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을 찬송함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71:6)
녹취자: 장형주
욥은 시련을 당할 때에 처음에는 믿음을 지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자기를 어미 뱃속에서 낙태되지 않고 태어나게 하신 날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오늘 이 다윗이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는 이 고백은 참 쉬운 고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게 행복하고 좋은 때에 부른 노래가 아니라 앞에 보면 악인에게 고통을 받던 때에 지은 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배우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차피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이 성결하게 살아도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죄가 넘치게 되면 그것이 삶의 무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런가 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성결하고 올바르게 살아도 내 마음의 죄가 꿈틀거리면 이것이 역사해서 주위의 질서들을 흐트러놓고 악을 행하게 됨으로서 그 열매인 고통의 씨를 우리들이 따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은 어차피 끊임없이 시련과 고난 그리고 아픔들이 늘 있는 곳입니다. 이때에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내가 원하지 않고 또 내가 직면하기 싫은 상황에 내가 놓이고 인생의 시련과 죄의 열매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라는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절망은 되고 싶은 나와 지금 그대로인 나를 둘 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특히 있는 그대로의 나가 현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할 때 인간이 끊임없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아무리 일어나고 괴로운 일이 우리에게 넘쳐날지라도 우리가 우리가 아닐 수가 있겠으며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나는 어디에나 나일 수밖에 없는데 신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나면은 아무리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되기 싫은 나가 되기 싫은 내가 되어 있는데 내가 나의 처지를 사랑스럽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신앙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망하는 대신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인간의 의무는 우리에게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하는 것이 인생의 의무입니다.
내가 만나기 좋아하는 상황도 만나고 내가 정말 만나기 싫은 상황도 만납니다. 차라리 이 상황을 견딜 바에야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실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몸부림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을 때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살하는 것은 어떤 거냐면 너무 너무 살고 싶은 겁니다. 지금 자기가 아닌 자기로서 너무 너무 살고 싶어 하는 피절인 몸부림이 자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야 되는 것이 뭐냐하면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을 추오도 자살 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내가 감당하여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괴롭고 힘든 것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목사님은 그게 좋습니까? 좋아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게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의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때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서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계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나쁜 일들, 견디기 힘들게 괴로운 일들은 우리의 죄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 경우에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마음에 있는 죄와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괴로움을 끼쳤다고 합시다. 그것은 그렇게 한 사람이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은 이제 그 사람이 한 게 아니라 받아들인 자신이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은 누가 먼저 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본인 자신의 죄와 악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개입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고통과 끔찍한 악들은 우리의 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고난과 많은 괴로움이 있지만 그런 속에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그것을 모두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주님을 안 믿어도 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경우는 없습니다.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저히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다고 믿을 때 그때에 주님 앞에 나왔고 자기가 죄인인것을 깨닫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랬다면 그 후에도 꼭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때로는 이웃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어서 커다란 손해와 상처를 입을 때 조차도 이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려니 하면서 견딜 수 있고 기쁜 상황 속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서는 그 풍랑을 인하여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은 적절히 고난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배신을 당하며 사는 것은 우리를 이 땅에서 부패하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소금입니다.
(예화)우리들이 생선이나 이런 것들 싱싱한 생물을 사다가 다 먹지 못하고 남겨 두면은 상합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소금 한 움큼 뿌려놓으면 그게 절여서 또 저녁 때 먹어도 신선한 식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한 없이 평안하면 부패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련과 핍박을 훌륭하게 견딘 사람이 형통하게 축복해 주실 때에 부패하고 타락하는 일은 언제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고통을 감당하며 견디는 게 아니라 그것을 견디려고 할 때에 우리들이 그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 시인이 고난 속에서 위로를 얻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지키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내가 작은 아기 씨로서 우리 엄마의 몸에 배태될 그 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아셨고 그 뱃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셔서 취하셔서 태어나게 하신 분도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것입니다.
(찬양)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아시리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그래서 이게 바로 주권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인간은 안다고 할 때에 알면서도 돕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도 누구나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고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돕기를 거절하는 때가 있고 또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서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을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나뉘어 질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런 유한한 것이 없으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아신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내 어미의 태에서부터 나를 아셨으며 또 주님이 나를 취하여 어미의 배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라는 이 고백은 결국 나의 인생 전체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상황 속에 있어서 행복한 때에나 때론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있어서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릴 때나 주님이 항상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찬양)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만약에 우리에게 고난이 없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나의 실존이 힘들고 버거운 시련이 없다면 우리가 우리같이 죄에 물든 종자들이 하늘나라를 앙망하겠습니까? 정말 천상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몸은 이 땅에 살아도 하늘 가치를 따라 살겠느냐 말입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종자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종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종자가 그렇게 돼서 절대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죄가 없을 때에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적절하게 이 세상에서 배반을 당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또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서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가 이 세상에 꿀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빛이 되기 위해서 소금으로 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것을 주실 때만 좋으신 주님이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주실 때에도 사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빠 보이는 것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좋은 것이 우리에 영혼에 끝까지 좋은 것을 주었던 적은 많지 않고 오히려 나빠 보이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함으로서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되어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매일매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때로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고 때로는 내가 뿌린 씨앗 때문에 거둬들여야 하는 쓰디쓰고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감당하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분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