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시편 71;15-16)
녹취자 : 이민희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이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을 잃지 않던 이 시인은 결국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사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문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교회의 역사를 보면 가장 교회가 시련을 많이 당하고 교인이 고난을 받던 때에 많은 찬송시가 작곡되고 불리어진 것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그 찬송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종일 전하겠습니다’. 이것이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주의 의’ 이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시편을 대하던 첫 번째 수신자에게는 ‘의’ 라고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율법을 생각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삶이 부합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그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이 의롭게 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며 살 수 있는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을 자신의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그 율법을 그렇게 지키며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의 부패성을 설명하면서 단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루터 같은 사람을 비롯한 종교개혁가 들은 시편에 등장하는 ‘주의 의’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모자란 사람들을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해석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의로 나를 구하소서’ 라고 하는 이러한 대목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입었다고 고백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 이런 것들은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얻게 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관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하나님의 그 들을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그런 신적인 의를 가리켰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의와 구원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구원’ 이라고 번역을 해도 좋은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그 뜻은 악인에게 에워싸이고 고난을 받고 시련을 많이 당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건져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이라는 사상입니다. ‘한번 나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악인에게 많은 고난을 당할 때에도 내가 모자라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후회없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입증해보이시려는 것처럼 나를 용납해주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오늘 주의 의와 구원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일 전파하겠다는 의미는 이것만큼 자신의 인생에서 압도하는 관심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존경하고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작은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자기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커다란 호의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 선물 자체가 크고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그 선물을 통해서 드러난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를 향한 큰 사랑의 정신 때문에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이 자신의 삶속에서 은혜를 베푸시고 자기를 도우실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 때문에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감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시는 그 인상이 모든 것보다도 압도적인 인상이 되었기에 종일 내 입으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전하겠습니다는 그런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후에 이어질 자신의 삶에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주의 의 ,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는 무슨 뜻이냐면 미래의 자신의 삶에도 이런 시련과 난관, 악인들로부터 받는 고통은 언제나 있을 것인데 이후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현재적으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영혼토록 나와 함께 할 것인데 이렇게 나와 함께해주시는 모든 삶의 과정속에서 내가 여호화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무슨 뜻이죠? 미래에도 내가 그런 일을 당할 것인데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것이고 하나님의 당신의 구원에 입각해서 당신의 의에 입각해서 내게 구원을 베풀어주실 터인데 이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당신 앞에 올 때 그 하나님의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어떻게? 역사 속에서의 경험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믿음과 신뢰였던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모든 불안은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부족 혹은 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확신은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인생을 살아갈 때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은혜 그런 능력을 내가 오늘 현재적으로 하나님으로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의 의 만을 진술하겠습니다. 이 16절에 나오는 이 부분이 아까 말씀드린 주의 의에 대한 해석을 상당히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나 같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정말 덧 입혀진 하나님의 의. 덧입혀진 하나님의 크고 넘치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아버지 앞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하나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애를 써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의 의에 근거해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가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그렇게 나타난 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성령의 단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의지함으로써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그 은혜의 손길을 우리도 또한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