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로부터 피함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시 71:4)
녹취자 : 정은숙
히브리어성경에는 이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되지요.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다가 ‘피하게 하소서’ 그런 보역을 집어넣었는데 그렇게 썩 잘못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의 구두점이나 이런 것들은 후대에 다 만들어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로 보면 앞 문장에 걸린다고 봐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러한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으로부터’ 이렇게 놓고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으로부터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십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산성, 피할 바위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 지방에 가보면 바위산이 워낙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숨으면, 굴도 많고 정말 안전합니다. 아프간에서 미군이 고전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그런 바위산 이런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찾을 수도 없고 정확하게 폭탄을 집어넣지 않는 한 60미터씩, 70미터씩 되는 굴속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의문들을 제기하게 되냐하면 아니 왜 사람이 그렇게 믿음이 없나 불의한 자가 있고 악인이 있어 흉악하게 나를 해치면 싹 쓸어달라고 기도를 해야지 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죠. 그런데 사실 이것은 시인의 믿음 없음을 보여 준다기 보다는 불의와 악에 대한 시인의 또 다른 생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의 시에 보면 악인들을 도말해달라는 기도, 불의한 자와 싸우겠다는 기도,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들이 많이 나옵니다. 굉장히 기도가 전투적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타나는데 모든 기도가 다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약해진 것을 의미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무슨 기사나 나옵니까? 요셉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마리아와 정혼하고 그가 잉태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을 예상했을 리가 없으니까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잖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명명백백히 다 뒤집어서 밝혀내고 율법에 따라서 그 여자를 처단해야지 그게 의로운 사람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그랬습니다.
오늘날 이 교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많은 일들은 좀 성경에 있는 이런 또 다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렇게 옳고 그른 것들을 가려내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에 부서지고 망가지는 교회, 실추되는 하나님의 영광,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그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피하겠습니다’ 이것은 전투할 능력이 모자라서 피한다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런 불의에 대한 성경의 양면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때 그 불의에 맞서고 어떤 때 그 불의를 피하여야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어느 교회에서 온통 뒤집혀서 그렇게 분쟁을 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돈을 모아서 광고를 내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분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마치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교회가 나쁘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하면서 그냥 치욕스러운, 말하자면 비난들이 오고가면서 나중에 누가 옳았는지 글렀는지를 판별하고 난 뒤에는 이미 교회가 갈라지거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나버린 다음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이야 다 잘못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우리가 참 많이 기도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도 보면 불의하고 흉악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72편에 저자는 안 나오지만 많은 학자들이 다윗의 시일 것이다, 문체나 모든 것들로 볼 때 그렇게 판단을 합니다. 또 다윗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악인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그 마음과 심성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속에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악을 행하고 흉악하게 행하여 고통을 주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언약 백성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같은 언약 백성 속에 있으면서 이렇게 끔찍하게 악을 행하고 그러고 그런 큰 고통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 악한 인간이 주님을 만나고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이런 성경구절들을 보면서 가슴에 새겨야하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물러나는 모든 것이 용기 없음이 아니고 또 흉악하고 불의한 자들과 다투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이 비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인에게 이런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오히려 그 악인들을 피하여 숨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람이 경우에 없이 짐승처럼 분노하거나 혹은 자신이 잘못했다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악의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맞서는 그것은 더 커다란 불화와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알았기 때문에 이 시인이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서 시인은 그런 때에 이 노래를 했습니다.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라고 노래했습니다. 수많은 비난과 구설에 다툼과 견딜 수 없는 치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질 때 그는 말도 안하고 보지도 않고 듣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주님께 피해서 그 날개 그늘아래 숨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시인에게 당신과 가까이 하는 사람의 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그 은밀하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아주 큰 은혜를 매일 맛보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살다보면 욱하는 일이 있고, 저런 건 경우에 어긋나는데, 저건 정말 악한 것인데, 하는 그런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도록, 숨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악인의 말로와 의롭게 그 악인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피할 때 그 모든 환경들이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들을 드러내는 빛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