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의로 건지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71장1절~2절)
녹취자: 이현정
이 시편 71편은 시편 31편 그리고 또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과 함께 마틴루터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던 본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의의 사상에 관해서 커다란 감화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그러한 교리를 종교개혁에 다시 재연해 내도록 만들어준 귀한 본문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길지만 마틴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간 후에 본격적으로 수도원 생활하고는 좀 다른 환경에서 성경연구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 때에 시편 31편이나 71편에서 발견한 사상이 바로 주의 으로 혹은 여호와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혹은 구원하시며 라는 사상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루터뿐만 아니라 카톨릭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 라고 하는 사상은 아주 정확하게 율법적인 의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으로 견해에서 볼 때 의라고 하는 그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모두 충족하여 그 율법의 기준을 따라서 그 사람은 정당 하다 라고 인정을 받은 상태가 그것이 의로운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그 율법에 부합한 삶을 삶으로서 만이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당시에 이야기 하는 의는 결국 두 가지 방법으로만 성취될 수 있었는데 우선 첫째는 부정의 방식, 또 하나는 긍정의 방식에 의해서 의가 성취가 되는 것 입니다. 부정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무엇을 하지 않으므로서 어떠 어떠한 상태가 되지 않으므로서 의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긍정의 방식은 그 위에 무엇인가가 덧붙여져서 의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덧붙여진 의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에서 성례와 미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덧붙여지는 그 성사의 공로를 통해서 그게 바로 의에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율법적인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많이 애를 써도 사실은 자신들이 그 의를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면 부정의 방식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 남는 것이 긍정의 방식인데 그것이 교회의 성사 속에 주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그 모든 은총을 시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 입니다. 이런것들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 때 까지 이 칭의 사상에 대한 아주 명확한 개념들이 정립이 덜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개념을 이야기 하긴 했는데 그것이 정말 어떻게 해서 의가 생기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견해를 다소 모호하게 만들어 놨고 그래서 그런 의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짐으로 칭의 되는데 그것을 모호하게 해놓고 간 것을 후에 중세에 들어오면서 그 일을 바로 우리 교회가 준다. 이렇게 함으로서 이제 중세의 교권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성사에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미사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이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에 대한 말하자면 차단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이제 의를 생각하니까 이 젊은 마틴 루터의 눈에는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에 아주 타락한 면죄부의 판매로부터 시작을 해서 교회의 각양 부패성을 보면서 과연 교회가 그런 의를 우리 인간들에게 줄 능력이 잇는가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발견해 낸 것이 31편 71편에 나오는 의의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주라고 하는 것은 실은 히브리말로 말하자면 아도나이 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야훼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에 근거가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런 이야기 입니다 . 여기에서 이제 루터는 교회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그런 종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수여하시는 그 의가 은혜의 방식이라는 사직에 대해서 눈을 Em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이미 신약성경 속에 이런 사상들이 나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신학사로 볼 때 이것을 마틴루터의 아주 획기적인 독창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모든 인간의 미덕과 덕성을 이신칭의 라고 하는 ale음이라도 하는 이 한 가지에 모두 귀착시켜서 그 믿음을 중심으로 모든 설명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여호와의 의라는 사상에 눈 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생을 의탁할 뿐이지만은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기뻐하셔서 그렇게 당신을 향해 의지하는 인간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사상에 눈을 띄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후 일어나는 모든 종교개혁의 운동을 건전한 어쨌든 건전성이 있는 모든 개신교 사상은 바로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는 여호와의 의 사상에 정초 하는 것입니다. 거기를 이탈 하는 것은 참된 종교개혁의 대의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무슨 이야기 인가. 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의에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통로가 의입니다. 그 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우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간 자신이 개발을 하고 가꾸어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를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들에게 자신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직접 당신 자신이 그 의를 수여해서 그래서 당신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상으로 만든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덧붙여지는 신적인 의의 전달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냐면 그렇게 설명하지 아니하고는 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의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가 마틴루터를 비롯해서 당시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의 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복수심 정도를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십계명이라도 칼빈은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리키는 방도로 십계명을 가르쳤고, 마틴 루터는 십계명을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젤 먼저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십계명을 다 해설해주어서 그로 하여금 죽어도 이 열 가지 계명을 진정한 의미에서는 지킬 수가 없다 그 결론을 내려서 절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십계명을 가르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을 모두 지켜야 주님께 받아들여질만 할 텐데.. 