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스라 강해
녹취자: 박은희B
지난시간에 대충 얘기 되었던 내용들이 대개 어떤 내용들 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얘기 되었던. 그러니까 지금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실 때에, 이미 올라간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영혼 속에 일어난 어떤 감동하심, 얘기하면 헌신의 깊은 감동,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이 어떤 한 개인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시는 일이 없이 그게 참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인 헌신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은 어느 정도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시는 그러한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헌신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헌신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감동하심을 받아서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의 각성과 좋은 부흥을 주시므로 그들이 버릴 수 없는 그러한 모든 이국땅에서의 생활의 기반들을 아낌없이 버리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그때 소망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 그것 하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 주님이 그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장 뚜렷한 특성은 뭐냐 하면, 온전한 헌신, 그리고 관심이 하나님의 영광의 꽂히는 그러한 것을 제외해놓고 신앙부흥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을 아무리 닦달을 해도 그들이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면서 살아간다라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뭔가 큰일을 행해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감격가운데 올라왔고 또 올라오는 과정도 굉장히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와 강가에 와 가지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리고 겸비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자신들과 자신의 자손의 앞에 평탄한길을 예비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한 그러한 것들을 보아서 참 대단한 것 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와서 아하와강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까지 오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돌아온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고 하는 이런 일들이 쭉 일어나는데 9장에 보면, 이일 후에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그 갭이 사실 창세기 33장과 34장에서 넘어오는 것과 아주 유사한 그 간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커다랗고 획기적인 일들이 일어났던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전건축은 좌절되었고, 그 좌절된 가운데서 사람들은 목표를 잃어버리고, 그러면서 이제 죄악이 관영하게 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9장 3절 이하에서 말하자면 영광스러운 에스라의 신앙부흥이 도입되게 되는데, 그 중간에 이제 하나님께서 한 각성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인물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방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워도 거기에는 그 시대를 인하여 고통하며 불법한자의 무법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던 것과 같이 그렇게 경건한 방백들이 있어서,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불신앙과 패괴함을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던 이런 방백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이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야기를 듣고 3절에서는 이제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3절서부터 사실은 부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님께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각성되게끔 만들어 주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에 에스라는 이 백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와는 관계가 없이 초연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백들이 고할 때 이것은 아주 특별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 에스라의 마음 가운데 깊이 아픔으로 와 닿을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도 종류는 틀리지만, 하나의 또 다른 하나님의 각성이다라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결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마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느냐하면,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시고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흥을 가져오시는 방법은, 역시 지도자를 각성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지도자의 각성은, 지도자가 아닌 수 천 명의 각성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참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지도자들을 각성시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사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죠? 단순히 그가 언약에 있어서 우두머리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그가 모든 가족들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였다라고 하는 면들이 고려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라의 신앙은 경건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충분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경건한 바리새인들로 그 시대가 충분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에스라가 그 시대와는 초연하게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는 경건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가 신음하고 있는 죄악을 깊이 느낄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자기시대의 모든 죄악들, 그것은 모두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각성을 주시므로 그러한 죄의 심각함을 단지 교리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 죄의 심각함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가 있어야지만, 비로소 지체의식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에스라를 먼저 깨운 가장 커다란 이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죄의 대한 설교가 행해질 때, 많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그리고 많은 호소력을 주지 못하는 것, 그런데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흔히 보게 됩니다. 물론 이제 거기에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죄에 대한 지적에 둔감해져 있기 때문에 사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설교하면서도 좀 목석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참 담대합니다. 죄인들은 담대하고 용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항상 죄에 대해서 설교할 때 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죄의 문제를 손대고 있는가? 