견딜수 없는 곤고함과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져버린 공허함속에 이중적으로 시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 시인은 죄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의 공허함을 깨달으면서 어찌하든지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해 돌아갈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도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울어도 할 수없었고, 힘써도 할 수 없었고, 무엇으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로도 할 수 없었고, 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이 고통스러운 이 영적상황을 타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 앞에 밤마다 밤마다 홀로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왕이었으니 아마 그 침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울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슬하에 많은 신하들이 아마 왕의 침소에서 그런 소리가 나면 의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 시인은 자신의 침상에 엎드려 자기의 요로 자기의 얼굴을 흠뻑 가리며 그 통곡하는 울음소리조차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막으며 펑펑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것이고, 자기가 눈물로 자신의 요를 적신다고 하는 그 부분도 역시 그렇게 해서 적시게된 눈물이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알수있겠습니까. 깊은 몸부림, 한 나라의 왕이요. 모든 사람의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던 다윗이 낮시간의 모습과 밤시간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낮시간에 단정하게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인자와 공평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처럼 나라와 백성과 신하들을 지도했고, 또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백전의 노장으로서 그 위엄과 관록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홀로드는 밤시간에 침상에 엎드렸을 때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관계있는 단 한분이 자기를 버렸다고 하는 처절한 이 소외감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침상의 요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흐느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울부짖으며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는 왕도 아니었고, 그리고 수많은 전쟁터를 승리로누빈 백전노장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하나에 소망을 걸고 어린아이처럼 떨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한 순진하고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결한 회개가 그를 끔찍한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고, 자신의 힘으로는 끊어버릴수 없었던 죄의 깊은 지배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완벽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 애를써야죠. 대충대충 사는 것 보다도 나쁜 것은 없습니다. 온전하려고 애를쓰고 그리고 자기가 마치 온전하게 살수있는 것 처럼 온 마음과 노력을 다길이면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삶의 모든 범주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려고 하는 그런 성심성의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떻게 완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잡았다 함도 아니요. 그것을 붙잡으려고 끊임없이 달려가는 미완성의 상태에서 완성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그리고 모자란 부분도 있고 시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죄 때문에 깊은 신앙의 바닥에 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자세를 보이느냐입니다.
밤에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가 정말 혼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껏까지 낮시간동안에 우리들이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칭찬,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인정,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던 명예, 이런것들이 하나님이 앞에서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 한분 앞에서 그 사람이 인정받는 사람이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그가 인정받을수 없는 사람이면 자기가 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수 없는지를 괴로워하면서 그 온전하고 완전하시고 참된 사랑이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이신, 그분앞에서 그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지,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고 높여주는 것, 사람 보는 앞에서 우리들이 한없이 높아져봐야,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신나는일 아닙니다. 나는 뭐 높아본적도 없지만 재미 없는 것입니다.
어느 강사 말마따나 원숭이가 나무타고 꼭데기 올라가봐야 엉덩이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야, 좋다고 올라갔는데 빨간 것 그것밖에 더 보입니까. 쳐다보는 사람도 그것 쳐다보고 있으면 뭐 좋은일이 있겠습니까. 비상사태나 만나지 말이죠. 다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이런 몸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직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고도 하나님 앞에 정직할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영혼이 핍절한데도 그것을 인정하려고 들지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이 없어서 깊이 고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되게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수없는 회복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홀로서는 그것을 너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신자가 될수록,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수록,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그 시간을 사람들속에 있는 시간들보다 훨씬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만족이신,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 앞에서 새로워지는 그것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오늘 밤새도록, 혹은 밤마다, 혹은 둘다도됩니다. 밤이면 밤마다 날이 새도록, 내 요를 눈물로 적시고, 내 침상을 눈물로 띄웁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았으면 홀로 하나님을 대면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 안하는지 아십니까? 무서워서 안하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할 수없어서,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담스러워서 안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뭐 거짓말을 하든지 나쁜짓을 하든지 예를들자면 시험지 두장을 받았는데 하나는 100점 맞고 하나는 80점 맞았느면 80점 맞은 것은 꼭버리고 오지않습니까. 그리고 왔을 때 집에서 쳐다보면서 “두과목을 봤다는데 왜 시험지가 하나밖에 없지“ 그러면서 눈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싫을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진실하고 솔직하다면 그 시간이 싫을 리가 없습니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자기를 이렇게 쳐다보는데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러니까 부담스럽고 힘들고 두려운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기를쓰고 기도를 안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채질화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 물어보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혼자서 다 해결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신앙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으로 지적을 받아도 항상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로 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그 말씀이 맞습니까? 내가 정말 잘못된 사람입니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고쳐져야합니까? 하나님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입니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이 죄를 벗어버리고 순결하신 주님과 교통하면서 살수있겠습니까? 어떻게하면 내 밤이 공허해지지 않고 행복해질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몸부림치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니까 대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실성이 없습니다. 늘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핑계대고 그리고 슬쩍슬쩍 하나님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목양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한대로 목회자에게 와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가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르게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길을 알지못합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든지 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면적으로 대면해서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풀어볼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다소 모자라는 부분들이 있어도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자꾸 회피할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변명과 회피 이런 것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입장에 대해서 동조해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홀로 있을 때에 자신의 양심이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홀로 있을 때에 이러이러한 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저하게 멀어진 것이 자기에게 느껴지는데 자기의 의견에 동조해준 사람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돌이킬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밤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 시인처럼 온밤은 새워 자신의 죄와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인해서 근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베푸신 사랑이 너무 귀하고 놀라와서 빛가루처럼 쏟아지는 그 은혜의 기억들 앞에서 “나갚이 쓸모없는 인간이 무엇이관데 주님이 이렇게 사랑해주시나. 내가 정말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아도 되는가?” 이런 주님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면서 정말 가슴이 녹아서 눈물이 가득고인채 온 마음과 정신이 쇠락해져서 그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밤을 지새우는적이 여러분들에게는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짓는 많은 죄들로 인해서 막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러분들을 괴롭고 힘들게 할 때에 그밤에 홀로 일어나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나님 제가 잘못했지만 저는 원래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돌아가고자 하나 길을 알수없고, 또 길을 알아도 돌아갈 힘이 없으니 하나님 나를 이 한번의 잘못으로 버리지 마시고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다시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지금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입니다. 가시에 떨고있는 한 마리의 양입니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을 찾아와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그런 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 덮어두고 내일 덮어두고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움도 되지않는 신앙생활 하면서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없이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주님이 주목할만한 회개를 여러분들이 경험하신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시인을 그래서 버리셨습니까? 그런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주님을 멀리 떠나서 이 사람이 결국은 버림을 받았습니까? 물론 여러날 동안 깊은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음성도 들려오지않는 가운데 경건한 시인은 가슴을 찢으며 몸부림쳤습니다. 죄의식과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아픔과 그리고 주님께 돌아갈려고 해도 도무지 돌아갈수 없는 자신의 의지의 무능을 철저히 자각하며 하나님 앞에 몸부림쳤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 없이 그가 홀로 몸부림치는 것 같았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요를적시고 입을 틀어막고 통곡하며 울었고, 그 눈물의 양은 침대를 능히 띄울 것 같이 강물처럼 그 침상에 흘러 넘쳤습니다.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은 없는 것 같았고, 주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신세가 된 이 시인을 보며 손가락질하는 악한 세력들만이 시인의 주변에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아하, 아하 하고 기뻐하는 자들로 이신의 주위에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밤마다 홀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친 이 시인을 하나님이 결국은 버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나님이 결국은 이 시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후에도 시인은 살아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의 경험을 노래하여 불후의 아름다운 신앙의 시들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가운데서 흐느끼는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소망을 보여주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쓸데없는 껍질들을 다 벗어버려야합니다. “내가 목사다. 장로다. 무슨 내가 뭐다.” 다 벗어버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한 마리의 어린양일뿐이다. 잘못했으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한분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해서 주님을 마음아프게 했던 것들을 깊이 회개하며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려야합니다.
하나님 한분 앞에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야단치시면 야단 맞아야죠. 징벌하시면 징벌을 당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홀로선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신의 영혼을 깊이 헤아려야합니다. 행복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기쁨니까? 홀로 있을 때에 주님으로 여러분 자신이 가득합니까? 많은 사람들속에 일속에 묻혔을 때에 덜 느껴지던 하나님이 깊은밤에 홀로 무릎을 꿇고 주님 대면할 때 가슴깊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깊은 은혜를 여러분들이 느낄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셔야합니다. 새벽기도도 은혜롭지만 밤기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깊은 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문은 밤12시까지 활짝 열려있습니다. 올라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의 심사를 통촉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그 속에서 영혼의 참다운 회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그 기도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시 서도록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한분 앞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회개의 깊이와 관계의 회복①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下)
아마 오늘이 이 6절을 네 번째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보면 “눈물로 내요를 적시며 침상을 띄우나이다.” 지난 시간에는 “밤마다”라는 구절을 가지고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회개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나와있는 “눈물로 내요를 적시며 내 침상을 띄우나이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눈물로 라는 말이 뒤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를적시며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나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번역했느냐 하면 “내가 흐느낌으로 내 요를 적시며 눈물로 내 침대를 띄워보냅니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본문은 그렇게 되어있고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눈물”입니다. 홍수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엄청나게 흘린 눈물의 양을 시인이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때에 이 눈물은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공통된 경험이 눈물은 슬플 때에 가장 많이 흘립니다. 또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의 양보다는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통곡하는 사람은 못보았으니까. 기쁘면 그냥 흐느껴 우는 정도이지 그런데 슬프고 고통스러우면 통곡하면서 이제 많은 눈물을 흘리게됩니다. 물론 눈물이 흘리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기자들을 보면서 가장 거것은 정말 꿈에도 흉내를 못내겠다. 그러는 대목이 있는데 뭐 다른 연기의 대목은 나도 열심히 연습하면 비슷하게 할 수있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흉내못내겠다.라는 대목은 뭐냐 하면 막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 확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한번 해보세요. 불가능합니다.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젠가한번 어떤 연기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울 때 어떻게 눈물을 나오게합니까?”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펐을 때를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들자면 아버지 돌아가셨던 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던 기억, 그런 것이겠죠. 뭐 그런 경험이야. 자기네들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들에게도 있지. 그렇죠. 우리들에게도 각자 인생을 살면서 눈물흘린적이 많지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것을 회상해서 금방 그 눈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듯이 ”연기자는 많은 사례금을 받아도 괜찮다. 왜냐 하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도저히 안될때는 어떻게 하느냐?“ ”할 수없이 안약을 집어넣습니다.“ 가끔 연기자들 이야기죠. 감정으로 충일해졌을 때 근육의 모양과 내적인 슬픔이 쫙 복받쳤을 때 이 얼굴의 근육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표정을 그렇게 연기해 낼수가 없는 것입니다. 1급 연기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 순발력이 얼마나 빠른가. 얼마나 짧은 시간안에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대본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일수있는가. 그러면서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의 눈물은 우리들이 신뢰하기 굉장히 어렵죠. 그렇죠.
그게 뭐냐 하면 극의 상황은 A인데 A라는 상황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B라는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를 이렇게 끌어안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아닙니까. 그런 눈물은 우리들이 쉽게 믿을수가 없습니다. 더 뛰어난 연기자는 뭐냐 하면 그런식으로 자신의 대본에서 요하는 감정을 다른곳에서 차용해오는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극을 받으면서 그 상황을 그대로 자기가 실재인 것 처럼 느끼면서 토해내는 그 눈물의 연기가 진짜연기라는 것입니다. 연기에 대해서 비교적 많이 알고있죠. 인생이 연극비슷하기 때문에 좀 배워야합니다.
저는 연기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거의 가려낼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특별히 눈물 흘리는 묘사가 자기 극본속에 빠져들어간 가운데 흘러나오는 눈물인지. 감정적으로 차용한 눈물인지 100%는 몰라도 한 70%는 가려낼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감정들은 우리들이 믿을수가 없습니다. 다른곳에서 차용해오는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무엇인가 이렇게 그 사람의 내부에 일어난 아주 심층적인 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층적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목놓아 외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 예배 마치고 집에 가다가 우연히 친구랑 들어간 3류 극장의 멜로 드라마를 보면서 펑펑우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인간의 심층의 깊은 세계를 두드리고 움직일 때에만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인간의 표피적인 감정을 건드릴때에도 눈물은 흘러나올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뭐에 찔려서 피가 나온다고 해서 모두 핏줄이 터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찌르면 특별한곳 빼놓고 웬만한 곳은 찌르면 다 피가 나오게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면 이눈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수단이됩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내가 너 눈물을 보았고”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제 죽고 다시 살지못하리라고 하는 선지자의 분부를 받고 면벽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걸어온 인생의 길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선처해달라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눈물을 보시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푸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아주 자주 거론이됩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이 눈물이 아니라. 눈물이 흐르도록 만든 그 사람의 내면의 참된 변화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마음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라고 하는 소위 히브리어로 슈부라고 하는 명령어가 많이 나옵니다.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슈부라고 하는 그 명령을 쭉 조사해보면 돌아오라. 돌아갔다.라고 하는 동사 혹은 명령어, 이런 모든 것들을 조사해본 안토니 후크마라고 하는 사람이 결론을 내리기를 뭐냐 하면 이 슈부라고 하는 동사로 미루어 볼때에는 돌아가는 것은 상당부분 사람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는 어떤 결단을 지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용례가 정확한 회수는 제가 기억이 안나는데 대부분의 용례가 제 기억으로는 70%넘고 8-90%정도의 용례가 모두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돌이킬 힘이있느냐? 없느냐? 그 돌이킨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논의에 속하는 문제이고 어쨌든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갈수있는 것 처럼 구약성경에서 강력하게 인간자신에게 촉구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후크마라고 하는 그 교수의 주장입니다.
우리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일수 있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구약성경은 특별히 인간의 결단을 아주 강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기도 하시고 또 그들을 향해서 무엇인가 심판을 은총으로 바꾸시기도 하는 그러한 모습들은 눈물 자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어떤 감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해 내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신앙에 있어서 어떤 정서적인 변화, 열정,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다 포함됩니다. 열정적인 회개, 열정적인 헌신, 열정적인 찬양.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하나님께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게만든 그 사람속에 있는 참다운 변화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보는바와 똑같은 것입니다.
뒤편에서도 보면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똑같은 것입니다. 흐느낌 혹은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 우는 소리를 들으셨도다. 라고 할 때에 그것은 우는 그 행위나 눈물 그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시인 밑바닥까지 와 닫고 그리고 움직인 참된 어떤 변화를 입증하기 때문에 이 눈물이 하나님 앞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여기에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깊이 강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로 자신의 요를적시고 그리고 자기의 침상을 띄움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우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약간 자기 과시적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보면 약간 유치한 것 같기도 한 그런 표현들을 여기에서 받드시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무엇때문이냐 하면 범죄한 이 시인의 깊은 영혼의 밑바닥을 건들고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그 어떤 만져주심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이 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아주 간절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시인이 흘리고 있는 이 눈물은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 일어난 모정의 강력한 변화의 결과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감정적으로 아주 슬픈 상태가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할 때에 그가 무엇인가 이렇게 굉장히 슬프고 그러면서 그 사람이 뭔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아주 슬프고 처량하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무엇인가 눈물을 쏟지않을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가도록 그런 모든 것들을 만들고 하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유치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한 설교를 신나게 열심히 해놓고 그다음에 신나는 행진곡이나 댄스음악을 틀어놓고 회개기도하십시다. 하는 것도 위치에 안맞는 것이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들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 시인의 마음의 밑바닥을 얼마나 깊이 만지고 지나가셨는지를 이 시인의 울부짖음과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흘리는 이 엄청난 눈물의 양, 그리고 그 시간적인 길이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 밑바닥을 깊이 건드리고 지나가서 그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부르짖게 만드는 그러한 원인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저는 이 6편을 읽을 때에는 항상 51편을 옆에 놓고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51편은 바로 이 6편과 짝을 이루는 쌍둥이 시라고 할 수 있는 시입니다. 그런데 그 51편에서도 이런 참회의 시를 적어내려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있는 그 유명한 성경구절이 몇 개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그런것과 그다음에 또 여러분들이 잘 알고있는 구절중에 하나는 뭐냐 하면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시옵소서” 그런 내용도 여러분들이 잘알고 있는 내용이고 또 이런 것 "내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수많은 복음성가들도 여기를 통해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표제어에 보면 무엇이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는 부제가 붙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선지자 나단이 와서 욕심장이의 비유를 들면서 그 가난한 사람의 양까지 빼앗아버린 이야기 하다가 왕이 진노하니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까 그 앞에서 다윗이 주저앉으면서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이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이전에 깊이 만난 사람이었고, 그리고 요즘 우리로 말하자면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던 아주 수준높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었습니다. 아주 탁원한 영적생활을 누리던 스피리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간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난번 여러번의 설교를 통해서 이미 언급한 바와같이 여러 가지 결과들을 그의 영혼속에 가져왔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밑도끝도없는 깊은 죄의식이었습니다. 깊은 죄의식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는 아주 명료하고 분명하게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뚜렸하게 알고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는 많았습니다. 많았는데 그것은 비유를하자면 하나의 죄를 통해서 알게된 죄들이었습니다. 쉽게 비유를들자면 화재가 나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꽉닫고 그리고 가상자리를 테입으로 막았는데 한참 있다보니까 복도에 연기가 꽉차고나니까 저기 맨 위에 가스파이프 하나를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이만큼 뚫어놓은 구멍이 있었는데 복도에 연기가 꽉차니까 그 유독가스가 뚫어진 구멍을 통해서 확 들어와서 자신의 많은 연기를 차단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피해있는 그 방을 연기로 가득채워서 자기를 질식하게 하는것처럼 그런 것이었습니다.
