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자의 탄원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 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시 69:26-27)
녹취자: 김혜진
계속해서 악인에 대한 탄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이 시가 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거 하나는 시인이 굉장히 커다란 고통가운데 이 시를 쓴 것은 분명하고, 또 그 많은 고통 중에서 상당부분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악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방사람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는 것, 이 네 가지 정도를 우리들이 시편의 내용을 통해서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제 제일 먼저 이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거처로 황폐케 하심은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심판의 문맥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실 때에,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도록 명령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제 전쟁을 치룰 때에 그 때에 사람들을 멸하도록 명령을 하시고, 그리고 남김없이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심판의 맥락을 생각하면서 이거를 보시면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도시 자체를 쓸어버립니다. 그것을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텔이라고 하는 것에 원인이 되는데, ‘텔’ 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의 지명에 보면 텔아비브 무슨 그러면서 텔 자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뭐 텔 엘 아마르나 뭐 이렇게 텔 자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텔이 히브리어로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대 국가들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 하면 점령을 하며는 깡그리 부셔버립니다. 그쪽에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그것이 쉬운 게 뭐냐 하며는 대게 흙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부셔져 버립니다. 부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는 겁니다. 도시라고 그래도 오늘날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안 되고, 이제 그 취락지가 생겨나는 겁니다. 전쟁이 나면 다시 다 부셔 버리고, 그 다음에 다시 또 짓는 겁니다. 이게 부정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또 다시 금세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케이크처럼 발굴을 해 보면 케이크처럼 한 시대가 살던 흔적이 나오고, 그 위에 그 다음 도시, 그 다음 도시, 그 다음 도시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도시를 결정할 때에 물이나 그 다음에 산, 그 다음에 공격에 방어하기에 적합한 지형 이런 것 들이 고려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도시에 있다가 갑자기 저기 허허벌판에 가서 다시 도시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도시가 있던 그 곳에 도시가 계속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때에 확 쓸어버려서 사람도 죽고 집이고 뭐고 전부 다 파괴되는 그러한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다시는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도록 해 달라, 무슨 뜻입니까? 왜 나라에서 역적이 생기면 반역을 한 그 반역을 한 사람만 처단하지 않고 옛날에, 거기에 역겨 있는 모든 가족들 삼족을 멸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는 구족을 멸한다고 그랬다 그러더랍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친척 때문에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형벌을 내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아예 보복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통이 심하고 힘들었으면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탄원을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의 죄상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겁니다. 대저, 대저라는 뜻은 그러므로 라는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황폐하게 해 달라고 저들의 멸망을 하나님 앞에 간청 드리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저희가 핍박하며 슬픔을 말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으며,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였으며, 상하게 하신 자에게 슬픔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핍박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이것은 뭐냐 하면 조롱한 것입니다. 조롱, 그냥 사람이 너무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냥 가만히 둬야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야 저 사람이 하고 수근 거리는 겁니다. “야! 저 사람이 이러 이러한 일을 당했대!” 옆에서 맞장구를 치면서 “ 내 그럴 줄 알았어! 평소에 하는 꼴을 보니” 그러면서 조롱을 하는 겁니다. 그 때에 이중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시인은 자기 자신을 의인화 시키는 거지 않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이 치신 자를 핍박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그래서 주님이 치신 겁니다. 징계하신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상하게 하셨다 하는 것도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이 사람을 치셔서 그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태라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부모한테 얻어맞은 아이가 밖에 나가서 동네 친구한테 또 얻어맞는 격입니다. 그러니까 설움이 막 복받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한테는 이렇게 야단을 맞고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나를 치실 수도 있고, 주님은 나를 아프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줄을 알고 핍박하고, 주님께 징계를 받은 내 모습이 초라해서 나를 슬픔을 당하고 있다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속에서 설움과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마음이 가득 차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치시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때리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치시고 때리시는 깊은 고통 속에서, 치고 때리시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때리고 치실 지라도, 주님과 자신사이에 맺어진 이 언약과 사랑의 관계에 변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때리시는 것은 오히려 그를 사랑하고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징계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또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께 자신은 소외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아프고 괴로울 때에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 겁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항상 편하게 먹고 편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로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를 근심하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고, 쓰라리게 하시고, 때로는 믿었던 것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이 비록 자기를 치시고 또 상하게 하셨어도, 다른 자들이 자기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이 차마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보호와 인도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징계 중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에 비록 자신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아도,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그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고 살도록 그렇게 창조하시고 그렇게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존하면서 사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도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에,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더욱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죄악에 죄악을 더 하사’ 원래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 자들이 죄를 더 짓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도 번역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은 죄에 죄를 더하지 못하게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억제하는 은혜를 베풀지 마시고 저희들이 갈 데까지 가게 해 주십시오. 왜? 그러면 하나님의 징벌이 크기 때문에, 시인은 이들이 짓는 죄를 더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오게 될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 큰 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게도 해석이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해 주심시오.
여러분 법에 어떤 게 있는가 하면 가중 처벌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인데 이러한 입장에서 이런 죄를 짓는 것은 굉장히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3년 정도 살 법을 이러한 상황에서 죄를 지을 때에는 원래는 3년이지만, 6년을 살게 만들어야 된다. 그런 법을 만드는 이유는 이제 그 특정한 죄를 저지를 때에 자기가 받는 법이 굉장히 무섭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지나가다가 사람의 지갑을 슬쩍 훔쳐가지고 가면 그냥 도둑입니다. 그런데 ‘돈 내놔! 그러고 가져가면 강도가 됩니다. 그런데 둘 이상이 정교하게 계획을 짜가지고 같이 협박을 하면 특수강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가중처벌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범죄에 대한 형벌이 계속 무거워지는 겁니다. 그런 거를 해 달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결코 주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긍휼을 베풀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이틀 전에 왜 이런 기도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이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시켜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 피하는 신앙은 배우고, 원수에 대해 징벌을 구하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큰 사랑을 알았던 신약의 성도답게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주님이 사랑으로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주님도 참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나도 참으면서 저들도 주님의 의에 들어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약 성도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고통 속에서 주님께 피하는 신앙은 배우고, 그들의 저주와 멸망을 구하는 기도는 사랑과 용서와 돌이킴으로 바꾸고, 그 대신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그 영광에 대한 열망은 계승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이 이 시편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할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시련과 어려움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이든지, 혹은 애매히 고난을 당하든지 오해와 그리고 거짓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당하게 되는 시련이든지 모함이든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이 나를 쓰라리게 하는 고통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서 깊이 아파할 때마다 주님께 피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주님은 나를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요, 나를 때리셨으나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가장 나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을 향해서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앙심까지는 아니더라도 토라지는 것, 그게 그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에게 약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악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의 통치를 거슬렸기 때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거슬렸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악과 고통의 원인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토라짐, 앙심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말려 죽이는 무서운 마음의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좋고 잘 된 것이 있으면 모두 주님의 은혜고, 나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