즉 뭐냐 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금 못 박혀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사람이 어떻게 된다라고 하는 그 심판을 몸소 겪으면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 그럴 때, 주님은 그 죄의 용서받지 못한 영혼, 죄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 인간의 그 비극, 그 심판의 비참하고 쓰라린 그것을 주님이 우리를 대신 해서 몸소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에스라가 신앙의 부흥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가 다뤄져야 됐습니다. 즉 뭐냐 하면 부흥이 일어났던 곳마다 사실 죄의 문제가 호되게 설교되지 않고, 신앙부흥이 일어난 역사적인 예를 얼마나 찾아볼 수 있겠는가? 또 신앙부흥이 일어나고 난 뒤에 사람들은, 회중들은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서 민감한 것만큼, 죄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신앙부흥이 일어났을 때 죄의 문제가 밀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부흥을 다른 술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의 보다 완전한 형태의 교통이 가능한 시기, 부흥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보다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는 특별한 시기,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위기를 경고 받고, 또 교회적으로 나아갈 길을 지시받고,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런 특별한 시기,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말로 이제 연결 지어져야 될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이야기 할 때 그게 끊임없는 방해 요소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죄의 문제 라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에스라가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은 사실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부흥을 일으켜야 된다라는 그런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흥이 찾아 온 것입니다. 에스라 입장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일단 방백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새로운 차원으로 각성시키시니까, 그의 마음이 정말 새로운 차원의 각성을 맞이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백성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쩌면 전에도 자세히는 몰랐어도 조금은 눈치 챘음직한 그런 잡혼의 죄들, 이러한 것들이 심각한 아픔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아픔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들이 회중의 죄가 자기 애 처럼 마음에 다가오지 않을 때, 과연 죄에 대해서 적절히 다루면서 설교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는 죄에 대해서 설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그 모든 죄를 같이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위 얘기하는 성육신하신 그 원리처럼 우리가 그 죄인의 자리, 그리고 말씀을 듣는 회중들이 떨어져있는 그 죄악의 자리,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 다가오는 하나님의 분노,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그 같이 범죄한 자와 같은 그러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고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적절히 다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여튼 지금 이 3절은 부흥으로 가는 하나의 중대한 두 번째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방백들이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에스라에 있어서 죄의 문제가 “이일을 듣고 겉옷과 속옷을 찢게 하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고 기가 막혀 앉으니” 쉽게 얘기하면 뭐냐 하면, 기도할 기력조차도 없는 그런 상황 속에, 깊은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절이 지도자의 깊은 회개, 지도자의 중보자적 회개 그것을 보여준다라고 할 것 같으면 3절에서 에스라가 회개하는 이 문제 이것은 사실 에스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저는 적당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중보자적인 회개, 그러니까 에스라의 회개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자기의 죄가 아님에도 그 지체들의 죄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동일하게 느끼면서 회개하는, 그러한 중보자적인 회개를 보여준다면 4절서부터는 지도자의 중보자적 회개가 가져다주는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확실히 신앙부흥은 물결처럼 확산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 소수로 시작해서 그것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으로, 공동체가 교회로, 교회가 지역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회개하는 그런 광경들을 보여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이상한 일이 일어났죠? 무슨 일이?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그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회중 속에. 아니, 본문에 입각해서 한번 더듬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 여기 에스라가 설교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김수미,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니, 차례대로 얘기해. 본문을 보면서. 그렇죠. 무엇 때문에?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로잡혔던 사람들의 죄를 인하여 에스라에게 모여오는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에스라가 아직 설교를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죠? 율법을 낭독하지도 않았고 에스라는 단지 방백들의 죄를 듣고, 방백들이 보고하는 민족적인 죄를 듣고, 그리고 그가 중보자적인 회개를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모두는 아닙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각할 때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방백들보다는 좀 더 많은 규모의 사람들입니다. 좀 더 많은 규모의 사람들이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김수미, 어떻게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아니, 복수입니다. 다 내게로 모여 왔다라고 그랬잖습니까? 떠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온 것입니다. 복수입니다.
그럼, 질문하나 합시다. 신앙부흥이 반드시 말씀의 선포로 통해 이루어집니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말씀의 선포가 없이도 부흥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부흥은 일어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선포되는 말씀은 없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메시지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슴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건 어떻겠던 말하자면 공통적인 메시지를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낄 때, 그때 그것이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그랬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한번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해서 떨게 되었는가? 그러니까 무얼 보여 주냐 하면,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삶과는 관계없이 버려져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쉽게 이야기해서 삶의 아무런 구속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날 살아있어서 자기의 심령을 지배하는 말씀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느냐? 이 에스라의 깊은 회개를 보면서 그들이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슨? 에스라가 이일을 듣고. 무슨 일이요? 잡혼? 잡혼에 관한, 잡혼이 유행한다라고 하는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 경건한 에스라의 깊은 중보자적인 회개를 보면서, 자신들이 짓고 있는 죄의 심각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한 번의 각성입니다. 또 한 번의 각성입니다.
