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짐을 지시는 여호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 68:19-21).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 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아멘.
여기서는 이 시인이 그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 짐 을 지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마치 오늘날 소히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님과 이 세계를 하나를 보고 오늘 날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들을 거기에 하나님이 참여 하시면서 당신도 그 고통 속에서 성숙 해가는 그런 신관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여기 나온 말씀은 그런 현대사상과는 상관이 없이 오히려 우리들이 언약백성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많은 고통들을 그 안에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 같은 그런 신앙적인 친밀함과 그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노래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서 시인은 이 언약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시련과 괴로움을 겪는 그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이 고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서 간섭하고 계시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흔히 우리가 큰 고난을 당하고 그런 시련이 사회적으로 오고 또 불의가 가득할 때에는 믿음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디계시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바로 그 현장에 함께 계시는 것이죠. 시인은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보호와 인도가 약속되어 있는 것이죠.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큰 시련을 당할 때,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건져주셨던 많은 역사들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깐 우리와 함께 고통을 함께 당하신 다기 보다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와 맺은 언약관계를 기억하셔서 그 고통당하는 그 상황이 하나님께도 이미 있는 사건이 되어서 구원 해동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데 그것이 바로 우리와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맺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약백 성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된 약속과 그리고 언약을 따르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 자신이 언약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놀라운 성품을 보여 주시는 거죠.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 하셨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이 창조된 세계에는 수많은 자연적인 피조물들이 있잖아요.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 하나 흙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리고 인간을 제외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유지 하심으로서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것이죠. 희미하게 나마 그런 모든 것들 속에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놀라운 흔적들을 지니고 있죠. 왜냐하면 동물들까지 간섭하실 때에는 육체를 가진 동물들과 간섭하시고 관계를 뿐이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이제 육체를 가질 뿐만아니라 영혼을 가진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 닮은 성품들을 속성들을 아주 찬란하게 비춰주시는 것이죠. 그러니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매질이라고 한다면 이 인간은 말하자면 이중의 매질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 그것이 어울려 작용하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속성에 아주 놀랍고 아름다운 빛깔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마지막 이 두 개의 축소되는 원한가운데 같은 인간이면서도 언약백성들이 있는데, 이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름다운 속성을 더욱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과 언약관계 속에서 생활 보고 나며는 정말 이전에 내가 불신자 일 때에도 이제와서 생각하니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고 나를 버리시지 않고 찾으셨다는 것을 느끼지만, 언약배성이 된 후에는 날마다 당신 자신과 사랑으로 채우시고 그 하늘 자원으로 우리가 이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드시는 이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작용은 성품의 역사는 우리들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정말 아름다운 찬송제목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올바르고 정당한 찬송은 이 세상을 향한 모든 인간들에게도 가능하고 또 더 넓게 확장하면 이세사의 모든 만물도 주님을 경배할 터이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찬송할 수 있는 특권은 언약백성들에게만 있는 것이라 이애기에요. 그러니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교회로 한몸을 이루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도 아마 주님을 모랐더라며는 자신의 인생에서 당하게 되는 수많은 괴로운 일들과 고통들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원수의 짖궂음과 행패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모든 고난 거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의 행동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는 우리게에 큰 위로를 가져다 주는 것이죠. 그래서 잘들어 보세요. 얼아들이 나중에 철이 든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어렸을 때에는 엄마 아빠라고 할지라도 싫어하고 친찬하면 우쭐하고 정당하게라도 책망을 하게 되면 삐치는 것이 애들이잖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깊이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면 엄마가 밥 한숟가락을 먹여줘도 그게 밥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여 져있는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예) 그 전에 한번 그분이 한일합방 백주년 아닙니까. 의미 깊은 땐데 신문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참 가슴이 뭉클 했어요. 왜냐하면 인제 대동화 전쟁에 끌려 가는 거죠. 한국젊은이 들이 전쟁에 끌려가지 전에 마지막 면회를 갔던 모양이에요. 그러고 인제 총을 매고 가는데, 그 어머니가 거기에 마직막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전송을 온거에요. 그러니 그당시에는 시집 장가를 일찍 갔잖아요. 저의 할머니가 열여섯에 시집을 가셔서 열일곱에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는데, 그러니 뭐 애가 한 스무살 컸다고하더라도 엄마는 기껏 해봐야 많아봐야 나이 한 사십정도 밖에 안됬을 텐데, 사진 보니깐 완전 바싹 늙은 할머니야, 그 할머니 같은 엄마가 그윽한 눈빛으로 자식을 그 전쟁터 살아돌아올지 어쩔지 모르는 그 전쟁터에 내보내면서 마지막 선물을 주는 것이 뭐냐하면수없이 두들겨 맞아서 찌글어진 것 같은 밤송이 같은 양은 그릇에다게 물 한 사발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올려 주는 거에요. 그 사진을 보는 데 가슴이 참 뭉클 하더라고요.
