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을 때에도 버리지 마소서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 (시 71:9)
녹취자: 이한슬
71편에서 뭐라고 확정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시편 71편의 문맥을 볼 때에 이것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는 없지만 다윗의 시라고 여겨지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가 다윗이 고난을 안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젊은 시절의 시였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이 시인이 악인에게 애워싸이기는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고난을 당하고는 있지만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힘이 쇠해버리고 좌절해버리고 다시 이런 내용들은 잘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많이 만나도 신앙이 살아있고 그리고 소망이 있고 또 육신의 힘도 있어서 그것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꺾이지 않고 감당해 나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뭐 그리 큰 고난은 없는데도 작은 어려움인데도 육체도 병들어서 기운이 약해서 없고 마음이 매우 쇠잔해 지는 적이 있지 않습니다. 살다가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이 시인이 지금 전자에 해당되는 경우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이 자기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지만 주님은 나의 견고한 피난처이기 때문에 주님을 찬송함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있습니다 라는게 마음의 문제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갑자기 이제 나를 늙은 때에도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도 떠나지 마소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이 시인이 아직 늙지 않았는데 내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라는 것은 늙을 때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힘이 있는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에서 쇠약하다 라는 것은 결국 늙을 때에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설명이 무엇이냐 하면 늙을 때에 육체의 특징이 아주 쇠약해 지는 것 아닙니까? 기능이 없어지는 것,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가지만 노인들의 행동은 어집니다. 뭐 같은 것들을 잘 쏟습니다. 물 같은 것을 쏟고 툭툭치고 그래서 보면 젊은 사람들은 옷에 먹다가 된장, 고추장 국물도 흘리고 그런 것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되면 지저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이 어집기 때문에 뭘 해도 거리감각이나 방향감각이나 그런 것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살아있어도 몸은 그게 잘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꾸 뭘 툭툭 쏟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다 거리 감각이나 그런 것이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젊었을 때 아주 깔끔하고 그러던 사람들도 나이들어서 줄줄 묻히고 다니고 젊었을 때에는 냄새에도 예민하고 거울도 자주보지만 나이 들면 거울도 안봅니다. 안보는 이유가 맨날 거울 속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야 되니까 그 인간을 보기 싫어서 안 본답니다. 그래서 옷에 뭐가 떨어져도 발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쇠약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에 대해서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옷깃에 뭐가 떨어져 있어도 저 양반이 원래 되게 지저분한 양반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게 육체가 쇠잔해져서 오는 현상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미국에 갔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 한명을 만났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소개 됐는데 정말 거물입니다. 근데 눈을 의심했습니다. 시골서 온 할아버지지 세계적인 학자일 리가 없는 그래서 옆에서 나를 그 양반에게 소개해준 목사님에게 “목사님, 정말 시골할아버지죠?” “맞어.” 막 뭐가 묻고 수염은 이렇게 길고 머리는 허옇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물우물해서 잘 못 알아 듣겠고, 가뜩이나 영어귀가 어두운데다가 우물우물 이야기를 하시니까. 젊은 시절에 세계적인 학자이니 얼마나 샤프했을 텐데 나이가 드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그걸보면서 뭐라할까 어려서는 우리할머니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실까 했습니다. 뭘 툭툭 떨어뜨리시고 얼굴에도 뭘 흘리고 다니시고 젊은 시절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감각이 떨어지니까 그런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내가 나이가 들어서 내가 그 처지에 되어가면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꼭 그러시길 바랍니다.