물론 시인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난 다음에 지은 많은 죄들이 있죠. 그렇죠. 우선 정직의 문제, 그다음에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살인하는 것이 되었죠. 그리고 그런 일에 혼자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살인을 교사했죠. 이런 많은 죄들 이런 것들이 다윗이 사무엘하 11장까지 살아온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던 다윗의 삶의 비춰보면 생각할 수 없는 죄악들이었습니다. 이런 죄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 시인의 밑바닥속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건이 커다란 막대기와 같이 되어서 시인의 밑바닥속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역사하지 않고 있던 죄들을 모두 일어나도록 휘젓는 역할을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간음의 죄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가 이루셀수없이 많다고 시인이 고백했던 것 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죄들이 떠올라서 자신을 칭칭 감으면서 영혼의 어두움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맨처음 시작은 하나였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마게로 해서 따니까 그다음에 거기에서부터 엄청난 죄들이 그 사건과 맞물리면서 밀려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그런 죄에 효과와 영향력이 그런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죄라도 우리들이 대단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그것은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그것은 수많은 또다른 죄들을 집단적으로 몰고옵니다. 그래서 목표그자체는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은혜의 세계를 초토화시키고 그리고 죄로 우리의 온 삶은 가득체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랑하던 주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이제 그 주님을 대항하면서 살도록 데려가는 것이 그 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런 비유를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바보가 아닌다음에야 수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적진을 향해서 쳐들어갈때에 왕이 앞에서서 우르르 떼거지처럼 몰려가는 그런 바보같은 군대는 없습니다. 제일먼저 누가오죠.? 척호병이옵니다. 한사람, 혹은 두사람, 혹은 세사람정도가. 혹은 네사람 다섯사람정도 가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가나안에 들어가기전에 정탐군들을 보냈던것처럼 말이죠. 얼마 안되는 수였지만 그 정탐군들은 잠시후 요단강을 건너 밀려올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고편이었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촉호병이 먼저 가서 적진을 살피고 그다음에 몰려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적군과 대치되는 상황에서 척호병 몇 명을 잡았다. 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척호병 몇 명은 목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척호병 몇 명이 수첩을 들고 자신의 나라 그것도 국경근처를 넘어서 오갔다는 이야기는 잠시후 큰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크기가 작아도 그것을 신자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자체는 작은 것일지는 몰라도 이것이 잠시후에 몰고올 그 다른죄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홀로들어오는 예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들어오기를 허락해주면 그다음에 그다음에 그다음에 계속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음의 죄가 들어오면서 나머지 것들이 죄들이 따라 들어오게되는데 그러니까 무엇에서 자기가 넘어졌는지에 대한 생각이 뚜렸해요? 불분명해요? 아주 뚜렸하죠.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너무 분명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그 비할데없는 은혜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이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죄의식에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죄의식 속에서 은혜의 세계가 딱 깨뜨려지고나면 그다음에 그런 은혜의 세계를 파괴한 그 죄에 대해서 상당기간동안 이제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죄의식 때문에 깊이 몸부림치면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시인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러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있었고, 그리고 그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있었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되었다라고 하는것도 알고있고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도 알고있고 그리고 자신이 돌이켜야된다.라고 하는 모두 알고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가왔죠? 나단이 왔죠. 만약에 죄를 나단이 와서 지적하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아주 깊이 깨뜨려져서 이렇게 자기 자신이 이렇게 6편이나 51편에서 보는바와 같이 상한 심령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그 찢어지는듯한 회개를 스스로 경험하고 있었다고 할것같으면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보내실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또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것과 죄를 지적받고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막연히 죄를지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내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몹쓸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할말이 없다.라고 느끼는 자신의 죄에 대한 죄를지은것에 대한 동의나 혹은 자기가 죄를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신념 이런 것들은 진정한 돌이킴을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 사람이 자신이 이미 다 알고있는 죄이고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죄였는데 나단이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해주었습니다. 그 때에 “아, 그래요. 그런 죄도 내게 있었습니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하고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도 그 죄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가 다 동의할 수 있는 것이고 나단이 자기에게 전해준 죄를 지적하는 그 설교는 자기가 이미 다 하나님 앞에 죄의식 속에서 괴로워 하고 있었던 그 내용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거나 나단이 말해서야 비로소 알게된 죄같은 것은 나단의 설교내용속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통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하나 깨달을수 있느냐 하면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깊이 돌이켜요 그래서 이 마음 밑바닥을 깊이 건드려서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성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외부적으로 그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 죄에 대해서 강력한 확신을 갖게끔 만들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의 심각성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깊이 자신속에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설교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 전까지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게 되는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성경을 읽기전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것을 성경을 읽으면서 아, 그것이 죄였구나.라고 깨닫는적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모두 설교를 듣기 전에도 혹은 성경을 읽기전에도 무엇이 죄인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기본적인 생각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 그것을 죄라고 여기는데 죄라고 인식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게하기까지 충분한 역할을 그 죄의식이 못해주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 하면 그 죄에 대한 자각에 미흡함 때문입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자매가 간증쓴 것을 읽었는데 자기 어머니를 굉장히 미워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엄마하고 감정적으로 안좋고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 부모들이 자기의 삶의 상황에 골돌하다가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잘 돌보지 못하면 그런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수 있지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미워합니다. 그것이 옳지않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잘압니다. 그래도 그 긴세월동안 내가 엄마를 이렇게 미워하면 안되는데 내가 아빠를 이렇게 싫어하면 안되는데 그래도 내가 자식에 대한 도리를 이렇게 하면 안되지. 그런 생각은 늘 가지고 있죠. 그러다가 어느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과 용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때에 심경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깨달아질수록 자신의 그 죄가 점점점 크게 부풀면서 자신의 전 자아를 전부 채우는 것 처럼 느껴지고 그러다가 어느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그 말씀이 그것을 찔러서 터트리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회개하게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점은 뭐냐 하면 요점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식을 가지고 있닥고 치고 어떤때는 아주 심히 자학할 수있죠. “내가 어떻게 자식이 되어서 엄마를 그렇게 미워할 수 있을까? 참 나는 저 강아지만도 못하구나” 그런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을 가지고는 돌이킬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지적받는것과 자기 스스로 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그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그 죄에 대해서 나는 그런 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참 잘못된 것이다.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생각만을 통해서는 좀처럼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불쾌감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 그리고 그 죄를 정리하고나면 살게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풍성한 삶에 대한 그 전망,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하나님의 열열한 마음, 이런 것들을 스스로 자기의 죄를 묵상하면서 느낀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거기에서 와닫는 죄의식이나 이런것들이 아무리 자기를 가득체우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의식 하나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은 없단말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필요도 없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도덕적인 결단으로 얼마든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바꿀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자기가 그 죄를 범하며 물론 울었겠죠. 그전에도 그렇게 높은 은혜속에 살다가 울었겠죠. 그리고 잠못이루면서 괴로워했겠죠. 그렇죠. 그리고 고통했겠죠. 그렇지만 나단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었을 때 이전에 이죄에 대한 자각이 그저 쿡쿡 쑤시는 아픔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이 나단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찔르면서 피가 확 쏟아져나오는 그런 정도의 차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깊은 밑바닥을 하나님께서 만지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기에서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뉘우치는 눈물을 흘리게된 것입니다. 이 눈물이 거기에서 나온 눌물입니다. 얼마나 그의 심층 깊은곳을 하나님의 회개의 은혜가 훑고 지나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우리들이 교리적으로 회개가 무엇이냐?라고 말하면 흔히 3대 요소를 말합니다. 우선 지적인 측면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적인면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잘못을 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많이 아파 하면서 정서적으로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 실패, 혹은 고의적인 하나님을 향한 반역, 이런것들에 대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수도 있고 자신에 대해서 분노할 수도 있죠. 그리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의지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잘못했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분명하게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회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진술하면 그런식의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한 그 표는뭐냐? 예를들자면 지적인면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겠죠. “내가 그런 죄를 지었다.” 그것은 한번 알고 나중에 잊어먹었다. 다시알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죄다. 잘못이다. 알겠죠.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정서입니다. 죄에 대해서 진짜 정말 내가 그 죄를 짓다니. 정말 나쁜놈이지. 너무슬프구나. 그런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주 죄를 지은것에 대해서 아주 슬퍼하는 그런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번 최초에 생긴 그 감정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느냐? 그것은 그럴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오웬이란 청교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된 회개의 징표는 무엇인가? 그 참된 회개의 징표는 ”자신이 범한 그 죄를 예전에 그 죄를 범하기전에 그 죄를 혐오하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럴 것 아닙니까. 은혜안에 있을때에 어떤 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잖아요. 그랬던 것처럼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표는 자기가 회개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었던 그 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회개가 겨냥하고 있는 그 목표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죄의 상태에서 회개. 회개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로 가는 그것이 서로 통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제 이것이 곧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술 마셔본 경험있죠. 저는 그렇게 술은썩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술마셔본 경험있죠. 그런데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그것도 뭐 친구들하고 만나거나 좋은 일이 있어서 음식도 풍성하게 놓고 절제를하면서 밤새도록 이렇게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양의 술을 먹으면서 또 소화시키고 다시 배설로 다 쏟아내고 그리고 또 마시고 이러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죠. 오히려 약간의술은 건강에도 도움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음식도 변변치않는데 화가난다든지 해서 나는 그럴 차이까지 느낄 경지까지는 못갔는데 또 이렇게 어떤 술을 먹었느냐에 따라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몇번 안먹어봤지만 무슨술을 먹든지간에 아침에 일어나서 술을 먹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질도안좋은 소주를 사발에 담아서 벌컥벌컥 들이키고 단무지 같은 것 한쪽으로 안주를하고 그리고 이제 집에들어가는 것입니다. 새벽에 들어가서 퍼지고 자면 밤새도록 볶이다가 먹은것도 없는데 밖에 나와서 토하고 난리를 치다가 그러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잠들고 싶어도 잠들수도 없고,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이제 저는 진짜 술먹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 이제 다시 술먹으면 니 자식이다.” 내가 그런 자식해서 뭐하겠습니까. “내가 다시 술을먹으면 성을 간다.” “사람이 아니다. 성을 간다. 니 아들이다.” 별 얘기를 다합니다. “나 만약에 다시 술집에 가면 다리를 분지러버려.” 그러면서 별이야기를 다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기 분도 아주 나빠서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닥 한 3일 지나고 온 몸이 정상상태로 돌아와요. 그러면 이제 정상상태로 돌아오는 것과 함께 온 몸이 다시 술과 재회할 준비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설명하고 싶으냐 하면 어느 한순간의 혐오감이나 미움, 그것도 우리들이 신뢰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것같으면 그러면 사람은 한번 회개한 죄는 죽을 때까지 반복하지 말아야되지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사실 안그런 경우가 훨씬더 많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어떤 혼란을 느끼느냐 하면 이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단번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단말인가? 굉장히 현실적으로 혼란을 많이 격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번의 회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안갖다준단 말인가? 그래서 회개를 했는데도 그 죄를 다시 짓거나 혹은 그 죄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그리움을 갖게되는 것은 회개가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혼란을 격고있는 그런 부분들아닙니까. 실재에 있어서 정답도 별로 없이 그냥 궁금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하게 연관되는 그런 문제들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은뭐냐.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를할 수 있을것입니다. 이제 어느날 옷을 입고. 전에 우리 어렸을 때도 학교다닐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만은 그 옛날에 우리들이 등산가면 잘쓰던 것 가운데 스웨덴재 버너입니다. 석유품어서 확나오는 것. 지금도 아마 등산하는 사람들에게는 애호품일 것입니다. 성능도 좋고 아주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굉장히 고가입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 때는 아주 굉장히 비쌌습니다. 학생들이 돈을 모아서 살수있을 정도가 안될정도로 굉장히 비쌌습니다. 대게 이제 그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알콜같으로 해서 불을 붙여서 찌개도 끓이는 것입니다. 그 알콜의 단점이 뭐냐 하면 불이 붙었는지 안붙었는지가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이제 불이 이렇게 있는데 친구들이 여름에 수영복을 입고 수영하다가 와서 “야, 라면좀 끓여라.” 그래서 라면을 이렇게 끓이는데 불이 안붙어서 알콜 플라스틱 통을 들고 찍쫬는데 이렇게 튀어서 저쪽에 있는 친구 다리에 맞었습니다. 그런데 얘가 유난히 털이 많았습니다. 불이 붙어서 생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물로 뛰어들어가고 난리를 쳤는데 나중에보니까 물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바지를 입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알콜같은 것이 묻어서 불이 붙었다고 칩시다. 회개가 바로 그것을 끄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 옷을 모두 벗고 상처를 치료되어서 그래서 그 상처가 아문 것을 하나님과의 평화로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물론 회개도 회심과 같이 깊이가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어떤 효과를 갖느냐 하면 막 일어나고 계속되고 있는 그 죄의 불을 끄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력한 회개는 막불붙고 있는 죄에 대해서 강력하게 물을 끼엊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것입니다. 9월 11날 W.T.C 빌딩이 폭파된 그 불씨가 얼마전까지 있었다고합니다. 3달인가 지나도록 계속 불씨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에 죄를 깊이 회개하면 일시에 불을 꺼버리는 힘이있습니다. 회개의 깊이가 워낙 강력해서 그래서 한번의 회개를 통해서 아주 지긋지긋하게 그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리고 일평생 그 죄는 생각하기 싫을정도로 혐오감을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회개의 경험이 깊이가 다 다르지만 아주 강력한 회개하여야할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 죄의 뿌리가 매우 얕았어야 할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지은지가 얼마 안되는 죄인데 그것에 대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엄청난 깊이 있는 회개를 하게되면 한숨에 날려버릴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혐오감, 하나님과의 평화, 그다음에 죄에 대한 후회, 뉘우침, 그리고 용서의 확신 이런 것들이 다 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가 깊어지고나면 그러면 한번의 강력한 회개를 해서 자기가 그 죄지은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한 친화적인 성격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화적이라는 정도가지고 묘사가 안될정도로 그것에 대해서 이끌리는 아주 강력한 경향성이 아직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 경험해보신적 없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들이 항상 공통적으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일주일동안에 살았던 삶을 참회하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지은 이러이러한 죄들을 깊이 뉘우치면서 참회하죠. 그리고 예배시간에 회개하고 그리고났는데 다시 그 다음주에 지난주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던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경우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두가지를 보여주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참회라고 하는 것, 회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깊이가 깊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그런 죄의 뿌리들이 얼마나 깊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뿌리가 아주 옅든지 아니면 회개가 아주 깊이 강력하든지. 둘중에 하나여야되는데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될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사의 삶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정사의 삶이 주는 유익은 무엇이냐 하면 신자라도 피할 수 없는 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형편인데 정사의 습관이 가져다주는 강력한 효과는 뭐냐 하면 죄가 일어나도 그 죄가 뿌리를 내리기전에 하나님 앞에 쓸어버리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속에 떠오르는 죄는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이렇게 살면 안된다.라고 하는 본분을 깊이 자각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에서 쓸어버릴수가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자기가 공무원이나 혹은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이권이 있는 자리에 있어서 누군가로부터 뇌물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십다. 돈도 궁하고 유흥비도 부족하고해서 “아, 누가 와서 상납하는 사람없나” 라는 생각이 그날 들었다고칩시다. 그랬는데 그날저녁에 자기 자신을 꼼꼼히 살피면서 오늘하루 살아오면서 내마음속에 올바르지 않는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가.? 행위들이 있었는가? 라고 볼때에 쭉 생각하니까. 그것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공직에 있으면서 혹은 기업의 이 자리에 있으면서 공정무사하게 일을 처리해야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정한 물질을 나에게 가져다 주기를 바랬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우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한 성품을 묵상하면서 그날 자기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빌고 정말 내가 부요하지 않고 많은 불의한 재물을 누리면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이 삶이 백번 행복합니다.“ 그렇게 복잡한 기도말고라도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리고 눈가에 맺히는 이슬을 닦고나면 한꺼번에 싹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누가 돈봉투 들고와서 “이것받고 일좀 처리해주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어림이나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뇌물을 받고 그래서 그것이 더큰 뇌물을 불러오고 그것이 더 거액이 되고 그래서 그 뇌물을 받은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또나쁜짓을 하고 이렇게 일이 엉키고 결국은 수사기관에까지 포착되고 계좌추적에 들어가고 영장이 청구되고 그러면 조용히 묵상하면서 “아, 3년전에 내가 그런 유혹을 받았던 것, 그것이 참 잘못된 것이구나. 하나님. 제가 그때 유혹받은 것, 참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날 저녁에 기도해도 그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 도움이 안되는 상황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의 범죄를 마치 실재에 일어난 범죄처럼 거의 동일하게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이유도 실제로 마음에서 일어난 범죄가 밖으로 일어난 범죄와 아무 차이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주님이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버려두면 그것이 맺일 결과들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간음이 계속쌓이면 반드시 그 일을 하고맙니다.
그래 지금도보면 가끔 인터넷에 들어오는 것보면 청년들이 인터넷 음란싸이트 이런것에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처음부터 “접근하는 것이 옳지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접근하지 말아야합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 찾아서 목양을 받던 몇몇지체들 가운데도 그런 것들이 가져다준 엄청난 디메이지 때문에 영혼의 손상을 입고 그리고 심한 오랜세월동안을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그랬던 사람 많습니다. 자기를 통제할 수 없으면 그런 속에 고급프로그램을 깔아서 자신이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해야합니다. 계속 유혹을 받는데 어떻게 안될 수가 있느냐고요.
제가 작년9월인가에 카나다에 갔지않습니까. 저는 어태까지 평생에 낙시대를 들고 대여섯번 가보았지만 송사리 한 마리 낚아본적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하도 짜증이나서 누가잡은 고기를 거기에 매서 한번 흔들어보았습니다. 한번만 잡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목사님이 “정말 그렇게 소원이냐.?” 그래서 “아, 진짜 소원입니다.” 그랬더니 걱정말라고 “오늘 내가 평생소원 풀어줄테니까. 이렇게 멀리 집회오셨는데 그것 못풀어주겠느냐고.” 오전에 집회가 끝나고 오후에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까운 이듬레이크라고 있다고 가자그래서 갔습니다. 호수가 좋았습니다. 봉고에서 고무보트를 꺼내서 바람을 넣으니까 보트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를저어서 갈줄 알았더니 모타를 달아야된데요. 그러더니 뒤에다 바테리로 가는 모타인데 꽤 빨리가요. 그래서 그것을 탔습니다.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고기가 물릴것이래요.
그래서 저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평생못잡았는데 카나다 고기라고 눈이멀었겠느냐” 그런데 송어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미끼를 하나 끼어서 주고 자기가 시키는데로 하래요. 한참 가더니 “여기입니다. 조용히 하시고 낚시를 던지세요.” 던졌더니 사르르 하고 1분도 안되었는데 뭐가 턱하고 걸리는거에요. 호수가 깊으니까 장화나 신발일리는 없고 고기가 탁물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정말 전도할 때 그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고기가 문다라는 느낌을 받을 때 제빨리 채야됩니다. 전도할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엄청나게 힘이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 10킬로짜리 하나 물렸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끌어올리고나니까 이만한 송어였습니다. 한40센티정도됩니다. 조그마한 것이다. 그래서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것입니다. “야, 이것이 밖으로 나오면 40센티짜리 아무것도 아닌데 고기의 고향은 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물속에 있을 때는 2킬로밖에 안되는 송어가 진짜 20킬로쯤 되는것같이 느껴질정도로 그렇게 강력합니다. 그래서 대여섯마리 낚았습니다. 그래서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겨울이래요. 그래서 어떡하느냐했더니 자기는 월요일마다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새카맣습니다. 낚시를 하도많이 다녀서. 그래서 얼음구멍을 뚫어놓고 낚시를 하고있으면 고기들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종류가 있는데 낚시밥을 비웃듯이 그냥 지나가는 고기가 있고, 그놈을 절대 못잡는데요. 두 번째는 와서 한번 툭 건드려보고 가는 것이 있고, 그것도 잡기가 힘들데요. 그런데 건드리면서 계속 그 옆을 빙빙도는 고기가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잡힌데요. 아주 심오한 진리를 거기에서 깨닫고 왔습니다. 그래요. 그렇게해서 자극을 받는데 안걸리겠습니까. 당연하게 걸리죠. 그런데 절대 접속하면 안됩니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문화인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했던 지체들의 상담을 해보면 자극은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고 그다음에는 그 자극으로 만족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런데 아까 그 얘기하다 말았는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렇게 쫓아버리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정사의 삶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면서 뉘우치는 삶을 사는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흘리는 통곡을 할지않으면서 살아도될지 모릅니다. 적어도 자기 개인의 경건에관해서만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않습니까. 진짜 성경에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겨우 자기자신의 경건을 옹호하기 위해서 아둥바둥하면서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충분하다.라고 말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 비참한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에 은혜받은 다음에 그렇게 행복해도 다시 예배끝나고 갈때에는 완전히 가지못할 곳으로 끌려가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렇게 슬픔기색으로 세상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일주일내내 주일만 기다리면서 살아도 안될것입니다.
세상에 돌아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성취해가는 그런 기쁨이 있어야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개인적인 경건을 지키기 위해서 눈물흘리고 애를쓰는 정도를 뛰어넘어서 오히려 경건하지못한 이 세상을 보며 아파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보면서 깊이 고통하면서 교회를 만민을위한 기도의 집으로 바꾸는 그런 삶, 그것이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겨우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겨우지키는 것이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넘쳐서 그래서 나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가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솟아난 그 생수의 강이 자기의 가족도 변화시키고 만나는 사람도 변화시키고 하는 이런 확장되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향력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고 그러한 영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에 깊이 사로잡히고나면 그럴수 없는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좋은 것이 뭐냐 하면 매일매일 정사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고 죄도그렇고 씨처럼 떨어지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에 죄가떨어져봤자. 열매를 맺지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길가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무장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씨가 있는데 이 마음밭에 떨어졌는데 이 마음이 워낙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어서 딱 떨어졌는데 이 죄가 계속해서 성장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됩니까? 바람에 날아가버리든지 밟혀버리든지 있기는 있는데 전혀 여기에 영향을 미치지못하고 동화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고 지금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눈물겨워서 성경찬송 끌어안고 주님뜻대로 살아야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눈물을 감추면서 지금 집으로 가고있는 교인에게 “안주 무료. 팁 절대 4만원. 오시기만 오시면 아주 멋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줄서서 유흥가의 전단지를 나누어준다고 해서 나중에 어떻겠습니까. 짜증이나지 않겠습니까. 전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막 전도하다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면 얘기할 수록 열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워낙 그 마음이 던져주고 있는 이 복음의 씨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살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우해서 통곡할 수 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몸부림칠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 시대와 그리고 교회, 그리고 주의 이름이 없수이 여기는 이 세상에 대한 처절한 아픔과 몸부림들이 배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파수적인 경건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파괴하려고 하는 강한 우리의 환경의 도전. 이런 것들로부터 싸우면서 우리를 지키죠. 그런데 우리를 지키는 이유는뭐냐 하면 사실은 우리 자신의 경건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는데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는 이유는 이 경건을 보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경건, 이 하나님 사랑, 이 신앙을 불질러서 온 세상에 이불이 번지게하기 위한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진정한 소원이죠. 우리의 신앙이 겨우 자기를 파수하고 그러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직장들어가는 젊은이들이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목사님 제가 크리스챤인데 직장에서 무지하게 핍박을 받고있다고. 사람들이 다 자기만 미워한다고” 그래서 “왜냐” 그랬더니 “자기는 직장 동료들하고 절대 저녁먹으로 안간데요.” 왜그러느냐. 그러니까 반드시 술을 먹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성결한 그리스도인이 술먹는 그 자리에 자기가 앉을수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결이 겨우 그런 것이 성결이라면 너무슬픈 성결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수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좋죠. 쉽게 이야기해서 그 사람들이 밥먹으면서 술한잔먹는 그곳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성결이 엄청나게 도전을 받는 것을 느끼고 그 속에서 그런 분위기에 항거할 수 없을정도의 정체성이라 그러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무나 깍으면서 먹고살아야지 이 죄악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살수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서 또 그 사람들과 똑같이 되어야된다해서 거기에서 술을 퍼먹고 더 신나게 바람잡고 놀면 안되죠. 바보같은 생각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사가 주는 유익이 그것입니다.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의 경우는 이미 그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바보입니까. 오늘저녁에 말씀묵상하면서 오늘 새벽에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서 오전시간 내내 보냈는데 낮에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한순간에 덤벼들어서 그 여자를 겁탈했을리는 없지않습니까.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짠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그동안에 먼저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정사의 삶을 살아갈수 있는 여력같은 것들을 모두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군이 공격할 때에 온갖 병기로 무장하고 있으면 죽으려고 결심하지 않는다음에야 덤벼들겠습니까. 그래서 술을 먹여서 총도빼앗고 칼도빼앗고 다 무장을 해제시킨다음에 그다음에 덤비겠죠. 그런 해제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동으로 일어나는 죄를 거의 동일시하면서 경고하신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벌써 그런 경유를 지난 것입니다. 죄가 깊이 뿌리내기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이런 생각하면 안됩니다. 한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서 그 때의 모든 것들 다 끝장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지옥에서 한순간에 울부짖는 회개를 통해서 한순간에 빛속으로 옮겨왔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시인이 경험하고 있는 죄의 성질상 그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에 나오는 밤새도록이 아니라. ( ? ) 밤마다.라고 히브리어의 콜 거기에 올이라는 뜻도있고 에브리라는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번역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그런 신학적인 배경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그렇게 번역했죠. “밤마다 내가 눈물로 내 요를 적시고 그리고 내 침상을 띄웁니다.” 여기에서 “행악하는 자들아 물러가라. 너희는 나를 다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그러면서 어떤 회복을 선언하는 이것은 하룻밤사이에 모두 일어난 일들이라고 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떤 혼란을 자꾸느끼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회개에 있어서의 생명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해지는 것인데 그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지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완전히 마귀의 속임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날 죄를지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너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괴로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고백을 했는데 자신 속에서 회개를 제대로하다보면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회개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회개가 있지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하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는 제가 그렇게 말하면 안될 것 같아요” 그러면서 횡성수설하면서 회개랍시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어떤 때에 그 회개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면 마치 주님이 내안에 계신 것처럼 마치 내속에 나를 진액을 짜듯이 밀어내시면서 그러면서 나를 회개시키신 적이 있지않습니까. 회개를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사죄를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또 똑같은 죄를 짓는다든지 아니면 그 죄에 대해서 처음 그렇게 기도할 때 느꼈던 그 죄에 대한 뼈저린 후회가 그다음에 다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깊이 회개가 나오면 그냥 한순간에 하나님 나를 와락 끌어안고 막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시면서 “아, 내가 너 그말 할 때를 기다렸다.” 우리는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증거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입니다.
