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10. 에스라 강해
곧 내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스 10:3-4)
녹취자: 박은희B
이제 일장에서 깊은 에스라의 그 회개와 그리고 그 회개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중에 많은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같이 이렇게 회개하고 또 모여 서게 되었다 이것을 여기서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 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1절 마지막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큰 무리가 에스라의 지도를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신앙이 없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자기가 뭔가를 행할 줄 안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자기가 마땅하다, 그리고 그렇게 행할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신앙이 다시 새로워지게 되니까 정말 영적인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관과 확신이 강하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그리고 그것을 믿는 신앙, 이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주관과 확신이 뚜렷한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주관과 확신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인간의 고집입니다. 불경건한 고집들. 그런데 말하자면 사사기 마지막에 뭐라고 말합니까? “백성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이 사사기에 마지막입니다. 여기서는 지금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정반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더라.’ 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더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보내신 사람의 지도를 기다리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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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10장 1절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많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참답게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타박하거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깊은 고백,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런 삶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영적인 지도력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있게 되었을 때에, 이제 2절서부터 본격적으로 그 전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라는 사람이 “소망이 있나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이 있나니”그랬는데 이것은 사실 처음서부터 소망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깊이 한번 절망하고 그리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 하는 계시적인 비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 하여 이 땅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나니” 그것은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그러니까 절망도 두 가지입니다. 파괴에 이르는 절망, 또 하나는 창조와 재건에 이르는 절망입니다. 그래서 뭡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가슴이 찔려서 절망한 것,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와 회복에 이르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가서 목매어 죽으니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완전이 그것은 파괴적인 절망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에서 요구되는 절망은 바로 이런 전자와 같은 절망이다 얘기입니다. 절망을 하면서 언약의 하나님이 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절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이어서 보면 3절에 그러면서 이제 “곧 내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것은 지난주에 했습니다. 그렇죠?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말하자면 기준이 생겨나게 된다라고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꾸 영적인 지도자들을 세우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은 결국은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운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윗필드의 교단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 다음에 웨슬리의 원래 교단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는 줄 아십니까? 나중에 감리교를 자기가 만들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왜 그런 것들이 잘 기억이 안 되느냐하면 기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사람들은 너무나 분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우리가 좀 생각을 좀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뒤편으로 가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그 후반 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그랬습니다. 이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 지난 시간에 아마했을 것입니다. 묵상을 좀 요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이렇게 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같이 죽는 게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를 그런 입장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부흥,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참된 회개 이런 것들은 이렇게 근본적인 변화들을 가지고 올수 있다 내용입니다. 신앙부흥이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근본적인 일들에 대해서 치유가 가능하겠는가? 