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에스라 강해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9:1-3)
녹취자: 백지영
9장이 이제 신앙부흥의 진정한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 시발을 이야기 할 때에 이 일 후에 그런 말로 시작을 합니다. 성경 원문에는 ‘이것들이 마쳐진 때에’ 이렇게 나와요. 이것들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겠느냐 말할 때 35절 이하에 나와 있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시작되었던 여러 가지 많은 일들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되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올라오는 과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8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 이제 쭉 나오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성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금이라든지 기명이라든지 은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바쳐지는 문제들, 또 여러 가지 아하와 강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들을 해치기 위해서 매복했던 자들의 손에서 그를 건지시는 일이라든지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일어난 그 후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올라오는 광경을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때에” 그러면서 쭉 나오는데 처음 에스라 1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의해서 감동되고 그래서 에스라 1장에 나오는 바벨론 포로 귀환 때서부터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렇게 감동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 그 자체가 사실은 깊은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신앙에서 출발을 하기까지에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되겠다고 하는 신앙적인 깊은 결단이 일어났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들이 가능했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올라오고 또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잠시 이야기가 6장까지에서 부터 그치다가 7장에서 다시 계속됩니다만 그러면서 올라오는 과정도 보면 아하와 강가에서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특별히 우리들이 여기에서 세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금식이라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는 마음이 겸비해지는 것, 그 다음에 간구하는 것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이들 속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그 과정이라든지 하는 그 자체가 상당히 신앙적인 분위기였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하였던 많은 것들이 8장에 와서 상당히 많이 해결이 되요. 그래서 염려하였던 대적들도 자신들을 훼방하지 못하게 되고 그리고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많은 여러 가지 물질들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새롭게 준비되게 되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외부의 조정으로부터의 지원도 있게 되고 그런데 이제 9장에 와 가지고 말하자면 앞의 이야기하고는 단락이 떨어지면서 9장과 10장은 전부 다 마지막 끝날 때까지 한 토막의 이야기로 계속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9장과 10장을 살펴보는 것이 에스라의 신앙부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느헤미아 8장에도 보면 부흥이 또 한 번 나타나는데 그러나 일단 에스라9장을 보면 ‘이 일 후에’ 그랬으니까 결국은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전을 돕는 이런 사역들을 8장 36절에서 하게 되는 데 이런 일들이 있게 된 그 후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른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이렇게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에스라가 이끄는 신앙공동체는 상당한 수준의 신앙공동체였음을 우리들이 이미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이미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기 전에도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고 올라오는 과정 속에서도 그렇게 깊은 기도와 간구와 겸비함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왔으니까 상당한 수준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또 그렇게 고토로 돌아올 때에 이들의 기대가 단순히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영적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가는 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 사람들이 돌아와서 공동체를 새롭게 이루고 이 속에서 에스라의 지도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될 때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순결한 신앙적인 공동체가 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모일 수 있는 이러한 의미의 신앙공동체의 회복은 실로 정말 70년 만에 있는 장대한 일이었는데 이런 속에서 그들이 잠시 기쁨을 누리면서 그리고 순결하게, 거룩한 백성답게 신앙생활을 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 장을 읽을 적마다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뉴잉글랜드의 사람들의 신앙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마 그렇게 수많은 대서양의 물결을 헤치고 신대륙으로 건너갔을 때에 그들은 참 커다란 감격 속에서 신앙의 자유, 이것을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모르는데 갑작스러운 비보가 에스라에게 다가왔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였다”(에9:1-2) 결론을 이야기하면 잡혼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8장에서 이렇게 감격적인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영광스러운 사건 이후에 무슨 특별한 일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33장에서 34장 창세기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이 나와요. 