아니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초창기 시절에 굉장한 혼란을 느꼈습니다. 아주 과장하자면 저의 성화생활이 거의 포기할정도까지 그런 혼란을 느낀 대목이 이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은 별로 안느끼신 것 같은데. 그런데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냐 하면 정직하고 진실해지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어쳤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용서해주시지 않는데 그렇데 도대체 내가 이이상 할것이 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용서의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상상임신 비슷하게 그래서 자기가 격렬한 회개를 할 때에는 사람들이 뭔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싸인이 왔다는 것들에 대해서 강력한 자기 암시를 갖고싶어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13,4년전 이야기인데 뭔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쳤는데 그 때에 어떤말씀을 듣고싶었느냐 하면 다른 것은 다 필요없어요. “앞으로 축복해주겠다.” 그런것도 필요없고 “옛날에 네가 지은죄 용서해준다.” 그런 음성을 듣고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망이 아주 간절해지면 사람들이 스스로 그 속에서 하나의 드라마같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할 때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자기 죄에 대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기도하다가 성경을 펼쳐보니까 내죄가 사하여졌고. 그런 성경구절이 나왔습니다. 뭐 이런 것들을 많이 간증하는 것들을 보면 사람들 마음속에 진짜 그것을 받고싶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말로만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증명서하나 써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 가야할 것은 지은죄에 대해서 다시 벌을 내리시지 않겠다고 하는 그어떤 용서의 체험, 그것이 아니라. 더적극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평화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평화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죄를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에 죄짓기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그 탁월한 친교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회개의 적극적인 목표입니다. 간절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거꾸로 미움과 용서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한 것 가운데 이런 논리를 제시한적있죠.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미워하게됩니다. 자기가 깊이 미워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자기에게 “내가 이렇게 미안해. 내가 예전에 잘못했어” 그러면 “알았어. 없던걸로하지.” 그래서 이것가지고 만족하지 않아서 이 사람은 계속 와서 “미안해 정말 내가 잘못했어 무릎꿇고 빌라면 빌게” “아, 그럴 필요없어. 용서해줬다니까. 다시 이런일로 나를 찾아오지마 진짜 용서해줬다. 내가 한 장 써달라하면 내가 써줄게” “네가 나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지만 나 용서했다고 그런데 다시는 보고싶지않아”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용서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은 혼돈합니다.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고싶지는 않습니다.” 이 얘기는 뭐냐 하면 용서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미 복음속에 약속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지금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물론 심판이 무서워서 회개할 수도 있죠. 왜? 신자에게도 하나님이 잘못했을 경우에 이 세상에서 갚으시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아니더라도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살면 내 인생이 곤고할터인데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안놔두시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입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는 그런 이유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그로하여금 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그로하여금 그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게 만들어주는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지만 그러나 그 죄는 용서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궁극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적을 받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그 회개는 자신속에 불타고있는 죄의 불들을 한번 끄는 역할들을 하지만 그러나 불을끄고나도 정리되어야할 불씨가 많이 남아있는 것ㅊ럼 그렇게 회개하고나도 그 체험이 워낙 강력하고 죄가 얕으면 한번에 모든 것들이 성취될수있지만 그렇지 않은적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밤마다 하나님 앞에 요를적시고 눈물로 흐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죄에 대해서 용서하신다는 말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것가지고는 안됩니다.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형벌 안주시는 것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렸던 그 탁월한 친교와 행복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인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시인은 밑바닥까지 뒤집어지는 그런 회개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무엇이 가져다주었느냐 하면 죄를 정확히 지적하는 나단이 생각나게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다주었습니다. 물론 나단의 설교는 우리들이 오늘날 제시하는 것처럼 죄에 대한 지적, 그리고 돌아올수 있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한없는 긍휼, 거기에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 이런 것을 골고루 풍부하게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단의 설교는 단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의식 속에서만 괴로워하고 있어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놀라운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나단의 죄에 대한 설교는 이미 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성속에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제하고있던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과 사랑과 긍휼의 성품. 이런 것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가 죄를지어서 지금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는데도 나를 책망하시는 이유 그 자체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그것을 상기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은혜로운 성품들을 떠오르게끔 만들었습니다. 밑바닥까지 훑고 지나가는 뼈져린 회개가 시인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참회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회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서의 참회를 경험해본적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안에 있는한 그 사람이 그런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당신의 거듭남을 아주 진지하게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나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수없이 세월이 흘러도 한번의 회개의 눈물도 흘릴수 없는 사람, 그리고 자시느이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있고. 구원이 이르는 그의 회심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있겠습니까. 거듭난 사람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 쌓아올려지는 모든 단정한 교회생활과 다양한 신앙에관한 지식들, 익숙해지는 교회생활, 이런 기독교적인 에티켓. 이런 것들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죽으면 그는 지옥가고야 말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구원의 심판앞에서는 그가 한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제고할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진실한 참회가 하나님의 신앙의 양태의 문제이고 그리고 어떤 개성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런 몰지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무를 심었는데 봄이되고 여름이 되면 싹이나고 잎이나고 가지가 뻣어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고 한 나무는 봄에 심어놓은 그대로 여름 가을, 겨울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햇볕이 나도 시들지 않고 비가와도 더 파래지지 않고 여름이 되었는데도 꽃이 피지않고 가을이 됨에도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두 나무는 개성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보같은 판단입니다. 한 나무는 살았고 한 나무는 가짜로 만든 나무입니다. 참회가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존재할 수있습니까. 참회가 없는 하나님의 백성,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참회가 없고 회개가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죄많은 이 세상, 죄의 본성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해당될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참회가 있습니까? 참회가 없다는 이야기는 한번 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복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회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골방에서든지 예배당에서든지 아니면 혼자 전철을 타고 갈때든지 성경을 읽을때든지, 책을 읽을때든지, 여러분들의 죄를인해서 진지하게 눈물을 흘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너무 찌르도록 아파본적이 언제입니까? 그래서 이 아픔만 멈출수있다면 이것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주님의 마음을 내가 진정시켜드릴수 있다면, 내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 지은죄를 고백할 용의도있고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수도 있고 하여튼 무엇이든지 할 수있겠다.라고 할정도로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해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것이라고 그냥 덜렁덜렁 살아요. 그리고 옛날에 하나님 앞에 받았던 은혜, 그런 것이나 자랑하고 말이죠. 씩씩하게 교회일 열심히 하면 천당가는줄 알고 그것이 다인것처럼 살아가고 자기 의에 가득차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외국에 있는 어느 형제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 목사님 책을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는데 자기도 동감입니다. 자기는 신학교 선생으로 강의하고 그리고 정말 기도많이 하고 설교에 있어서 자기가 능력이 있다는 것이 벌써 여러차례 입증이 되고, 막 썼습니다. 아무 답장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개의 편지가 왔습니다. 저의 메일이들어왔습니까? 들어왔죠. 보냈는데 안들어왔겠어요. 중간에 날아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중에 누가 테입을 사서 보내준 것을 다 읽으면서 자기가 편지보내고 나는 답장도 안했는데 자기가 또 답장을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그것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내가 받은 은혜, 또 신학교 선생, 그다음에 설교에 의해서 특히 여러차례 자기의 능력이 많이 입증되었다고 하는 것, 지금 자기가 그 편지를 보면 얼굴이 뜨거워서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래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니다.
제 마음속에 정말 간절한 소원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도 인터넷에 들어가보니까 참회의 방에 많이들 들어왔습니다. 이름은 안밝히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데 뭐 간음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사람도 있고 그다음에 미워한 것 용서해달라고 빈 사람도 있고. 나는 정말 훌륭한 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세요. 여러분, 정말 우리의 삶속에 참회가 있습니까? 아니 우리 살아있는 신자의 표라고 이야기하는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회의 정신없이 자기 깨어짐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역에 대해서 접근하고 말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주님의 성품과 닮아가는 그 성화의 삶의 국면에 적용시켜서 이야기 하든지 무엇에 적용시켜서 말하든지간에 어쨌든지 참회의 마음없이 자기깨어짐의 정신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아주 너그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말하잖아요. 그것이 아주 진취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상인것처럼. 죄에 대해서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는 것이 마치 고도의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표인것처럼 생각하고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주 심약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인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생각가지고는 여러분들이 결코 생명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시인이 마치 이죄를 범했기 때문에 훌륭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될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이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인상이 있지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사실 이 죄가 가져다 주는 효과가 아니라. 사실 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면서 그는 예전에 피상적으로 알던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깔린 죄성,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그리고 정말 의인은 누구이고, 불의한 자가 누구이며 그리고 하나님을 배역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 신자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이 시인이 아주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제가 정말 꿈꾸고 그리워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신경쓰죠. 그렇죠. 사람이 많아지니까. 물론 교회도 지어야죠. 안질용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들어가서 신앙생활할만한 곳을 누가 빌려준다. 그러면 나 안짓습니다. 할 일없다고 그 것을 하고 밤을 새고 앉아있겠어요. 열심히 설교하고 기도하고 가서 전도나하고 있지. 내일이라도 당장 하나 어디서 얻어 오세요. 내가 모두 수포로 돌리고 거기 들어가서 예배듣리고 싶으니까. 이런일도 하고 저런일도 다 해야죠. 그렇죠.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교회가 커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역사와 전통을 쌓아가고 그래서 제가 언젠가 부러워했던 예배시간은 매일 자도 헌금은 많이 하는 교회같이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천막에서 모이든지 공설운동장에서 모여서 탠트를 치고 예배를 드려도 이 참회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성도들이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적합한 표현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참회의 은혜 속에서 일평생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이 있는 교회.
어느 교회에 이름만 대면 다아는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자기교회가 맨처음에 세워질 때 얼마나 하나님이 회개의 역사를 일으켜주셨는지 우는 소리 때문에 예배를 못드릴 때가 많았었다고. 그런데 그것이 과거에 대한 회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보세요. 참회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진지한 회개가있습니까? 뉘우침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시인이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뼈속깊이 파고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적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울리지 않게 지은 자신의 죄와 그리고 그 최초의 죄를 인해서 경험하게된 물고들어온 수많은 죄들에 대해서 뉘여쳤습니다. 그러한 죄악들이 자기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도 얻을수 있을만치 그렇게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입니다. 뼈저리게 참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만은 오늘 분명히 해야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자,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그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이시라도 회개 이외의 다른 길들은 우리에게 예비해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거기를 통과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회개의 깊이와 관계의 회복Ⅱ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下)
지난 시간에는 6절 하반절을 중심으로 “눈물로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웁니다.”라는 구절을 살피면서 회개의 정서적인 측면에 대해서 우리들이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볼 주제는 여기에서 나오는 시인의 회개와 함께 나온 이 깊은 눈물을 통해서 우리들이 한번 회개와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오늘 이시간에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지난 시간에 제가 설명드린바와 같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흘리고 있는 이 눈물은 가식적인 눈물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발가벗기고 그리고 그 앞에서 주의 성령을 통해서 자기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지금 회개하고 있는 이 장면을 시인이 자기 자신의 필치로 그려낸 것입니다. 따라서 나오는 시인의 이 눈물은 회개에 반드시 따라오는 자기깨어짐의 한 중요한 증거가 될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어느정도 강도의 슬픔에서 눈물을 흘리느냐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한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그분과의 생명적인 연합 속에서 온갖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범죄하기 전에 지은 시를 보더라도 이미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하고 풍부한 정서를 느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정서가 메마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의 세계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그 만남의 정서를 경험하게되면 어떤 정서적인 민감성들이 훨씬 많이 높아질수 있습니다. 그런예는 충분히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변합니까? 안변합니까? 예수 믿으면서 성격이 변합니다. 어떻게 안변하겠습니까. 좋은 친구 한둘을 만나도 인생이 바뀌는데 교회에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많은데 왜 안바뀌겠으며 귀신이 들어가도 표가나는데 성령이 오셨는데 표가 안나고 바뀌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자기가 본질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변화가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 쫙 줄로세워놓고 한 5분씩만 이야기하면 연애하는지 안하는지 거의 가려낼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침떼고 나녀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애가 지금 곤고한 연애인지 아니면 기쁨으로 가득찬 연애인지 그리고 그 기쁨도 그래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주님께로부터 멀어진 기쁨인지, 그것도 정확하게 찾아낼수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한번 찾아와보세요. 정확하게 찾아낼수 있습니다. 숨길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깊이 사랑하고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숨길수 없는데 하물며 신자가 주님을 만나서 큰 은혜를 받고 “날마다 내 영혼은 주를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의 그런 놀라운 텃치를 느끼면서 기쁨 속에서 생활하는데 그 사람이 변함이 없다. 그러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에 의해서 오랫4동안 굳어졌던 정서들이 자극되어서 터트려지면 그다음음부터 눈물도 몇번 흘리기가 힘들지 한 서너번 터지고나면 그다음에는 이제 자연스럽게 눈물도 나오고 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땀 안흘리닥. 어느해 여름에 땀을 펑펑 흘리고나면 그다음에 땀구멍이 넓어져서 조금남 더워도 담이 쏟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이 정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기전에 여러분들의 정서는 어떤 의미에서 망가지 정서입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것들을 나사풀린 사람처럼 뜨겁게 사랑하거나 하나도 우습지도 않는데 웃거나 또는 슬픈데도 전혀 눈물한방울 흘릴지 모르거나 이렇게 정서적으로 망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나면 여러분들 모두 정서장애였던 것들이 고쳐집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 울어야할지 어느시점에서 웃어야할지 이런 것들이 풍부해집니다. 그런 것들이 자극되어서 한번 분출되고나면 그다음에 그런 정서들을 신앙안에서 상당히 유지하면서 살아갈수 있게끔 그렇게 우리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전에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경험 속에서 환희와 거룩한 기쁨, 분노, 슬픔, 이런 것들을 풍부하게 느끼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라밍 오늘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표면적인 회개라기보다는 시인 자신속에 일어난 모정의 강력한 변화를 반영한 그런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눈물들이 어떤 내면의 변화가 가져온 눈물이었느냐 하는 이것은 자기 깨어짐의 통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경회때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자기깨어짐은 상한 마음과는 좀 다릅니다. 상한 마음은 영적 각성을 통해서 갖게된 변화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영적각성은 항상 우리로하여금 이렇게 한쪽 방향에서 늘 보던 사물을 영적으로 깊이 각성하게되면 다른쪽애서 이것을 볼수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각성하고나면 자기 자신도 예전에 보던 자기 자신과는 다른면을 자기 자신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깊이 각성되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이나 혹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영적으로 각성하게 되면 새로운 마인드가 생깁니다. 자기는 항상 문제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쪽에서 자신의 정체를 볼수 있게 되는 그런 변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각성된 마음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영적으로 각성되고나면 그 때에 자기 자신의 관심사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신령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은 번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민이 일어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개달으면서 깊이 심적인 부담을 갖고 괴로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깨뜨려진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경험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깊이 자기자신이 깨뜨려지면서 회개의 눈물을 쏟아놓게 되는 것은 이것은 영적인 각성,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자리에 들면서 시인이 무슨 생각은 안했겠습니까. 그렇죠. 내 안에 사라진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아무리 손을 뻣어서 내 영혼을 만져봐도 하나님을 기뻐 노래할 제목들이 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 두고 켜던 그 수금의 줄은 끊어졌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찬양을 돌려드릴수 있더 자신의 영혼에는 거미줄이 끼었습니다. 그런 처절한 궁핍함을 맛보면서 어떤 두려움을 시인이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두려움과 그다음에 별의별 복합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꼈겠죠.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후회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고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어느정도 상한 마음은 될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깨뜨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참회와함께 일어나는 자기깨어짐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회개와함께 참회 속에서 경험되는 자기깨어짐의 정체는 죄에 대한 사랑의 깨어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참회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습관적은 죄들을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습관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하면 그 죄에 대한 사랑을 막지않는한 결코 그 습관적인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렸죠. 어느 알콜중독이 깊이 드신분하고 상담을 했는데 가족이 그 사람을 알콜중독에서 끊어놓으려고 2년반인가 3년동안을 강제로 강제수용시켰습니다. 그런 오늘날의 제도도 문제가 많습니다. 본인은 술을 먹을뿐이고 정상적으로 멀쩔한데 가족들이 도장찍으면 그냥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서 짐승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3년동안 있다가 나왔는데 나와서 제일먼저 한 것이 술집에 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환경적으로 그 사람을 아무리 멀리 떼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한 그 환경은 다시 환경이 조성되면 언제든지 그 쪽으로 돌아갈수 있다. 그런 친화적인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죄에 대한 사랑을 끊는 것이 어디로부터냐 하면 깊은 참회를 통해서 죄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 대해서 깨뜨려질 때에 그 때에 오랫동안 자기가 계속되어오던 그러한 죄들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진심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좋아했겠죠. 그리고 그 속에서 죄를 짓고 고통하면서 그것과함께 죄에 대한 사랑도 같이 자랐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복합적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저절로 깨뜨려진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거기에는 나단 선지자의 정직한 그의 영혼의 상태를 그의 삶을 보여주는 아주 정직하고 타협이 없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 있었고, 그리고 그 앞에서 다윗은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왕이 그릇된 길에 들어섰을 때에 직언을했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을 죽이거나 가둔 왕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다윗은 그렇게 정직하게 직언해줄때에 하나님 앞에 거뚜러지는 그런 참회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비롯 이 사람이 특정한 죄에 탐닉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순간은 사실 하나님보다 그런 죄를 더 사랑했습니다. 존 오웬의 말처럼 “신자가 죄를 지을 때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죄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런죄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보다 더 가치있다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가치관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속에 있는 타고난 부패성,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오래도록 살지못함으로 와해된 어떤 경건, 경건의 능력,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느슨해지고 풀어진 자신의 걷잡을수 업는 마음의 방종, 이런 것들에 지금 휘둘려고 살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 자체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보다 훨씬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럴정도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단 선지자가 자기에게 그렇게 정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며 직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사랑이 열열하고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을 버렸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가치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그 사람 안에 있는 은혜를 이긴 상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 때에 나단선지자의 정확한 지적이 주어지니까 거기에서 깊이 참회하며 거꾸러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왕이니까 얼마든지 그 상황을 뒤엎어 버릴만한 권세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무엄하도다” 한마디면 끝입니다. “어느 안전에서” 그러면 끝입니다. 그리고 아니라고 우기면됩니다. “네가 무엇을 안단말이냐?” “너만 선지자냐? 나도 선지자다.”얼마든지 그럴수 있었는데 그럴만큼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강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깊은 깨뜨려짐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그렇게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뜨려지고 무너졌는데도 마지막 결말은 어떻게 났습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어떻게 했습니까? 정식으로 데려왔죠. 그 삶을 다윗이 청산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정확한 답은 뭐냐 하면 다윗의 판단에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다윗의 판단에 이제 우리아도 죽고 그리고 이 여자는 왕과 함께 죄를 지은 여자로서 그렇게 되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사실 돌에맞아 죽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자신이 만약에 버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이 가장 가까운 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그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서 왕궁에서 살게되었는데 그것과함께 또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또한편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참홰했으면서도 그 죄를 결별할 수 없었던, 그 관계자체를 결별할 수 없었던 그런 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죄는 아이와 같아서 마음으로 품고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처분할 수 있습니다. 없애버릴수도 있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어떻게 할 수가 있는데 일단 행동으로 산출해 놓게되면 이것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자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시인이 맞이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잘못을 해놓고 나서 그다음에는 그 여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그 여자도 알지 않았겠습니까. 자기 남편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 것도 나중에 알게되었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다윗을 떠날수가 없었을 것이고, 또 다윗은 다윗대로 이 여자에게 매달리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를 이기는 수단으로서 자기는 그런 은밀한 죄들을 즐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다윗 속에서 계속 자라가고 있었던 죄에 대한 사랑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뜨려지는 이 상황을 맞이하게됩니다. 결국은 자기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죄에 대한 사랑, 그것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번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나는 굉장히 쓸만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두가지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뒤면처럼 붙어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참회하면서 죄에 대한 사랑이 자기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끊임없이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겸손할 수 있겠는가? 한 신자의 겸손의 깊이는 자신이 사람들을 향해서 갖추는 겸손의 예의를 통해서 겸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신자가 가지고 있는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절대자 앞에서의 겸손을 토대로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표출되는 것이 그것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진다고 할 때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과 그리고 자기의 죄에 대한 사랑의 깨어짐 이 두가는 항상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율법에 있어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감히 자부하던 바울이 자기를 죄인중에 괴수라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 이면도살펴보면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면서 형식적으로 비난받지 않고 살아가면 그것으로서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듭나고 변화되고나자 그는 새로운 각도에서 자기를 바라볼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속에 비옷뒤의 풀밭처럼 한없이 자라는 이 무성한 잡초밭과 같은 자신속에 있는 수많은 욕망과 내면의 죄들을 보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거룩한 본성이 심겨지지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죄 같은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니까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욕구를 갖게되니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되는 것이지 솔직히 말해서 서울에서 자란 사람들은 “피”가 무엇인지 “알곡”이 무엇인지 그런 것 잘모릅니다. 그러나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들은 아주 기가막히게 조금밖에 자라지 않았는데도 이것이 뽑아야할 집풀인지 아니면 곡식이 될 풀인지 정확하게 찾아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알곡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되니까. 아닌 것들에 탁월한 감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성품이 자기속에 심겨지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주 몹쓸 죄인이라는 그런 인식을 갖지않는 것입니다. 그런다가 어느 한순간에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거룩한 본성이 심겨지게되니까.