인간은 생각보다 자기이익에 대해서 참 철저한 존재입니다. 꼭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 그렇게 정들어서 살던 그런 아내, 그런 사람들을 물론 그중에는 이제 이방여인을 얻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부부가 불화한 사람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 가족을 워낙 사랑하고 아마 그랬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다 보통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내어 보내기로 우리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할 것이라” 바로 그 얘기입니다. “율법대로 할 것이라” 그러니까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 말씀의 권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율법에 이렇게 관심이 있었으면 왜 이방여인을 취했겠고, 율법에 관심이 있었으면 왜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서 거룩한 자손이 이방족속과 서로 섞이게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신앙부흥이 일어나게 되니까 말씀이 한 가운데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그리고 삶의 한가운데 서게 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될까요? 본질로 돌아가요? 그렇게 얘기해서 평신도들이 알아듣겠습니까?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끼리나 알아듣지.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열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열망, 간절한 바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신앙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말씀대로 행하여야 되겠다그랬는데 결국 보면 해석이 필요하게 되니까 올바른 해석에 대한 추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이제 실지로 자기의 삶을 그 말씀 앞에서 변화 받고 또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많이 깨달아 알아서 그 계명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애씀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한국교회가 성경해석에 있어서 엄격한 그 문자주의를 지향했고 그리고 또 성수주일이라든지 아니면 ‘discipline’ 성도의 그 뭐라고 그럽니까? 성도의 훈련, 성도의 생활, 성도의 혹은 치리, 이런 면에 있어서 아주 엄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기뻐했으니까 사실을 엄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법하고 교회의 법하고는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법은 사회가 악해질수록 법이 모질고 혹독해지지만, 교회는 교회가 타락할수록 법이 너그러워지고 융통성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현상이지요? 그거 맞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아니면 침례교에서 가장 오래되고 엄격한 신앙고백이 뭡니까? 별로 그런 게 없죠? 그런데 하여튼 고백주의적인 전통에 대한 반발이었으니까. 그런데 고백주의적인 전통에서 보면 그들이 세상이 타락하는 것을 보다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물론 고백을 했지만 그런 대다수사람들이 일치하게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속에 나오는 수없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잔캘빈의 기독교강요 속에서 한 천개가 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대일수록 성경이 모두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인 논쟁을 하다가 결론은 성경으로 돌아와서 내는데, 지금은 신학적인 논쟁에 성경을 끌어들이면 촌스럽게 여겨지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말씀을 어떻게 해설하는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성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 그리고 뭐 이렇게 지식의 현란한 얘기나 좋아하고 말씀을 그대로 해설하는 강의나 그런 설교나 이런 것들을 우습게 취급하는 그런 시대에는 결국 뭘 보여 주냐 하면, 얼마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기를 사모하지 않는가? 또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보십시오. 사보나롤라에서 내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사보나롤라 시대의 사람들이 변화를 받으니까 설교집이 막 그냥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읽는 게 설교집입니다. 왜? 설교집을 왜 읽습니까? 성경말씀을 해설한 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설교도 성경을 중심으로 파고드는 그런 설교들은, 결국은 부흥시대에. 내가 늘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야, 너희들이 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에 가면 그렇게 해가지고 밥 먹고 살겠냐? 성도들이 우리보다 훨씬 낫다. 응?”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어찌하든지. 그것 보십시오. 교회에 역사에 보면 무슨 교리문제 같은 것으로 순교한 사람들이 성직자만이 아닙니다. 다 평범한 성도들이 요만큼만 바꾸자 그러는데 그저 목을 내놓았습니다. 그거 왜 그럽니까? 그것 괜히 유별나서 그러는 겁니까? 성격이 유별나다고 순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뭔가 그 속에 진리에 대한 불붙는 확신이 있으니까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으니까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라고 하면 얼마든지 들어가고 나오라 그러면 얼마든지 나오는 시대니까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이오타 헬라어에 이오타 하나 가지고 막 난리가 나는데 호모시우스 호모이우시우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다 사람과 유사하시다 그것 하나가지고 엄청나게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그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희미하게 만드는 그 어떤 기도들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기에 이르도록. 그러니까 그런 시대에는 말씀이 이렇게 한가운데 자리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이 이렇게 한가운데 자리에서 부각되는 것 있죠? 그러니까 자연히 그 시대에는 설교와 예배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저기 뭡니까? 간단하게 20분 정도로 그렇게 끝낼 수가 있겠는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뭐 이 이야기는 이 이야기하고는 좀.
