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6-17)
녹취자: 박지성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경견하게 살기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는데 계속 말씀의 책망만 받고 이 세상 사람들의 번영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번영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에는 그 죄 값을 모두 받고 비참하게 죽을 줄 알았는데 죽을 때에도 고난이 없고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이런 모순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은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럴 바에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냥 내 방법대로 살아 볼걸….’하고 후회했지만 이 고백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 사람의 믿음조차 완전히 끊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확실한 것은 그렇다고 해답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의 증거 사이에서 그는 무엇엔가 억눌려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이런 고뇌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소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넓은 의미로 사용이 되면 당시에 있던 성막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이 되면 성막 가운데 있는 가장 중요한 시설인 텐트, 천막이 있고 거기에 약 18평 크기의 방이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2평의 큰 방을 지나면 6평의 작은 방이 있는데 그 12평짜리 방을 성소, 6평짜리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소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막 전체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지성소 앞에 있는 성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삽의 시라고 했는데, 아삽이 지은 것인지 혹은 아삽이 누군가 지은 시를 맡아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즈 모를 레 아삽”이라고 했는데 “레”라는 말이 누구에게 속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지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면 그 성소는 좁은 의미의 성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소에는 제사장만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제사장이 아닐 경우에는 결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넒은 의미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 문제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해석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했는데 누가 설득하는 사람도 없이 성소에 들어갈 때 어떻게 단박에 ‘아!’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이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도 번영을 하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도 잘 먹고 잘 삽니다. 죽을 때나 비참하게 죽을까 했더니 죽을 때도 평안하게 죽습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전부 시간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그때에는 누구를 생각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시간 안에만 계셔서 죽거나 소멸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아!’ 하고 깨닫고 불신앙이 주저앉는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 그렇구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 세상에 살다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나는 그 모든 인간의 과정 중에서 현실만, 그것도 짧은 한 순간만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없다며 괴로워했구나! 아!’ 하고 깨달으며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자기도 다 아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생겨난 경우에는 의식 속에서 살아있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해결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무지의 어두움을 비추는 진리의 깨달음이 없으면 영혼의 침체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성소에 들어설 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정말 생생한 신앙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무엇인가 자꾸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이고 우리의 육신은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결별한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는 썩지 않는 보다 완전한 몸을 입어 영원을 잇대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들어서는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이 제대로 된다면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관계를 맺고 죽은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구나.’라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경험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항상 당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십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을 씁니다. 라틴어로 “꼬람데오”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등을 돌린다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감출 수 있는 무엇이 있겠으며 기둥 뒤에 숨는다고 하나님이 인식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당신을 숨기실 수야 있겠지만 제가 하나님께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꼬람데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만물과 사람이 하나님께 노출되어 있고 의식하든 못하든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만물이 다 주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꼬람데오”는 인식론적인 축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모두 아실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이 내 앞에 서 계신 증거가 믿음 안에서 워낙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다는 증거를 찾기 힘든 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꼬람데오”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결국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이 무엇입니까? 종말이라고 바꿔도 됩니다. “저희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아! 그렇구나. 저렇게 하나님 없이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 사람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라는 회의, 혹은 정말 하나님이 올바르신 하나님이신가, 이 세상을 정말 당신의 의로 통치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서 고민을 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죽는 그 사람들의 죽음으로 그들의 인생이 끝난다고 볼 때 다가온 고민이었구나.’라는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아! 그렇구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그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는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에 잇대어 인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은 심각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허물어 버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옥은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게 진짜 있다고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직접적으로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사람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후의 심판이 없으면 불합리하고 도덕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속에 남아있는 영원에 대한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됩니다.
최근에 알랭 드 보통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요지가 무엇이냐면 “신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증명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신이 있다고 치고 살자. 그게 참 좋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견해입니다. 왜? 인간의 가치의 기준이나 모든 것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도움 없이 도덕이 올바르게 교육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가 무섭게 망가져가니까 그것을 종교의 힘으로 세우려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니 싫고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미 앞선 철학자들이 다 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모순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아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훌륭한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이 유한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영원에 이르는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면 악인의 형통함과 악인의 평안한 죽음이, 악인의 그 모든 일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가 그를 알 때든지 모를 때든지 언제나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우리의 마음에 항상 있으나 성소에 들어갈 때 영원을 느꼈던 것처럼 교회에 올 때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가르쳐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아, 그렇구나!’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이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깨달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