그런데 여기에는 에스라서에는 전체적으로 보면 구약에서 흔히 얘기되고 있는 우상의 사건이라든지 우상숭배의 사건이라든지 바알이라든지 아스다롯이라든지 아세라라든지 하는 그런 우상들의 즐겨 나오는 이름 그런 것도 별로 나오지 않아요.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나오지 않아요. 그런 가운데 9장에서 신앙적인 분위기가 확 반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심각한 국면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뭘 볼 수 있느냐 하면 에스라가 신앙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삼대 혹은 사대 계속되는 생활근거지를 다 떨쳐버리고 그들의 손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그 때에는 뭔가 신앙적인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올라온 이후에도 에스라의 순결한 성품과 율법에 깊이 착념하는 에스라의 경건성으로 보아서 이 백성들이 계속해서 신앙 안에 머물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로 머물러 있으라는 권면을 쉼 없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있으라고 권면했던 것처럼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권면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 하나는 신앙부흥을 필요로 하는 영적인 상태의 악화, 이런 것들은 사실 엄청난 범죄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모양으로 좋아 보이고 교회가 감격적인 일을 맞이한 때조차도 그 안에는 이미 신앙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요인들이 이미 배태되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교회의 상태 속에서도 이미 시간이 지나고 신앙의 감격과 열기가 식어지면 곧 이어서 마치 병균이 번식하는 것처럼 그럴 수 있는 가능성들을 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부흥이 한시적이고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성격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가 순결하고 외적으로 완전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 안에는 타락의 가능성들 그런 요건들이 이미 있어서 이런 것들이 장엄한 신앙부흥의 불길이 그치게 될 때 이런 인간의 죄성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일단 처음에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는 그 안에 물론 어떤 상업적인 이유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겠다는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공동체의 분위기는 상당히 영적인 회복이었다. 뭘 보면 알 수 있어요? 성전 지대를 놓을 때 통곡하는 노인들도 사실은 신앙적인 것 때문에 그런 것이 그들로 하여금 통곡하게 만들었고 또 기뻐하며 환호성을 치는 젊은이들도 역시 깊이는 틀리고 방향은 같지 않았지만은 신앙적인 동기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예루살렘 자체가 이미 자기네들이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그 땅이 여전히 자기네 땅이 아니라 바벨론 이후로 소위 이야기하는 사민정책 그래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가지고 국제화하는 이런 정책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 많은 이방족속들이 와서 살고 있게 되었고 특별히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위 이야기하는 민족적인 아이덴티티를 잊어버렸다고 하는 사마리아 콤플렉스에 의해서 상당히 박해와 그리고 또 함께 살아야 하는 환경에의 제약 이런 것들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턴이 비슷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세겜에 가서 살면서 그런 문제를 야기하게 되듯이 이 사람들도 또 그 땅에 있는 여러 백성들 누구냐 하면 가나안 사람, 헷사람, 브리스, 여부스, 아몬사람 이 사람들이 다 누구냐 하면 하나님께서 옛날에 여호수아로 하여금 다 진멸하도록 명령하신 그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자손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사실 하나님 앞에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백성들 속에 섞여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아이덴티티를 갖는다는 것이 그것이 내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얘기에요. 그래서 언젠가도 제가 그런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성경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러는데 그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그리고 추구하는 것 그런 것들이 전부 다 그 시대를 좇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아들이 되지 말라, 그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그 시대가 너를 낳았으나 그 시대의 아들이 되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결국은 될 수 있는 방향은 하나인데 시대라고 하는 물줄기 속에서 그것을 거스릴 수 있게 만드는 어떤 내적인 다른 힘이 시대의 물줄기보다 더 강한 어떤 힘이 자기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헷사람, 브리스사람, 여부스사람 이 많은 사람들 속에 있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으로 이들을 올려 보내실 때에 이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러한 다양한 많은 이방민족들, 여호와를 알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는 이방족속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셨을 리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셨어요. 성경에는 뭐라고 자명한 이야기가 안 나와 있지만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독립시키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바벨론, 매데, 바사, 헬라, 로마 계속해서 그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왜 포로생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시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끔 기적적인 방법으로 길을 터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문제를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우리들이 먼저 살펴야 됩니다. 