그 냉수 한 그릇을 받아도 그렇게 자신에게 그냉수를 건내는 어머니 마음 안에 있는 어떤 성품 그 자기 아들인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는 어머니 자신의 그 마음, 볼 수 없고 만질 수 도 없지만, 그러나 느껴지는 그 마음, 그것을 많이 느끼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증거가 없을 때 조차도 자신을 향한 그 성품 때문에 그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 그분들이 살아계신 것에 감격하는 그마음이 참 효도하는 마음이라 이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똑같은 거에요.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모든 근본은 하나님 한분으로 모두 수렴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리가 모두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가장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이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집약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으로 집약이 되는 거에요. 다다음주에 제가 영국 갔다와서 삼위일체를 배워야죠. 그죠! 오늘 성경에 보며는 이렇게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어다. 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을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거죠. 이 시편 기자에게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에요. 세가지 정도로 이야기하는데, 넓게보면 두가지지만, 좋게 보면 세가지인데, 첫째는 뭐냐하면, 육체의 죽음이에요. 육체가 죽는 것이 사망이죠. 그다음에는 영혼의 죽음이에요. 신약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한 영혼에 대한 멸망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마는 소히 스올이라고 하는말 로 영혼의 죽음을 표현해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은 후에 들어간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이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생명의 박탈이나, 멸절이라기 보다는 살았을 때에 생생한 활기를 잃어버린 아주 희미해지고 침체에 빠진 그 죽음과 방불한 그런 상태거든요, 음습하고, 세 번째 죽음의 개념이 뭐냐하면 그런 것이 지금 육체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 투영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야곱 같은 사람이 소히 이야기하는 요셉스토리에 나오는 거죠. 이제 아들을 잃어 버리면 음부로 내려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고 노래하죠 자식들도 그러고요. 그런 것들은 뭘 보여주느냐면, 이렇게 살아 있지만 그러나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위로와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서 죽은자와 방불한 삶을 살게되는 것이 죽음이에요.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는 분이시죠. 전쟁이 일어나서 육체가 육을 수 밖에 없는 때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시고 그리고 생명의 모든 기운을 잃어버린 그런 때에도 시편 73편 같은데서 나오는 시인의 믿음은 거기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죠. 또 욥기에 나오는 그 증언을 보더라도 이런 신앙이 있었던거죠. 내가 육체 밖같에서 나의 중보자를 뵈오리라. 고 하는 고백 말이죠. 그런가 하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이 삶속에서 만나는 끊임없는 생기 없음과 좌절속에서 새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시인이 그렇게 노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언약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악을 행하기를 끊임없이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정수리를 깨쳐서 담대한 선언으로 이 시의 구절들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백성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평생 우리의 즐거움이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시련을 당할때든, 고난을 당할 때든, 심지어 우리들이 악에 빠져 미끄러졌을 때 조차도 우리와 맺은 관계 속에서 나타 내 보여주시는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의 빛깔들을 우리들이 보면서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감사하고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시행되는 방식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더 알아가는 거에요. 거기에 우리의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 지식에서 생겨나는 것이죠.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남은 시간도 저희와 함께 해 주셔서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이길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