그 다음에 하여튼 말씀이 한가운데 오게 된다는 것 그 애기를 제가 했습니다.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그렇죠?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누가 에스라를 뽑은 것도 아닙니다. 투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자연스럽게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여기에서 이제 에스라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에스라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에스라가 이렇게 드러나서 이는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그랬는데 이렇게 에스라가 지도자로서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그랬는데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 뭘 얘기했냐 하면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그랬습니다. “주장할 일이니”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이런 자기의 민족적인 깊은 회개, 그리고 죄에 대한 애통들이 에스라가 만들어 내거나 지어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지금 이들의 관심의 초점은 철저히 누구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보아서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이들이 사람을 의지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에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어떤 권위아래 순복하고 또 그렇게 순복할만한 지도자들이 생겨나고 또 그런 지도자들 밑에서 지도를 받고 싶어 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시대,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시대에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권위에 대한 깊은 거부입니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고,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될 때에, 이 사람들은 진실로 주를 주 앞에 각성된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뭘 원했느냐하면, 하나님의 세운 지도자의 권위아래 순복하면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생애를 보면 이 문제를 아주 참 확연하게 우리들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상한 그 말하자면 그 뒤틀린 민주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 뭡니까? 당신의 일꾼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구약에서만 원리가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의 직분을 단순히 성경말씀을 해설하는 정도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그 앞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고,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러한 통찰력과 그러한 방향들을 하나님이 보이신다라는 사실도 생각해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계시록에 7개의 나오는 그 사자, 사자를 사람들이 여러 방면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천사로 해석을 하기도 하고 수호천사, 그리고 그런데 나는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수호천사로 해석을 하면 하나님이 수호천사에게 요한으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셨다? 글쎄, 그것은 좀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지하는데 나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감독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교회 사자에게 그것은 에베소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돌보고 있는 실질적인 사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다만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그러니까 잔같은 사람들이, Zahn, 18세기 인가?의 주석가입니다.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래서 살다가 bishop 으로 봅니다. 감독으로. 그것은 사실 맞는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이렇게 영적인 권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람들이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닐수록 또 뭐가 생겨나는 것입니까? 교회에서는 반대편으로는. 권위주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꾸 밟아가지고 권위에 복종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런 이상한 그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권위에 순복하는 일들이 안 일어나니까 자꾸 권위주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사람들이 권위에 순복하기를 원하고 주께서 세우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에 이런 권위의 문제는 참 중요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여기죠? 그러니까 신앙부흥을 맞이하고, 그러니까 회개를 깊이 경험하니까 성도들이 성숙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결정이 있고 아무리 좋은 영적인 지도력이 있고 방향이 있어도 성도들이 거기에 대해서 성숙하게 반응하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성숙한 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결국 목회자는 성숙하지 못한 교회와 그 다음에 성숙한 자기의 이상, 그 사이에서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참 많이 느낍니다. 성경을 읽는 게 도움이 되느냐? 이렇게 반문을 했더니 거기에 또 걸려져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얘기는 성경을 읽는 것을 그만둬라! 그 얘기가 아닌데 그렇게 얘기를 듣다보니까 이것 말고 성경을 읽는데 뭔가 더 높은 차원이 있구나. 그러니까 나는 그게 안 된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야 할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괴적인 절망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시 설교도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를 해야지 너무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성숙한 반응을 보여야 된다.
그 한 예가 사도행전에 나오죠? 그렇죠?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그랬더니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기쁘게 여깁니다. 그것이 성숙한 것입니다. 요즘 같아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그랬는데 “아니, 뭐 심방도 하고 구제도 해야지. 목사님, 그러고만 어떻게 있으면 일이 됩니까?” 그러면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그런 문제가. 그것은 뭐냐 하면 자연스럽게 회심한 공동체, 크게 회개한 이 공동체가 다 회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모인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장면이 보여지잖습니까? 그렇죠? 하나의 유니티가 이루어지잖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에스라가 나가서 통곡하게된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를 받고 말이야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면 이사람 왜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려고하는 에스라와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갈려고 하는 사람사이에 자연스러운 하나의 유니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앞으로는 폭발적인 역사를 일으켜가지고 말하자면 민족적으로 이 회개와 부흥이 확산될 그런 조짐들을 보이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참된 부흥 이외에는 참된 유니티를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늘 기억해야 됩니다.