그 계명을 피상적으로 보면 나 우상 숭배 안했어. 나 안식일 범하지 않았어. 나 살인한적 없어. 이런 식으로 자기가 그 의를 이루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계명을 진정으로 준수하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 보여주면 누구도 그것을 지킬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예를 들면 살인이 사람을 칼로 찔러 죽여서 피를 쏟으면서 절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 중에 살인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넓은 의미로 보자면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게 되면 누구도 그 살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짜 괴물같이 생긴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한다면 우린 그렇게 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보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우상 숭배의 의미다. 라고 하면 우리 중에 아무도 우상 숭배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다 가르쳐줄 때 결국은 그 십계명을 배우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계명을 지켜서 그 분에게 합당하도록 내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절규 하듯이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하나의 사건을 앞에서 보느냐 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이게 중세 시대에 맥락에서 보면 이건 어마어마한 복음의 발견이고, 그 모든 허접한 교회중심의 그 모든 공로주의를 타파히게 만들어주는 아주 획기적인 그런 신학적인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틴루터는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이 사랑이 그중의 제일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제 역사하는 측면에서 그런 것이지 발생론적으로 본다면 사실은 믿음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그의 서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못 박습니다. 사실 그 해석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명제는 성립할 수도 있고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후에 역사의 측면에서 반대편으로 보게 되면 이러한 신학적인 해석은 근본에 있어서 영원히 유지되어야할 커다란 대의 임에 틀림이 없지만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믿음의 귀속시킴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관적인 믿음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와서 이제 다음 세대에 와서는 칼빈같은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믿음 그 자체가 구원에 있어서 중심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에 대해 눈을 뜸으로서 그래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믿음과 우리를 믿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그 모든 것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실현 시키시는 우리의 구원의 작정의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에 대해서 균형 잡힌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로 나를 건져달라는 이 구약의 시인들의 간절한 탄원은 티클 만큼도 자기를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는 절대 의존의 믿음을 보여준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모든 것들은 내려놓아지고 그리고 주님의 은총에 온전히 호소함으로서 그래서 주님의 뜻은 무엇이든지 무한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복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입는 그런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언제 이런 감정을 이런 믿음을 경험했습니까? 당연히 주님께 피할 때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수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일 까요? 상세한 이야기가 본문에 더 안 나오니까 우리가 확대해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두 가지 사실은 수납해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대적들로 말미암는 수치입니다. 대적들에게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패배하면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하면 주님께 피할 때 만약에 주님이 절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의지하는 이 시인을 “난 널 모른다.” 라고 재치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달라고 주님께 전심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지 못하는 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집중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나만 사랑해야해“라고 물어보는 자체가 이미 그렇게 말하는 화자의 마음속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자기도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묻기도 하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 하면 정신병자 아닙니까 사랑할수도 없거니와 사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그런 하나님의 대한 믿음의 약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그렇게 피할 수 있는 곳이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그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신앙에 있어서 대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총명이 흐려지고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현저히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면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절대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그릇된 독립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의존하던 죄인들의 헌제의 기도를 속죄제의 기도를 마음속으로 드리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 합니다 그리고 나는 티끌만큼도 의지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주님께 매달리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 속 에서는 바로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명령에 대해서는 무한대의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지 안할지는 두보 봐야 하지만 그 순간 만큼은 무한대의 순종을 하겠다라고 하는 의지와 욕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제 말씀드리 것과 같이 혼란과 시련과 인생의 수많은 풍랑들을 겪습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혹은 우리의 죄 때문에 혹은 우리의 결점 때문에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어느 곳도 우리를 영원히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