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 믿고난 다음에 산 삶이 예수믿기전에 바리세인으로 살았던 삶보다 못한 삶이 뭐가있습니까? 설마 예수님을 믿고난 후에 율법적으로 사는 것은 가치없는 삶이다. 그리고 율법을 짓밟으면서 살았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만났어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한 율법을 준수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나서 오히려 바리세인의 삶보다는 훨씬 거룩해졌는데도 그런데도 바리세인 시절에는 느낄수 없었던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깊은 참회, 그리고 자기속에 뿌리박혀있는 이 죄에 대한 사랑같은 것들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한히 깨뜨려지는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살수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심겨지는 그 놀라운 변화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단선지자를 만나고 나서 그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의 영혼을 깊이 찌르면서 아주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역사하게되니까.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게되니까 그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든 불결과 더러움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깊은 뿌리박혀있었던 그 사랑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하면서 그리고 통회하는 장면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얼만큼 이런 죄에 빠졌다가 회복되었는지 정확한 날자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왜냐 하면 그가 꾸미는 여려가지 일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동안에 그는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그런 악에 빠져서 살아가는 동안에 죄에 대한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나단선지자를 만나고 깊이 깨뜨려지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눈물로 참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자기속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이 깨뜨려지면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고, 그리고 그가 단 한번의 그림같은 회개를 통해서 한번에 결단하고 새삶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는 사람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생각일뿐이지 실재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이 사람은 여기에서 표현하듯이 밤마다, 혹은 온밤을 이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는 이런 참회를 아주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단히 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깨뜨리고 그리고 그 깨뜨려진 과정을 통해서 은혜가 이 사람속에 다시 세워지는 무너진 이 사람의 세계가 재건되는 그런 변화가 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속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변화가 이 사람을 정말 새롭게 다시 만들어서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이 사람이 경험해 가면서 무너졌던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질서들이 새롭게 죄의 질서들이 다시 무너지고 은혜의 질서들로 다시 세워지는 그런 참된 변화가 이사람의 마음속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사람의 깊은 참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충분히 그 죄에 대해서 고통을 받게 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게 하시다가 어느 한순간에 터치심으로 이 죄에 대한 사랑을 감퇴시키시고 그 죄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셔서 결국은 그의 마음을 잠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서 죄로 인해서 질서가 세워지던 이 사람의 마음 자체를 하나님이 쓸어내시면서 그러면서 새롭게 은혜의 세계를 재건하시는 장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이미 있는 것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다시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아주 깊고 진실한 참회가 없이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를 은혜가운데 사는 것은 오늘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여러분들이 죄가운데 살면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질서들이 다시 새롭게 구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질서들을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이 점차점차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부터 죄에 대한 질서들이 세워지면서 은혜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뿐만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죄에 대해서 저항하기 힘든 그런 한 세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갖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은혜에 대해서는 자꾸 이루어져야되고 죄에 대해서는 자꾸 무너져야 할것아닙니까. 그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두 세계가 같이 구축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아주 진실하고 깊은 참회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의해서 건설되는 세계는 강화시키고 그리고 죄에 의해서 구축되는 질서와 세계들을 무너뜨리는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깊은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흘리는 그 눈물들은 그런 통증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입니다. 이미 구축된 세계들이 허물어질 때 그때 깊은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똑같이 죄의 세계가 무너질때도 통증을 느끼고 은혜의 세계가 무너질때도 통증을 느낍니다. 은혜의 세계가 무너질때의 통증은 신령한 자아가 느끼고 죄의 질서들이 무너질때에 느끼는 그 통증은 육적 자아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너지는 것만큼 즉각적으로 기쁨이 안올때가 있습니다. 무너지는것만큼 즉각적으로 기쁨이 안올수가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다윗과 같이 은혜의 질서들이 거의 파괴되고 죄의 질서들이 서는 가운데서 그때 이제 이 죄의 질서들이 파괴되고 무너져 내려가면서 자기속에 있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엄청난 육적인 자아가 느끼는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성화에 있어서 진정한 참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 회개케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회개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루만지시고 양심의 가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들을 완강히 거부하는 죄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회개의 경험들을 잘 보시지를 않으신다. 자신이 회개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진실로 참회하고 깨뜨려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게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깨뜨려 주시도록 자기를 내놓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믿음입니다. 죄가운데 살아온 사람에게 그 세계가 무너지면 뭐가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구축되온 죄의 질서, 그리고 죄가운데서 죄에 대해서 죄악된 반응을 하면서 사는것밖에 자기 자신속에 어떤 좋은 준비도 없는데 그것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렇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개방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것 자체가 아주 중대한 모험입니다.
죄인들의 눈에 그를 죄로유혹할 때에는 항상 확실한 기쁨의 보증이 보이고 그 죄인들의 마음을 회개로 인도할 때에는 항상 확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웅켜쥐고 그 죄가운데서 살게되면 그 죄를 버리는 것 자체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 죄와 결별하고난 다음에 일어날 어떤 일들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믿음입니다.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확고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직 느낄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고 그리고 볼수도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진실성을 의지해서 깊이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끔가다 물품대금으로 수표를 받았다. 그러죠. 여러분 거기에 싸인이 있죠.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에 싸인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무은행 아무 지점장이 거기에 싸인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본적도 없고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지못합니다. 그렇죠. 그래도 믿지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은 회개를 통해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참회하는 자를 버리지시 않는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는 단순한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참회개 하시도록 자기를 개방하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나단선지자의 지적을 받으면서 최초로 자기가 깨뜨려지는 깊은 참회를 경험했을 때 죄에 대한 사랑에서 깨뜨려지는 것과 함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심령으로 함께 변화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집착에서 깨뜨려진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이 죄인의 마음속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죄에 대해서 깊이 깨뜨려질 때에는 죄에 대한 사랑, 죄에 대한 후회, 그 집착을 버려야하는 아픔, 이런 것들 때문에 깨뜨려지면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했지만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나면 그다음에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말 심히 두렵고 떠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간 세리가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밖에는 내게는 아무 기대할것이 없다라고 하는 믿음을 갖고나니까 그다음에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인식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한번 거기에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다윗의 생애는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만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누차에 걸친 칭찬도 그러했고, 그리고 그 주위에 다윗을 정말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사람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살아오면서 매순간 분초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어주신 풍부한 신앙의 간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을 자신이 정말 하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할만한 그런것들이 주님 만나고 난후에 정말 없었습니다. 정말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자기를 의롭게 여겨도 좋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신앙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자기가 깊은 죄에빠져서 하나님의 은총하나만을 진심으로 바라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자기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기에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다윗의 어떤 영안이 열린다고 할까요. 그렇게 열립니다. 그 열린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었습니다.
인간의 이 죄와 내면의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죄를지으면 모두 그런 통찰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죄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망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실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 눈이 어두워지고 어떤면에서는 더 눈이 멀어서 그래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식도 모두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게 주님 앞에 성결하게 살다가 죄를짓고나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는 아주 탁월한 시야를 갖게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때문입니까? 이런 참회와 죄로부터의 영적인 깊은 회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영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약에 있어서 사도바울에 비견될 정도로 아주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의 그 관계에 대해서 이 사람만큼 그렇게 탁월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별로없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와함께 이 사람은 정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나 이런 사람들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아는 그 지식이 탁월했던 사람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깊은 자기 깨어짐의 참회가 있고나니까. 그런 인식들이 생겨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이와같은 케이스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잘못해서 깊이 죄가운데 빠져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방황하면서 살아온 날들은 날짜 그 자체가 걸어온 그 자체가 죄라고 하는 발자국을 남기면서 걸어온 인생의 한걸음도 예외없이 모든 발걸음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가운데 살아온 날들을 미래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 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수 있는 기회로 삼느냐? 아니면 앞으로의 인생도 계속해서 죄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될것이냐라고 하는 문제는 이제 여러분들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무엇이 좌우하는 것입니까? 깊은 자기 깨어짐의 참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자신의 죄의 세계에 대한 사랑들을 깨뜨릴 때 그 때 여러분들은 정말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그 기간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사는데 훌륭한 기회가 되는지모릅니다. 아무리 예를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유대인들의 거짓된 삶, 유대인들의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그런 속에서 화려한 종교적인 업적들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상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그삶의 비참함과 어두운 종말에 대해서 진저리 치도록 느낄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자기가 예전에 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꾸로 보면 바울이 만약에 그렇게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멀고,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지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두화두가 뭐냐 하면 구원론과 그리스도론, 기독론입니다. 만약에 그가 그리스도없는 삶을 그렇게 오랫동안 살고 또 구원과는 거리가먼 삶을 살아보고 그 속에서 영혼의 곤고함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할것같으면 그 사람이 이렇게 뼈저리게 그리스도 예수만은 붙들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 구원의 은혜를 감지덕지하면서 그렇게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 그 로마서의 고백은 그 의미가 굉장히 심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죄가운데서 살아왔거나 또 어떤 죄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가책과 고통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오히려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살아가게 만들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는 아주 굉장히 놀라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기만하면?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 속에서 여러분들의 무너진 세계가 재건되는 자기 깨어짐이 있기만 하면 가능합니다.
청년들을 지도하면 이런 딜레마에 많이 빠집니다. 이제 설교시간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 세상가운데 방황하던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말만하면 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 없을 때 매일 떠오르는 것이 죽는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힘드니까. 진짜 길가에 피어난 한포기의 풀이 훨씬더 자랑스럽죠. 그래서 누군가 그런 글을 썼더라고요. 자기 인생에 제일 부러운 것이 바퀴벌레라고, 어느 영국의 수필가가 썼습니다. 자기가 바퀴벌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하여튼 그랬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없이 살았던 날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곤고하고 어둠속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죄악 덩어리였습니다.” 몇몇 애들을 막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듣는데 그 시간에 계속 졸고 딴짓하는 애가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자기는 그런 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멀리 떠났던때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랐는데 모태신앙이 잘하면 좋은 신앙인데, 모태 신앙이 잘못하면 무엇이든지 못해, 못해, 그러는 신앙입니다. 못된 신앙이 되기 싶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러면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못느끼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변화의 깊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모태신앙이 아니라. 모태 할아버지 신앙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진짜 한번도 교회를 떠나본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진짜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맛본 사람이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정도가 똑같습니까. 똑같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스펄젼 목사님 얘기했죠. 서제에서 막 울고있어서 부인이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아,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마음이 아무런 감동도 없고 너무 건조하다고 그래서 너무 슬퍼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 교회에 잘나오고 그리고 남들이 볼때에 모범적으로 생활해도 항상 마음속에 내가 지금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서 오는 가책, 그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주님을 멀리 떠나서 방황하는 모습 그자체입니다. 이해가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얘는 그런 만남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그것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해 주를 떠나봐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연락을 즐겨봐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눈물을 흘리고 자기가 돌아와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돌아올지 안돌아 올지 어떻게 아느냐?”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그런 바보같은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절대아닙니다. 참회의 깊이는 죄지은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죄질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의 깊이는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만났느냐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깊은 죄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그 바보같은 망상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깊은 죄가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그 사모함이 있는가? 그리고 그를 얼마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갈망들을 축복해주시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강도 한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렇게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회개하고 구원받는 강도를 보면서 자기고 인생을 살다보면 젊어서 예수 믿을수는 없고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면 내가 저렇게 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중에 그런 본보기가 된 사람은 딱 한사람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죄악가운데 죽었는데 성경에 그렇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딱 한사람밖에 안나오는데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그 케이스에 해당할 것이라고 그렇게 위험스럽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깊이가 회개의 깊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빛을 통해서 자신이 그 본질상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많이 마음 깊은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깊이가 참회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지 죄의 깊이가 회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말 나쁜짓 많이 한사람 가만히 있는데, 정말 잘믿는 사람, 오늘 뭔가 이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조금 주님을 슬프게 한 사람, 그랬다가 오전에 그랬다가 오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데도 밤에와서 오전에 있었던 잠시 자신의 마음의 미끄러짐을 인해서 구르듯이 통곡하고 아파하는 것이 이것이 은혜 속에서의 경험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죄의 질은 앞사람이 훨씬큰데 은혜의 빛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죄의 심각성과 그리고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고 후자의 사람은 조금죄를 지었지만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있는 참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참된 참회는 오래된 우리의 죄에 대한 집착들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그릇된 사랑들의 뿌리를 뽑고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게 사랑해야할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래서 거기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강력하고 탁월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시간에 여러분 한번 깊이 여러분 자신을 비춰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이 있는 참회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지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죄라도 크게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충분합니다. 죄의 크기가 작아서 크신 하나님을 못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아래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요. 그리고 자신속에 있는 이 죄에 대한 집착과 자신속에 있는 이 악한 본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더럽고 무서운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깨뜨리는 그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때 오늘 여러분들이 넘어진 그 자리는 오히려 주님이 여러분들을 새롭게 일으키시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죄에 대한 그 싶패는 오히려 일생동안 그 죄를 증오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아주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죄로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어둠속에 살았던 경험들은 오히려 일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의 빛 아래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간절한 갈망들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변화시킬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그리고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롭게 그를 은혜의 세계 속에서 세움받을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참회중에 받는 고통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6:7)
그런 참회의 경험을 하고난 다음에 시인은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였으며 나의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시에 있어서 아주 전형적인 병행법, 혹은 대구법입니다. 그래서 “내 눈이 내 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그것이 빠졌지만 또 내 눈이죠. “내 눈이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내 눈이, 내 눈이“ 이렇게 반복되고 있고 ”근심을 인하여, 모든 대적을 인하여“ 반복되고 있고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두 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요소를 가지고 반복해서 쓴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이, 내 눈이, 그 다음에 근심을 인하여, 대적을 인하여, 그다음에 쇠하였나이다. 그다음에 어두웠나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차이점이 뭐냐? 어두워지는 것과 눈이 어두워지는 것과 쇠하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쇠하는 것과 어두워지는 것의 차이점이뭐냐라는 것을 따지기보다는 이제 같은 사상을 반복함으로서 강조하거나 혹은 점점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증폭시켜가는 아주 전형적인 하나의 작시법입니다.
그렇게 놓고보면 시인이 그런 참회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즉시 자신의 눈이 근심을 인해서 쇠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쇠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힘이 뚝 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어두웠나이다.“는 침침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비슷한 것입니다. ”내 눈이“ 히브리 성경에 두눈이라고 나오는데 ”두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였나이다.“ 이 사람의 눈이 쇠하였는데 뭐 육체적으로 본다면 오래도록 눈물을 흘리고 통곡했으니 눈이 퉁퉁부었겠죠. 안구가 충혈되고 많은 눈물을 쏟아내었기 때문에 눈꺼풀이 따가워지고 육체적으로 안구의 충혈이 생기고 그래서 눈두덩이 부어서 눈이 물리적으로 아주 고통스러운 상태를 여기에서는 염두해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참회가 얼마나 진실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의 회개는 그런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오늘날 우리의 회개하는 모습은 너무 당당하고 거만해서 마치 사회에서 각서쓰고 반성문 쓰는 것 비슷합니다.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사오나. 그것이 어디 나만 그러겠습니까. 그렇지만 하여튼 잘못한 것을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선처해주시면 앞으로 유사한 일이 되풀이 되지않도록 노력은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멘” 이런 정도가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라고 불리우는데 사실은 그것은 회개라기 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유감표명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유감표명이 아닙니다. 유감표명은 단지 머리로서 자기가 잘못했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살짝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참회의 효과는 뭐냐 하면 진실하고 깊은 참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회할 수밖에 없는 죄를 짓도록 만들었던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깊이 있는 참회가 안되니까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반복되는 잘못된 죄에 대해서 거의 도움을 주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어서 죄인이 죄를 지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이 “눈이 쇠하였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참회를 통해서 흘린 그 눈물, 그리고 회개를 하게되면 피가 모두 머리로 솟구치는 것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회개하다가 졸도하는 지체들을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서 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졸도시킨다고 생각하시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너무 안타까워서 막 울면 피가 거꾸로 솟아서 꽉찹니다. 그렇게 될 때에 혈액의 농도가 아주 진해집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위험하니까. 회개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일상생활 하다가도 이렇게 긴장이 되고 화가나고 해서 뻗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렇게 순간적으로 아드레날린이 나오면서 혈액의 정도가 아주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제일좋은 것은 뭐냐 하면 마음을 다스려서 그런 본노를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좋은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제일먼저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혈액의 정도가 뚝 떨어집니다.그리고 마시는 동안에 이 혈액의 점도가 떨어지면서 한잔의 물이 마음 자체에 미치는 영향도 또 있습니다. 거기에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회개하다가 그렇게 피가 확 몰려서 쓰러져서 졸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회개하다가 고혈압이 터져서 죽는 사람은 못보았습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이보았습니다. 너무너무 자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참회의 마음이 가져다주는 육체적인 반응을 육체자신이 감당을 못하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참회, 그런 것이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었던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텃치해줍니다. 이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이 쇠하기까지 물리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 위에 이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식적인 것들이 겹쳤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근심입니다. 후회는 하고 있지만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그리고 수많은 근심을 죄는 낳습니다. 유혹이 다가오는 순간에는 아주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유혹에 의해서 점령되고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 유혹에 빠질 때는 이렇게 안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충족되고나면 그다음에는 그것보다더 황량한 정신적인 고통이 뒤따르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근심입니다. 그래서 죄많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의로운 일을 위한 경건한 슬픔같은 것들이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마음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루만지고 지나가시기 전까지는 딱딱해서 좀처럼 상한 마음이 되지 않고 깨어지는 것은 정말 드문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아의 아내 사건이 있고나서 그 이후에 벌어진 우리아의 일이라든지 그다음에 살인후에 그것이 폭로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든지 하여튼 범죄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수많은 근심들이 이 시인이 에워싼 것입니다. 참회의 이런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전까지 그는 그런 근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왜? 지키며 살수있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내가 짐승처럼 살았을 터인데 주님이 이 말씀을 내게 주시니 이 말씀은 고난중에 나의 위로라. 하루에 7번씩 혹은 밤에 자다가도 깨어 일어나서 자기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하며 야경이 있기전에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받고 주님 앞에 새롭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몇주전에 그랬죠. 밤에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여러분중에 몇 사람이나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여러분들은 막 웃고지나갔지만 아닙니다. 낮에 사랑하는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또 문학적인 상상력이 떨어져서 오해할까봐 설명을 덧붙이자면 낮에는 일을하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이런일 저런일 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일이 자기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정도는 증명해주지만 세부적인것까지 증명해주지는 않습니다. 밤에 자다가 눈을 떴는데 낮에 열심히 주를 위해 살았어도 밤에 눈을떴는데 하나님이 낯설게 생각되면 그것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정직한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폭풍의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을 살아도 햇빛이 찬란한 그런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거고 그래서 그런 과정을 겪어오면서 이런 깊은 참회를 통해서 이제 다음주에 보시면 알지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 일이 있기전까지는 계속 근심 속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신령은혜로 말미암는 모든 기쁨은 시인의 가슴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님을 향해 춤추고 노래하던 자신의 영혼은 거미줄이 끼어있는 커다란 어두운 동굴처럼 변했습니다. 늘 손에들고 켜서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하던 수금은 줄이 끊어졌고, 그의 마음속에는 얼음장보다도 더 차가운 냉담한 그 얼음장 속에서도 끌어오르는 정욕, 이런 것들의 종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는 동안에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예전에 누렸던 우리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견딜수 없는 근심이 그의 육신의 기력을 점점점점 떨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눈이 쇠했습니다.
