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을 찾는 자들을 욕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시70:1~3)
녹취자: 임국한
이 시편 70편도 일종의 탄원시입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에서 3절까지 악인을 위해 비는 기도, 4절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5절과 6절은 자신의 처지와 간구로 나누어집니다.
제일 먼저 1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는데, 나를 건져달라는, ‘나를 건져주옵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간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악인에게 아주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고 심적으로 괴롭힘을 겪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시편에 ‘영혼’이라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히브리어에 ‘네페쉬’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이것을 거의 획일적으로 ‘영혼’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사실은 뜻이 ‘영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사용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영어에도 흔적이 나옵니다. ‘There is not a soul’을 직역하면 ‘거기에는 하나의 영혼이 없었다.’ 이렇게 되지만, 원래 영어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다.’가 됩니다. 히브리어에서와 똑같이, 그런 영어의 용법이 사실은 히브리어를 번역하는 성경 번역의 과정에서 온 잔재들입니다.
그렇게 ‘네페쉬’라고 하는 단어는 아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목구멍, 사람 등의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목숨’입니다. ‘내 목숨을 찾는 자들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옵소서.’ 악인들 중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악인들도 많은데 악인이 그 영혼을 노리겠습니까? 그것은 시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토해놓는 하나의 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즉 ‘내 목숨을 찾는 자로’, 악인의 관심사는 궁극적으로 시인 같은 사람들이 없어져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 같은 것들이 아주 강하게 되면 선에 대해서 더 많이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이해관계가 맞물리지 않는 한 악이 커다란 고통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올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굳건한 사람들에게는 악이 커다란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주님이 자기들을 구속해 놓으신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혹은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해도 실제적인 삶은 무신론적인 삶입니다. 그들이 그려나가는 삶의 질서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 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질서와 상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미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일용할 공기를 공급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나 충분히 많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누리고 살아가니까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식생활의 공급이 고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그것은 악인들이 그려가고 있는 질서와 이 경건한 시인이 그려가는 질서가 상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악인들의 멸망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종종 악인을 위한 탄원의 기도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를 여러분들에게 설명 드렸는데 대개 두 가지로 말씀드렸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때는 충분한 하나님의 계시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계시의 한계 때문에 이 사람들이 마치 전쟁에 준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계시의 부족이든, 영적인 미성숙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든, 어떻든지 간에 이 시인은 악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그런 간절한 탄원 속에서 오늘 이 시인도 ‘나의 목숨을 찾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시며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일평생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영혼을 찾는 자로’ 하는 것은 목숨을 찾는 자들인데 그것은 자기가 경험해 본 바였습니다. 사울이 풀어놓은 자객 추격꾼들이 자기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엄청난 상, 혹은 커다란 위협이 약속되어 있어서 그 일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시인을 찾아 나섰던 그 사울의 군사들처럼 그렇게 집요하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데, 중간에 포기하거나 힘들어서 그 일을 접거나 하지 않고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끝까지 추적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시인을 미워하며 목숨을 찾으면서 집요하게 추격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기 자신을 향해 부끄러움과 무안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마음 속에는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인이 상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상하게 하든지 무엇엔가 상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한다고 하는 것은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폭력과 억압 속에서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짓이겨지고 하는 그런 죽음과 방불한 고통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물러가 욕을 받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전쟁의 개념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할 때 사람들은 퇴각을 합니다. 그때의 부끄러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광대신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고통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하, 아하’ 하는 것은 히브리사람들의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수치를 너무 당해서 뒤로 물러가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영광을 받으면 힘을 얻고 격려되지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게 되면 뒤로 물러나고 위축되게 됩니다. 자신의 원수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이러한 목숨을 찾고, 상함을 기뻐하고,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들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없애기 위해서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시고, 악인들은 자신을 죽도록 두들겨 상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령을 상하게 하지 않고 보호하시고, 조롱하는 악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인정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과 시련이 만날수록 주님께 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