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통치의 영광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시72:8-10)
녹취자: 박지성
사람이 보기에 복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오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 불순종하는 자들의 번영,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의 행복,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는 이 모든 세상을 주관하며 섭리하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번영하게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볼 때 좁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과 넓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들은 항상 같이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악인도 허락하시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허용하시기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견해에서 보면 악인의 번성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아껴 쓰고 좀 영악하고 똑똑하면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심지어는 신앙을 팔아서 번영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주님이 복을 주셔서 번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번영도 이렇게 두 가지가 있듯이 왕국의 번영도 그러합니다. 물론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평소에 외적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덜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에 힘입어서 나라를 통치할 때 왕국에 어떠한 영광이 나타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첫 번째는 하나님이 광대한 땅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라는 구절은 왕국의 권한이 내륙에 뿐만 아니라 해양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권이 약해지게 되면 바다가 외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해적들이 출몰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 임진왜란 직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나라가 여유가 있고 왕권이 강해야만 바다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다는 각종 장비와 배들을 띄워서 훈련된 군인들로 지키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그것은 국권을 상징합니다. 내륙을 통치하는 왕권이 강력할 때 바다를 지배하는 영역 또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왕국의 권세가 미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강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묘사하는 것은 “강이 땅 끝까지 미친다.”는 구절로 강물이 흐르는 순서를 따라서 보면 상류에서부터 흐르지만 바다 쪽에서 그 강을 보게 되면 마치 그 물이 스며들어서 저 내륙 쪽의 큰 강에서 하천으로, 하천에서 개울로, 개울에서 실개천으로, 실개천에서 더 작은 지류로 핏줄처럼 뻗어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하나로 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여러 개로 뻗어 나아가 그 모든 땅들의 핏줄 역할을 합니다. 나라가 있어도 저 산간지방이나 오지지방에 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여 그들끼리 세금을 거둬서 살고, 거기서 또 다른 왕이 통치하게 된다면 그곳은 진정한 의미에서 왕권이 미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왕권 자체를 하나님이 아주 강하게 해주셔서 왕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도록 철저한 왕국의 통치 권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땅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자기 땅이 아닙니다. 땅이 있고, 거기에 경찰과 군인이 있고, 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생산을 하고, 생산을 해서 세금이 나오고, 또 왕이 명령을 내리면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어 왕의 통치에 백성이 복종해야 진정한 왕국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넓은 왕국을 허락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창칼로 꼼짝 못하게 무릎을 꿇려야 정복이었지만, 이제 그런 의미의 정복은 사라졌습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과거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이 서구에 미치지 못했을 때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미국의 음악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미국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빚이 많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과 같은 나라에 대출을 많이 받아 더욱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장관을 세우는 일까지 전부 다 간섭을 받게 됩니다. 당장 빚을 회수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무너지므로 경제 개통의 장관들을 새울 때에 미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하고 있어도 사실상 경제적으로 외국에 예속된 것입니다. 또 나라가 있기는 있는데 외적의 침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다른 나라에게 국방을 의지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예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변화된 정복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판단과 의를 구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되기를 사모했습니다. 그 당시 아주 외진 광야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고 나라가 불안정하거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한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라는 구절은 이제 그런 광야에 있는 작은 무리들까지도 굽히며 복종한다는 것으로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전에 필리핀에 아웃리치를 갔는데 ‘민다나오’라는 꽤 큰 섬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외국 사람들도 잘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유는 그곳까지 국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반군들이 오래전부터 지배해서 자기들끼리 불법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거둬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해 싹 토벌을 해서 그곳을 국가의 권한에 복종시켜야 하는데 수시로 전투를 해도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땅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원수들이 있습니다. 나라로서 그 나라에 원수가 되는 나라가 있고, 왕국 안에 왕에 대해 반감을 품고 원수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는 것은 그들이 티끌을 핥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티끌은 ‘아파르’라는 단어이며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먼저 존재적으로 가장 비천한 것을 암시합니다. ‘내가 티끌같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티끌을 핥는 다는 의미는 첫째, 그것을 핥는 자와 티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먹을 것이 없어서 티끌을 핥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행하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굴복을 했으니 이제 이 왕의 권세가 그 나라에 가득해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그래서 역사를 보면 왕들이 행복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북한도 지금 비슷한 형편으로 끊임없이 누구도 못 믿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옛날에 금나라가 고난을 가지고 청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청국의 왕궁인 자금성은 바닥을 두께가 3-4미터정도 되는 돌로 깔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누군가가 성을 뚫고 잠입해서 황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할 때도 돌연사 등등을 방지하기 위해 침실 창살 너머로 궁녀 세 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24시간 감시를 받았으니 행복했겠습니까?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감시하는 사람을 만들어 끊임없이 고발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또 그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이렇게 두 겹 세 겹으로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게 했습니다. 죽여야 할 한 사람만 포함되어 있다면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안 죽이기 위해서 죽여야 할 사람이 풀려나면 이것이 왕에게는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궁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르기가 어려운 일이며 또 그렇게 올라서 왕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땅이나 캐어 먹고살면 누가 와서 죽일 일은 없지만 왕 곁에서 영광을 받던 사람은 왕의 마음이 변하면 한 번에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궁은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이런 원수들을 하나님이 정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는 바다를 제패해서 작은 섬들 까지 모두 다 세금을 낸다는 이야기이고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는 왕국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던 솔로몬을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서 애굽을 지나 아래쪽으로 많이 내려와야 했기에 솔로몬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곳을 직접 지배했던 것은 아니고 ‘어쩌면 그렇게 탁월한 판단력과 의로 통치를 해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을까? 정말 당신을 존경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왕국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화) 오래전에 북한에 갔는데 수해를 당해서 남쪽에서 식량을 많이 도와 줬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핵폭탄이 무서워서 남한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렇게 어느 나라든지 자신의 나라가 강성해져서 조공과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번영과 영광을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할 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국민소득이 삼만 불이 되고 사만 불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항상 정치 지도자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판단과 의에 입각한 통치로 나라에 구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런 나라가 되도록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고 탈세를 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