아무리 같이 먹고 마시고 같이 자고 같이 어떠한 것을 나눈다고 할지라도 참된 신앙부흥 아니고는 참된 교회의 연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부흥은 성령이 교회를 하나로 묶으시는 그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흥 속에서 밖에는 사실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 안에 펼쳐지는 것들도 사실 참된 부흥속이 아니고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사 읽어보십시오. 자기부인이 간통을 했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는 자기부인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한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간음을 했을 경우에 부부가 상대편을 버릴 수 있다지 버려야 한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러한 사랑을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면 아, 그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것은 신앙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때는 그러한 수준 높은 용서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이를 향해서 죽이려고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부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스테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오늘날은 사랑의 개념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확 부어진바 되게 하신다라고 하는 개념보다도 스스로 훈련을 받아서 인격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제자훈련에서 사랑도 가르쳐줘야지만 학점을 따듯이 계속 쌓여가는 그런 정도로 생각이 되어 지는데 물론 훈련은 받을 수 있습니다. 훈련은.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떤 영적인 해할게 없는가? 또 사랑할 때 어떤 기쁨은 있는가? 그렇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말로 손양원 목사님처럼 자기아들을 죽인 그 사람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는 그런 것, 그런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흥을 경험하지 않고는 사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이, 그런 경험이 없이 인격을 가지고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을 하니까 항상 우리들이 한계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경험한 그 사랑, 거기에 빚지고 있는 사람,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금 완전한 하나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비로소 이들이 육신의 일에 관심이 없어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니까. 네? 그것을 그렇게 보게 되는 시각이 생긴다라고 하는 자체가 그것 참 대단한 일입니다. 신앙을 말하자면 생명적인 일 이상의 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하여튼 그 이외에도 살펴볼 것은 참 10장 4절까지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5절서부터 한번 봅시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시작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 내리라 하매” 거기까지 봅시다. 8절까지 봅시다.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보십시오. 5절에서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다”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맹세를 하게 한 것입니까?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한 그 발언의 내용을 정말 너 이렇게 할꺼냐?하고 맹세하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해서 일단 그들이 고백한 것을 묶어버리고, 거기에 속박해버리고 그리고 이제 이어서 이야기 한 게 ‘이에 에스라가 성전, 하나님의 전 에서 일어났다’ 뭔가 이제 갈 길을 찾은 것입니다. 지금. 그렇죠? 기도를 풀었다기보다도 이제는 내가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아마 들었던 가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일어난 것입니다. 6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만사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기도할 때가 있고, 그 다음에는 기도 끝에 결단하고 이제는 행하여야 할 때가 있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성전 문 앞에 엎드려서 그렇게 깊은 근심과 애통 속에서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는 이런 일들을 충분히 한 이후에 그 다음에 이제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을 때 그 모습은 예전과는 이제 좀 다른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다른 모습이었습니까? “전도사님, 어떻게 좀 다른 모습이었겠습니까? 어떻게 다른 모습이었습니까? 쉽게 이야기 해 볼까요?” 어떻게 다른 모습이었냐 하면, 에스라가 성전 문 앞에 엎드렸을 때는 이젠 뭘 해야 되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하여튼 슬프고 기가 막힌 것입니다. 자기의 고백대로. 슬프도소이다 또 기가막혀 앉았더니 그러면서 하염없이 울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울고 여러 가지 상황이 진전되는 것들을 딱 보니까 이제는 결단이 서는 것입니다. 딱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에스라에게는 뭔가 해결의 복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스라가 말이야, 요즘 같은 말로 하면 성전 문 앞에 엎드려서 잠깐 엎드린 다음에 그 다음에는 제직회를 소집하든지, 당회를 소집하든지, 족장회의를 소집한다든지 해가지고 의견을 내봐라 하면서 찬반토론을 붙이고 다수결투표를 해가지고 최종안을 확정을 해서 개혁추진위원회 이름으로 포고문을 발표한다든지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누구하고 의논하지도 않고 거기 그대로 탁 엎드려서 충분히 기도가 끝났다 생각하고 딱 일어섰을 때에는 그 얼굴에는 이미 옛날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 비통하게 울부짖고만 있던 그 에스라가 아니라 이제는 뭔가 모종의 결단이 서려있는 에스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실 영적인 지도자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눈물 흘릴 줄 아는 그런 착하고 그런 것,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일단 눈물 흘릴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딱 닦고는 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어났는데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 가니라’ 글쎄, 뭐 이 사람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여호하난이 누구인지 느헤미야에도 한번 나옵니다만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이라 그랬는데, 여호하난이라는 말이 느헤미야 12장 22절에 나옵니다. 그냥 명단만 나옵니다. 알 수 없습니다. 요하난이나, 여호하난이나, 그 다음에 요한이나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훼+헤눈눈, 하난, 은혜를 베풀다라는 동사에 그 합성어입니다. 뭐 안 나옵니다. 별로 특기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무슨 일을 이 사람이 하냐 하면 6절 하반 절에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그랬습니다. ‘떡도 안 먹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이것을 금식기도라고 봐야지 맞겠죠? 그렇죠?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아하! 뭔가를 궁리해야 되겠는데 너무 답답하니까 좀 먹을 것도 잊어버리고 마실 것도 잊어버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고, 기도했다는 말은 잘 안 나오는데 그러나 에스라의 그 멘탈리트로 볼 때에 여기 분명히 뭐라 그랬냐하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였다’ 이 근심은 자연스럽게 죄로 말미암는 근심이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뻔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 사람이 다시 기도의 강도를 높이는 일들이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뭔가 이제는 결정을 한 것 같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더 깊은 기도로 들어가면서 이제 금식기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사실 그렇게 비참하게 울었을 때 제대로 뭘 먹고 그랬을 수는 없는데 그런데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라’ 그랬으니까 이것은 아마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했던 것보다도 상당한 기일동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들어가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라’ 민족의 죄를 인하여서 그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던 모세의 모습을 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는데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사로잡혔던 자의 죄 때문이었다.
