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진노하실 때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시 74:1)
녹취자: 박세원
이 74편은 탄원 시로 분류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간절한 탄원을 드리는 기도의 시입니다. 아삽의 마스길이라고 했는데 아삽이라는 사람이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추측하는 학자도 있고 아삽에 의해서 보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혹은 어떤 학자들은 시편42편 같은 것은 다윗이 썼는데 아마 고라의 자손이 보관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논리에 의해서 이것도 아삽이 썼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경건한 그 이전의 저자들이 기록을 한 것을 아삽의 집안에서 보존해 온 것이기 때문에 관례상 아삽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을 수 도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단언 할 수 는 없을 것 입니다.
마스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샤칼 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오는 사역형 분사입니다. 그래서 샤칼 이라는 것은 지혜롭다. 히스 킬은 그러면 지혜롭게 하다. 마스길 그럼 지혜롭게 하는 것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스길 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시를 많이 읽으면 지혜를 얻게 된다. 지혜롭게 하는 시다. 그런 의미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이 74편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곤구한 형편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엇인가 이민족의 침략을 당해서 성소가 부서지고 파괴되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아주 후기에 지어진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됐든, 이 시인은 이제 1절에서 아주 절망에 가득 찬 가운데 하나님 앞에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주의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바라 시 나이 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토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그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그 시기에 이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것은 마치 개인을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도록 하는 방법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개인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다양한 연단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하나의 몸으로써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타락하면 징계하시고, 징계하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다시 복을 주시는 이 네 가지의 사이클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 이어져 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은 그 모든 축복, 타락, 징계, 회개 다시 하나님의 축복 이것들을 기계적으로 반복 하시 는 것 같지만 그렇게 베푸시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아주 커다란 유익을 주시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 주시고 구속의 위대한 계시를 점진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역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보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죄를 짓고 타락 하는 것도 유익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세교 꺼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우리가 죄 가운에 거하겠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신앙생활 잘하면서 매일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미끄러지고 넘어졌는데도 후에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깊이 깨닫고 나면 그렇게 실패하고 미끄러지고 넘어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원의 곤고함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의 고귀함과 가치를 뼈 속 깊이 깨달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빛이 얼마나 좋은 것 인지를 깨닫게 되고 목마름을 통해서 물의 고마움을, 굶주림을 통해서 양식의 축복을 깨닫게 되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면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과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격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지들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징계하고 책망하실 때에는 경건한 사람들조차 낙심이 될 정도로 정말 이제 시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이제 하나님의 은총이 다 하였는가 이제 그 의 자비는 그쳤는가 하고 탄식할 정도로 하나님이 엄중하게 그들을 징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두 가지 국면이 함께 교차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런 징계를 통한 하나님의 격륜 과 그 격륜 에 대한 징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해입니다.
우선 첫 번째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격륜 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뒤로 물러가고 언약백성으로써의 독특성 을 상실하고 살아가는데도 계속 번영하고, 그리고 행복하다면 그러면 결국은 그들은 맛 잃은 소금, 빛 잃은 등불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 세우신 의도와 상반된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을 섬기시기 위해서 뽑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 서 뽑아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우선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 세우신 것은 저 멀리 앞으로 보면 저 멀리 뒤로 보면 아브라함을 뽑아 세우신 이유와 같고, 저 앞으로 멀리 보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뽑아 세우시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이스라엘을 뽑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왜 죄와 그리고 불신앙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외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로 물러가고 불순종 하여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주시고 크게 번영하게 하심으로써도 당신에 관한 이 지식을 이 세계에 전달하게 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로 물러가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에는 그들을 징계하심으로써도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계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징계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무엇을 행하든지 그들을 판단하시는 어미로 우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경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국면은 하나님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태도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 시를 쓴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임은 틀림없지만 완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완벽한 신앙을 가진 인간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시속에서 탁월한 신앙도 보이지만 73편에서 본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좌절하고 낙심하는 연약한 믿음도 보입니다. 