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자의 어리석은 후회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73:15)
녹취자: 장현수
이 시인이 바로 앞 절에서 악인이 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깊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과 비교를 한 것입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하는데 자신은 매일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형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혼란을 느끼면서 오늘 고백을 토한 것입니다. 만약에 시인 자신이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책망을 받고 이러면서 살던 그때에 언젠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될 것이라면 그러면 차라리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그럴걸 그랬다 하고 후회를 하였던 것이에요.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시인이 생각할 때 이거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었어요.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강하고,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고,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 한 이 형통한 삶을 보면서 시인은 불공평하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자기는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매일 하나님께 질책을 받았다 그러는데 어떻게 질책을 받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데 그 말씀이 자기를 아주 심하게 책망을 하는 거요. 그러면 용서를 빌고 그 다음에 다시 손을 씻었다고 하는데 자신의 행동을 주의 하고 이런 삶을 계속 살아온 거요. 자기 혼자 살아왔을 때에는 비교 의식이 없었는데 악인들의 형통한 삶을 보면서 비교 의식이 생기자 자신이 후회하고 있는 거죠. 어떻게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차라리 악인이 이렇게 형통하는 줄 알았더라면 굳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께 책망을 받고 그러고 살 필요가 없이 그냥 악인에게 악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여기선 괴휼이리 그랬는데 하나의 잘못 된 방법이죠. 잘못된 방법을 행하면서 그러면서 나 편하면서 살 걸 왜 그랬을까 그러고 깊은 회의에 잠기게 되는 거죠. 시험이 우리를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우리의 팔 다리나 가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우리의 정신을 공격 합니다 지성을 공격하는 거죠. 그래서 이치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비록 많은 지식 없어도 성경의 진리를 꽉 붙들고 불타는 마음으로 믿으며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괜찮아요. 그러니까 자신이 알지 못하지만은 그 성경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해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면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유혹을 하거나 혹은 도전해도 회의에 빠지거나 그러지 않아요. 왜냐하면 가슴에 생생하게 신앙이 실제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런 거를 방어할 능력이 없어도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항상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런 때도 있고 좀 덜 그런 때도 있고 더 그런 때고 있고 계속 변하는 거죠. 그런데 지식이 없이 그것만 있으면 바람이 훅 불 때에 확 날아갑니다. 바람이 아무 때나 부는 게 아니라 신앙이 떨어지고 성령의 은혜가 식었을 때 훅 하고 붑니다. 그런 거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지식이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견고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경건하게는 살려고는 애를 썼지만 이 신앙의 중요한 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악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의 저자가 아니라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고 하는 신정론에 대한 정리된 생각이 없었죠. 그러니까 한번에 훅 하고 바람이 부는 거죠. 비로 그것이에요. 만약에 이 시인이 하나님 사랑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더라면 시험에 들었을 리가 없죠. 그때도 아마 대답할 수가 없었을 거에요. 왜 하나님을 믿고 말씀 안에서 살려는 나는 하나님이 매일 야단을 치시고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형통하고 변영하고 심지어 죽는 때에도 고통 없이 죽는 그런 놀라운 그 평안이 있는가 하는 것을 궁금하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나만 혼내시는 구나 그러진 않았을 거라는 거죠 언제 신앙이 뜨겁게 살아있으면 몰라도 모르는 건 그대로 내버려두고 지금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날 사람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기쁘다 그 마음만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나 신앙이 식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악인의 형통함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매일 꾸지람을 듣는 것 이 두 가지가 딱 대비되어 다가왔어요. 이것이 이 시인의 말하자면은 고민이었던 거죠.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회의이에요 회의 불신앙은 지성과 의지가 하나 되어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고 믿어야 할 증거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며 안 믿겠다고 거주하는 의지에요 의지 그래서 이 불신앙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죄에요 그러나 회의는 달라요 회의는 지성이 무엇인가 확실하게 정리를 못했기 때문에 의지가 이럴까 저럴까 하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가 회의에요. 지금 이 사람은 안 믿겠다고 고집을 하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 믿어 왔는데 지성이 정리가 안 됐기 때문에 의지가 한 곳으로 향하여 가던 그 힘을 어느 순간 잃어 버린 거에요. 그리고 의지가 불러 일으켜지지가 않는 거예요. 이 상태가 회의에요 회의는 불신앙과 같은 적극적인 죄는 아니지만 소극적인 의미에서 이 회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죄에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냐? 회의가 들어오는데 어떻게 하냐? 내가 안 믿겠다고 그런 게 아니라 이러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내 마음에 회의가 생기는데 어떻게 하냐 이거는 두 가지 점에서 잘못하고 있는 거죠.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비록 지식이 충분하지 않아도 열렬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그 의지의 작용 안에서는 이런 회의가 들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신앙의 활기를 유지하지 않은 것이에요. 존 오웬 목사님은 시험에 대해서 정의 하기를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이 시험이라고 정의를 내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뭐라고 증거하죠? 하나님은 존재 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 세상에 어떤 인간과 피조물도 단연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 날 수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뜨겁게 받아들이고 믿는 곳에서는 회의가 침투할 수 없는 거죠. 이미 벌써 마음에 믿음의 끈이 상당히 느슨해 졌을 때 그런 회의가 스며 들어오는 거죠. 이런 점에서 이제 소극적인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거구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녀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말 할 필요 없이 모두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의무는 믿었으면 자기가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를 부지런히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그래서 안셀무스라는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믿고 난 후에는 우리는 더 이상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고도 왜 그것이 진리 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 내용의 확실함을 인식하고 우리가 믿는바 내용을 친숙하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믿었어도 우리가 왜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를 신앙의 입장에서 잘 이해 할 수 있게 될 때, 그때에 물론 그때 우리가 믿는 그 내용은 아무리 이해 할려고 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이죠. 그러니까 믿었다고 하더라도 믿은 내용이 왜 진린지를 잘 알려고 할 때 그때에 거기서 알려고 할 때 바로 거기에서 우리에게 지적인 친밀성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믿음이 우리가 그 믿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고 감동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아주 중요한 의무인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그런 의무를 게을리 한 거죠.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 붙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잘 훈련된 지성으로 하나님께 붙어있는 믿음이 아니었기에 어느 한 순간에 신앙이 식을 때 훅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리는 그런 회의주의자가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우늘 이시인의 방황을 보면서 우리가 확고히 해야 할 바는 아주 분명한 것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고민 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을 마음을 다해서 숙고하고 우리가 왜 그것을 믿을 수 있는지를 받아들이는 그 지식 안에서 충만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많은 지식이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기본적인 내용들을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은혜라면 내가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를 깊이 숙고하며 신앙의 지적인 친밀성을 더하는 작업은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영적 성장을 이야기 할 때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갈 지어다. 이 은혜가 먼저 나오는 거예요.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과학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는 때에는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터득하지 않고는 우리가 옳 곧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수 없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죠. 밀려오는 이 세상의 사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괴로워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온전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되요. 그때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요즘에 생각해낸 말인데 산 같은 지식 물 같은 마음이면 참 좋겠어요. 지식은 산 같이 탄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하나님 앞에 물 같아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호소하고 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에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생활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가 한번 믿어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