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7)
자주 나오는 표현이죠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대면하실 때에는 진노와 심판을 위해서 대면하시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복주시기 위해서 대면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며는 전쟁에 나갈 때에 제사장의 축도가 주는 그 얼굴 빛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며, 비추시며 그랬어요. 그건 최고의 축복이죠. 이런 사상은 예수님에게서도 계속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라고 할 때, 주어가 하나님을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고 되어 있지마는 그러나 역시 그것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그 팔복 중에서 아주 정수에 해당하는 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서야 그 나라도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고, 하나님이 계셔야지만, 애통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 하나님이 이유가 되어야지만, 온유한 것도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계셔야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도 의미가 있는 거지.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결국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그 복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보는 거죠. 복과 관련지어서 우리들이 설명을 해도 사실 많은 이야기 들이 나옵니다. 뭐냐 하며는 원래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원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피조물들에게나 해당되는 거거든요. 이유가 뭐냐하며는 우리들이 짐승도 자기자신이 만족스러워 하는 때가 있잖아요. 개도 좋으면, 꼬리를 치고 고양이도 꼬리를 올리잖아요. 기분이 좋으면, 그런 것들을 우리가 행복이라고 이야기를 안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이유가 뭐냐하며는 원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들이 누리는 이 모든 행복과 만족의 원천이 완전한 행복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행복은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강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에게 해당되는 것이 바로 행복이에요. 그러며는 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며는 완전한 복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만족,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 이것이 원래의 참다운 행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당신 자신의 완전하심 때문에 행복하신데, 그 행복의 정체가 삼위의 교통이라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때에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행복을 인간에게 교통시키고 나누어 주시는 그 비결이 뭐냐하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거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특권이 있는 부르심 이라는 말이죠. 이러한 비밀들을 알았기 때문에 경견한 시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춰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에요. 특별이 오늘 시인은 당신의 얼굴 빛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이것은 무슨 기도와 똑같냐며는 태양을 보고 낮에 제발 그 빛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죠. 태양은 빛을 자기 스스로 가리우는 법은 없어요. 땅위에 눈이 펑펑 내려서 거의 해를 볼 수 없을 때에도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며는 구름 아래서 내리는 것이지,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언제나 비치고 있고 거기에는 눈이 와서 흐리거나 비가 와서 어둡거나 그런거 있을 수 없는 것이죠. 언재나 찬란하게 비치는 것이죠. 그 해에는 밤이나 낮의 개념도 없죠. 지구가 스스로 그 태양을 등지고 돌아서 앉으는 것이니깐, 밤이오는 것이지 밤이라는 개념도 없는 거에요. 언재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죠. 하나님이 언재나 그러신 분이세요. 그래서 결국 역설적으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서 숨기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그것은 어떻게 보며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공평하고 완전하신 속성 때문에 하나님앞에 정죄를 당하거나 혹은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그러니깐, 자신을 위한 기도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주님의 종이다 이렇게 불러요 이것은 두가지 사실을 함유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보여 주고 또 하나는 이 사람과 하나님이 맺으신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에요. 삶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죠. 종의 특징은 자기 자신이 주장하는 목표나 꿈이나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것이 있으면 그는 자유인이에요. 종은 그런 거 없어요. 종은 일상에 아무 계획도 없어요. 주인이 부리고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또 어떤 계획을 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인을 섬기기 위한 대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획이에요. 그것이 종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깐,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종이라고 하는 계급이 존재를 안하잖아요. 사실상은 존재 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서, 사실상 존재하죠. 어떻게 보며는 더 야비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실재적으로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잘 모르죠. 그러나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명백하게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며는 그 종들에 대한 관습을 제도를 가지고 있고 그 종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에벳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들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닫는 단어였겠는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근데 이 단어를 이때가 10세기인데, 10세기 뿐만 아니라 저 위로 22세기 까지 올라가서 아브라함 시대때부터 시작해서 이 단어자체를 아주 놀랍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은 사실은 사도바울이 사도시대 때에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이 맨 처음 언약의 하나님을 만나는 그 아브라함 혹은 아브라함 이상을 올라가는 유구한 정통을 가지고 있는 거죠. 