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의 찬송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시70:1~3)
녹취자: 임국한
자신이 어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추구하게 되면 동일하게 그 길로 나아가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하나님 섬기면서 핍박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때 공산권에서 특수선교를 하던 선배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지만 지금은 공산권에서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들어가서 거기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을 자유세계로 탈출시키는 것을 돕는 그야말로 특수 선교였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구 러시아에서 부부가 탈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탈출시켜놓고 정확하게 일 년이 좀 넘었는데 이 선교사를 만나더니 다시 러시아로 자기를 돌아가게 해 줄 수 없냐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살기는 미국이 훨씬 좋은데 신앙생활하기에는 러시아가 훨씬 좋다고 그러면서 자유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본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일 년 동안 느꼈던 신앙의 격차와 환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박해가 있고 고난이 있었지만 거기서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며 핍박을 이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박해받지 않는 사람들이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피상적인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이 시인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저처럼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기뻐하게 해주시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병행법으로 반복해서 나오기를, 형태는 바뀌었지만 의미는 같은 의미이고 더 구체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시련과 어려움들을 만나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들을 만날 때 하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를 어느 정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돈이 몰리면, 우리도 돈을 벌 수 있고 꿀 수도 있고 대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나면 살고 죽는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지만, 우리 손으로 약을 지어 먹을 수도 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모든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 완전히 그것을 해결해서 어려움들을 모면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려움을 주실 때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혼자서도 잘 해보라고 하는 하나의 시험하시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줄 알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도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꼭 해야 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마음을 먹지만 마음이 마음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 또 마음이 마음에 순종했다 하더라도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늘 숙제로 남는 것,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구원을 사모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들이고 환경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해 간절해질 수 있도록 수시로 우리에게 숙제를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더 열렬해질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꼭 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지만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한번 조용히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또 믿음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을 열렬히 사모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격해 하게 되는 일들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기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속성을 새롭게 알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믿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속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광대성입니다. 광대성은 하나님의 존재적인 속성입니다. 저에 의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둘로 나뉘는데, 존재적 속성과 품성적 속성으로 나뉩니다. 품성적인 속성은 인간들과 맺으시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관계적 속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존재적 속성은 관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속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독립적 속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무한성, 완전성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다음에는 ‘하나님은 참 광대하시구나. 무한하시구나.’ 하고 고백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이 만드신 법칙, 그리고 당신이 만드신 규칙으로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친히 계셔서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이 이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을 비롯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잠시 악인이 의인을 박해하고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이기는 것 같아서 마치 하나님이 거기에 안 계신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것은 잠시 하나님이 인간의 악을 그냥 허락하셨기 때문이고, 시간이 지나서 상처가 아물듯이 악들이 모두 정리되고 치료되고 나니까 여기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시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해도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는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보면,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데 아직까지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 빅뱅이론입니다. 빅뱅이론이 무엇이냐면, 원래 이 우주가 천문학적인 특이점이었다는 것입니다. 특이점이 무엇이냐면 블랙홀의 거의 핵심을 가리키는데 크기 거의 제로에 질량은 무한대인 점입니다. 그런 아주 크기가 거의 없는 무한대의 질량을 가진 그 특이점이 폭발을 하면서 우주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폭발에 대한 증거는 우주 공간에 수없이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고, 천문학자들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징귤라리티라고 이야기하는데, 소위 특이점, 그것이 바로 영원과 시간 사이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거의 27km나 되는 전자광 가속기를 만들어서 10조원이나 들여서 공사를 해서 실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비밀을 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그것이 크기가 거의 없는 0에 가까운 아주 작은 특이점이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폭발을 일으켜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가 되어버렸다면 그 작은 점이 하나님 품 안에 있었다면 그것이 커진 다음에도 하나님 품 안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의 모든 크기는 0으로 수렴하는 크기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다고 말해도 충분하고 세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주님이 안 계신 곳이 있는 것 같은 것은 우리의 상식과 불신앙의 문제이지,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이 무한하고 광대하신 분이며 나 같이 티끌 같은 인간이 살고 나를 에워싼 수많은 악인이 사는 이 도시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목놓아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안 계신 곳이 없이 우리의 모든 삶, 영혼, 외면의 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포괄적인 주권을 고백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봅시다. 만약에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고, 처지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을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보면 거기서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여기도 계시는구나. 그래서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위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한 기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은혜는 간절히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