사실 이 성전이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 대두된 것은 물론 그 전에도 여러 가지 단을 쌓은 이야기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가운데 이것들이 주어진 것은 역시 모세 시대의 성막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성막 속에 담겨져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신다는 것 물론 이것은 제사를 통해서입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왕권과 제사장의 권한이 분리가 되지 않았으니까 사실 왕권도 다스리는 통치도 신정정치였으니까 통치의 모든 권한도 사실은 성소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쳐진 그 회막, 백성들 가운데 쳐진 이 성막, 성막은 하나님의 거하심이었고 그것은 또 하나님의 보좌였어요. 그리고 그 보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전으로 구체화되어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은 우리들에게 상당히 장엄한 그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흩어지고 그리고 이방의 민족들이 거기서 오히려 약속의 땅에 올라와서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아서 뿔뿔이 흩어진 그 민족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이 이방민족들의 풍습과 그들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으로 인하여서 더럽혀진 그곳에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그 모든 이방과 열방 가운데 하나님이 다시 임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 그 나라의 회복, 그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그것이 더 발전되면 그 성전을 통해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오시는 왕이신 메시아, 이것을 예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도록 허락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돌아온 자들, 그들의 소명은 대단히 역사적인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 그리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앙의 정도라고 한다면 그들이 그 하나님을, 70년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야훼도 다 잊혀져가고 있고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는 더더욱 잊혀 가고 있고 그리고 기억도 되지 않고 있는 야훼의 이름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짓는 것과 함께 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서 진정한 신앙, 신앙의 성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신앙의 성전들이 함께 지대를 놓고 쌓여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결국은 성전을 짓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그런 성전을 지어가는 과정들을 통해서 같이 신앙이 쌓여져 가기를 원하시는데 성전이 지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방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가운데서 신앙적인 아이덴티티를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던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던 신앙들도 다 식어지고 그리고 자기가 그곳으로부터 보냄 받았던 역사적이고 신앙적이고 구속사적인 소명도 더럽혀지고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밑그림입니다. 그 밑그림 속에서 드디어 에스라가 시대 상황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을. 그래서 이미 사회가 일반화되게 되었는데 그가 이러한 일들을 딱 보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의 보고를 받은 에스라의 태도가 3절 이하에 나오게 되요.
그런데 우리가 먼저 이런 보고에 접했던 에스라의 말하자면 신앙적인 반응, 그리고 그 반응이 어떻게 신앙부흥과 관계가 있는가. 그런 것들을 보기 이전에 먼저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헷사람과 브리스사람 가나안 여부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떠나지 아니하고 그랬는데,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이 말은 사실은 장소적인 말이라기보다는 삶이 이미 그 땅에서 통용되고 있는 비신앙적인 관습 이런 것들과 이미 강하게 집착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탁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제기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그랬습니다. 왜 여기서 자기네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는 그 문제를 거론하기 보다도 왜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 문제를 강하게 거론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 비슷한 문제가 창세기 6장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문제들, 왜 하나님의 딸들이 사람의 아들과 혼인하는 문제는 거론을 안 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는 문제, 선택된 백성들의 아들이 선택되지 못한 이방의 딸들과 결혼하는 문제를 이렇게 집요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정하고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가정교육,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자식은 혈통을 따라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 되요. 혈통은 유대인인데 아버지는 돈 벌러 나가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 아이를 가르치는 어머니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아이는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혈통적인 개념보다는 교육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그 아이는 이방인의 피를 물려받았어도 유대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머니에 의해서 반드시 유대인의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방의 딸들이 아내와 며느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가정 자체가 이미 기존의 전해 내려오던 신앙적인 분위기, 율법을 중시하고 그 율법에 의해서 가정들이 다스려지고 통제되고 그리고 자녀들이 양육되는 이런 기본적인 야훼의 신앙교육의 기반들이 다 무너지게 된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도 그렇고 에스라도 그렇고 상당히 가정이 신앙을 버리고 세속화되어져 가는 데 있어서 가정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하는 면을 그들에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에스라가 왜 이렇게 몰랐을까? 이렇게 되도록 몰랐을까? 어떻게 생각해요?