오늘도 이 시인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영히 버리시나이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때리시고 때로는 치시지만 결국은 싸 메시고 고치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당할 때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볕 같이 일정하니 우리가 그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께 정당하게 징계를 받으면서 그 진노를 너무나 크게 읽은 나머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영원하고 신실한 연약 관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탄식들이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과 탁월하게 경건한 시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바다위에 떠있는 배처럼 요동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바다에 나가보면 배가 한 두 어 사람 밖에 못 들어 갈 다라위보다 좀 큰 쪽배부터 시작해서 수천 톤, 수 십 만 톤 의 배가 서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바다에 나가서 바다가 파도가 없이 잔잔할 때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때에는 작은 배는 물결에 흔들려도 큰 배는 조용히 항해 합니다. 그러나 일단 파도가 세차게 치면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 선장이었는데 항해를 하면서 17미터 파도까지 만나봤다고 합니다. 그 정도 파도를 만나면 요즘은 기상학이나 예보 학 이 아주 발달해서 그래서 인공위성이나 탐지를 해서 태풍이 지나가며는 언제 일어나서 어느 경로로 간다고 생각을 하고 다 비켜 가기 때문에 요즘들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파도를 만나면 30만 톤 자리를 몰았다고 했던 가?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모두 가랑잎처럼 출렁거립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보기에는 경건해 보이고 온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정말 커다란 시련과 국가적인 징계에 직면하게 될 때 시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요동쳤는가 하는 것 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중에는 위대 한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가랑잎처럼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도 3시 52분에 잠을 깼습니다. 너무 몸이 피곤해서 더 자야 되겠는데 도저히 잠이 안 옵니다. 조용히 누워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우주 속에서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 한 점밖에 없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없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태어나 없는 것처럼 어느 한순가에 사라져 가는데 그게 그 무한한 우주에서 한 공간에서 인간이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우주에 무슨 영향을 끼칠까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과 박테리아 한 마리가 몇 초 동안에 생존하다가 몇 초 만에 입에서 가글을 하고 가셔 내질 때에 죽고 사라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허무감을 느끼는 그 자체는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허무와 연약함의 끝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게 할 수 있는 그런 지성과 믿음을 주시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크신 섬리이고,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정말 그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들의 경건하고 탁월한 영적인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이렇게 거의 절망하는 수준의 탄식을 토해놓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시인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던 그 장구한 날들의 대한 기억은 잃어버리고 국가적인 재난과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자신들이 기각되었다. 내 팽 게 졌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식을 갖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하나님 앞에 버려짐 받은 것 같은 날, 가장 하나님 앞에 모든 은혜에서 끊어진 것처럼 징계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동안에 우리를 돌보고 이끄셨던 하나님의 그 큰사랑 오히려 징계하고 분노하신 순간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신 것을 기억하며 고난의 때를 이길 수 있는 신앙을 복 돋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 합니다.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바라 시 나이 까 여기 연기라고 하는 것은 콧김으로도 번역을 될 수도 있는데 사람이 화가 나면 씩씩 거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이렇게 그 격한 감정이 나오게 됩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식 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좀 뭐라고 그럴까 좀 저속한 표현 아닙니까?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학의 한 표현 방식 이었습니다. 근데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바라 시 나이 까 전쟁이 일어나고 아군들이 수없이 죽어 갈 때에 그때에 병사들은 이 혹은 병사들이나 장수들은 콧김을 뿜으면서 자기의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그림으로 묘사를 하는 것을 보니까 한편으로 이시인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한편으로 이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얼마나 엄중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이 치시는 양들이 아닙니까? 그나마 이 시인의 믿음을 읽을 수 있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하나님이 큰 진노를 바라실지라도 이 시인에게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커다란 목양하시는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치시는 양들인데 어찌하여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양떼들을 습격한 맹수를 다루시는 것처럼 그렇게 진노 하시나이까?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든지 항상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혹시 우리의 생명을 취하신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폐기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양들이라고 부르셨고 우리는 주의 손에 길러지는 양떼들이라고 묘사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로써 자기의 양떼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깊은 사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언 약적 사랑에 기초하여 이 시인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떼를 향한 하나님의 언 약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