저는 아주 그런 것을 뼈져리게 경험했습니다. 제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막 방탕한 식생활로 인해서 체중이 한없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들의 책임도 큽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한 60% 이면 여러분들은 40%의 책임이 있습니다. 밤 9시에 심방간 사람에게 잔뜩 먹으라고 내놓으면 어떡하겠습니까. 안먹고 오면 또 얼마나 “아이고 우리 목사님은 잘 잡수지도 않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실컷 먹어서 목회에 손해본적은 없고 목사가 너무많이 먹어서 교인이 실족해본 경험은 한번도 못보았습니다. 늘 안먹어서 문제죠.
어느 목사님이 심방을 갔는데 그냥 그 할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서 떡방아간에 가서 떡을 해서 떡고물을 뭍혀서 따끈따끈하게 해가지고 왔는데 이 목사님은 그 팥 알레르기였습니다. 먹었다 하면 그 날은 다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지않습니까. 그래서 이 목사님이 안먹었는데 이 할머니가 얼마나 가슴아파하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 노인네가 그것 한번 대접할려고 그렇게 했는데 안드셨다고” 5년이 넘도록 그 얘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방만 가면 가슴에 한이 맺혀서. 그래서 알레르기를 안주신 하나님께 나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탕한 식생활을해서 몸이 너무너무 불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이 저를 보기에 날씬해 보였지만 사실은 킬로수가 굉장히 많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몸무게를 줄여야 되겠다.라기 보다도 어느날 거울 앞에서 비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준 금식상태로 2개월이 지나자 13킬로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나서 제가 6개월지난 다음에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바보같은 일을 했구나. 왜냐 하면 천천히 해야되는데 그렇게 하고나서 두가지 변화가 왔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눈이 확 나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안경을 두 개를 가지고 다닙니다. 하나는 노안에 끼는 안경을 따로 가지고다닙니다. 이것은 생활용 안경이고 책보는 안경이 따로있습니다. 성경이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을 환하게 켜놓고 잘 들여다봐야합니다. 그러니 원서같은 것은 깨알같은 각주를 어떻게 읽겠습니까. 그러니까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예 복사해서 크게 확대해서 들여다보고 이러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렇게 눈이 좋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확 나빠졌습니다. 그런 현상하나하고 또 하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 때가 기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설교 탬포가 굉장히 빨라서 1시간 안에 쏟아놓는 말의 분량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뚝떨어졌습니다. 녹취해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90분하면 15장 정도나옵니다. 그런데 뚝 떨어졌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그대로 경험한 것입니다. 너무 마음에 근심이 많고 먹지를 못하고 아까 그렇잖습니까.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그리고 식음을 전패하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으니까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정말 얼마나 자신이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있는데 그 사람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이 그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셔서 지울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 영혼안에 스치고 지나가셔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그것은 그가 올바르게 살아갈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참회할 때에는 그 사람의 어떤 영적인 깊이가 그대로 들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했어도 이 다윗을 버리실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다윗이 큰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애절하고 진지하게 참회하고 그리고 그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잠시 충동적으로 죄를 지었지만 죄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항구적인 것이었으며 죄를 범한 그의 심령은 충동적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이 신앙심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난 다음에 몸부림 치는 전존재적인 참회의 갈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입증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어떻게 이 사랑을 버리실수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진실한 참회와 자신이 죄에 대한 몸부림으로 그는 눈이 쇠하여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진실한 참회가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런 정도까지 타락한 정도는 없어 그리고 오늘 내가 이 시인처럼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지 않고 밤마다 볼을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로 내 요를 적시지 않는 것은 결국은 내가 이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기때문이 아니겠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죄의 크기뿐 아니라. 죄라고 하는 그 질에 대해서 지금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인처럼 이렇게 간음하고 살인하는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참회하지 않은 많은 죄들이 쌓여서 사실은 이 시인이 한번 지은죄보다 훨씬 큰죄로 그렇게 뭉쳐져 있지 않다고 누가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단언할 수있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반문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당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도덕을 통해서 나에게 입증하지말고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교를 통해서 내게 입증하라” 왜, 우리가 왜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왜 영적으로 깊은 사람일수록 죄에 대해서 예민하고 그리고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형식적인 참회를 미워하고 진실한 참회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내가 죄를 지어서 세상을 불행하게 한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적인 경험 속에서 죄가 하나님과의 이 달콤한 친교를 앗아가 버린다고 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지를 지었을 때에는 이렇게 처절한 참회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고 철저한 참회를 통해서 주님 앞에 얻고싶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얻고싶었습니까.? 한번 이 시인의 마음이 되어서 저의 질문에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밤마다 침상을 띄우가 눈물로 자기의 요를 적시는 뼈를깎는 참회를 통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얻고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통곡한다고 그 죄가 원위치 될수있습니까? 죽은 우리야가 다시 살아날수있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것은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미 돌이킬수 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는 것입니까? 지금 이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참회하는 이유가 주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 집안에 칼이 그치지 않고 환란이 많이 닥칠것이다.”라고 하는 그것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그 칼도 좀 없어지게 해주시고 우리 집안에 어려움도 없게 해 달라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지금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진실하게 매달리면서 지금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얻고싶은 것입니까? 시인이 지금 이 속에서 있으면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적 없습니까? 폭풍과 그리고 먹구름같은 어두움이 인생에 갑자기 밀려오고 마음은 시험에 들고 몸은 죄에빠져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아침에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인데 사실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왜 기도 안하느냐고 자꾸만 그러는데 사실은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일까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잘 되는데 게을러서 안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런 책망을 받을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리고 다수는 뭐냐 하면 이미 기도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기도 안할 때에는 부자연스럽습니다. 가슴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기도하면 시원합니다. 이런것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인이 지금 이렇게 절실하게 참회하면서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제 왕에서 내려오라고 할까봐?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줄일까봐요?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이 이렇게 위를 물려받을 것을 하나님이 약속했다가 취소 하면서 사울의 왕위를 다윗에게 준 것처럼 누구 다른 사람에게 줄까봐? 아닙니다. 자기 죽은후에 일어날 그런 일들 때문에 지금 참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단절된 친교의 회복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만 회복할 수 있다면 “너 왕 그만두고 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면 내가 다시 친교를 회복해 주마” 그러면 시인이 망설였을까요? 안망설였을까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사람속에 있는 주님 자신을 향한 사모합니다.
죄를 하나님보다 사랑했지만 그러나 죄에 대한 사랑을 일시적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항구적이었습니다. 한순간 하나님을 버렸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아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이 하나님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신 신자속에 있는 은혜의 심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깊이 있는 참회를 해야합니다. 깊이 있는 참회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세가지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자신의 죄를 해부할 수 있는 정직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참회할때에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성령의 부어주시는 각성, 그 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진실함입니다. 정직하게 자기를 보고 자기가 어디에서 미끄러졌는지, 어떤 것들이 자신에게 잘못된 것들인지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탄원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
기도가 안되면 오늘밤에 가서 편지지 몇장놓고 쓰세요. 그것은 할 수있죠. 생각안나면 좀 쉬었다가 쓰고 그래도 생각이 안나면 담임목사 설교를 생각하면서 배껴서라도 쓰세요. 그리고 내일 새벽에 와서 그것을 읽으세요. 왜 안하세요. 내가 이 기회를 통해서 이야기 하겠는데 대표기도할 때 제발 써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가 막히게 하면 좋은데 쓰세요. 형식이라고 하는데 못보셨습니까. 여기 나와서 깨알같이 써와서 읽으면서 눈물 펑펑흘리면서 기도하는 그 기도가 의문에 매인 형식적인 기도입니까. 내용도 없이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을 막 반복하면서 하는 즉흥적인 기도말고 쓰세요. 이것은 자기 개인기도가 아니지않습니까. 쓰세요. 훌륭한 기도가됩니다. 그 기도는 그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일주일동안 준비하면서 써온 것입니다. 그중에는 배낀 것도 있겠죠. 배껴도 내가 눈물흘리면서 기도하면 그 사람의 기도아닙니까. 자기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모함만 있다면 오늘 저녁에 가서 댓장쓰세요. 정 기도할 수 없으면 그것을 읽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가세요. 그런데 정말 자기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면 저는 정말 기도시간에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모릅니다. 우리 지체들의 읽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모릅니다. 정말 그 사람의 영성이 그 기도속에 묻어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갈망, 주님과의 그런 친교를 복원하지 않고는 살수없지않습니까. 어떻게 살수있겠습니까. 주님이 시인의 죄는 잘못되었지만 성경 속에서 이런 사람을 흔히 만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 하나만 비싸게 주고 사도 떨어져서 깨지면 쪼가리를 풀을 붙여서라도 쓰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그렇게 진실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떨어져서 그만 깨졌습니다. 그래도 그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치고 만졌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은 모두 기운 것 투성이입니다. 저자신을 못보세요. 넉마입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우리 초등학교때 보면 장독 꿰매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억나세요. 기가막히게 구멍을 뚫어서 실로 꿰매서 그래서 무엇을 발라서 그래가지고 감쪽같이 물이 안새게끔 만들었습니다. 양은 냄비같은 것을 하늘을 향해 들고 구멍을 찾아서 ( ? )떼웠습니다. 나는 아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하게 쓰시는 사람가운데 순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적인 순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떼우고 고쳐서 다시 찢어진 것 꿰매서 그래서 주님 앞에 결국 쓰임받은 사람들은 주님이 쓰셔서 귀한 사람이지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가꾸 기어서 쓰셔요? 잘못한 것은 사실인데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 때마다 꿰매서 쓰시고 떼워서 쓰시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죠. 주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을 예전에는 영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님이 크게 쓰신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그 사람들은 안보이고 그 사람을 기워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좀 잘못했어도 그래도 기워서 떼워서 하나님이 다시 써주시는 것이 좋지 “에이. 이것은 도저히 안되겠구나” 하고 휙 집어버리시는 사람되고 싶지는 않지않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참회를 해야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깊이 있는 참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회하는 자세 자체가 진실해져야합니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평판, 사람들에게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나의 명예. 이런 것보다 하나님 자신의 친히 용서해주시는 은혜, 그리고 회복해주시는 교제의 축복, 이런 것들을 훨씬 더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 “내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쇠한 것 보다도 한걸음 더 나간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점진적인 대구법입니다. 그래서 근심에서 대적으로 발전하고 그다음에 쇠한 것에서 어두운 것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것은 이제 눈이 실명될 정도가 되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눈이 완전히 침침하고 안보이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내 눈이 나의 대적을 인하여 어두워졌나이다.” 이것은 하나의 안팎으로 시달리는 이 시인의 죄가운데서 받는 고통, 그것이 이 시인의 육신을 얼마나 상하게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댜. 여기에 보면 대적이라 그랬는데 이렇게 똑같은 말을 여러개로 번역했는지 이해가 잘 안가는데 히브리 성경 원어로 보면 시편 23편에 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렇지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형태도 이것이 단수가 아니라. "쪼레라이“ ”나의 원수라기보다는 “짜라르”가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오는 분사 복수형태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나를 고통주는 자들을 인해서 내가 나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면 무슨대적들일까요? 안팎에 있었겠죠. 어떻게?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필연적으로 누구와의 관계가 깨뜨려집니까.?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뜨려지지만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믿어야지만 여러분들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가족들 구원을 놓고 늘 아파하는 지체들을 보면 내 마음도 참 아픈데 진짜 나는 정말로 “당신 이 교인들을 향한 소원이 뭐냐 하면” 나는 첫 번째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홀로 나오는 부인들, 혹은 홀로 나오는 남편들도 있지않습니까. 그들이 손잡고 한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는 것, 그것도 대충 교회만 따라 나오는것만 가지고도 감격하는데 그것말고 거기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진실한 신자로 변화되어서 성화의 길에 대해서 서로 생각하면서 기도할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잘해서 은혜받은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제가 무슨 죄가 있어서 목회를 하겠습니까. 은혜받은 죄 때문에. 주님이 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몹쓸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33년의 그 고통스러운 세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진 그 지상의 생애를 보내셨을까요.? 그래서 제가 언제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오직 하나, 우리를 너무 사랑한 것 밖에는 그분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우리도 은혜받으면 죄인입니다. 왜냐 하면 은혜받은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여러분들이 먼저 믿지않고 남편이 먼저 은혜받고 변화되었으면 지금쯤 여러분들은 집에서 남편 박아지나 심심하면 박박 긁어서 기분풀고 남편이 그대들 때문에 성화되기 위해서 새벽마다 울었겠죠. 그래 뒤로 가지 왜 앞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그 앞으로 나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면 죽어지내야지. 할말 하다고 어떻게 복음을 전해요. 내가 진짜 여러분들에게 할말 다 해볼까요? 목회가 되나 안되나 해볼까요? 오늘 당장 몇사람 불러서 해볼까요? 안됩니다. 죽어야지. 할말도 참고, 들은 것도 안들은 것으로 하고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깊이 사랑을 받으면 대적들이 잠잠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아침에도 명상한 내용인데 무슨 치유가 되었다. 그러는데 치유는 없다. 치유는 없습니다. 무슨 치유가 있어요. 죄많은 세상에서 무슨 치유입니까. 치유가 없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옛날에 많은 상처가 있고 그리고 또 혹은 누구를 미워했거나 아니면 또 패역이 있어서 빠졌었는데 이제 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고 새사람되면서 다 버렸습니다. 은혜안에서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니까 치유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죄가운데 들어가고 공급받는 것 하나도 없으면 옛날에 사람 갈구던 사람, 다시 그 성질 발동해서 갈구고, 30년전에 미워한 사람 다시 생각나서 다시 씹는 것입니다. 그러다 옛날에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그 패역이 사라질 때는 천천히 사라졌는데 살아날 때는 확 살아납니다. 그래서 제가 치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에서 사는 길이 그것이 치유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부패성의 교리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무슨 치유받았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는요, 작년에 다 치유받았는데요. 오늘은 또 이런 것을 보니까 작년의 치유가 진실이 아니었나봐요.“ ”너는 맨날 그러다가 죽는다 이제 봐라. 내가 뭐라 그러던 치유는 없다.“ 지금 이 교리가 죄죽임의 교리, 마음 지킴의 교리, 다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면서 신자의 삶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기면 이긴 것입니다. 내일도 장담 못합니다. 싸우며 싸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적들이 무슨 대적들일까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보셨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윗을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 역사에 다윗같이 정치를 잘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나라를 세울 때 상처받은 사람, 병신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나라를 시작한 사람이니까. 그 백성들을 향한 정말 애틋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에게 반란을 받고 반역을 받아서 도망갈 때 어쩌면 그렇게 백성들이 등을 돌려요. 그렇죠. 그렇게 다윗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그 때 궐기하고 일어서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왕을 도울때다 우리왕이 도대체 잘못한 것이 뭐가있느냐? 이제껏까지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면서 우리를 다스리고 이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강대국을 만들었는데“ 이러면서 들고 일어나야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차갑게 등을 돌렸습니까. 그리고 자기의 그 사랑하던 부하들이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뭐라그랬습니까? ”나는 저희를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미워하는도다“
대적들이 에워싼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느낀 것입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 대적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운데 있으면서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로 나오지 않으면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깨뜨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보세요. 두사람이 얼마나 친했습니까. 선악과를 따서 맛있으면 전나실컷 먹지. 그것을 왜줘요. 그것을 먹고 너무 맛있으니까 주지 않았겠습니까. 둘이서 아주 정답게 나눠먹고 그 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균열도 발견할 수없었습니다. 둘이서 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각자, 각자가 범죄하고나니까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하는 관계가 3장에 가니까 ”왜 그것을 먹었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한 저여자가 내게 줘서 먹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계속케고 올라가면 이 여자가 날 주었는데 이 여자를 준분은 하나님입니다. 관계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을 때 하와가 자기 남편에 대해서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습니까. 만약에 2장같았으면 어땠을까요? 딱 하와를 가로막으면서 ”하나님 이 여자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제가 달라그랬습니다. 먹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제가 빼앗았습니다.“ 아니 그래야되지 않습니까. 둘 사이에 어떤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깨뜨려진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부부생활하는데 신앙생활하는데 알콩달콩 잘살겠다. 그러는 사람들 내가 얼음판을 걷는 것 처럼 불안합니다. 언제나 빠집니다. 하나님 없이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대적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드려지고나니까 막 우우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이 이야기는 다 전파되었을 것 아닙니까. 나단선지자에 의해서 책망받은 이야기, 거기 주저앉아서 통곡했다는 이야기, 다 전파되었을 것 아닙니까. 다 알았습니다. 왕궁에 다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것보다도 더 나쁜 놈들이면서 왕이 그렇게해서 남의 집 여자나 갖다가 망쳐놓고 그리고 그 남편까지 잡아죽였데. 아 진짜 나쁜놈, 한순간에 왕이면서 선지자요. 말하자면 절대권력과 영적인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던 사람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니까 거기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인이 뼈져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대적들이 일어났는데 그 대적들을 칼로 감당할 수 있는 대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역전의 명장인데, 그런데 그렇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대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속에서 일어나는 대적, 그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생각나면서 “너는 이런 죄를지은 사람이지” 양심이 계속 “너는 용납될 수 없는 인간이다” “너 같은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냐, 너는 인간도 아니다.” 이런 양심의 부르짖음이 의로운 음성을 가장하고 막 들려오는 것입니다.