(질문)
(답변) 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에스라가 왜 이것을 진작 몰랐을까? 분명히 이 사람은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경건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타계주의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의미냐 하면 에스라의 삶,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사모하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에스라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고차원적이고 높은 신앙의 목표, 이것들 속에서 오히려 현실과의 괴리, 소위 이야기하는 타계(他界, other worlds), 신앙의 두 가지가 같이 조화 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초월적인 성격과 역사적인 성격입니다. 역사적인 성격을 무시하고 초월신앙이 되어 버리면 세상과 선교회 같은 그런 것이 되고,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초월적인 신앙을 잃어버리고 역사적인 데로만 떨어지면 해방신학이나 이런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땅만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런 초월적인 신앙과 역사적인 것들이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이러한 밑의 기반들이 약화되어 있는 타계적인 신앙의 오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언젠가 이 9장을 읽으면서 에스라의 신앙에 대한 중대한 의문 그런 것들을 한번 제기해 본 적이 있어요. 한 번 더 깊이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아요. 마치 이것은 왕궁 속에서 묻혀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것과 유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신앙의 제도나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 기독교의 제도하고 이때하고는 엄청 틀리잖아요. 계층별로 분화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처럼 세속 속에서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완전히 구별된 삶으로써 드려진 그런 삶인데, 옛날에 루이 10세나 이런 사람들이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니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왜 빵만 자꾸 달라고 하느냐고 그것과 똑같은 이야기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진지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주 주변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목회자들 속에서도 이런 타계적인 성격의 신앙생활을 하시는 고상한 분들에게서 이런 한계를 저는 참 많이 보아요. 그래서 제가 아는 어느 신학자인데 그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87년도에 학생들이 데모하고 하는데 민주화시대 때 왜 데모하는지를 몰라요. 신학교 선생인데 왜 데모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한 번 그 집에서 자면서 왜 데모하는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몰랐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도 그 일에 좀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고, 그것이 88년도 일이었어요.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타계적인 그런 성격이.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지도자는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는 양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런 타계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서 완전히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런 어리석음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 문제를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를 의식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섬기는 교회가 해방신학이 쓸고 지나가서 초토화시킨 교회거든요? 그런데 새순이 돋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느껴요. 너무 너무 어렵다. 차라리 어떤 의미에서 말씀에 대해서 무관심한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필터가 있어가지고 다 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이 순수한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신학과 교회들을 향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데, 역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장을 이해해 가지고 그것이 모두 동일한 역사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고민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토론)
(답변) 너무 경건해서, 신앙이 너무 초월적이어서 역사에 소홀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너무 신앙이 초월적이어서, 박윤선 목사님이 대단히 비슷하신 분이셨지요.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가면 나머지가 다 지푸라기 같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앙부흥으로 딱 가니까 지지한 것 상담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다 우습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우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라가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느냐? 9장 1절을 보세요. 방백들이 얘기했어요. 히브리어에 나오는 샤르예요. 그런데 정확하게 그 샤르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분명한 것 하나는 이들은 행정적인 책임을 맡고 있고, 재판에 권한도 있는 통치조직에 있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와서 일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뭐라고 했느냐하면 2절 하반 절에 보면 방백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의 이런 죄들은 이미 전 계층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회가 부패한다. 그것은 모든 계층에 똑같은 정도로 부패하는 것이지 어느 한 쪽 층만 심각하게 부패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모든 계층에 똑같이 부패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일들에 있어서 방백과 두목들이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방백과 두목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앙적인 기대를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선동을 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도 그런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거침없이 범죄 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거시는 기대는 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거시는 기대와는 확연하게 다르다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적입니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맡은 자에게는 적게 구할 것이라는 이것은 계시나 신앙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 모든 것에 있어서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이 한번 커다란 어려움과 범죄에 직면했을 때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전 계층의 부패, 그러니까 부흥이 필요로 한다고 볼 때 종교계를 볼 때 부흥이 필요하다 아니면 정치계를 볼 때 부흥이 필요하다 아니면 교육계를 볼 때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 그리고 모든 교회, 교회가 부패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세상은 부패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들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치 교회와 세상은 커다란 대롱이 밑으로 연결된 비커와 같아요. 그래서 처음엔 수위가 다른 것 같아도, 수위가 다를 수 있지요. 