그게 여기서 핵심 상황이 아니라 시인이 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이게 결국 뭘 의미하냐면 젊을 때 인데도 이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이 많이 들면 가장 느끼는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나이 많이 들었을 때 느끼는 어려움은 어둡고 불편하고 그런 것이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이 뭐냐면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벌써 아버님 돌아가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후회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런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하고 그리고 용서하고 가까이 하고 싶고 그랬는데 표현을 다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마음에 섭섭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노인 둘이서 제주도에 놀러왔다가 남편이 우리가 여기 언제 오겠냐면서 사진 좀 많이 찍자니까 부인이 싫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며칠있다가 여행을 너무 격렬하게 했는지 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루는데 그 부인이 그렇게 후회를 하더랍니다. 남편이 사진을 찍자고 할 때 찍을 껄하고 그렇게 후회를 하더랍니다. 나이들어서 제일 큰 문제는 외로움입니다. 경제적인 것도 물론이지만 그것이 해결이 되어도 그래서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치매라 그러고 노인들을 데려가서 치료를 시키고 격리를 시키고 그러는데 그거에 상당 부분이 우울증이랍니다.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 라는걸 노인이니까 지식이 없어서 모르고 의사소통도 잘 안되고 우울증에 걸리면 말을 잘 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치매라고 치부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효도하고 할 때 그 효도는 삶을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도 마찬가지고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고 부모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꼭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벌써 경험한 것입니다. 경험 했다기 보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늙을 때에 가장 커다란 것이 외로움인데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도 만약 버림을 받는 다면은 내가 어떻게 살까 하는 것 아닙니까? 시인의 지금 시점이 자식들로부터 배반을 받은 시점인지 왕이 된 이후인지 왕이 되기 이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느끼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이냐면 여기서 버리다라는 것이 히브리어로 아자흐라는 말인데 떠난다는 뜻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함께 하다가 떠난 사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누구를 보았습니까? 사울을 보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다가 하나님이 떠나시고 나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설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이 젊었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셔서 시련과 고난을 이기시게 하는 것처럼 나의 늙은 때에도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왕관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이런 이야기 할 때마다 엊그제도 미국 갔다 오면서 눈물이 났는데 사실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모시던 선생님이 그 당시에 94세였습니다. 아직 돌아가셨는지 생사도 확인을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20년 만에 찾아가 뵀습니다. 그래서 LA에 집회를 갔다가 디즈니랜드를 구경을 하시던지 유니버셜 그런 것을 구경하든지 그래서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으니까 우리 선생님 한번 찾아 달라고했더니 금방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94세셨습니다. 그래서 과일한 바구니하고 꽃 한바구니 하고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엔 못 알아보십니다. 이것저것 설명을 하니까 알아보십니다. 그래서 큰절을 하고 그러고 보니까 한 21평 아파트에 혼자사시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70대 중반이니까 같이 늙어가는 처지입니다. 사모님은 어떻게 되셨나고 물었습니다. 그때도 편찮으셨는데 7년전에 돌아가시고 92세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셨답니다. 92세서부터 발목이 안 좋아지면서 운전을 못하고 무언가에 의지해서 걷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말짱하십니다. 그때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썼을 때였는데 책을 한권 드렸더니 안경을 끼시고 한참을 보시더니 아이고 이거 조직신학에 대한 책을 하나 썼구먼 하셨습니다. 정신이 말똥말똥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에 “목사님 너무 외롭지 않으세요” 했더니 사회복지사가 이틀에 한번씩 와서 챙겨주고 그러고 가고 또 당신이 뭘 좀 끓여먹고 그러고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씩 친구가 오면 노인네 둘이서 같이 앞에 나가서 음식점에 가서 음식이라도 드신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하고 묻는데 평생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그 말을 하면서 목이 메이는 것입니다. 노인 혼자서 24시간 그러고 있으니, 내 평생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외롭냐고? 내가 왜 외로워? 내가 뭐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누어서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지 외롭긴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돌아서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느낌에 저 할아버지가 얼마나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을까? 정신없이 바쁘지만 언제 기회가 나면 그 후배들하고 휠체어라도 밀고 공원에라도 다녀오면 참 좋아하실텐데. 다음에 오면 꼭 그래야지. 그래놓고 그게 벌써 5년 세월이 흘렀으니 살아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100세가 다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과 그렇게 나이 많아서 힘이 없어 늙어가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한 인생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격차가 있겠습니까? 이는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시인이 젊었을 때에도 일평생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상처받거나 섭섭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렇게 힘이 없고 육신도 약해지고 그러면 그런 사람들 다 귀찮습니다. 옆에 있어서 귀찮은 사람이 있고 옆에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이동수장로님께 갔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앉자마자 “목사님 정신없이 바쁠텐데 얼른 올라가보세요.” 하면서도 손을 잡고 놓지를 않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래서 울지 말라고 했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참 감사하다고 그러셨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노인들은 있었으니까 거동이 불편하고 그런 노인들이 어느 시대든 없겠습니까? 병원에 가 보면 자기힘으로 기도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사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버릇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제도 병원에 가보니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며 숨쉬고 자기가 손이 움직여서 밥을 떠먹고 배변을 하면서 산다는 것 차제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우리들이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하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족에 힘이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돈이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연세가 드실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고 젊었을 때에는 이런 주님과의 관계가 일평생 지속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노년에 자식들이 다 떠나고 심지어는 남편이 심지어는 아내가 우리를 홀로 두고 떠나도 마지막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외롭나? 내가 주님과 같이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