양심이 나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인도받고 있는 동안에 이 양심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껴 참되고 진실한 참회로 돌아가게 만들지만 그렇지못하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의 양심의 송사는 그를 점점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믿음을 상실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양심이 꼭 필요하면서도 또 이 양심이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으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 하면서 기도하는데 “니가 기도할 자격이 있느냐?” 그리고 양심의 송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대적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이 양심의 대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는데도 자기가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한분이 자동차 교통사고가 나서 어린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합의도 다되었고 교도소도 잠깐 살다가 나왔습니다. 법적으로 배상도 끝났고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밤에 컴컴한 때에 가로등이 켜진길을 지나갈 때 아마 사고가 났데요.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아주 생생하게 그 아이를 죽인 죄책감에서. 그것이 뭐냐 하면 속에있는 이 대적들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어떤해결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시달린 것입니다. 또하나는 무엇이었습니까? 위에있는 대적들입니다. 영적인 대적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것만큼 영적인 악한 원수들의 조롱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악한 원수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은혜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기승을 부렸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을 때에는 고개도 들지못하던 수많은 대적들이 안팎으로 그리고 위로 아래로 치밀어 오르면서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이 속에서 이 시인은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밥도 먹지 못하게끔 만들었고, 물도 마실수 없게 육신을 돌볼수 없을 정도로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범죄하고난 다음에도 왕의 옷을 입고 점잖게 앉아서 먹고 마시고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본격적인 고뇌가 시작되었습니까? 선지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난 다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그 음성이 이 다윗의 죄로 물든 가슴을 파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는 수술대 위에 놓인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오랬동안 묻혔던 자신의 죄의식들이 발동하면서 참회와 함께 그런 것들이 격렬하게 역사하면서 그의 육신의 힘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이 사람이 육체로 경험한 현상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몸부림 치면서 이 시인은 수많은 대적들을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고 자신의 양심이 자기를 송사하고 악한 영들의 세력들이 자기를 압제하는 그런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참회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 사람은 이런 모든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고통받으면서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욕하고 돌던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양심의 송사에 귀를 막고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악한 영들의 압제를 향해서도 등을 돌리고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으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범죄했으나 주님을 나를 받아주실 것이며, 주님이 나의 이 진실한 탄원과 참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회개하다 죽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하는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하나님이 이 진실한 참회자의 몸부림 치는 이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거절하지 않으셨을까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4.사죄의 은혜를 경험할 때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6:8)
분명한 사실 하나는 7절과 8절 사이에는 연결되지 않는 어떤 골짜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니다. 7절까지 시인은 고통 속에서 자기가 쇠하고 그리고 눈이 어두워진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시인은 그야말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해서 얼마나 영육간에 노심초사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눈은 쇠하고 그리고 어두워지게 되었고 그리고 많은 대적들은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그를 조롱하는 대적들의 소리는 들렸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범죄한 후에 하나님 앞에 느꼈을 그 처절한 거절감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7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좋은 소식도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서 송사를 당하는가하면 수많은 대적들이 일어나서 자기를 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정결하게 살아갈 때는 자신에게 복종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일들도 일어났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충만한 권능을 부음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의 곁에는 사단이 따라다녔습니다. 다윗의 생애의 두가지 커다란 실수가운데 하나인 인구조사를 한 사건에 대해서도 성경은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다윗에게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단이 그렇게 했다고 핑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말씀드린바와 같이 사단도 성령도 준비된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렇게 충만한 권능을 받은 사람 곁에 사단의 역사가 따라다녔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은혜를 하나님 앞에 좀 받았어도 별로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깊이 끼어들지 않고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저 자기 혼자 은혜생활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뭘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유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의 신앙의 대적들을 볼수 있었는데 이제 열심히 열심히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다가보면 그다음에는 그 대적과 유혹을 이렇게 멀리서 보고살기 보다는 항상 도망을 다니는 그런 처지입니다. 저의 얘기가 맞죠.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수가 있겠지만 오늘 이 문제와 관련해서 왜 그런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의 은혜받은 사람겯에 아주 가까이에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은혜못받으면 사단도 상대를 안합니다. 뭐 그렇게 귀찮게 가서 다죽은놈 자꾸 건드려봐야 뭐합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권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주 가까이에 대적들이 있어서 조금만 자기가 은혜에서 살짝 미끄러지기만 하면 밀려들 듯이 확 덤벼들어서 쓰러뜨리려고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대적들이 확 밀려들어와서 미끄러진 이 시인을 짓밟았습니다. 대적은 거기에만 끝나지않습니다. 율법과 양심에 끊임없는 송사는 하나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조차도 확신할 수 없으리만치 정죄의식속에 자기를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속에 근심, 밖에 걱정 수많은 원수들이 안팎에 있어서 시련에 시련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눈은 쇠하여졌고 그 에워싼 안팎의 수많은 대적들로 인해서 이 시인의 눈은 어두워지기까지 건강이 몹시 상했습니다. 건강만 상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던 그의 영혼도 파리해져 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 세사에서 제일 힘든일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상대해주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을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몸으로 떼우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상대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처지를 지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수없지만 시인은 그런 시간을 지냈고 6절에 나와있는 이 시가 어떤 한순간, 한두시간 사이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발견하고 자각하고 괴로워하고 투쟁하고, 몸부림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참회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을 함축적으로 이 6편의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게 안팎의 수많은 원수들에게 시달리면서 견디기 힘들정도로 이 시인이 고통을 받고 심령은 찢어지는 것 처럼 아프고 힘겨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은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뼈저리게 뼈저리게 경험하고 난 후에 갑자기 8절에서 7절까지의 분위기 하고는 전혀다른 어떤 확신있는 외침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행악하는 자가 누구이고 곡성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전에 먼저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누군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안팎으로 자기를 에워싸고 견디기 힘들게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던 그 수많은 원수들을 향해서 보란 듯이 외치는 이 한마디의 외침,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7절과 8절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났을까요? 뭔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7절과 8절 사이에서 일이 일어났다기 보다는 7절까지는 하나님 앞에 그냥 몸부림 치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후회하고 참회하면서 씨름하는 그 시점에서의 이야기이고 그다음에 8절은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입고난 후에 시인이 느끼게된 강력한 감격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 문제는 조금있다가 다루고요. 오늘 여기에보면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번역에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아웬, 즉 악, 혹은 죄라는 뜻도됩니다. 대게는 악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여. 이렇게 호격으로 나옵니다.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여. 이렇게됩니다. 나로부터 멀어지라. 그리고는 뭐가 하나 빠졌느냐 하면 히브리말로 키인데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 콜바키라고 나오는데 박카인데 박카는 뭐냐 하면 우는데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 ? ) 야곱의 유모 리브가가 죽은 다음에 거기를 엘룸바쿳이라. 그래죠. 바쿳트 그러니까 통곡의 상수리나무, 박카는 통곡하면서 소리내서 엉엉우는 것입니다. 그 울음의 콜 소리 나의 통곡의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셨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여 나로부터 멀어지거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지만 그렇지만 의미가 새롭습니다. 자 하나씩 더듬어봅시다. 우선 첫 번째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시인을 향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진 것을 기회로 삼아서 이 시인을 고통중에 그리고 이 시인을 넘어뜨리고 아프게 만드는 그런 의미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웬” 이라는 히브리말이 “허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시인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서 입각해서 보면 원래 이 사람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시인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아주 악날한 방법으로 이 시인에게 고통을 가한 정치적으로 시인과 대적의 관계에 서있는 그런 사람들일수도 있고 또 시인 가까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그리고 죄를 짓게끔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단의 무리들도 여기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해해서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얘를들자면 욥이 시험을 당해서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욥의 세친구라는 사람이 욥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죠. 그렇죠. 그런데 그들이 악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욥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뭔가 욥의 그 고난받는 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이 사람들이 욥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에서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그 욥을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리고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욥이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은 죄때문이기 때문에 죄없이 고난받는 사람을 우리는 본적도 없고, 성경이 그런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상상도 한적이 없다. 그러니 네가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네가 너무 눈이 어두우니까 내가 너의 눈을 벌려주마.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욥을 사랑했기 때문에 욥과함께 재를 무릎쓰고 그 고통받는 자리에 동참해서 그래서 그 욥을 어떻게 하든지 깨우치려고 애를쓴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다른 이유로 인해서 그들이 고의적으로 의롭게 고난을 받는 그 욥에게 그 정도의 고통을 주었더라면 하나님이 가만히 안내버려두셨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죠.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하면 내가 용서해주마” 아주 가볍게 다루셨습니다.)
또 비슷한 사건 하나가 민수기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미리암과 아론의 이야기입니다. 이 미리암과 아론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이 미리암과 아론이 근본적으로 모세의 주도권을 탈취할려고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확신이 있느냐 하면 모세 저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 저 사람이 너무 교만해져있으며, 그리고 저 모세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될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지도권에 대해서 항거한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적인 죄라기보다는 하나의 허물에 상당히 가깝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볍게 다루시지않습니까. 어떻게 문둥병은 걸리게 하셨지만 그 모세에게 도전한 그 잘못은 굉장히 큰것이었지만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죄라기보다는 쉽게 이야기하면 신앙의 수준이나 모든 것들이 아직 어린데서 비롯된 결과였기 때문에 고의적인 악보다는 허물쪽에 상당히 많이 가 있었습니다. 허물과 죄악은 다르죠. 허물은 연약함을 인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에 모자라는 어떤 결함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여, 혹은 허물대로 행하는 자들이여“라고 할 때에 여기에 포함된 존제들은 의도적으로 이 시인을 고난주고 그리고 고통을 주려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그 적대감을 시인을 향해서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그러나 시인의 처지를 오해하거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고토을 주고 아픔을 주었던 경건한 모든 사람들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 시인이 ”행악하는 자들이여“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이라는 말을 거기에 덧붙인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가만히 보면 사실은 우리에게 이렇게 의도적으로 잘못한 죄를 용서해줄 필요보다는 허물을 용서해주어야할 필요를 우리 신앙인들은 더많이 그런 경우를 더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물론 같이 교회안에 있으면서도 아주 질적으로 아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거듭났을까? 하고 의심이 될 정도로 아주 질적으로 악해서 또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진짜 굉장히 많이 악해져서 그래서 아주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그 지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속이고 그 지체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그런 신실하지 못한 인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용서해야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것보다는 어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월등히 모자라거나 신앙에 있어서 지식들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마치 얼음판을 미끄러지면서 천천히 달려가는 자동차 같이 어디로 미끄러질지 모르는 그런 판단, 그런 우발적인 오판, 그릇된 판단 이런 것들 때문에 지체들을 아주 쉽게 판단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 악의적인 죄라기 보다는 잘못은 잘못이지만 허물쪽에 많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마음의 송사를 받으며 이 곤고하고 괴로운 상황을 보냈는지 이것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깊은 죄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을 느낄때에 그 때에 우군이 있었습니까? 순식간에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발뒤꿈치를 들었습니다. 함께 떡그릇에 손을 넣고 먹는자가 자기의 목숨을 해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 상황들을 시인이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있건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서 인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해서 시인에게 고통을 주었든, 어쨌든지간에 이런 많은 고통과 악을 이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죄의 은총을 힘입기 전까지는 이 시인이 그런 모든 공박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원래 우리가 하나를 잘못하면 딱 하나만큼만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잘못을 안했는데 두 개 세 개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번져나가면서 비난이 비난을 몰고오고 오해가 오해를 낳으면서 어느 한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내가 하나 잘못하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 받는 이 많은 비난은 내 죄에비하면 너무 억울하다. 그런 생각을 갖게끔만듭니다. 그런 와중에서 죄인들이 더 강팍해지기도 합니다. 막가파 같은 심리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어쩔래 넌 어떠냐?”
옛날에 돌대가리 같은 녀석말이죠. 신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에 졸업시험에 컨닝을 했습니다. 내가 아주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리반은 절대 컨닝 안해야합니다. 한 의자에 한명씩 시험을 보니까 컨닝할려고 노력해도 안됩니다. 컨닝을 했습니다. 저는 에누리없습니다. 잡아서 거기에 의견서 붙여서 이런 녀석은 정학시키라고 학생처에 던져버립니다. 그래 이제 나 때문에 졸업을 못하게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와서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봐달라. 그러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빌어도 워낙 긍휼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동할까말까 하는데 “한번 봐줘요? 예”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둘이 와서 죽을 맛이지 이것도. 강의 나오면 기다리고 있다가 또 들어와서 “한번 봐줘요. 예. 예.” 계속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졸없이 그렇게 중요하냐? 너 같은 인간들이 목사가 되어서 우리 자손들이 그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소명은 무슨놈의 소명이냐” 안 물러나죠. 제가 끝까지 도장 안찍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에 한녀석이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봐달라고 빌더니 나중에는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아니 그러면 교수님은 7년동안 신학교 다니면서 컨닝한적 없습니까?” 이것이 막바파 신앙입니다. 아니 지가 컨닝해서 끌려왔으면 지 일이나 잘볼것이지.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랬습니다. “없다.” 그랬더니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아니 한번도 없어요?” 그래요. 그래지금 누가 누구를 신문하는 것입니까. “없다.” 그러면 “교수님은 의로우세요?” “나는 하나도 의롭지 않다.” “난 의롭다고 생각한적도 없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만 컨닝은 안했다. 한번도 안했다” “시도해본적도 없다. 모르면 나는 덮어놓고 그냥 나왔다.” 어떻게 거기에서 그렇게 나와요. 그러니 긍휼이 생길려고 그러다가도 말지. 내가 진짜 펑펑울면서 우리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저를 한번 봐 달라고 그랬으면 봐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말이지. “교수님은 컨닝한적 없습니까” 그래 내가 얼굴이 시뻘게질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막가파입니다.
시인은 다 ( ? )한순간에 할말이 없습니다. 막 짓누르는데 아무 할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할말이 뭐가있습니까. 그렇죠. 수많은 대적들이 “너 죄졌지. 너 나쁜짓했지. 그리고도 뭘 기도를 할려고 나쁨놈. 너 같은 인간이 어디있냐?” 그 때 시인이 한일이 뭐가있었습니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 주께 바라리이다.
조금 공부도 너무 못하면 안되지 여기 신학생들도 있지만 너무 못하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좀 해야지. 어느정도는 그런데 좀 진실해야합니다. 또 한 학생이 있었는데 졸업시험을 대신해서 레포트를 내는 것이었는데 배껴서 썼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인쇠소를 다녀서 돈을 벌어서 그 야근해서 돈을 벌어서 그 남편을 신학공부를 시킨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졸업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원서를 보여주는데 대학원 원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너의 대학원 원서하고 그것을 보고 내가 너 레포트 남의것을 보고 배껴쓴 비양심적인 학생을 졸업시켜 주어야할 의무하고가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느냐? 자네는 그것 사러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 성적이나 받고 갈 것이지 성적도 못받은 사람이 그것은 아깝게 왜 사가지고 왔느냐고 말이지” 그런 일을 만난지라. 어디에서 뺨맞고 어디에서 하소연 한다고 그냥 한 30동안 융단폭격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벌벌떨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날인가 왔습니다. 뭐라하느냐 하면 “교수님이 야단치시는 그 목소리는 교수님의 음성의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4년동안 저의 신학교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성적표였습니다. 저는 그 모든 서류다 찢어버렸습니다. 한 학기를 다시 다니겠습니다.” 그러면서 어깨를 들먹이면서 그렇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자기 아내에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아직 말을못했데요. 그러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보내고 나서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내가 편지인가 팩스인가 써서 조교시켜서 보냈습니다. “성적처리 해줄테니까 늦기전에 빨리 가서 대학원 원서 접수해라. 그리고 그 대신 원서 접수하고 와서 레포트는 다시 내라.”
시인이 그런 똑같은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인간이잖아요.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가슴이 녹아질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입니다. 죄지은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소수의 사람만 참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쌓여서 견딜수 없이 고통을 받다가 할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 당하는거죠. 그 억울함을 다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억울함을 다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사실 억울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이 악한 송사들은 더 많지않습니까. 그러자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나오는 그것이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음이라.”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 시인이 그렇게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이 사죄의 아주 확실한 표징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어떤식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셨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시인속에 자기가 죄를 지었다.라고 확신과 맞먹는 또다른 학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죄에 대한 확신을 맞먹거나 혹은 그것을 능가하는 확신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 나의 참회하는 이 눈물의 탄원을 들으시고 주님이 나를 그 많은 죄악의 구렁에서 건져내시고 그래서 내가 다시 그 하나님 앞에 내 목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도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게 하는 사건이 7절과 8절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말이죠. 참회를 해도 참회만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소리가 안나잖아요. 하나님이 아무리 용서해주셔도 소리가 안나요. 참획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있어서 그 확신이 죄의식을 능가할 때 비로소 양심이 자유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나에게 잘못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주 여러분 자신이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해요.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 이상 말하지마. 용서했다고 다시 그 얘기 꺼내지말아라. 내가 용서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했데니까. 왜 자꾸 귀찮게굴지. 나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그런데 복도에서 만나면 마주치는 거에요. 계단에 내려가다가 이렇게 마주치고 화장실에서도 이렇게 마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자유함이 없지. 옛날처럼 활짝 웃어주고 가끔 농담도 하고 그래야지. 아, 저양반이 나를 용서했구나 하는 확신을 느낄수 있을 것 아닙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시인이 울지를 않아서 하나님 앞에 용서의 확신을 못가진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정말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었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언제나 우리 이런 식으로 상상할 수 없잖아요. 죄를 지어놓고 “하나님 잘못했어요. 흑흑흑” 그러니까 “뭘 그렇게 울기까지 하니 오늘 용서해줄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우리를 그렇게 안하십니다. 마음지킴의 교리에서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했죠.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미끄러지면 상당히 긴 시간동안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왜? 거기에서 이 마음을 지키지못해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하게 만드심으로서 그 죄에 대해서 단련되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상당한 정결케하시는 과정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 속에서 이 시인이 많이 울고 통곡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죄의식을 능가하는 사죄의 확신을 얻기전까지는 담대해질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다른 시편에 보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그 죄가 자기 앞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죄를 다시 짓는다.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를 했지만 그 죄가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다.라고 확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심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도 자신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훌륭하게 사단이 이용해서 그를 아주 끝없는 영적인 침체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으며 기도하던 많은 날들이 있었는데 그 어느날 하나님께로부터 죄의식을 능가하는 사죄의 강력한 확신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혼자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실한 죄사함, 그리고 그 죄사함의 확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내가 죄를 지은것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것만으로 회개가 충분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뭐가 필요하냐면 하나님이 “이젠 내가 너를 인정한다. 네가 많은 죄가운데서 나를 거스렸지만 너의 진실한 참회를 내가 들었고, 그리고 내가 너를 사죄하노라.”라고 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안에 성령으로 베풀어 주시는 어떤 사죄의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합니다.
물론 자기는 계속 그 죄가운데 있으면서 그런 확신을 달라고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노리는거죠. 그것은 안됩니다. 거기에서 떠나고 다 정리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죄의 확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인이 언제 그런 강력한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언제냐 하면 두 번째로보니까 왜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통곡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흐느껴온 수많은 날동안의 눈물과 흐느낌, 그리고 그 많은 통곡들중에 단 하나도 하나님이 듣지않으신 것이 없죠. 안계신 곳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인의 그런 흐느낌, 그런 시인의 울부짖음, 당신과의 사랑의 교제로부터 미끄러져서 신음하는 그 영혼의 아픈 통곡소리를 안들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그렇게 참회하고 부르짖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울부짖음이 허공에 맴도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빨려들 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그 간곡한 부르짖음을 주님께서 듣고계시다.라는 아주 강력한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샤마”라는 단어가 쓰여졌는데 구약에서 아주 심오한 동사가운데 하나가 이 “샤마” “듣다” “샤무엘” “쉐마“ 다 같은데서 나온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주어로 해서 하나님이 듣다.라고 하는것도 많이 나오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관해서 듣는것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억나실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들으며 주의 계명을 듣고 내가 너희엑게 지시한바를 듣고” 듣고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자면( ? )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들려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내적인 순복의 의지를 가지고 민감한 촉각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지못해서 놓침으로 그것대로 준행하지못하는 일이 없도록 내적 순복과 주의력을 가지고 청취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뭔가 행동개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들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가지고 있었던 아주 놀라운 특권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입니다. “샤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시인의 통곡하는 울음이섞인 탄원의 목소리를 주님이 “샤마”들으셨을 때에 말하자면 이 시인은 한이 풀리는 것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사죄의 확신이 가져다 주는 아주 놀라운 자유함입니다.
우리에게도 단순한 참회의 반복이 아니라.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내가 참회할 때 주님이 정말 나의 이 울음소리를 들으셨구나. 그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의 가슴속에 새기실때에 그 확신이 죄의식을 능가하고 그럼으로서 우리들이 양심의 송사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주님이 나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셨다.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인의 이러한 그 8절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주 깊은 교훈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죄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죄가운데 있으면서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고 그 죄를 통해서 빚어지게된 영혼의 침체와 그 죄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양심의 송사를 계속받고 원수들에게 에워쌓여 압제를 당하는 것은 결국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신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우리의 이 참회하는 태도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죄의 깊이도 깊었지만 참회의 깊이는 죄의 깊이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는 충동적인 정욕으로 죄를지었지만 회개할 때에는 충동이 그를 회개시킨 것이 아니라. 온 영혼 밑바닥에서 들고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욕구가 소리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한 것입니다. 마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할 때에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주님을 향해서 찬양하던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참회하는 순간에 모두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충동 속에서 자신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확신이 이 순결했던 시인의 마음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들고 일어나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며 통곡했을 때 그 참회의 깊이는 죄의식, 양심의 가책의 깊이를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시인이 법죄하기 전에는 죄에 대한 유혹, 그 다음에 이보다도 더한 죄를 지을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그리고 경건한 어떤 신자의 마음속에도 죄에 대한 호기심은 남아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모두 들고 일어나게 하심으로서 이 시인을 한번 조금씩 조금씩 쌓여온 모든 악과 이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그런 것들을 다 들고 일어나게 하셔서 한번 이 시인의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이 불과 그리고 칼로서 물로서 정결케 하시는 그런 사건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들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참회하는 순간을 통해서 이 시인은 죄를 짓기전보다 훨씬 정결한 사람으로 거룩의 길을 걸어갈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그런 은총을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영혼이 회복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거꾸로 자신의 인생을 보기만 하면 어떻게보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의 뉘우침, 사죄의 놀라운 은총이 있기만 하면 어떤 의미에서 어쩔수 없이 들어선 우리의 범죄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한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짓지말고 잘못에 빠지지 않고 잘 살았더라면 좋았죠.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합니까. 돌이킬수 없는 일을 주워담을수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선의 길은 이제 최선의 길이 되었고 그 최선의 길은 자기의 이 미끄러진 것을 오히려 하나님이 시인처럼 자기를 변화시켜서 그 사죄의 확신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를 더 정결케 만들어주실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처럼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합니다.