다르기 위해서는 가운데가 차단되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사실은 차단되어 잇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여기서도 지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간격이 차단되지 않고 서로 교통하게 될 때 그때 교회는 신앙의 부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세상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받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한번 얘기했지만, 소금을 맹물에다 타면 소금처럼 안타지는 것이 없어요. 설탕은 끓이면 빨리 타지는데 소금은 물을 끓여도 마찬가지에요. 분해도가 똑같아요.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뭣이냐 하면 맹물에 타면 안타지는 소금이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어 가지고 배에 싣다가 잘못해서 가마를 떨어뜨리잖아요? 1분 만에 꺼내도 없데요. 지푸라기밖에 없데요. 그래서 그 염전하시는 장로님이,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소금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근본적으로 성도들은 세상에 살던 자들을 하나님이 취하셨기 때문에 한번 하나님이 손을 놓고 세상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세상 물에 용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 그것이 인생들이고 신앙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볼 때에 이러한 전반적인 부패 현상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알려준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 시대의 희망입니다. 방백들이었지요. 이들은 정치적인 권한도 가지고 있었고 그랬으니까 아마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누차 이야기했겠지요. 그러나 결국은 안 되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권징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들 많이 하잖아요? 신앙이 없는데 권징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출교 그러면 성도의 교통으로부터 떼어 내는 것 아니에요? 가장 무서운 것 아니에요? 그 다음에 수찬정지, 성찬을 못 받게 하는 것, 성찬에 대한 감격도 없고 성도의 교제에 대한 감격도 없는데 그것을 누가 겁을 내겠느냐 이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권징의 회복 하는데 그것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시대의 권징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그런 깊은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깊이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으로부터 끊어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지옥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수찬정지 그럴 때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징계를 내리는 교회가 있지만은 그것은 대개 ‘아, 사람들 앞에 망신이다.’ 이 생각하지 주의 그 거룩한 성찬으로부터 내가 제외 당했다 그런 영적인 비참함을 느끼느냐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영적인 것들에 대한 향유를 담보로 하는 그런 징계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고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고 볼 때에는, 옛날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형제건 자매건 세례 받지 아니한 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하시는 축의금도 안 주고 목사님이 주례를 안서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 광고까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날에는 징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징의 대상이었는데 권징은 못하더라도 우리가 교회에서 장려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시는데,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이 무서워서 불신자와 결혼을 못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근본적으로 그런 신앙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도달하지 못한 높은 수준의 것은 징계를 위한 담보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보면 결국은 방백들이 있었지만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다수는 아니었고 소수였을 것이 틀림없어요.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한 사람은 아니었고 여러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소수였음에는 틀림없지요. 그러니까 모두가 다 악하고 어두운 세대 속에서 자기만이 혼자 유일하게 주님의 거룩함을 사모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시대에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인을 남겨 둔 것과 같이 이 시대에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그 시대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세속화되어지고 그리고 가증한 일들을 행함으로 그들이 기쁨을 누리고 그리고 그들의 딸을 취해서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 말하자면 신세대의 풍속, 이런 속에서 그것들을 조금도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때에 그러한 시대의 도도한 물결과 거스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러니까 불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롯과 같이 이들은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고민하고 그리고 그 시대의 그 일들을 향하여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이 방백들의 입장이 되어 가지고 묵상을 해 보세요.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때는 신앙적이고 원대한 꿈을 가지고 돌아 왔는데 돌아온 지 얼마 안 되가지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다 극복하고 이길 수 있게 해 주셨는데 이러한 비참한 가운데 직면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몇 가지 거론해야 할 문제들이 사실 1절과 2절 사이에 상당히 많아요. 우선 지금 조장로님이 지적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은 흔히 이 죄의 모든 문제들을 환경과 여건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논리대로 얘기한다면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헷사람과 브리스사람과 여부스족속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 환경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토론)
(답변) 여러 가지 방면을 생각할 수 있지요.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 과연 소명과 혼동되고 있는데 사실 그것이 참 소명이겠는가. 라고 하는 문제. 소명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프로스칼레오, 앞으로 이렇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한 자신의 리스판스(response), 그것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원론적인 사고에 많이 빠져 있어서 이런 사역자의 삶은 거룩하고 나머지 삶은 속되다고 하는 생각 속에 많이 빠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도 해요. 과연 시대가 이렇게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할까? 그러니까 좀 더 시대를 저항할 수 있는 깊이를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도 보면 부흥운동의 시발이 이름들도 나오지 않고 있는 이 방백들, 그 사람들은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다 보편화되고 있는 그런 관습들 그런 것들을 거스를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들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고민하지 않는 문제가 이들에게는 고민이 되었고 시대가 아파하지 않는 문제들을 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평한 시대에 각성을 외친 선지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깊이 추론해 가면 제사장과 선지자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문제에요. 