오늘날 대개 금식기도가 이러한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금식기도는 거의 없습니다. 대개 취직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든지, 목회지를 달라고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무슨 뭐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금식기도 한다든지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많이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에 붙들려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우리 같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가? 한번 기억을 해봐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로잡혔던 자의 죄, 그것이 너무 근심이 되어서 금식을 한다 또 금식을 하면 그렇게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기대들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신앙의 세계는 얼핏 보면 우리와 같은 것 같지만 그러나 전혀 다른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고 오늘날 말만 무성한 이 세대들이 어떻게 에스라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더듬어 알뿐이지 그 이스라엘의 죄,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 이것이 에스라로 하여금 에스라에겐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으로 하나님 앞에 떡도 먹을 수 없고 물도 마실 수 없는 그러한 문제로 그에게 다가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에스더의 기도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차원 높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려는 위기에서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주님이 무슨 지금 뭐 땅을 가르셨습니까? 아니면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셨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징조가 일어났다면 또 그럴 수도 있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응보 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절박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참 얼마나 중차기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중보기도가 사실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죠? 이게 신앙부흥에 쓰임 받는 사람들에 말하자면 그 영적인 세계입니다. 그 세상의 죄,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과의 죄, 그것을 인하여 깊이 애통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바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여튼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여호하난의 방의 문을 열고 나온 것입니다. 그 여호하난이란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 방속에서 그가 떡 먹기도 거부하고 물도 마실 것을 잊어버렸을 그때에 하나님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 그대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방에서. 그리고 이제 딱 나와서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그랬습니다.‘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이제는 모종의 결단이 딱 서려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여기서 우리들은 참다운 어떤 지도자의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단은 단순히 영적인 결단이 아니라 영적인 결단과 함께 아닥사스다왕이 그에게 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렇죠? 재판하고 재산을 관할할 수 있는 그 권한을 비로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에? 신앙적인 목적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하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 내리라” 그랬는데 공포내용이 좀 이상 하쟎습니까? 그렇죠? 공포내용이 이상합니까? 뭐라고 그래야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내쫒지 않으면 가만 안 내버려 두겠다 이러면 간단한데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삼일 내에 오지 아니 하면, 모아놓고 뭘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모아놓고 그 뒤에 나오지 않습니까? 10장에. 에스라가 뭐하고 있습니까? 지금.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하나님의 뜻을 지금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왜 에스라가 우선 삼일 내에 오라는 이야기를 먼저 했느냐? 그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개혁이 아니라, 단순히 잘못된 것들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결국 에스라는 결국은 그렇게 되어 진 세상이 변화된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변화되어서 마음이 변화되고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마음의 죄악을 깊이 깨달아 알아서 회개를 하고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돌이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라가 삼일 내에 와야된다라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8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모이는 장소가 하필이면 왜 예루살렘이었을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죠? 성전이 있고 또 하나님이 그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 그러니까 주님이 베푸신 은총을 예루살렘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고는 기대를 걸 수가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재산을 적몰하고” 왜 삼일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오늘과 같이 교통이 발달되지 않으니까 의사가 있어도 결국은 지금과 같이 그렇게 발달한 때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오고 싶은 의사가 있어도 이제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린다라고 하는 것들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내리라.” 재산을 적몰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 아닥사스다왕이 줄 수 있는 세속적인 권세였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내리라 이것은 말하자면 출회할 수 있는 종교적인 권한이었습니다. 모든 권한을 다 동원해가지고 너희들을 모아야 되겠다 이것입니다. 결국은 앞에 나온 에스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결단입니다. 그렇죠?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서 재산을 정벌한다 결국은 전부다 재산을 빼앗아버리겠다 라고 하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거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라고 하는 것이고, 또 이스라엘에서 쫓아 내버린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가장 극단적인 최상의 그러니까 최고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문면입니다.