여기에 특별히 “나의 곡성”이라고 번역된 “나의 울부짖음의 소리”라고 표현된 이 부분은 시인의 그 참회가 얼마나 가슴을 찢는 전인적인 참회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잘못에 유감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자신의 허물, 자신의 이 고통을 인해서 너무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결국은 자신의 그 타락, 자신의 범죄를 오히려 거룩한 다윗으로 우리에게 알려질수 있는 아주 훌륭한 한 기회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역전의 대 드라마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만약에 이런 처지에 있다면 아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전인적이고 깊은 참회를 함으로서 오히려 우리의 실수와 범죄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수 있는 한 기회로 바꿀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5. 다시 하늘 문이 열릴 때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편6:9)
범죄하고 비탄가운데서 몸부림치며 육체와 영혼이 모두 쇠잔하였던 시인이 어느 한순간에 담력을 얻고 “행악하는 너희는 다 물러갈 찌어다. 나를 떠나라.” 이렇게 외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7절과 8절 사이에 구체적인 한 경험이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신 경험이었다고 여러분들에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시인은 좀더 구체적으로 9절에 와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셨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기전에 일어난 일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까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글 성경에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과거의 경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 이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부분이 히브리 성경에는 문맥은 전혀 이상이 없는데 단어의 의미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으며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순서로보면 두 문장으로 되어있는데 히브리 성경에서 순서로 보면 첫째문장은 보통 흔히 쓰이는 어순으로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대게 동사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주어가 나오고 그다음에 목적어가 나오고 그다음에 보어가 나오는 이런식이 되는데 첫 번째 문장은 그런식으로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들으셨도다.“ ”들으셨다.“ ”여호와께서“ 그다음에 ”나의 간구를“ 이렇게 되어있는데 두 번째 문장에서는 일상적인 히브리 문장에서는 동사가 먼저 나오고 주어가 나오는데 그런데 이 두 번째 문장에서는 주어가 먼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작하는 그 주체를 강조하는 의미로 앞에다 내어다 놓은 것이니다.
그런데 이것을 번역을 할 때에는 그것을 다 반영할 수 없으니까. 언어가 다 틀리니까 했죠. 그래서 읽을 때 차라리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다. 바로 그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이 강조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의미전달이 되셨죠.
두 번째는 여기에 나와있는 “간구”라는 말이 애매한데. 간구하고 기도하고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설명하기에 굉장히 힘들겠죠. 사실은 이것은 간구인데 “타힌나”라는 단어입니다. “타인나”라는 단어가 “타”는 “애원” “간구” “ 간청” 이런 뜻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특별히 간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때 이 단어를씁니다. “타힌나”라고 하는 단어의 명사인데 그것은 동사 “하난”에서 썼습니다. “하난”은 뭐냐 하면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타힌나“ 하면 이것은 ”하난“ 은혜를 베풀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변형이 되어서 ”간청“ ”탄원“이런 말로 사용되는데 그 뜻은 뭐냐 하면 단순하게 자기가 어떤 요구사항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이미 그 내용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그런 종류의 탄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무엇을 간구했는가?라고 하는 것을 이미벌써 이 단어자체가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난 후에 할말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기전에 일어나는 마음의 가장 강력한 변화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아무 할말이 없다.라고 하는 자기 인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한 사람의 기도자가 자기가 범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할말이 많이 있는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범죄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아직도 자기의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이유와 핑계, 그리고 변명,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세상도 없고 나도없고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죄지은 자기 자신밖에는 없는 그 경험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회복될때가 되면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지만 오늘 이 주제와 관련된 변화는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받고 영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그 시점으로부터 아주먼 때에는 사고가 너무 복잡하고 자기 자신이 영적인 침체에 빠진 원인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굉장히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를 이런 침체속에 빠뜨리거나 혹은 나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연이 정말길죠.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사연이 많을 때에는 기도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 하면 기도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 이깁니다. 논쟁하면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 이깁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하는 사람과 자기가 직접 거기에서 본 사람이 얘기하는 것 사이에는 논쟁해서 이길수 없죠. “이렇다. 그러더라.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가 보니까“ 그리고 쭉 얘기하면 할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자기의 범죄한 사실, 혹은 자신의 영적인 깊은침체, 그런 속에서 굉장히 사고가 혼란하죠. 그래서 영적 사고의 질서와 그다음에 영적인 상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사고가 잘 정리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상태가 아주 나빠지고나면 그다음에는 이 사고가 아주 흐릿합니다. 마치 주파수맞지않은 TV켜놓은 것처럼 그렇게 아주 혼돈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혼돈을 마귀는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죄는 언제나 선명한 사고보다는 그렇게 희미하고 혼돈된 사고속에 거하기를 좋아합니다.
할 얘기가 아직까지도 많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는 사실 할 얘기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기도하는 그 인간이 자기가 왜 죄를 짓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요인들과 그다음에 사람들을 향한 많은 원망과 분노,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를지은 그 사람이 지,정,의가 바뀌어서 인격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통해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자기 자신의 죄에 떨어진 많은 문제들을 환경과 주변의 상황에서 찾으려고 애를쓰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실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혼돈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씀의 은혜를 받게되면 그러면 그다음에는 그렇게 용서를 필요로하는 자기 자신의 이 죄악된 상태에 대한 원인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너무 많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자기를 만지기 시작하면 아주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나다.” 그 때 비로소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얘기나옵니다.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할 때 그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까? 로마의 이 구조적인 사회가 나를 세리노릇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바닥에 살면서 내가 동족들을 등처먹지않고 어떻게 살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왜 나만 가지고 그렇습니까. 왜 딴 사람 보십시오. 그래도 그 사람들보다는 덜 먹었습니다.“ 그렇기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이 사실 그 사람 책임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범죄했지만 다윗 책임만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다윗을 깊이 동정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아버지도 책임을 좀 져야합니다. 충분한 하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어려서부터 심성이 건강하게 잘 자랐더라면 이렇게 이상한 여성편력쪽으로 안갔을 것입니다. 형들도 책임이 있죠. 형들도 이 동생을 왕따 시키지말고 잘 사랑하고 그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우애를 느낄수 있었으면 어떤식으로든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그 아내인 미가엘에게는 더 책임이 많죠. 어쨌든지간에 남편이 홀로 어두운밤에 눈물을 흘리면 50%는 아내 책임입니다. 그리고 상황이야 구체적으로 성경에 안나오지만 그 여자가 거기에서 목욕만 안했어도 뭐 위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왕궁을 설계하는 사람이 담장만 좀 놓이 쌓았어도. 그 사람도 책임이 좀 있다고 말할 수 있지않습니까. 뿐만아니죠. 왕만 안되었더라도 계속해서 양의 똥이나 치우고 낙타나 쳤더라면 누가 와서 그 앞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다윗이 되고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경험할 때가 되면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내가 죄인입니다. 모든 문제는 내게 있었습니다. 내가 범죄했습니다.“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죠. 참 얼마나 묘하냐 하면 보세요.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했는데 그것 여러분들 꼭 들으세요. 거기에서 이부분을 들으세요.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그 부분을 들어보세요.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깨달을수 있었습니까? ”사랑을 시기하지 아니하며“ 그 아가페의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왜그럴까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독점하고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아닙니까. 그렇죠. 여기 결혼 안한 형제들,
자매가 있는데 너무 착해요. 성품이 착한 사람들은 대게 못생겼잖아요. 물론 못생긴 사람들이 모두 성품이 착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성품도 착한데 외모도 예뻐요. 외모도 예쁘고 성품도 좋으면 뭐 가난하든지, 아니면 공부를 못했던지, 그런데 공부도 잘했습니다. 공부를 잘한 사람은 대게 교만하잖아요. 물론 공부도 못하고 교만하기만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을 안열잖아요. 그런데 그냥 그 형제를 사랑해요. 그런데 너무좋죠. 그런데 자기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한사람 또 있어요. 그러면 그 순간 어떻게되요.? 그 사랑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불결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왜그렀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에게 사랑을 이렇게 줄때에 그 받는 사람이 이 사람과 이 사람이 함께 자기가 사랑받는다.라고 느낄 때에는 그것을 독점하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투기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결하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깊이 받으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때문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받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시는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한번쯤은 이 세상에 나도없고 내 주의에 모든 사람도 없고 오직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사랑받는 나 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크리스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하나님 앞에 깊이 느끼는 사람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회개역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깊이 느낄때와 자신속에 있는 죄를 뼈져리게 느낄때에 그 반응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도없고 세상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죄에 대한 그런 인식이 회개를 가져오는데 회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회개의 종착력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고, 예전에 사랑할 수 없었던 것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또 가만히보면 회개하지 않을수 없도록 죄를 짓게 만들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 육신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입니다. 어느순간에 회개하면서 세상에 붙었던 욕심과 더러운 것들을 떨쳐내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이 말했듯이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성도의 마음이 가득차고 삶의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확정되는 것, 그것이 순결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순결한 사람들은 모두 냉정한 사람이 없습니다. 순결한 사람은 모두 열열합니다.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있으니까.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구했는데 그 간구의 성경이 뭐냐 하면 은총에 대한 탄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어느순간에 이런 모든 자신의 범죄의 이유, 그럴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다 깡그리 날려버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독대를 경험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앞에 다른 모든 이유와 핑계없이 스스로 죄를 선택해서 범죄한 자기 자신, 그리고 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무런 주님에게 죄지은 시인을 다시 상대해주셔야할 어떤 의무가 우리 주님에게 있었습니까? 죄지은 이 사람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셔야할 어떤 필연적인 의미가 우리 주님에게 있었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이 시인을 쓸어버리고 그리고 다윗 못지않은 제2의 새로운 사람을 세워서 다윗을 통해서 이룰려고 하신 일들을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간다고 할 때에 우리 주님을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식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강요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그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피조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미루어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잘못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죠. 제가 자주쓰는 표현임니다만은 자식이 시름시름 앓습니다. 약값도 들어가고 병원 데리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요. 그렇다고 버립니까? 고쳐줘야죠. 중병이 걸렸으면 중병이 걸렸기 때문에 더 고쳐줘야되고, 감기에 걸렸으면 그까짓 감기에 걸렸다고 “에이, 감기 병원채에 오염된 넌 싫다.” 그리고 밖에 버릴수 있느냐고요. 그렇지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참회할 때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한 죄인들이 그 회개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경험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진부한 경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진부한 경험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 은총, 그 용서의 은혜, 그 때 그런 것, 또 해주시네. 그럼 그렇지 옛날에도 용서해주셨는데 뭐 새로운 것이 뭐가 있겠어. 늘 기도하고 그저 매달리면 또 용서해주시고 그리고나면 또 가서 죄를 짓고, 그러다 썩음썩음해지면 또 와서 또 용서해달라고 빌고 그러면서 사는거지” 그런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레미야 애가에서 경험한 그 인자가 무슨인자였습니까? 그것이 예루살렘성이 다 무너지고 파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쓸어버리신 그 백성위에 여전히 심판은 심판이고 그 위에여전이 그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본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표현합니까?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파괴된 예루살렘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눈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인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시인이 행악하는 자들이 내게서 다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라고 그렇게 담대하게 자기를 송사하는 양심과 그리고 율법의 모든 다툼을 뿌리칠수 있었던 그 담대함 이면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는데 그 용서를 경험하기까지 이 시인이 하나님의 은총 하나를 바라보고 매달렸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곤고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한 사람이 곤고하게 살아가고 있고 고통받으면서 매일매일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유때문만으로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지못합니다. 영혼이 파리해져도 단지 그가 고통받고 괴로워 하고 영혼이 파리해졌다는 이유만으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지못합니다. 그러면 어떠해야하느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간절한 탄원. 자기 스스로 애통해야지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주시지. 뭐 너무 슬퍼해야지만 하나님이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죄인들이 그러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수시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져주시는 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경험들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그 사랑의 경험들이 언제있었습니까. 항상 마음이 아프던 시절에 있었습니다. 충만한 은혜가운데 살때가 사실은 가장 마음이 아팠던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그 때에 항상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바로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고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열열히 구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핑계대지도 않았고, 또 자신의 죄에 대해서 둘러대지도 않았고, 선지자 나단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들어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합리화나 그리고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는 범죄하였고, 나는 할말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싶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탄원을 간구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었습니까? 몸이 수척하기까지 영혼이 파리하기까지 밤마다 슬피울기까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는 어쩌면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에 몸부림 속에서 부르짖어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없는 외침처럼 하나님 앞에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탄원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지난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할 때에 그 곡성은 “콜 베카티” “박하”는 “콜”은 목소리이고 “박카티”는 “박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소리내어서 통곡하며 우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에 혹은 그 이전에 제사를 드릴때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차가운 거절의 경험들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여호와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기뻐하면 내가 벌써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그렇게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을 하나님 앞에 외쳐도 응답이 없는 탄원을 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그 은총을 죄인에게 용서해주시기를 구하는 그 탄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몇 달이나 편안하게 살수있을까요. 그는 밤마다 두려움 속에서 잠에서 깰것이며 아침마다 주님도없이 홀로 눈뜨는 고통을 경험해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살수있습니까? 주님 없이 살라는 말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주스러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지금 주님 없이 살고있는데 나는 밤에도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새벽에 혼자눈뜨고 통곡해도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그렇게 속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들이 헤아릴수 없을정도로 많은 날들을 그런 주님의 사랑없이 살아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암니다. 그대들은 그런식으로 일생을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들은 너무나 아파하고있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하나님을 멀리떠날려고 애를쓰면서도 사실은 주님께로 돌아오는것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간절히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싶어하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외침에 조용히 귀기울여보십시오. 아무것도 필요없고 오직 주님의 그 사랑을 다시받고 싶어하고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 영혼의 외침을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마음속에 열열한 용서를 탄원하는 외침이 끝났지만 그러나 그것은 울다울다 지켜서 잠이든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다시 깨어나기만하면 다시 흐느끼며 주님의 은총과 그리고 용서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탄원할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그 긴탄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왜 죄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가 하는 것을 뼈져리게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그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 그것이 모든 글속에 배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그의 가슴에 불로지지고 지나간 흔적이 그 사람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모릅니다.
이 시인을 하나님이 정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를 고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범죄한 것은 하나님이 범죄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범죄를 통해서 그는 어떤의미에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자신의 영혼의 깊은 밑바닥, 그리고 그 악하고 더러운 자신의 이 영적인 본성들을 보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정말 이 거룩한 은혜가운데 사는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려질게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생애를 걸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탄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고쳐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시인이 범죄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죄보다는 하나님을 훨씬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죄를짓는 그 순간은 죄를사랑했지만 순간의 사랑이 결국은 사랑의 전체적인 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인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죄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이고 간헐적이었으며 주님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붙들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탄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탄원하여야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샤마“입니다. 이 샤마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력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 설교를 듣는것처럼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간에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그것에 순종하겠노라고 하는 다짐 속에서 듣는것입니다. 마치 차를 몰고 가는 운전수가 표지판을 찾으면서 운전할 때에 그 표지판이 지시하고 있는 화살표대로 움직일 100%의 마음을 가지고 표지판을 찾듯이 그런 태도로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그렇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세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같은 여인도 보면 자기의 고백 속에서 이런 것이 나옵니다. 마리아의 고백 속에서도 나오고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 사람들이 경험한 공통적인 경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들으신 것인데 “하나님이 들으셨다.” “들으신다.“ ”들으실 것이다.“라고 하는 그 고백속에는 반드시 뭐가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라고할때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 충돌을 일으켜서 하실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해줄수 있는 그 일에 대해서는 해주실수 있는, 다시말하는 베푸실 은총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베푸실 용의를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의 그 간구하는 탄원에 대해서 그것이 설령 죄를짓고 찾아와서 지루할정도로 길게 긴 날동안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탄원하는 같은 내용의 반복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든지 자신이 해줄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실 용의를 가지고 그 기도를 듣고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귀기울여 들으실만큼 자기전체를 실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탄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쓰다보면 많은 벽에부딪힙니다. 되는데로 인생을 살려고 마음을 먹으면 벽에 부딪히는적이 별로없습니다. 또 벽에 부딪혀도 무슨문제입니까. 돌아가든지 아니면 안가면되지. 그런데 어떤신앙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에는 부딪히는 벽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많은 벽들을 만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벽을 만났을 때에 절망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는 그 간절한 마음보다 항상 훨씬큽니다.
하나님을 섬기든 무엇을하든, 어떤 상황에 딱부딪히게되면 거기에서 자기를 다 쏟아부으면서 그러면서 다시 일어서는 그런 강한 몸부림이 필요한데 그렇게 간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오늘도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뭐, 문학적인 표현으로 가득찬 아주 정교한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려고 하는 아름다운 표현과 미사어구로 가득찬 그런 기도에만 하나님이 마음을 기울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있는 사람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총에맞은 짐승처럼 신음소리만 내며 기도해도 그것이 영혼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꺽을수 없는 깊은 탄식을 동반한 외침이면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주목하며 당신 한분만을 바라보면서 몰입하며 그분께만 은총을 기대하며 탄원하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들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이런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끌었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애처러운 기도의 몸부림 속에서 시인이 충분히 정결케 되었다고 믿게된 그 어느순간에 하나님께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행악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라.” 외칠수 있는 그런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보니까.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도라고 되어있는 그 부분은 진짜 일반적으로 “테필라”라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기도라고 번역된 그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아까말씀드린바와 같이 주어가 먼저나옵니다. 여호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 그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이 왜그렇게 강조되었습니까? 그것은 그 동안에 시인이 범죄 속에서 그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그간의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온 영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고 또 용서해주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이 자기와 교통하신다고 하는 아주 실재적이고도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주어를 바꾸어놓을 정도로 시인에게는 엄청난 감동을 준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오랜동안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던 그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고계시다.라고 하는 놀라운 감격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보면 “들으시리로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여호와, 바로 그분이 나의 기도를 취하시리로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히브리어에는 현재, 과거, 미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없어서, 또 어떻게 되어있느냐 하면 동작을 표현할 때 끝났느냐 안끝났느냐. 그것만 가지고 따집니다. 그래서 하나는 완결형, 미완결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문법을 가지고보면 과거진행형도 미완결입니다. 미래는 더더욱 안되었으니까 미완결이고, 현재도 미완결이고 현재진행형도 미완결입니다. 그리고 과거진행형도 물론 미완결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생각할 때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 그런 것 필요없이 이야기 하는 내용 속에서 지칭하고 있는 시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 동작이 계속되고 있으면 미완결형이고 끝났으면 완결형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미래를 시점으로 보았을 때에 “내년 12월 31일에는 내가 한국에 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완결형입니다. 이런 식이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취하실 것이다.“라고 하는 이 미완성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현재로 해석해야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도 이것을 N.I.V같은 경우는 ( ? )라고 해석했습니다.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탄원을 들으셨다. 그리고 여호와 바로 그분이 나의 기도를 받고 계시다. 취하고 계시다. 내가 기도를 올리면 기도를 이렇게 취하고 계시다. 가져가고 계시다. 그것을 지금 현재의 경우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지금 기도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과거에는 기도가 안되었느냐.? 이 몸이 수척하도록 뼈가 마르도록 밤이고 낮이고 핍절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기도가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기도도 가만히보면 나도 안하고 하나님도 안들으시는 기도가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는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기도하는데 내 마음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냥 기도는 나가고 물론 하나님도 안들으시고, 나도 내 마음으로 기도를 바라지않았고 하나님도 안들으시고, 그러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대부분 그런 기도입니다. 그다음에 뭐냐 하면 나는 정말 진정으로 마음 속에서 기도가 우러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들으십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죠. 정말 나는 간절히 외쳤는데 아주 정직하게 말하면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어디론가 허공중으로 흩어질 때. 그런 기도가있습니다.