이런 사람들이 와서 에스라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용하실 것인가? 신앙적 현실도피주의 아니면 무기력 그렇게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실 지는 그것은 몰라요. 장암하게 사브나롤라처럼 사용하실 지 아니면 에스라에게 한번 이야기하고 쑥 들어간 방백들 그러나 이들은 말하자면 장엄한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키는 뇌관과 같은 존재들이 되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다 사브나롤라 같이 될 수 있겠어요? 사브라롤라는 몇 백 년에 하나 태어났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휫필드와 같아 질 수 있겠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그 시대를 향하여 고민하고 흐느끼는 흐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주님이 반드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방백들 보세요. 이름도 안 나오고 이후에 안 나와요. 영원히 사라졌어요. 누군지도 몰라요. 몇 명인지도 모르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대에 그 방백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에스라의 중보기도가 뇌관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뇌관을 때리는 격발장치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을 꿈꾸면서 우리들이 영웅주의에 빠져서는 안 돼요.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휫필드처럼 사용해 주실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이야 좋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용해 주셔야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어느 목사님이 그러세요. 로이드 존스가 한 것이 무엇이 있냐? 책 몇 권 쓴 것밖에 더 있냐? 그가 그렇게 부흥을 사모했고 그렇게 하나님을 크게 경험했고 그래도 한 것이 무엇이 있냐? 2차 대전 후에도 부흥을 그렇게 바랬지만 결국은 못 보고 죽고 1200명모인 속에서 매주일 설교를 했다고 하지만 12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는 지금 한국에서 꼽을 수 없이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갔지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그의 책들이 깨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 하실지는 몰라요.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사브라롤라 같은 사람이 나올지 그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면서 하나의 커다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그리고 내가 이런 꿈을 가지고 있어도 장엄하게 쓰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사용하신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순전한 마음, 그러니까 그 시대를 본받지 않는 방백으로서 그런 시대의 타락한 상을 보면서 지도자를 찾아가서 흐느끼는 흐느낌으로서 그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고민하며 탄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마음을 변치 않고 간직하느냐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는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급속하게 확 확산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어느 정도 있었지.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이 보면 이것은 이 사람들이 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기 전에 그런 잡혼들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의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사마리아는 그 이전에 그것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앗수르에게 멸망한 이후로 국제화되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올라올 때는 잡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미워하시는 것이라는 것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신학적인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와가지고 급속하게 그 시대를 본받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사 에스라가 왜 이때서야 알았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의 큰 감격 뒤에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바벨론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그런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사실 거기서 이미 죄의 뿌리를 내려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이리로 올라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추론할 때에. 그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깨끗한 사람들이 올라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의 나라에서도 그것을 지켰던 사람들 이제 감격적인 언약의 도성으로 돌아오고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그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뭔가 암시해 주지 않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주를 위해 살겠다고 순교적인 각오를 했던 것 그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런 결단이나 이런 것들이 영원히 자기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어떤 것들을 우리가 엿볼 수 있어요? 이것은 약간 영적인 해석이 될지 모르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어떤 이야기가 좀 확대될 수 있어요? 영적인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신약적인 구도에서 이것을 새롭게 본다고 한다면 바벨론의 땅에서 있을 때에는 오히려 지킬 수 있었던 그런 신앙의 순결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도성으로 돌아오고 성전이 지어지는 그 가운데서는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강력한 사단의 세력들의 도전이 있는 곳, 세속의 물결이 가장 맹렬하게 침투하기를 원하는 곳, 그곳이 어디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그런 세속과의 깊은 갈등과 충돌이 이루어지고 접전이 이루어지는 곳들이 교회지요. 이제 정복당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런 파장들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1절, 2절은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의문을 던져주어요. 왜 에스라가 그렇게까지 몰랐을까? 저는 그 부분을 이렇게 봅니다. 하나는 에스라의 초월에 치우친 신앙으로 해석을 하고 두 번째는 설령 에스라가 알았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 하나는 이 방백들이 정식으로 에스라에게 와서 보고했을 그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이 방백들의 말로 에스라를 각성시켰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특별히 하나님께서 에스라의 마음속에 이 방백들의 보고가 처음 보고였는지 몇 번째의 보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에스라가 전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피상적이었었는데 그러나 아니, 이 정도까지 하면서 깊은 각성에 도달하게 만들었던 도구로서 하나님이 이 방백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그런 악이 있다는 것들은 어렴풋이 감지를 했을지 모르는 데 그 일에 있어서 누구누구 이름이 거명될 때에 다 이름을 알만하고 함께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일들에 있어서 으뜸이 됐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것이 에스라에게 더 갑작스러운 충격과 각성과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공동체적인 절망감 그런데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1절, 2절은 그 이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문제를 많이 던져주어요.
