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시원케 하는 구원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시편69:32)
녹취자 : 이민희
여기에서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에서 ‘이것을’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시인이 그 악한 자들의 무리로부터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고, 하나님께 노래로 하나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은 광대하시다’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온유한 자’라고 되어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기뻐하나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온유함’이라는 것은 언약백성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인격적 특징입니다. 온유함의 원천은 평화입니다. 평화 때문에 온유한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샬롬”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 때문에 다른 모든 언약백성들과도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 평화 때문에 온전한 평강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일을 당하거나 해도 쉽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안정된 가운데 온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모세에 대해서 도전하고 심지어 이제까지 자기와 함께 사역의 길을 걸어갔던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더냐’ 하며 도전하며 대들 때에도 '비난받을 때에 모세의 온유함이 온 지면에 승 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정치적인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샬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무엇인가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잘못된 일을 할 때에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억울함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용서해주는 것도 훌륭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이 나를 격동시킬 수 없을 정도로 초연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평강의 효과입니다. 용서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용서할 만큼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아데네 사람들이 정착해서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온갖 신들이 와서 너희가 모여서 나라를 세우면 나를 섬겨라, 나를 섬겨라 요구했습니다. 포세이돈이 와서 말하길 ‘너희들이 나를 섬기면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겠으니 나를 섬겨라’.하자 모든 백성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데나가 와서 하는 말이 ‘너희가 만일 나를 섬기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겠다’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택할 까요? 당연히 아데나를 택하겠죠.
힘들게 자기를 꺾고 용서하는 것보다 훌륭한 것은 용서할거조차 없이 마음이 요동치 않고 초연한 그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들도 은혜 많이 받으시면 이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내가 초월적 은혜에 붙잡혀있으면 상대방의 행동이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까? 헛일을 저렇게 많이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까? 상처가 되지 않고 초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지나가던 교인이 지나가다 ‘할머니 바보’ 하면 마음상하겠지만. 쬐그마한 꼬마가 지나가다 ‘할머니 바보’ 해도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초연함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옵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 없이 마음을 먹고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법에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구김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런 온유함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쉽게 노여워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그런 마음. 그것을 옛날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아파데’(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윗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덕으로 여겼음)‘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사랑 때문에 왠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상태가 온유함의 근원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를 보고 기뻐할 것이다. 왜? 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잠시 하나님이 안 계신것 같이 살던 사람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구원의 놀라운 감격이 있고 그때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은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밖으로 밖으로 펼쳐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사랑은 폐쇄적 사랑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개방적인 사랑 혹은 유통하는 사랑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사랑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들면 짐승만도 못해집니다. 자녀도 부모도 없이 오직 자기 행복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은 그것이 깨드려지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그러면 관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옮아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그것이 마음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이 악인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이 침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찌그러지고 하나님의 법도가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약은 이런 구약적인 배경을 밑에 깔고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할 때 그 온유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늘나라를 소유하고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해를 초월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샬롬’을 누리며 살며, 그렇게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진짜 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확장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면 추종자들을 만들고 권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면 아부자들을 만들지만 온유한 인격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면 그가 진정한 온 땅의 지배자가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칼 한자루 없이).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할지어다’ 이것의 의미는 여기저기서 어그러진 언약백성들이 언약백성의 본분에 어긋난 비루한 행동을 하고 있고 의인들에게 박해를 주는 일이 언약백성 속에서 부지기수 일어나고 있으며 그 중의 한 경우가 이 시인에게 일어난것이며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어디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히브리어 말로 ‘다라쉬‘라고 합니다. 이 뜻은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너무나 소중해서 갈망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 헤매고 구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가까이 해야하겠다고 결심하는 절실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체를 가진 한정된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다라쉬(찾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만일 동전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아 찾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을 그렇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자기소유에 두고 안정감을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말합니다, 주님이 말하시길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나님이 찬란한 속성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속성의 빛에 어울리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치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기대하셨던 간절한 기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치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 당신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당신의 속성을 비춰주시면 그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감동하는 언약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면서 주님 성품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주님의 속성의 빛은 직접 알 수 없지만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 속성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신앙이 깊어지면. 이 세상 어디에서든 볼 수 있고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악인의 멸망을 통해서도 이런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보게됩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서 비춰지는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속성의 빛이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되는 방법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통에서 흘러나올 때입니다.
(예화)어느 주일학생이 고백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가르치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 그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가득해도 다른 증거에 의해서 가려서 희석되는 증거일 뿐이나,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역사합니다. 그것이 그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고통 받는 언약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유한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같은 사람으로 병행법적으로 재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판치는 광경을 보면서 심령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가 하나님이 악한자의 손에서 의인을 건지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의 광경을 목격하면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아주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이길 담대함을 마음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커다란 영광은 주님의 이 아름다운 속성을 사람들에게 정말 충만하게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고 자신이 그렇게 알아가는 삶이 복된 삶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