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편 28절)
73편 시편의 마지막 결론이죠. 여기 하나님께 가까이함 이라고 하는 이것이 히브리어에는 하나님의 나아옴입니다. 이게 의미상으로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건지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건지 명확하지는 않아요.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에서 28절 시작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가까이함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까운 상태에요. 거기에 강조점이 있는거에요. 이 시인이 이 모든 회의에 과정,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방황의 과정을 통해서 마지막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하나님과 가까운 상태에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죠.
앞에서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걸려 넘어지고 방황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악인의 번영을 보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시련과 고난도 보았습니다. 둘을 대조했습니다. 악인은 죄를 짓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형통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징책을 보았습니다. 이 둘을 대조해 보십시오. 악인은 마지막에 죽을 때에는 아주 비참하게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한 정당한 응보를 받고 죽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 죽을 때도 평안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막 살아버릴걸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게 된 것이죠. 이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점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기준점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과 형통함 그리고 인간의 모든 복된 누림 이러한 것들이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행복의 기준을 놓고 보니깐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의로우심이 설명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에 깊이 깨달았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악인을 형통하게 하고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하고 고통을 주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준점에서 놓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징책을 당하였습니다. 달리 해석하면 하나님이 매일 아침마다 그를 꾸짖으시므로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셨습니다. 종일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셔서 정결한 자로 만드시고, 혹은 이 세상에 잘못된 질서 속에서 당하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재앙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징책과 재앙 그리고 의롭게 살면서도 당하는 모든 괴로움은 거꾸로 보면 하나님이 당신자 신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고 당신자신과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해서 수단으로써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당신 자신께 이 시인을 가까이 있게 하고 더 온전한 사람이 되며 더 신실한 사람이 되어 당신과 함께 동행하고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버려졌습니다. 그는 형통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에도 평안했지만, 죽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다윗과 같은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었습니다만은 거긴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형통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와 가까이 하시는 증거요. 악인에게는 형통한 그 자체가 하나님이 그를 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실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살게끔 내버려 두심으로서 그들을 온갖 악에 빠지도록 허락을 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저희 불의를 향하여 하늘로 쫒아 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깨달은 또 하나의 성경적인 관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옮기는 것이에요. 만약이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한 것이죠.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께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나에게 복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당연이 이 복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라 성도들만 누릴 수 있는 복이죠.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세상과 있는 사람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행복과 불행의 기준점이 달라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이에요. 그러면서 이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입니다. 나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가장 복되신 분이고 하나님 자신이 가장 복된 상태이고 이후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행복의 원천이 삼위하나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가므로 누리는 그 행복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고, 그분을 멀리 떠나서 누리는 복이야 말로 우리를 파괴하고 파멸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어 놓은 불행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의 원천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 보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만약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 지기를 누구든지 원한다면, 행복의 원인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성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복에 대한 관점을 성도의 행복에 대한 관점으로까지 바꾸지 않아요. 그래서 여전히 자기를 중심에 두고 예전에는 내 힘으로 행복해 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그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그 행복 그 은혜 그 복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이 복되다고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시인이 두가지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단이기도 한 것 입니다. 그 첫째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는 주여호와 안에 나의 피난처를 둘것입니다. 훨씬 더 감동적이죠. 성질을 요양해보면, 유난히 이러한 피난처들로 삼을 만한 곳이 많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위틈이에요. 그러니깐, 시내산 같은 것을 보면 그 큰 산이 전체가 바위 덩어리 이거든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바위들이 이렇게 깍이고 이렇게 다듬어 지고 하면서 몸을 숨기면 머리위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자기 자신을 보호 할 수 있을 것 같은 은신처들이 많아요. 그런 피난처를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내가 주 여호와 안에 나의 피난처를 둘것입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일 까요? 이전에는 자신의 피난처를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그 피난처를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에요. 왜? 하나님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나니깐,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었어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안에 안식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니깐, 오늘날 회의와 오늘날 낙심과 하나님께 대한 의심, 이 모든 것들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격받았습니다. 결국은 있던 신앙도 모두 잃어버리고 그리고 차라리 주의 아들의 시절을 향하여 나도 계율을 행하였으리이다. 이렇게 방황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피난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 하나님을 믿으면 신실한 신앙을 가지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고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실현을 당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이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져도 물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지금은 내가 실현과 고난을 당하고 재앙을 당하는 것 같아도, 원수들이 나를 비웃어도 언젠가는 이 큰 고통과 괴로움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나를 복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죠. 그러나 어떻해? 어떻게? 그것같이 이해 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어떻게를 이해 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없죠. 그냥 그 사실을 알면 되는거죠. 모릅니다. 오늘 내가 믿음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데 당하는 고난, 상대적인, 혹은 절대적인 십자가를 지고 괴로움을 당하는 나의 이 끝이 어떻게 결론 내어질지 모릅니다. 그때에 수많은 의심의 화살들이 날아오고 그리고 회의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들이 고개를 들고 대적처럼 엄습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피난처였습니다.
매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
그래서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겠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였을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 그것이 분이 나도록 시기하게 만들고 이렇게 살아가는 자신이 고난을 당할 때에 견딜 수 없는 의심이 밀려올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시편 31편 저자에 의하면,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해둔 그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께서 은밀한 곳 장막에 저를 감추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경건하게 살아라가는 자신의 억울함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면, 맛볼 수 없었을 하나님과의 미로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 시인이 뼈저리게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피할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피난처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은 도망칠 때에는 죽을 것 같아서 주님께 도망치지만, 도망친 후에는 그 곳에서 시련이 아니였다면 누릴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기 때문이죠.
마지막, 두 번째는 주의 행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 전파한다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헤하리다. 혹은 기록하다 혹은 말하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싸파라” 라는 단어인데, 수를 헤아리는데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주의 모든 행하신 일들 복수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을 내가 하나씩 하나씩 헤아릴 것입니다. 혹은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뜻입니다. 왜?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자기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들고 의지하지 못하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보고 많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다 헤아리고, 헤아려 내가 알게 된 그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여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이외에 더 큰 복은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겠다 라는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행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만날때에 그분께 피하고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헤아리면서 그분의 성품을 배우고 배운바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님의 의뢰할 만한 분으로 여기며 그분을 가까이 하며 살게v하는 것 이것이 성도의 본분이고 어떻게 보면 성도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서 깊은 73편 시편을 끝내면서 우리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어떠한 행복을 구하지 않기를 우리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든지 우리는 그것을 그것 자체에 탐닉하지 않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더듬어 올라가 모든 하나님의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도록 그분께 더 가까이 가게 되도록 우리는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와 시련이 겹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행복을 맛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것은 이세상이 결코 약탈 할 수 없는 행복이니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들에 의존한 행복이 어찌 진정한 행복이겠습니까? 잃어 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행복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