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 69:28-29)
녹취자 : 김미현
이 시인이 계속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그 탄원의 내용 중 두 가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납니다. 우선 첫째는, ‘저희들이 지은 죄가 있는데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죄악이라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주의 의’, 시편 31편 같은 경우 이 ‘주의 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마틴 루터가 복음적 의의 개념을 깨닫게 된 하나의 단추가 되었다고 역사적으로 보도가 되고 있는데 이제 여기에서 나오는 ‘주의 의’라고 하는 것을 물론 마틴 루터처럼 복음적 의를 가지고 들어와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계시사적으로 이 당시의 문맥에서 본다면 사실은 그것보다는 구약 자체 내에서 발전된 계시만큼만 이 ‘주의 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많은 것입니다. 마틴 루터 같은 경우 복음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이미 복음 시대에 살고 있고 그 복음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나 경험을 가지고 구약으로 들어갔으니까 구약이 그렇게 찬란하게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마틴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주의 의’의 개념을 복음에 기록된 것 같은 것을 이해하면서 사실은 ‘주의 의’라고 고백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사적으로 볼 때에 이 사람들이 ‘주의 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들이 후일에 발전이 되면서 그 복음적으로 의로 나타날 그런 것들은 충분히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시편만 놓고 보더라도 시인이 이것을 기록 했지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기록한 그 사람보다도 해석하는 오늘 우리가 그 사람의 글을 더 정확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를 많이 받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 전제 하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 23편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만 시인이 그 설교에서 우리가 했던 것 같은 깨달음을 다 가지고 그 시를 써내려갔을 것이라고는 우리들이 긍정할 수 있지만 긍정을 안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낫다. 이것이 이제 천국을 두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신약의 복음의 계시가 주어질 때에 그 축복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열심히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들을 헤아리며 살아갈 때에 어마어마한 복음과 진리의 빛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과 안사는 신자의 차이는 거의 짐승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거의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교육받지 않으면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어쨌든 ‘당신의 의에 들어오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을 루터가 해석했던 것처럼 복음적 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언약 백성들이 누리는 의의 혜택입니다. 그 의의 혜택들이 어떤 것이냐 하면 우선 하나님은 그 의의 기준이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었으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은 주의 의에 부합한 살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파생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안 지키며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올무처럼 주어지는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 100대 기도제목 내놓고 기도하는데 기도 안하려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담이겠지만 기도하려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냥 읽으면 기도가 되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도 다시 나누어지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가 넓은 의미의 율법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한다. 저런 것을 원한다. 이런 것을 원하지 않고 이런 것을 나는 싫어한다. 이런 의사표명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의 의’를 누리를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적인 의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전하게 율법을 지킴으로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사실은 그것은 구약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도 하나님 앞에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고 여러 곳에서 호소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입니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어쨌든 만족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받으심 직하게 만드는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아도 당신의 그 자비로운 성품으로 받아주시는 그야말로 외부로부터 덧입혀진 의인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여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 의라고 하는 것 ‘주의 의’를 누리며 산다고 하는 이것은 사실은 의가 발현이 되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고 하는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안 믿는 백성과 나라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죄악이 지나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 죄악을 보시면서 징벌하시고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그들도 하나님의 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혜택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오직 언약 백성들만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다윗이 이 69편을 써내려갈 때에 경험했던 수많은 악인들이 전부다 언약백성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 언약백성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냐 하면 결국은 다윗 같은 사람들도 보기에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결코 그 언약에 참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자면 거짓 신자들이 교회에 많이 있는 것처럼 언약 백성 속에도 결코 그 약속을 향유할 수 없는 그런 인종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 속에 들어있지만 그들의 정체는 하나님의 ‘주의 의’에 들어올 수 있는 백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제 참된 교회를 바라보는 그 시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렇게 교회에서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나눈다고 할 때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분리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교회의 사명은 밖으로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정체와 삶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끊임없이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한 분리주의라든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한 교회가 되도록 몸부림치는 그것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는 죄를 가지고 성화에 몸부림을 치는 것과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 속에 여전히 죄악된 요소가 있고 한데 그 때에 자기 의에 빠져서 자신은 건전한 사람이라고 계속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진실하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의에 찬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어느 청교도가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런 죄나 이런 것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이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해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확장을 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비회심자들 때문에 고뇌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급기야 교회는 야합을 하게 되고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무리들이 교회에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교회가 조직적으로 반항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그렇게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이제 교회가 외관적으로 아무리 커도 사실은 이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고민하면서 몸부림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몇 달째 삼위일체 책을 쓰느라고 어제도 밤 12시까지 쓰다가 갔습니다. 결국 오늘날에 그렇게 삼위일체를 안 믿으려고 하고 있는 교리들을 정통적으로 내려온 것들을 비틀어서 기형화 시키면서 전체적인 신학적인 구도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어디로 가느냐하면 신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신앙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한 채 신학을 하니까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신학 속에 밀어 집어 넣어가지고 비틀어서 그래서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거의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이제 논리만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전파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설득력을 갖고 신학이 사회학처럼 변화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런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악인에 대한 반감과 미움 때문에만 기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훼손될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간절한 갈망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옵소서.’ 생명책이라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도 모세의 기도 속에 나오고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이 생명책의 개념을 계시록에 있는 생명책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아직 내세 사상에 대해서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라는 개념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은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향유하고 누리고 있는 등록된 상태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면 어떨까 조심스러운 해석이 듭니다.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점들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계시록에 나오는 그 최종적인 구원을 뜻하는 생명책이라고 말할 때에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첫째는 계시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끌어온다는 것이 좀 해석상 맞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만약에 그렇게 이해를 했다면 지우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구원하시려고 생명책에 적어 놓으셨는데 그것을 지우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오히려 이것은 계시의 발전의 정도와 문맥에서 본다면 이것은 ‘언약백성으로서 등기된 이름일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그럼 언약 백성은 지워질 수 있습니까?’ 지워질 수 있습니다. 언약백성은 지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백성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언약백성 속에는 참되고 진실한 언약백성과 가등기 상태의 언약 백성들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마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언약백성이지만 불신앙 때문에 떨어져 나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 사람 중에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마 저 사람은 참된 언약 백성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제 호소하면서 의인과 함께 저희들이 기록될 수 없게 해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호소하는게 후렴구처럼 시인의 기도 속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가난하고 슬픕니다. 구원으로 나를 높여주시옵소서. 여기서 나오는 구원은 영육간의 모든 상태를 다 의미하는 포괄적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우선적으로는 자신이 악인에게 고통 받는 상태에서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신학함과 철학함의 전범으로서 다윗을 삼은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제사, 그래서 그가 철학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제사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고 간절하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제사요 기도입니다. 하나님 많이 의지하면서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