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가치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시 72 : 2 - 3)
녹취자 : 김용재
어제는 시인이 왕에게 왕 자신과 그리고 또 이어지는 왕의 계승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판단력을 주시고 의를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제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2절과 3절의 본문은 이 시인이 왜 왕들에게 그 두 가지를 구했는지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우선 주된 이유는 무엇이냐면 왕에게 하나님이 그런 판단력과 의를 주셔야지만 그 백성들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국가를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가운데 허용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이스라엘이 여전히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이 직접 왕이 되어서 통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 세상에서 왕을 세워서 왕이 마치 그 나라의 소유자인 것처럼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임금인 것처럼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통치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고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당신을 돕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행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나라와 똑같은 나라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분노함으로 왕을 허락하였고 진노함으로 왕들을 폐하였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나라를 세우실 때에 그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정말 이 지상에 존재했던 나라가운데 백성들을 행복하게 했던 나라는 너무너무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세금을 나라에 내고도 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어서 그래서 역사적으로 아나키스트들 즉, 무정부주의자 국가라는 이런 체제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그리고 의를 간절히 구하면서 그래야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의로 판단하고 가난한 자를 그런데 이것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 보면 아니에이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의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 받는 자들을 공의로 판단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국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의 가치가 뭐냐면 이 땅에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보고 그리고 그들에게 올바른 의를 따라 판단하고 그래서 백성들이 의를 학습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라 판단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국가의 단 하나의 가치라고 말할 순 없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와 불의 선과 악 사이의 구분을 명백하게 해 주고 자신이 그 선을 따라 살려는 그것을 보여주고 또 그 백성들이 그런 선한 가치를 따라 의롭게 살 때에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는 말할 순 없지만 가장 중요한 나라의 가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솔로몬이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왕직에 대해서 아주 명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가 타락하고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던 것도 사실은 나라의 번영을 구가하고 이미 이루어진 그 번영들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에 발생한 타락이고 왕국의 부패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다윗은 그렇게 솔로몬처럼 세속적인 방법으로 연혼을 맺고 그렇게 해서 왕국을 보호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복을 주셨더니 그렇게 큰 판도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자체가 이 세상에서 큰 나라가 되고 돈이 많은 부자 민족이 되어서 다른 나라보다 번영을 일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스라엘나라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가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이스라엘의 가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 의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나라와 역사를 움직이고 싶어 하시는 분인지를 보여주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나라가 잘 살고 부강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교지에 나가보면 나라가 잘 살아야지만 선교에도 보탬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해외선교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1980년대 중반이후 여행이 자유화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습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번영하는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의로운 나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올바른 나라가 되는 것은 번영하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시켜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번영의 삶을 사고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히 헤아리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가득 있게 되는 것. 비록 내가 높은 지위와 큰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선한 의지가 매우 작다면 오히려 내가 가난뱅이로 살면서 선한 의지를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후자의 경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에 따라서 우리를 높고 낮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기의 나라가 번영하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고 나라고 정의가 구부러졌기 때문에 고통 받는 백성은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경건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연일 보도되고 있는 중국의 고속철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갑니다. 우리도 모두 경험한 것이지만 빨리 빨리 따라잡아서 선진국과 경쟁하려고 하다 보니까 한 쪽은 발전하고 한 쪽은 발전을 안 한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220 km/h로 달리는 열차가 400km/h 로 달릴 수 있을 때까지 4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중국은 불과 몇 년 만에 600km/h까지 달리는 기차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지금도 황해에 가서 고속철 지하철을 타면 시내를 통과하며 달리는 기차인데도 430km/h로 달립니다. 그것참, 사람들이 감탄을 합니다. 그런데 크게 사고가 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명을 잃었고 어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다가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제발 똑바로 사고 원인을 조사해 달라고 한 광경이 두루두루 전 세계에 퍼 날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나자마자 한 사람에게 8500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그 정도 돈이면 우리나라 가치로 따지자면 4억 이상 되는 가치일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더욱이 그런 열차를 탈 정도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정말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몇 년 전까지 농민이 1년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고 마지막에 손에 쥐는 돈이 4000위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만 원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니 8500만원은 100년을 농사를 지어야 될 돈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울부짖은 것입니다. 무엇이 급했는지 조사도 끝나기 전에 현장을 덮어버렸고 현장을 덮다가 살아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의롭지 못한 처사에 대해서 백성들은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그런 공의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올바른 삶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들어서 이렇게 이 세계가 하나님을 떠나 사람중심이 되는 세계가 되기에 이바지한 큰 공로가 있는 칸트의 글을 어제 잠깐 보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자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망 나온 사람이 자기 집 뒤에 숨었다 할지라도 악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가 여기 있느냐고 물어도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보다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도 그렇게 올바름을 강조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나라가 의롭지 않으면 온갖 재앙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연을 철저하게 의존하며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자연적인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만약에 나라가 의를 굳게 하고 그리고 불의가 성행되어서 고통 받는 자들을 고통 받게 내버려두고 그릇되게 사는 자들을 그릇되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무용한 나라가 된다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결국은 이 세상에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는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름을 따라서 사는 그 일은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언약 백성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의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정말 불의하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기 때문에 의의 가치는 점점 더 큰 부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