그 다음에 3절에 보면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쭉 나와요. 그러니까 6절에서부터 중보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요. 도고의 내용이 나오고, 우선 3절서부터 5절까지는 그런 도고에 들어가기 전까지 있었던 에스라의 심경 그리고 에스라라의 태도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게 미친 영향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지요. 첫째 3절은 우리에게 에스라가 이런 일들을 보고받았을 때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부흥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3절에 흐르고 있는 장면을 두 글자로 된 에스라의 심경을 표현한다면 절망입니다. 그러니까 큰 놀라움에 쾅 직면한 것입니다. 메소멤. 큰 놀라움에 혼이 확 빠진 것, 그런 상태로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절망입니다. 그럼 보세요. 우리들이 지난주에 이야기할 때 부흥은 흐느낌으로 시작된다고 하였는데 그 흐느낌이 무슨 흐느낌입니까? 절망 속에 한 줄기 빛을 찾는 그런 흐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대안이 있다, 이것이면 된다. 그것이 있는 한은 신앙부흥의 마인드를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 이제는 캄캄하구나, 절망적이다’ 그런 통찰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흐느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신앙부흥이 가장 좋은 대안입니다’ 말 자체가 어폐가 있지요? 그러니까 신앙부흥은 대안일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아직 기도도 시작을 못했어요. 완전히 절망 상태, 거기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서 다 기분 좋게 살아가는데 이 사람에게 있어서 절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입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절망하게 만들었습니까? 다른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가책을 안 느끼는데 왜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심각한 절망으로 다가와요? 방백들이 느낀 것보다 오히려 정도가 더 크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정도, 그것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시대의 잘못된 영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시편을 읽으면서 시편의 기자가 이야기하는 인자, 그 헤세드가 사실 나는 산 아래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산꼭대기에서 여호와의 인자를 본 것입니다. 말하고 있는 개념자체가 나는 땅에 매인 것들을 줍고 있는데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가 만민 중에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열방 가운데서 자기가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영적인 특권들의 장엄함, 이런 것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큰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이나 바울이나 이런 사람들이 진짜 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신학자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누구 말처럼 예수에게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울에게서 도무지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한 마디 한 얘기를 가지고 수천 편의 논문을 써도 그것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으로 흘러들어가는. 결국 땅 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땅 위의 세계에 대해서 다수결 투표를 해도 더듬어 알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에스라가 절망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절망을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사람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에스라가 에스라의 마음속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전을 짓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었지요. 성전을 짓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지요. 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깊이 묵상할 때에, 모세오경 아닙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깊이 알고 율법에 정통한 학자였을 때 그는 분명히 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죄악도 알았겠지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감격 속에서 섬겼는가 하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또 그런 마음을 어느 정도 이 에스라에게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돌아왔을 때 에스라가 꿈꾸는 것은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고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때 그 다스림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말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말하자면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가질 수 없었던 제사와 정치가 하나가 된 신정일치 그런 수준 높은 신앙공동체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의 모습들이 많이 보여요. 아하와 강가에 이르러서 하나님 앞에 전심전력으로 갈 길을 구하는 그런 문제들, 정치적인 수완이나 또 정치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아닥사스다 왕의 특권 이런 것들을 활용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갈 길의 평탄함을 구하는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그가 정말 그러한 사회를 꿈꾸었을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러난 상황을 보면 기대했던 그 상황에 너무 미치지 못하는 처참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었다” 듣고 그랬어요. 이 일을 듣고.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다는 일들을 에스라도 들었고 또 방백들에 의해서 그런 다른 백성의 방백과 두목들도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이런 일들을 금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조언과 충고를 우리는 안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어요 출애굽기에 나온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에스라의 마음은 이 일을 들었을 때에 즉시 각성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높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깊은 영적인 위기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의 시각이 확 열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존재가 녹는 것 같은 그런 일치된 슬픔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각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대가 참 절망적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때다.”