필요할 때 지도자는 이렇게 정말 결단할 수 있는 그러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기는 사실은 그런데 무엇입니까? 신적 용기입니다. 신적용기.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교회를 움직이는 그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적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보나롤라 보면 알지 않습니까? 어떻게 인간으로서 연약한 인간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물론 그 사람도 이제 잡혀가 가지고 때로는 너무 무서워가지고 번복한 적도 있고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신적인 용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신 용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죽음을 우습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죽음을 우습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죽음을 우습게 생각하고 그리고 늘 견딜수 토마스 모아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모어를 이제 사형선고를 내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한테 가서 악수를 청하면서 스테반과 바울이 천국에서 쑥스럽게 악수를 했듯이 우리도 아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담대하고 신적인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 줄만할 그때에는 더더욱 그런 용기와 깊은 결단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지금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흥을 추구하고 그러다가 벽에 부딪혀서 뭔가를 포기하고 하는 그런 일들도 그런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런데 신적인 용기의 결핍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신적인 용기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만용은 신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만용. 괜히 막 찔러보는 것, 이런 것들은 만용입니다. 만용. 뭔가 간절한 하나님의 그 열정과 정염, 그 시각, 그 마음, 그것을 가지고 타오르는 가운데, 그런 것 있잖습니까? 괜히 찔러보는 것 많지 않습니까? 보면. 비아냥거리고 권위에 대해서 한번 도전해 볼려고 하는 그런 것, 결국 뭐냐 하면 신앙부흥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이라 하는 것은 한 가지를 향해서 일관된 길을 쪽 가는데 거기 부딪힐 때 그것들을 깨뜨리고 지나갈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신적인 용기인데, 괜히 비판과 비판을 위한 그런 화살 던지기식의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모여야만 됐단 말입니다. 모여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로부터 들어야 되는데, 모이지 않고는 얘기가 안 되니까 그러니까 이런 깊은 결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일단 모이라 이것입니다. 결국 거기에 대해서 그 모이는 모임이 보통 의미가 있는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하자면 세속적인 권세와 종교적인 권세를 모두 사용을 해가지고 극단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9절까지만 합시다. 우리. 9절. 9절 읽읍시다. 시작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구월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를 인하여 떨더니” 네, 됐습니다. 어! 참 재미있지요? 난 이것 읽을 적마다 재미있습니다. 어디가 재미있습니까? 우선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다 모였습니다.’ 하여튼 모여야 될 사람들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에스라는 지금 날짜까지 적어놓았습니다. ‘구월 이십일이라’ 성지순례를 안 갔다 와서 참 구월 이십일쯤 기후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떠합니까? 춥습니까? 얼핏 듣기로는 꽤 선선한 때라 이렇게 얘기를 들었는데 하여튼 잘 모르겠습니다. ‘구월 이십일쯤 됐는데 무리가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앉아서’ 그랬습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역시 무슨 일은 역시 하나님의 전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비록 그 성전이 제구실을 못해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완전히 다 쑥밭이 되어버리고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뭔 일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엎드렸던 그 자리에 이 많은 백성들이 에스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는 사실을 한번 기억해 보라 이것입니다. 거기 엎드렸던 그 자리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였는데 무리가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앉았습니다. 앉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쉽게 해결될 일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는 이야기는 없으니까 어쨌든지 간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앉아있었던 심정이 어떤 심정 이었겠느냐? 일이 뭔 일이 일어났나? 