생각해 보십시오. 둘루스라고 하는 그리스 시대의 종들이 얼마나 비참했어요. 그것을 자기 인식을 시키는 거에요. 구약시대에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는 엄격하게 말하면, 신분상 계급으로의 종이 없었어요. 신분상 계급으로서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세습되야 되거든요. 근데 이스라엘게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노예제도를 주신 것이 아니에요. 안식녀이나 특별이 희년이며는 댓가 없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로마시대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에서 있었던 노예제도 같은 그런 방신의 제도가 아니였단 말이죠. 그래도 어쨌든 외국인으로서 전쟁에 졌을 때, 그렇게 해서 노예로 들어오기도 하고 가장 흔한 방법은 뭐냐하며는 소희 셀프셀링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빚에 파는 거에요. 로마에서도 그런 제도가 있는데, 도저히 자신의 지분을 감당하지 못하며는 자기 자신의 몸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그 빚을 청산하고 가족들이라도 살려두는 거죠. 그렇지 않으며는 다 노예가 될 수 있으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원해서 아에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구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그렇게 노예제도를 과격하고 그렇게 비인간 적으로 운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고, 사욕이 가득 차게 되며는 그러며는 이 노예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다른 나라처럼 똑같았어요. 다른 나라도 똑같이 타락한 인간이니깐, 로마 사람들이 글라디에이터 같은데 보며는 눈요기를 위해서 노예들을 풀어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칼싸움을 하는 그런 거 보잖아요. 그런식으로 운영을 했던 거죠. 근데 그렇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아주 극단적인 두 그림이 함께 들어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앞에서 자기 자신을 종이라고 정체성을 밝힌 이것은 먼저 그가 목표를 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하면, 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종이라는 개념이 단지 하나님앞에 죽도록 일하는 노예만을 의마하는 것은 아니였죠. 하나님이 너는 내 종이라 이렇게 불러 줬을 때에는 어둡고 칙칙한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모스서에서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나의 비밀 스러운 일을 나의 종 선지자에게 말하지 아니하고는 행하는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숨겨진 내밀한 계획을 털어놓으시고 미리 알려주시는 이것은 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고 애정의 표현이에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높은 사람이 밥 한그럭 휙 던져 주고 가는 것보다는 조용히 불러서 자기의 일을 의논하고 미래에 될일을 미리 알려주는 그것이 그렇잖아요. 정부에서도 대통령 의중에 있는 생각을 파악하는 순서가 애정의 순서란 말이에요. 당연하잖아요. 여기에서도 종이 그런 그림도 가지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나오는 종이라는 그림을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그렇게 보면 안되요. 그 상황에 따라서 하나두개의 그림들을 다양하게 가지고 그렇게 문학적인 서술을 해 나가는 거죠. 여기서는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의 일생의 목표는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라는 고백과 그래도 내가 환란을 당하고 있지마는 주님이 친근히 대해주신 사람입니다. 그 고백이 함께 이속에 묻어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앞에 간절히 호소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얼굴 빛을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은 환란속에 있으면서 정확한 핵심을 아주 분명하게 집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하며는 환란 속에서 있어도 이 사람의 관심사는 그 환란과 시련속에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 환란과 시련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교통하는 것 그러며는 자신이 신앙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라고 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보여 주시는 것이죠. 오늘 우리들도 똑같아요. 다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 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보면서 이 판도가 이렇게 이렇게 되며는 가장 좋을 거다 생각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답은 아니에요. 그래서 종종 우리가 간절히 원했는데도.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다르게 이루어 져서 그래서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고 기뻐하게 되는 그런 시간들도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이죠. 그다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환란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앞에서 보며는 시인이 깊은 고통속에서 시련을 당하고 원들에게 애워싸여 있습니다. 이것을 시인을 환란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환란 중에 있으니 속히 자신에게 응답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환란을 당한 사람에게 응답은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아직 모든 상황이 바뀌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주시겠다고 하는 분명한 응답이 있으면, 마음에 평강이 오고 그 말씀을 붙들고 약속삼아서 붙들고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시인이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시편 속에서 시인이 이런 기도를 합니다. 어느때 까지니이까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없으면, 그 인내가 정말 고통 스럽고 그리고 흔들리는 믿음을 막을 수 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표증을 구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응답해 주시면 자신이 이 환란과 시련을 견딜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믿음을 따라서 살면서 친밀한 주님을 힘입어 이기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