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찬양할 때 2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71:23)
녹취자:박정윤
시인은 바로 앞절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여러분에게 이 성실하심이 신실하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성실하심과 진실함이 모두 진리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연결됨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다시 한번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의 내면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하나님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22절 내용이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를 자기 밖에서 발견한 것이라면 23절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작용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들이 염두할 점은 이 시는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노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에 시편에 대한 이해는 우리들이 신앙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이 시편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집니다. 대개 세 가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시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제일먼저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험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시편의 내용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밀착되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늘 하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야다 엘로임, 혹은 야다 야훼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4장에 기록했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 아는 내용에 대한 구약적 명칭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앎은 결국 두가지를 내포하는데 하나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앎이고 또하나는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시행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나와 이웃의 삶과 관련을 맺어 실행되는가를 아는것 이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도 아니고 한정이 있는 영적피조물도 아니십니다. 만지면 만져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런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피조물을 보는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우리와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이 어떻게 실행되는지를 배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갑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앎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이 시편에 대한 이해는 깊어집니다.
둘째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자체에 대한 경험이 깊어져야 시편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집니다. 이 시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찬송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 세계와 인생에 대한 지식과 아주 밀접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하고 인생자체를 바라다볼 수 있는 일반 은총 통찰들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그러한 인생과 인생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뜻, 삶, 계획, 생명, 능력들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지를 함께 배워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시편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시편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좌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인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속성은 우연히 시인들에게만 보여주신 속성은 아닙니다. 이미 시인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고 체득하게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은 성경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다 계시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런분이시다, 저런분이시다 이렇게 계시된 내용들인데 그것들은 우리가 은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아주 놀랍게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많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더 잘 보이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은 읽어도 자기 수준에 맞을 정도로만 계시는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내가 주를 찬양할 때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라는 부분을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시적묘사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은혜의 세계 속에서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피아노나 악기를 잘 연주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마음에 충만하고 성령이 그 사람 마음속에 역사하여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이 가득찰 때 이 건반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그런 은혜로 가득찼을 때 예전과 같지않다는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들이 신들렸다 하는데 신들린 듯이 연주가 됩니다. 그것 뿐이겠습니까. 저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아주 필수적입니다. 어떤 때는 심혈을 기울여서 하루종일 글을 썼는데 원고지 20장도 못썼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 부분을 읽으면 별루입니다. 어떤 때는 글이 막 쏟아집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원고지 200매 이상도 써봤습니다. 이 정도면 닷새쓰면 책한권이 되는데 10년후 책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어떻게 썼지 지금은 못쓸텐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종의 신들림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작용에 감화를 입었을때 우리의 손인데 우리손 같지않고 우리의 글인데 우리글 같지않게 쏟아져 나옵니다. 찬양할 때도 똑같이 경험합니다. 노래하면 언제든지 노래하려고 마음먹을때 누구든지 노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성령의 은혜에 깊이 감화될때 못올라가는 고음도 올라가고 그 소리 자체가 이속에서도 울려퍼져서 자신의 속으로 휘돕니다. 우리같은 사람들도 경험하는데 시인처럼 깊은 은혜의 세계를 누렸던 사람들 얼마나 더 많이 경험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인이 내가 주님을 찬양할 때 내 입술이 기뻐 외칩니다. 입술이 무엇을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하는건 입술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요 정신입니다. 마치 입술자체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그런게 가끔 있습니다. 1989년도에 아이들을 데리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고개를 6개를 넘어서 민간이 들어갈 수 없는곳에서 수련회를 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완전히 고립이 돼서 군에 헬기를 보내달라 요청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형광등 몇 개 켜놓고 한 수련회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자로 데뷔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당시 7시반에 예배가 시작되는데 45분 설교하고 50분쯤 마쳤겠죠. 근데 한시가 됐는데도 기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찬양을 부르는데 정말 미션에 나온 것처럼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한 것 같았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본 적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천상의 메아리랑 같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속에 내가 가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면서 아,그렇구나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만져주실 때 인간의 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가락이 나올 수 있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귀에 널리널리 울리리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를 그렇게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당신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상상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일까. 그 목사님 말씀에 따르면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흐느끼는 고백들이 시적묘사가 아니라 영혼에서 직접 울려퍼지는 말하자면 마치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속에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입술이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하고 마음까지 차오르는 속에서 외치게 되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뒷절에보면 ‘주께서 구속하시는 내 영혼이 즐거워하겠습니다.’ 여기서 구속의 의미는 넓게보면 죄가운데 건져내셔서 언약 백성을 삼으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가깝게 보면 이 구속하심은 구출입니다. 71편 문맥자체가 원수와 악인에게 둘러쌓여 고통 받고있는 시인의 모습인데 자신은 힘이 없어서 시련과 난관에서 자신을 건져낼수 없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건져주셨을때 이 사람의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함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것입니다. 누가 가장 하나님을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음대출신? 아닙니다. 평소 훈련 가장 많이 받은사람?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를 위기에서 건져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 예수 예수 믿는것은 받은증거 많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찬양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퍼지면 그 찬양은 다시 우리의 마음으로 들아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할 때 그 찬양은 사람들으라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구원자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자이자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찬양의 내용중에 하나님 모르는 찬양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였냐 알려줘서 고맙다 이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찬양은 우리가 노래하나님께 영광올린다는 것은 이것들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것이 아니라 그 찬양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려질 때 그 찬양이 올려지는 찬양을 통해서 옥죄와 거기에 담긴 가사를 통해 우리 자신이 영향을 받는것 때문에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찬양은 이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결과적 의미에서 우리자신에게 유익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회상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분, 저런분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회상하게 될때 그것을 찬양에 담을때 우리의 마음과 정신 전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눈물로 찬양한 사람이 눈물이 마르기전에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찬양이 가슴에 울려퍼진 그 사람이 노래의 말마디가 마음속에 멈추기 전에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의 정동 속에서 늘 살도록 힘쓰는데 이 찬양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 찬양을 통해 경건한 영향을 받는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찬양의 간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