그러고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에스라가 이렇게 애통했다는 소문은 들렸고, 우리가 이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던 많은 사람들의 함성들이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있었던 그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광장에 앞에서 떠는데 하필이면 큰비가 거기에 펑펑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설교할 때에 천기를 움직이셔서 하늘의 말하자면 그 기후를 움직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에 집중할 수 있게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가산은 전몰하겠다는 포고를 듣고 달려와 가지고 와보니까는 이미 회개한 사람들이 우리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데, 그리고 전 앞에 모여 앉았는데 이제 임박한 심판에 대한 인식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만 안 내버려 두신다 이런 임박한 심판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때에 비가 또 막 쏟아지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그 심판이 두려워서 떨고, 비가 오니까 추워서 떨고, 영 육간에 떤 것입니다. 참 대단한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은혜. 그래서 저는 여담이지만, 수련회나 야외에서 무슨 집회할 때 기후를 위해서는 전 기도 안합니다. 비가 안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러다 만약에 비가 오면 얼마나 심란할 것입니까? 초장서부터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안 해주셨으니 그 수련회가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냐 하면 비가 오든지 안 오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여튼 뭐 한여름에 눈이 쏟아지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잘 집중할 수 있는 기후와 여건으로 주님이 만들어 주시옵소서.
나는 오히려 비가 쏟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를 본 수련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러 번. 비가 막 쏟아지니까 애들이 밖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말씀에 관심이 쫙 가는 것입니다. 공놀이를 할 수 있나 산에를 올라갈 수 있나 수영을 할 수 있나 그래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후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도도 못하게 합니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비가 오는 게 난지 아니면 우박이 쏟아지는 게 난지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까 그저 무슨 기후가 되었든 지간에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기후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번개가 치고 낙뢰가 떨어져서 더 말씀에 집중을 잘 할 수도 있고, 난 그런 것은 뭐 걱정을 안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그런데 가서 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기후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많이 하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비가 막 쏟아지는데 은혜가 됩디다. 비가 막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를 치는 날에.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이 사람들이 떨었던 것은 육신적으로만 떨었던 것이 아니라 이일과 그 다음에 큰 비를 인하여 동시에 떨었다. 그래서 그 목사와 설교에 보면 그 누구입니까? 아니 로이드 존스가 아니라 윗필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윗필드가 요즘 윗필드의 설교를 원고를 주면 출판하겠다고 그랬더니 윗필드가 뭐라고 그랬냐하면 천둥과 번개소리도 활자화 할 수 있습니까? 그게 영적인 천둥과 번개인줄 알았더니 나중에 원래 글을 보니까 그게 아니라 진짜 천둥과 번개와 빛, 자연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윗필드는 그런 것을 자주 경험했다고 그럽니다. 말씀을 전할 때 천둥이 때리고 이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을 더 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상당히 예리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그 이야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이미 심령이 벌써 각성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여기 와서 아직 에스라가 설교를 시작을 안했는데 벌써 거기 와가지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거기 주저앉아 가지고 처량하고 심란한 기분과 함께 말하자면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서 벌써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이러한 자세로 지금 앉아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 뒤에 안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이 그렇게 준비된 상태에서 설교자가 나타났다 뭐 그것은 누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실 비슷한 얘기만 하면은 꼭 횃불을 갖다가 여기 기름이 쫙 깔렸는데 엄청난 횃불을 갖다가 거기다가 대지 않아도 그저 성냥불만 탁 그어대도 그냥 확 불이 붙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지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은 그 두 가지가 다 결합될 수 그러니까 설교자는 계속해서 막 번쩍번쩍하는데 불이 안 붙을 때가 있고, 밑에는 석유를 다 준비해놓고 휘발유까지 뿌려놓고 짚불 펴놓고 기다리는데 ‘아이, 이거 물이 떨어져야지’ 그런 양쪽집회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지난 년에 오늘 우리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