그래 성경에 보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듣지아니하시는 그런 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내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기도가 쏟아져나오는데 그 기도가 자기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고 우러나오지 않는 것은 자기가 너무 잘알지않습니까. 그런데 우러나왔는데 동시에 하나님이 그것을 취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쏟아져 나올 때 느낌이 어떠냐 하면 마치 하나님이 빨대를 내 마음속에 대고 기도를 마시는것처럼 그런 느낌이듭니다. 기도할새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거두어가십니다. “락카”라는 단어인데 “취한다.” 그런 뜻입니다. 기도가 형성될려고 하면 다 그냥 가져가십니다. 그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기도가 막 쏟아져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는 고갈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기도 속에서는 가끔 막 눈물을 쏟으면서 마음 속에서는 우러나오는데 어느 한순간 갑자기 우리의 마음이 차갑게 냉담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기도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기도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빨대를 우리의 마음에 꽂으시고 기도의 기운이 올라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빨아대시는 것같은 그런때가 있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시인도 모르고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긴 시간이 지나고난후에 정말 시인이 경험한 이 기도의 경우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단숨에 자신의 양심과 율법과 사단의 송사를 받은 사람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물러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내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셨도다.” 외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에서 시인이 정말 완전한 사죄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다윗의 승리라기보다는 죄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말이죠. 회개의 궁극적인 마지막 종착역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받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책임을 묻지않으시겠다.라고 하는 그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용서가 그렇게 필요한 이유는 뭐냐 하면 용서의 경험은 항상 영적 교통이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경험이 영적인 단절을 다시 영적인 교통으로 바꾸어주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실지에 있어서 만약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회복이 없다면 죄인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알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용서해주셨다고 말씀해주셔도 믿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곳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의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편 51편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무슨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기전까지는 자기 자신이 죄에서 용서받았다.라고 하는 확신을 가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어볼까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니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데요. 그리고 질문도 해보았죠. 뭐라고 예수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천당못갑니까?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되었다. 성취되었다. 그런다면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문제가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복음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바로 그런죄를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아무리 사죄의 교리를 설명해도 나 자신은 그것으로서 만족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다.라고 하는 놀라운 확신을 주님이 사랑을 내게 경험하게 해주심으로서 비로소 내가 자유로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를 사랑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수 있는때가 언제입니까? 기도할때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의 사람됨은 기도할때의 그 사람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기도중에 하나님이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에 합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느낄수 있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얼마나 감격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긴 날동안에 밤이면 밤마다 눈물도 침상을 띄우가 자기의 요를 적셨습니다. 왕궁의 좋은 음식이 주는 기쁨도 잊어버렸고, 가무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슬픈자와 같이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느순간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용서의 은혜를 주시고 다시 그를향한 불쾌감을 거두시고 진노를 거두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하니라.”고 한 그 마음을 거두시고 다시 다윗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다시 당신의 사랑의 빛 아래서 살도록 시인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들도 이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죄인들을 다루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의 마지막 희망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햇빛처럼 쏟아지는 그 사랑 앞에서 지나간 부끄러운 죄를 용서받고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다시 사는 것 그것이 죄인의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6.하나님과의 화목:대적을 이기는 길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 가리로다.(시6:10)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시편6편의 마지막절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절에서 이 시인은 우리가 읽은바 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 가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장엄한 시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평이하다.라는 느낌이듭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바로 그 앞절에 나온 시편6편을 기록한 이 시인의 승리의 선언과함께 우리에게 진정으로 죄사함을 받은자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새로운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과 그리고 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아주 소중한 구절입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말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 가리로다.” 히브리 성경에는 “나의 모든 원수”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쓰여진 이 원수는 시편23편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할 때 그 원수 하고는 다른 단어입니다. 거기에서는 “쪼레르”라는 단어를 썼는데 “괴롭히는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예부” 복수가 되어서 “오예바이”라는 단어가 되었는데 이 단어는 좀 다릅니다. 똑같이 원수라고 번역되었지만 시편23편의 원수는 두 사람을 획일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보는 관점에서 시편23편에서는 자기에게 고통을 실제적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의미하고 여기에서는 보다도 넓게 “오예브”인데 이 오예브는 “미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이 원수는 실제적으로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는 훨씬더 범위를 넓혀서 마음속에 이 시인을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상대를 포함하고 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내 모든 원수들이“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동태로 되어있어서 적절합니다. ”심히 떪이여“ 그랬는데 이 ”심히 떪이여“라고 하는 단어는 여기에서 보면 공포에 두려워 떠는 것처럼 보이는데 원래 이것은 ”당황해하다”그런 단어입니다. 그래서 얘기치 못한 어떤 일들이 발생해서 그 일이 너무 놀랍고 위협적이어서 그래서 마음에 긴장하고 덜덜 떨게되는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 가리로다.” “홀연히“는 갑자기 라고 되어있고, 히브리 성경에는 물러가리로다.가 먼저 나오고 부끄러움을 당하리로다.가 뒤로 나옵니다. 그래서 번역하면 ”나의 모든 미워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리고 당황해 하며 그들은 갑자기 물러날 것이며 부끄러움을 당하리로다“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그렇게 우리말 번역이 커다란 오류를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여기에서 시인은 ”원수“라는 단어를 통해서 죄가운데 있을 때에 경험했던 이 시인의 마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범죄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죄가운데 있었을 때에 시인이 경험한 것은 수많은 대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자기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대적들이 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들이 두가지로 이 문제를 생각해볼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시인의 범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시인을 다루시기 위해서 범죄하지 않았을 때에는 평화롭게 지낼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깨뜨려져서 그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들로 돌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 우선 첫 번째입니다.
(예를들자면 창세기에 보면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3장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징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기전에 먼저 아담에게 “네가 어디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연유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두 사람은 2장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 속에서 부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주님 앞에 범죄할때까지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다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각자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자 그들의 관계는 깨뜨려졌습니다. 그리고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라는 말하자면 자신에게 도저히 만족을 주지 못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여자의 존재가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짐이된다.라고 하는 우회적인 고백을 낮게끔 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을 함께 경험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해 질 때에 주님이 우리를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는 방법이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의 소유를 가져가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뢰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망과 혹은 배신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고 우리가 위로를 받고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받는 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유한하고 불안한 것이며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하나님으로 받는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우리의 마음속에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되고 깨뜨려진 마음이 될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적절하게 배신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실망하고 가졌던 재물을 잃어버리고 좋은 삶의 환경에서 갑자기 굴러떨어지고 하는 이러한 다양한 변화들은 어떻게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며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받는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들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놀고 그리고 먹을것도 주고 해서 만족스러울때는 울지 않지만 그러나 누가 자기를 좀 섭하게 하거나,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거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수 없을 때에는 즉시 엄마를 부르며 울게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여기서는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쌓인 것은 진짜 다윗이 그렇게 많이 원수맺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했다.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런 관계들을 깨뜨려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곤고합니다. 기도해야 할터인데 기도도 잘 안되요. 괴롭습니다. 그런데 주위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왕국은 아직 여전히 아주 강성하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아버지 존경하고 그리고 그의 신하들은 이 다윗이 영적으로 어려울 때 더없이 똘똘뭉쳐서 하나가 되어서 다윗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어떠한 갈등이나 틈을 내다볼수 없이 그렇게 태평성대를 이루며 살았다고 할것같으면 시인이 이렇게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매달릴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중하죠. 물론 우리는 그런것만 가지고는 편안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은혜의 세계를 본 이 시인이 어떻게 왕국이 걱정없이 돌아가고 먹을것이 많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해 준다는 그 이유 하나로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두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교제, 깡그리 사라져버린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런 속에서 넉넉히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그럴수 없다고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충분히 우리들이 인정하면서도 그렇지만 이 다윗의 생애를 실재적으로 볼것같으면 그 후에 그가 타락을 통해서 오히려 거룩으로 나아갈수 있었던 것은 사랑받아야할 관계에서 수많은 깨뜨려짐을 경험했고, 그리고 다윗이 만약에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등졌을 리가 없습니다. 후에 조금 교만해지고 그리고 조금 육신적으로 흘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윗은 정말 은혜로 그 왕국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악한 왕이 다스렸을시기 못지않게 반역이 일어나고 그리고 더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아주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도록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완전하고 그리고 훌륭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이 영원하고 완전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셨기 때문에 시인이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수시로 돌아가서 원수들로부터 받는 수많은 조롱과 멸시, 그리고 자기는 사랑하지만 저희들은 자기를 미워할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런 주님을 찾는 사람으로 되돌아 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경험되는 관계의 깨뜨려짐, 그래서 많은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면 외톨이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범죄한 다윗을 다루시기 위해서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관계들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미워하는 자들이 이 시편6편에서 등장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실재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을 때 자기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생각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면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미 여러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그 율법의 아름다움과 그 율법의 한없는 축복에 대해서 말하죠.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의 율법이 전에는 시인이 고통을 받을 때에 넘치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우둔할 때에는 그 눈을 밝혀서 갈길이 어디인지를 알게 해주어요. 그렇게 율법에 의해서 오히려 자기의 삶이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께로 다가갔는데 자기 자신이 죄에 빠지고나니까 이 율법이 원수와 같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이야기냐 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갈 때에는 그 율법이 끊임없이 자기를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는데 어느순간에 이 율법이 끊임없이 이 시인을 정죄하면서 그러면서 이 시인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변했다기보다는 그 율법을 대하는 시인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발받는데 문제는 자기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참한 무기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비슷한 경험을 사도바울이 그 후에 로마서에서 필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이 정말 소중하고 필요하면서도 또한 이처럼 죄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죄를 지적해주고 그리고 그 죄를 일깨워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그 무엇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양심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그 은혜 아래 살때에는 양심이 아주 훌륭한 우리의 신앙의 작은 등불이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이 믿을수 없지만 그러나 그 양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 살아가는 자의 양심일 경우에는 아주 굉장히 소중한 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풍부한 지식이 있을 때에는 어떤 의미에서 그 양심은 그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때 그 발 앞에 비취는 등불과 같이 그렇게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모두 깨닫고 그가 은혜 아래 살면서 그 양심의 인도를 받으면서 우리들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범죄하게 되지 마치 이제껐까지 자기를 끌고가던 그 양심이 자기와 대적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맞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양심이 여러분들의 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적있죠? (예를들자면 이제껏까지 나를 이끌어 가고 그리고 나를 인도해주던 양심인데 어느 한순간에 딱 돌아서면서 그 양심이 나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무슨 기도를 하냐? 그런다고 되냐? 너는 용서받을수 없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분명히 범죄하고난 다음의 시라고 믿어지는 또다른 시편에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어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의 대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지금 두 번째 말씀드린 내면의 대적들과함께 첫 번째 말씀드린 하나님이 그를 다스리시려고 깨뜨리셔서 그래서 일어서게 만드신 그 수많은 대적들과함께 어울러지면서 그야말로 시인은 안팎에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로 가득찬 곤고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런 인생의 어두운밤을 지내본적이 없습니까? 이 세상 온갖 시험들이 마음을 흔들고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밖에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원수들이 여러분들을 에워싸고 있어서 어디에도 여러분들을 도울수 있는 우군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철저하게 포위되어서 몸부림치던 영혼의 어두운 밤은 없습니까? 주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조차 없어서 마치 밤바다에 내동이쳐진 파산직전의, 난파직전의 작은 배 하나처럼 그렇게 대적들의 시험과 그리고 풍랑에 휘몰리던적은 없었습니까?
인생을 지나다보면 꼭 그런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잔잔한 바다에서 즐겁게 뱃놀이만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많은 항해를 한 사람들은 수많은 시험의 폭풍과도 싸왔고, 죄악의 파도와도 싸운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마귀의 표적이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시험의 표적이됩니다. 그들의 구원을 취소시킬수는 없지만 어찌하든지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 그 큰 은혜의 경험과는 거리가먼 삶을 살게함으로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서 현제의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자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어두운밤을 지내본적이 없습니까? 이 시인은 그런 밤을 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때는 몰랐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죄가운데 빠지고나니까 수많은 원수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스리기 위해서 깨뜨리신 관계들뿐 아니라. 그 사람속에 있는 양심과 율법뿐 아니라. 또 하나의 대적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죄에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림으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런 상처와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림 속에서 그대로 들어나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몇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여러분들이 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는 치유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속지마세요. 여러분들이 은혜안에 있을 때에만 그 여러분들이 필연적으로 격으면서 살아야할 여러분의 상처나 이런 것들에 영향을 안받고 사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경험했어도 여러분들이 일단 다시 은혜에서 멀어지고 죄가운데 들기만하면 그런 모든 것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여러분들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운데 있으면서 이러한 대적들로부터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의 안에 자기의 밖에 원수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것 만으로도 땅에 구르는 진토에 떨어진자와 같이 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신데, 그가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죄의 그 비참한 결과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잃어버렸을뿐만 아니라. 묻어두었던 수많은 원수들이 안팎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랑받아야할 관계 속에서 깨뜨려짐을 경험했고 그래서 수많은 원수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맨처음에 다윗이 어떻게 나라를 세웠습니까. 상처받은자. 그리고 절름발이, 병자들, 말하자면 그 시대에 사회에서 모두 소외된 사람들이 다윗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귀족들을 설득해서 구태타를 일으키고 나라를 정복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기름부어 세워주셨지만 슬피우는자, 고통하는자, 병든자, 갈곳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다윗이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인간이 다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을 끝까지 끌어안는 정신을 사실은 왕이 된뒤에도 유지했어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다윗을 사랑하고 존경했죠. 군주 이상으로 그를 사랑했고 존경했습니다. 그 백성들을 끌어안고 그 사울의 치하에서 찢어지고 그리고 벗겨진 민심들을 치유하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다윗이 백성들에게 그토록 미움을 받을만한 무슨일을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들고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것 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수많은 원수들이 안팎에 들고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자니 그 길이 너무나 멀고, 죄가운데 그 길을 찾을수 없고, 그리고 견디자니 수많은 대적들이 들고 일어선 그 압박과 시련과 고통의 짐이 너무나 너무나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탄식하는 통곡이 범죄한 이후로 오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임금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가상제 전제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윗의 이 범죄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가치도 없을 정도의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임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이기 이전에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할 하나님 아버지의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에 그는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혹독할 정도의 고통을 느끼면서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쌓여서 그 긴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죄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경외의 마음과 죄에 대한 두려운 마음은 항상 비례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랑은 거룩한 하나님께대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즘은 “사랑해” 그런말 대게 많이합니다. 너무 무책임한 것 같습니다. 우리 지난주에도 교리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면서 그런 얘기 나누었는데 교리적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은 대체적으로 세 측면에서 관측됩니다. “은혜‘ ”긍휼“ ”오래참음“ 이것인데 그것이 은혜를 받는 사람의 편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베푸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는데도 그것을 용서하실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셔야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맨날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대가를 충분히 지불한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야지. 분명히 잘못한 사람인데 논리는 멈추고 그를 향한 아가페의 마음 때문에 그가 당하고 있는 죄의 비참한 결과 때문에 아파하고 신음하는 그것이 긍휼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퍼붓는 그 노골적인 도전에 대해서 희망을 걸고 참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 것이 사랑인데 함부로 ”사랑해. 사랑해“ 그 동네 강아지한테 이야기 하듯이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책임질수 있습니까?
얼마나 장엄하고 심각한 말인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정말 큰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원수들에게까지 에워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아릴수 없는 긴밤, 해아릴 수 없는 긴 시간들을 이런 고통 속에서 보내었습니다. 범죄를 통해서 맛본 즐거움은 잠깐이었는데 그 죄로 말미암는 비참한 고통은 가혹할 정도로 길었습니다. 자기가 살아야할 모든 이유까지 상실할 정도로 그렇게 혹독하리만치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이 시인을 그렇게 미워하는 자들이 이 시인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리고 당황해서 두려워 떨게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인이 그 대적들을 향해서 반격을 가했습니까? 시인이 싫다고 일어난 수많은 대적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맞서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렸습니까? 아닙니다. 시인 속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송사, 율법의 고소, 이런 것들을 향해서 시인이 어떻게 조치를 했기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당황하여 덜덜 떨게되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수는 의기양양했고, 다윗을 미워하는 자들은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을 압제하고 시인은 비참한 자같이 그 원수들에게 밟히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리고 당황하여 두려워 덜덜떨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사이에 뭐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 용서의 확신, 다시금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 이런 사건이 바로 그 사이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신실했던 다윗과 그리고 한번 택한 자기의 백성들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날카로운 대조를봅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등지고 죄를 지은 사람은 다윗이었지만 그러나 쫓아오셔서 그를 붙들고 그에게 감화를 주시고 그를 변화시키셔서 용서를받게 만드신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다윗이 하나님을 찾은 공적의 대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부엉이가 슬피우는 것 처럼 참새가 처량하게 부르짖는 것 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죄와 용서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것이 용서를 위한 공적이 될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울부짖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게 용서를 강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또 찾고 몸부림치고 울고 슬퍼하였을지라도 그랬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죄의 은혜를 베푸시고 그 사죄의 확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회복시켜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여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그리고 그 연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그 하나님의 자비와 선에 대해서 아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그 죄에 대한 심오한 통찰, 그리고 그 속에 묻어나오는 그 복음에 대한 깨달음들, 이런것들은 다윗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체득하게된 그런 진리의 지평에 대한 인식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처럼 범죄해서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일이었고 그리고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좋았을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추구했더라면 하나님은 다윗의 그 범죄의 과정 없이도 다윗을 심오한 신앙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실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설명을 드리자면 죄를 많이 지었다고해서 죄에 대해서 깊이 깨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바보같은 이야기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많이 지으면 죄에 대해서 많이 깨달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것입니다. 죄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범죄의 감격에 풍덩빠지지 않아도 죄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고 깨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다봅니다. 그리고 작은 죄를 통해서 경험하는 작은 실패와 비참함과 그 고통은 그것을 실재로 행해서 그 범죄속에 풍덩빠져서 완전히 죄가운데 들어가서 맛보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떤 인식의 문제이고 경험의 문제이지 경험의 깊이와 그 인식의 질에문제이지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양적으로 굉장히 크게 경험하고도 짐승처럼 살아갈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양적으로는 그렇게 크게는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그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느끼면서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한 계기를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으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이 부어주신 양에만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붙들고 지키면서 살아가느냐 거기에도 이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충분히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심오한 신앙의 세계,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세계, 범죄를 통해서 회개함으로서 깨닫게 되었던 그 하나님에 대한 찬란한 인식과 영광에 대한 놀라운 감각들을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주실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흔히 자기가 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타락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사죄의 사랑을 경험하고나니까 이 시인을 에워싸던 수많은 대적들이 한꺼번에 뒤로 나자빠지며 황당하게 좌절하면서 덜덜떠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서 이것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처음 주님을 믿고 또 변화를 받고 그럴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사모함이라 그럴까.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들 심방하러갈 때 위로하러 가지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능력있는 사람은 살리러 갑니다. “살려줄까? 일어나” 딱 일어나죠. 능력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가지만 능력있는 사람은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건져냅니다.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런데 점점 이 성화의 길을 걸어갈수록 제 마음속에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화려하게 만드는 그 놀라운 능력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고 그리고 그런 것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유익하게 하나님을 섬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위로부터 부으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느낍니다. 진짜 정말 뼈저리게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또하나 그것못지않게 그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피나는 참회의 과정,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재위에 뒹구는 것과 같은 비참한 몸부림을 통해서 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큰 영광 권세였을까요? 넓은 나라, 부귀한 영토였습니까? 정말 예언을 하고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서 능력있게 섬기는 그런 신비한 영적인 파워였습니까? 아닙니다. 시인이 찾고 싶었던 것은 오직 무엇입니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 안에 있어서
저 포도 비유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그것입니다. 왕국도 영화도, 그큰 능력도 전쟁에서의 승리도, 넓은 영토도, 진정으로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이새의 아들로 돌아가서 고향에서 양이나 치며 짐승의 똥을 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별빛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잡들고 해빛처럼 눈부신 빛살아래서 아침에 눈을 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강렬한 요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내 영혼이 어찌하여 낙망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어찌하여 슬퍼하며 우리의 영혼이 어찌하여 슬피울며 이리저리 방황합니까. 우리의 핍절한 그 영혼이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부귀와 영화입니까? 세상의 권세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까? 사람들로부터 오는 위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대치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이시는 그 친밀한 은혜, 다함이 없는 그 사랑,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만족합니다.
우리의 짧은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죄 용서 받은 후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고 어두웠던 우리의 영혼에 칠흙과 같은 곤고함이 물러가고 빚줄기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었을 때, 그 때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긴 설교를 통해서 이 위대한 시편6편을 충분히 증거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발견한 진리는 그저 드넓은 바다 시편6편의 바다 언저리에서 바닷물 몇모금 손에 움쳐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우렐리 어거스틴이 고백했듯이 “나의 영혼이 주님의 품에서 안식하기까지에는 나의 영혼에는 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 살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요. 범죄하고 뒤로 물러가 미끄러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들이 충만한 은혜속에 살 때에도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선하셨고 죄가운데 미끄러졌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더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당신에게로 돌아오는 그 정결함을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더 간절하게 주님을 찾게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일정기간동안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간절한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 그 사랑과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잠시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피흘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기까지 잠시 그 은혜롭고 감격적인 만남을 유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잠시 순간에 즐거움으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시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간구했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오늘 이처럼 쏟아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 속에서 그를 미워하던 수많은 원수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원수들 앞에서 넘치는 은혜로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만찬을 베푸시고 그 밥상 앞에서 오랜동안 죄 가운데 방황하던 시인의 마음의 상처들을 아물게 하셨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시인이 살았던 것처럼 또한 은혜의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그 시인이 바랐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버리지 아니하실 그 놀라운 사랑의 증거를 죄의 용서의 증거를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 6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