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은 것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시 73 : 17 - 18)
녹취자 : 이시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악인이 형통한지 그리고 자신은 그래도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왜 아침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야단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무엇인가 섬광처럼 한줄기 빛이 시인의 마음을 지나가며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결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종말이 있다는 것 그것이 깨달아지면서 그러면서 종말 이후에까지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관심은 우리의 이생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태어나기 이전에는 우리의 기억이 없고 그 시간과 공간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하고 죽음이후에는 우리들이 아직 도달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심사와 대부분의 마음은 오직 이 현세에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기 전에도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에 대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올 때까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그럴 것이고 죽음이후에는 비록 우리가 잠시 육신을 벗고 영혼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에도 주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고 부활이후에는 온전히 몸을 입은 상태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이 모든 인간의 죽음이 막고 있는 휘장을 걷어내고 죽음너머에 있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통해 아직 죽음에 도달하지 않은 우리 인생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의 인생은 죽음의 빛으로 비추어보기 전에는 우리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제가 늘 그렇게 말합니다. 삶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는 것으로서는 우리의 삶을 판단하기에 충분치 않고 오히려 죽음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볼 때에 우리의 삶을 훨씬 정확하게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법입니다. 이 시인이 경건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의지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렇게 죽음너머에 있는 빛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 세상에 있는 악인들의 인생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지식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미끄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 갔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였으니까 성소에 가는 것도 예전처럼 행복하고 감격적이고 두려움과 기쁨이 섞인 그런 독특한 종교적인 감정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에 나오는 이 경건한 시인을 거기에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그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없었던 것을 하나님이 새로 보여주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함으로서 이미 있었으나 그가 미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의 빛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 세상의 인간의 인생을 비춰보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참으로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 것은 악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경건한 시인이 실족해야 했던 형통하는 악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미끄러운 곳에 두셨습니다. 언제입니까 죽음과 함께입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 문제없고 너무 형통해서 그래서 이 시인의 마음에 큰 걸림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성소에 들어설 때에 우리인생은 지금 시간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인생의 종말이 있다는 것이 섬광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죽음과 함께 그 인간을 이제까지 평탄하게 걸어오던 풀밭과 같은 그 길에서 죽음에 문에 들어서자 그는 확 미끄러지면서 파멸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미끄러져서 파멸에 확 던져지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악인이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게 그렇게 늘 생각하기 어려운 것인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구약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들이 아주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이후에 대한 생각들이 사람들이 죽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음이후에는 스올이라고 하는 음습하고 아주 기분 나쁘고 생명의 기운이 거의 박탈당한 그런 곳으로 인간이 간다는 것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개념들이 아주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깨닫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말을 인식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항상 현재의 일에 몰두하고 현재의 일에 마음을 쏟느라고 우리의 인생을 죽음너머에 있는 빛으로 영원한 빛으로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역시 이렇게 죽음이후에 있는 명백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아주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악인과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책 한권이 나왔는데 록베얼이라는 목사가 책을 썼습니다. 책의 이름은 러브윈즈라는 책입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이긴다 그런 뜻인데 그게 무슨 내용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당신을 안 믿었다는 이유로 교회 안다녔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고 지옥에 던져서 영원한 불길에 타오르게 만드신다는데 과연 그 지긋지긋한 교리가 사실이겠는가 그러면서 이제 논변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분은 제가 보기에는 아주 수재입니다. 신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 양자역학 디자인 역사부터 시작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지옥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오늘날의 대세입니다. 물론 지옥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이론과 희망사항으로 잠재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교리가 성경에서 너무 분명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영원히 심판하실 수 있느냐 합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증거는 너무 분명하고 우렁찹니다.
오늘 시인이 바로 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교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불균등과 불평등 그리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지겨운 현실 속에서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각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 같은 것이 미끄러지다가 미끄럼이 끝나고 나면 확 던져져서 파멸에 던져지게 되는데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놀라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던져져 버린 것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은 제 마음속에는 하나의 그림이 생겨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빚습니다. 그러다가 찌그러지든지 원하는 모양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제 망가진 진흙을 넣는 그곳에다가 던져 넣습니다. 연못같이 생긴 그런데에다가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게 물하고 이런 것들이 섞여있는 속으로 던져집니다. 그럼 나중에 그것을 다 밟아서 그것을 다시 재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미 초벌구이를 했는데 그게 만약에 원하는 모습으로 안 나왔다 그런 경우에는 휙 던져버리면 그릇자체가 깨져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박살이 납니다. 그것은 재사용도 안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악인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모든 것이 번영할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신만 미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버려 두어서 마지막에 커다란 파멸에 이르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애정을 가지고 잘못했을 때 꾸짖고 깨닫게 함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그것이 그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생자에게는 징계가 없나니 하나님은 자기의 친아들을 징계하시느니라 징계가 당시에는 슬퍼보이나 연단을 한 후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존오웬목사님은 자기의 책속에서 징계를 받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다음에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죄를 용서 받는다 은혜를 충만히 공급 받는다 뭐 등등의 것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징계를 받는다 하나님께 혼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커다란 말하자면 특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조금도 우리들이 시기하거나 질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의 기업의 위대함과 풍성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찌르시고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징계를 받게 하시는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제일 무서운 심판입니다. 내버려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특성인 무모함과 맹렬함과 광기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저버리고 끊임없는 타락과 방종에 자기 자신을 내어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에 찔림을 받고 그 말씀에 아파하고 하나님이 종종 섭리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려는 어떤 일을 안되게 하셔서 우리의 몸에 회초리를 대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깝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심에게 있어서 악인은 우리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많이 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꼭 커다란 징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영혼이 메마르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마음에 들리지 않고 곤고해서 기도하러 나와도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고 하는 이러한 아주 곤고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은혜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신자에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그 댓가로 내가 손에 넣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의 소극적인 징계의 한 국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경건의 의무를 게을리 하거나 혹은 죄를 지어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오히려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돌아갈 때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은 형통할 때에 우리에게 더 많은 물질을 더 많은 번영을 더 많은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은혜에 미끄러진 자가 되었을 때 혹은 죄짓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을 때 그때에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이 마침내 우리에게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감격적인 사랑을 깨달은 거기에는 많은 물질이나 번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이 죄인을 용납하시고 그리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신앙으로 살게 하였던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의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하늘위에서 우리자신의 인생을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순간에 살고 있으나 영원을 잇대어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 세상을 살면서 역경도 만나고 순경도 만나고 즐거울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 우리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설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꼭 붙들고 내 인생을 향한 나의 판단보다는 그분의 판단이 훨씬 탁월하고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러면서 그분의 손을 의지하며 걷는 것이 지금은 쓰라리고 이해가 안 되는 길이고 항의하고 싶은 길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분의 지혜로 이끄는 그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 손을 붙들어 이끄시지만 주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계셔서 나와 함께 인생의 골목을 지나고 벌판을 지나고 혹은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은 하늘높이 계서서 나도 그 옆에 있어서 내 인생을 마치 남의 인생인 것처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조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와 함께 웃고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고 우리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이시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우리의 눈높이가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던 이 눈높이에서 들어서 온 땅에 가득하고 어떤 인간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은 그때에 사실은 온 땅과 만물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대한 임재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벌레만도 못하고 티끌만도 못하고 가을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만도 못한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관계를 맺으시고 그리고 나를 시간에서 영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깊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의 인생에 이 짧은 날이 형통한 어두움보다는 시련이 있는 찬란한 진리의 빛 안에서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성소에 들어설 그때에 이런 지혜의 섬광을 받으며 이 진리의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깨닫지 말고 항상 이 빛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