라고 하는 절박한 필요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가와야 하는 데 그것도 역시 로마서에 나오는 대로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들음을 사용하지 아니하고도 사람들 마음 가운데 이상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넣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일단 일반적인 방법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보면 요즘 교회에서 신앙부흥이라는 토픽(topic)을 가지고 리더들을 공부시키는데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의 설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입니다. 심지어는 단 한편의 설교 그것으로 마음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런데 역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을 때 듣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신앙부흥도 어떤 의미에서는 좀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을 듣게 해야 해요. 그리고 이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이 떠나있고 비참한가를 볼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도 결국 보면 에스라 3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성전이 지어질 때 통곡했던 사람들처럼 에스라에게는 이런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향한 높은 섬김, 높은 경외함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과 이상이 있으니까 현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었다.” 그랬어요. 속옷과 겉옷을 찢었다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회개의 의미에요. 속옷과 겉옷을 찢으면서 또 하나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다? 재를 무릅쓰고 앉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는 회개고 두 번째는 겸비함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티끌 그러면 가장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그런 겸비함을 하나님 앞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에스라가 속옷과 겉옷을 찢으면서 이것이 에스라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의문도 제기될 수 있지요. 무엇이냐 하면 “에스라가 회개해야 될 일인가?” 에스라는 거기 동참한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에스라 9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좀 신약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참된 교회의 지체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지체됨의 의미는 좋은 것 나누어 먹고 소사이어티(society)의 멤버십 정도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참된 지체됨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큰 각성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 처음 일어났던 것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것이 자기의 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셨잖아요. 여러분 그것 어떻게 생각하세요?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그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다고 했지요? 그 때 무엇을 기도했을 것 같아요? 무대를 어디를 얘기하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특별히. 일반적으로 그것을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하고 연결을 시켜서 해석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어요. 그럼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그것이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 기도는 일분도 안 걸렸어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당신이 그것을 위해서 왔다는 것을 다 알았는데 주님 앞에 간절히 이 잔을 옮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이것을 질 수 없겠습니다.’라고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다가 밤을 새웠겠느냐고 볼 수는 없고 오히려 이후에 주님이 본격적인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그분이 깊이 기도하셨던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남겨진 공동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이유도 결국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단절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은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중보기도가 깊어지면 그 사람은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를 받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이 생기잖아요. 구체적으로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지금 심각하게 고통을 받고 있구나.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가까워 있구나. 그런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고백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도의 교통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는 교제라고만 많이 바꾸는데 사실은 교통입니다. 교회가 성도와 교통하고 성도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됨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다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죄,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가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 없이는 같이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체됨의 본질로 다가가는 것이냐? 생각할 때 항상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할 것 같아요. 진정한 탄원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위대한 사람들의 조국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다는 사브로롤라도 보세요. 기도하는 것 보면 민족과 백성의 죄를 항상 남의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비판하느냐 그것을 늘 생각을 해야지요. 그리고 이제 두 번째는 머리털과 수염, 이것은 사실 구약시대에서는 사람의 존귀의 상징이었어요. 그래서 나실인을 이야기할 때도 머리를 밀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되어지고 수염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존귀와 위엄의 상징이었는데 이런 것들을 다 쥐어뜯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비참할 정도로 낮아지는 그 겸비함. 그러니까 그 백성들의 죄가 자기에게 미치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뜯고 수염을 뜯으면서 마지막에 기가 막혀서 앉았다 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신앙의 부흥을 주도하게 된, 하나님께서 신앙부흥을 일으키시는 중요한 도구가 될 그 사람의 심경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중요한 원리적인 교훈을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 일들을 이루실 때에 결국은 3절에 나와 있는 이 절망감, 에스라의 심경 그것이 곧 누구의 심경이겠어요? 하나님이 똑 같이 느끼시는 것 그 시대를 향해서 느끼시는 것과 똑같은 창세기 신앙부흥에서 이야기하는 심퍼세틱한(sympathetic) 감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성될 뿐만 아니라 각성된 속에서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과 심정을 느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