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의를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시 71:24)
녹취자 : 조 원 정
시편 71편의 마지막을 자기를 괴롭히던 모든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정리가 되고 난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으로 시편 71편을 끝맺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피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이 사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시인에게 강력한 소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악인에게 고난을 받고 뒤틀린 질서 속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바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든 과정일 뿐이고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하나님은 이 상황을 섭리하심으로 마지막에 당신 자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을 필역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바로 믿음을 기초로 이루어진 소망입니다.
희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 암시적인 희망과 신앙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 암시적인 희망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잘 될 것이라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계시를 붙든 소망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빛에 근거하여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이 시인은 이러한 소망 때문에 이 고통스러운 71편 시편을 그래도 희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과 환난을 당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단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믿음 없이 나아간다면 우리를 시험 속에서 악에 빠지게 하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빠지는 대부분은 악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굳게 붙들고 우리가 보이는 상황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지만 보이는 상황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매달리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고 하나님께는 더더욱 영광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보이는 상황보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보이는 상황이 약속의 말씀을 바꿀 것이라고 믿지 말고 약속의 말씀이 보이는 상황을 변화 시킬 것이라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커다란 적은 밖에 있는 우리 원수들이 아닙니다. 죄악에 기울지 않는데 마귀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 세상이 우리를 대항해서 어떤 나쁜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시련과 환난이 그걸 통해 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주님께 더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믿음에 믿음이 지시하는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적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약속의 말씀을 놓고 불신앙 하는 우리 스스로 절망하고 포기해 버리는 바로 거기에 우리의 모든 죄와 악들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된 후에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 어조로 노래합니다. 그것은 종일토록 주님의 의를 내가 말씀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의라고 할 때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의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입니다. 또 마음의 자질까지 포함합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허공중에 알린 것이 아니라 이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서 알리시니까 그 율법을 통해서 율법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흠 없는 당신의 뜻으로 알려주신 넓은 의미의 율법이 있고 좁은 의미로는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규율하기 위해서 지키지 않으면 징벌을 받으리라고 하는 심판의 보증과 함께 제시된 율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에 부합하는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은 어디에서든지 의로워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의를 성취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의를 채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겁니다. 그게 제사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에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의를 채울 수 있는 다른 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속성과 관련한 의라고 말할 때에는 뜻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의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만 하나님은 바깥에서 그런 기준을 받으실 수 없고 당신 자신이 기준이 되시는 분이니까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의 거룩성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정의에 우리들이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많이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옵니다. 나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걸 느껴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은 안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불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를 언제 경험하는가 하면 나든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잘 못삽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아오시도록 많이 교훈하십니다. 그런데 그 뜻을 계속 어기면서 불순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합당하도록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질서들을 올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이때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징계와 심판을 받고 옳은데도 잘못된 사람들의 질서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시 회복을 시켜 주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발현이 되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당신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들로부터 당신의 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정의에 100%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정의를 적극적으로 사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반대로 뒤집으면 하나님의 의를 매일 매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힘들 것이라는 논리와 유사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서도 방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랑 안에 사랑과 함께 공존하는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느낍니다. 다만 차이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두려움 속에서 그 의를 지키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그 의를 따르면서 사는 것조차도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의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칼날을 못 느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신학자들의 동의를 정의에 충분히 공감을 하면서도 100%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속성다발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다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저는 비판을 합니다만 다발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단순성 속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수렴해서 아무것도 어느 하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안에 모든 게 있는 것입니다.
햇빛으로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일곱 가지 찬란한 무지개 빛이 나옵니다. 빨강은 주황과 다르고 노랑도 주황과 다릅니다. 초록은 노랑과 다르고 파랑은 또 초록과 다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보라색 까지 가는 겁니다. 프리즘을 지나서 빛을 보면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빛은 사물을 우리에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대상도 되고 대상이 아닌 것도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빛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빛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는 광학에 대한 이해가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의든 사랑이든 무엇이든지 여러 가지 많은 속성들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들일 뿐입니다. 그 프리즘은 바로 인간입니다. 죄짓고 비참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만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프리즘을 통하여 의라는 빛깔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서 비참해진 사람들은 의지할 거 없는 사람들을 긍휼이라는 속성의 빛이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걸 더듬으면서 올라가면 파악할 수 없는 빛이 있는데 이것을 신학에서 단순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시인이 내가 종일 주의 의를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항하는 악인들이 자기를 무수히 괴롭혔기 때문에 무수히 괴롭힌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지라도 이 시인은 그들을 프리즘 삼아서 통과되는 찬란한 빛을 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향해 당신이 창조한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인간을 향해 당신이 살게 하고 싶으셨던 것을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 선하고 의롭게 살든지 악하고 죄짓든지 주님을 반역하고 비굴하게 살든지 아파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인간이든지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으며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찬란하게 드러나 나도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빛깔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전달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 그는 진공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그에게도 아픈 것은 쓰라린 것이고 괴로운 것은 가슴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처럼 아무 고통이 없이 자신을 둘러싼 이세상의 많은 악과 불의 죄악들을 객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속에서 아파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복수를 꿈꾸고 때로는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몸부림 치고 때로는 낙심하고 아픕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찬란한 빛들을 이 시인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을 때도 주님의 성품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이 시련의 폭풍 속을 지나면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한없이 배웠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고 하나님이 악인들을 처결하실 마지막 마무리의 날이 이르게 되면 자신은 하나님의 의를 말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한다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우신 분이시란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처결하셔서 정리하셨고 나는 악인들에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았으나 구원하셨도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교화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지극한 두려움 속에서 사랑 속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는 경건한 삶의 진작이 이 시인의 마지막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속에서 우리들이 언제나 간구하지 말아야 할 구도는 선교적 구도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 행운과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으면 이것은 이 시인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공동체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그들도 이 지식의 빛 아래로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도 똑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회와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를 말하면서 가르쳐 드렸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신학을 공부하거나 성경을 공부하거나 혹은 하나님에 관해서 새로운 성품의 지식을 알게 되면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 부쳐진 지체로서 내가 그걸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피, 나의 섬김을 통해서 나와 함께 접 부쳐져 있는 모든 지체들이 그것을 공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은사를 주신 목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 보편 교회 안에서 공유되어야 하고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그들도 공유하게 하여야 합니다. 선교는 선교사의 일이 아니라 선교사가 있는 거기에 유기체적인 몸으로서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를 모해하려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하였습니다. 그 수치와 무안은 신이 퍼부은 수치와 무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날에 개념을 가지고 주님이 섭리 속에서 모든 것들을 참으시지만 어느 한 순간에 이 모든 것들을 마감하고 결정하고 정리하시는 그때에 하나님이 쭉 정리해 주셔서 마무리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정리해 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를까요? 우리가 항상 잘할까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사랑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도 우리 혼자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파도에 떠 밀리는 가랑잎 같은 존재들이지만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도 그것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지 않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그리 된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