그러니까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얘기 해줘 가지고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에스라는 이 모습 그 존재자체, presence, 그 존재자체가 사람들에게 각성을 제공해주었다라고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4절에 “이에” 그러고 나오는 “이에” “이에” 기가 막혀 앉아있는 그 결과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우리들 형식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즉 뭡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이 막 그 처절하게 회개하는 장면을 볼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서 자기가 무디어져있던 그 죄악에 대해서 눈 뜨게 만들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서 그 자신도 그와 동일한 죄의 심각성을 의식하게 만드는 이런 하나님의 방편들, 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또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일 하나는 중보자적인 깊은 회개가 가져다준 변화입니다 변화. 그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4절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그랬는데,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않는 수많은 다수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비로소 무슨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소위 피죤, 나뉘어지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그런 정도의 죄를 가지고 저렇게 머리와 수염을 쥐어뜯고 겉옷과 속옷을 찢고 통곡하는 에스라와 그 옆에 덜덜 떨면서 그에게로 모여들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방관하면서 ‘저 도대체 뭐하는 거냐? 꼭 저럴 필요까지 있겠는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수많은 다수가 거기에는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냉담하고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교회 속에서 말씀을 인해서 사람들이 나뉘어지면 그 나뉨 자체를 중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진리로 말미암는 나뉨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것은 참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설교자는 설교하고 난 결과 대해서 연연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단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최선을 다해서 선포하지 못했다는 것에 인하여 괴로워해야지, 선포하고 일어나는 결과들을 보면서 연연해하는 것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아니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나뉘어지는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지 이게 하나가 되겠는가?
에스라는 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짓밟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중보자적인 회개를 드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 속에서 죄악의 심각성과 율법의 살아있음을 보고, 그리고 자신들의 죄에 깊은 문제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 말씀을 인하여 떨었다” 그 무슨 뜻이겠습니까? 말씀이 그러한 죄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는 징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네. 그것을 인하여 떠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떨게 되면서 그들이 나아와서 에스라와 하나가 되고, 그리고 그들 속에 있어서 율법이 관심이 되고, 이 잡혼의 죄악의 문제가 중대한 실존적인 관심의 문제가 되었을 때에, 그 문제에 대해서 냉담한 사람들과 어떻게 연합을 이룰 수 있겠느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기억해야 될 것은 나뉨이 있을 때 나뉘는 자체를 주목하지 말고, 그것이 정말 진리로 말미암는 나뉨인가? 나뉨인가? 그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부흥에 있어서는 이런 일들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같은 것을 보면, 그 훌륭한 사람들이 전부다 강단이 폐쇄 당했습니다. 안 받아주기로, 그 사람들을 강단에 안 세우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한 예들은 자주 있었습니다. 웨슬리 같은 경우도 그런 조치를 받았습니다. 웨슬리가 옥스퍼드 출신 아닙니까? 옥스포드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 교수들이 과연 거듭났는지 묻고 싶다고 얘기를 했더니 교수회의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 하면, 웨슬리는 영원히 옥스퍼드 강단에 설수 없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다시 못섰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우리들이 한번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들에게는 그것을 인하여 떨 수 있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 그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지금 무슨 에스라가 무슨 율법을 설교한 것도 아닌데 그게 뭡니까? 그들이 지식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이지적으로만 아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가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 율법을 그렇게 착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위대한 복음 전도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해박한 신구약을 관통하고 연결 짓는 그러한 신학적인 논술을 써 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할 때에, 우리는 회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의 저자 권에 대해서 논쟁이 많지만,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그 사람이 구약의 율법의 정통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자가 정통함으로 말미암아 그림같이 신약의 속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역시 그러한 이들에게는 그것을 인하여 떨 수 있는 말씀이 있었다라고 하는 그것이 굉장히 좋은 하나님의 각성의 도구가 되었던 사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다음입니다. 잘 보십시오. 떠는 자가 왜 에스라에게로 다 모여 왔습니까? 왜 에스라에게로 다 모여 왔습니까? 아니, 성경에 있는 대로 이야기 하십시오. 성경에 있는 대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게 오늘날 설교의 문제라고? 성경에 있는 대로. 뭐 어떻게요? 아니, 아니, 거기 아직 가지도 않았습니다. 4절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나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포로들 전부다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로 잡혔던 자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출원할 수 있는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확실히 이 4절에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나왔다” 그러는데, 이 사람들이 각성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래도 비교적 이 죄에 대해서 그래도 비교적 관계가 적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뭐냐 하면 에스라에게로 다 모여 왔던 이유가 뭐냐 하면, 사로잡혔던 자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동료입니다. 동료들의 죄로 인하여 그에게 나아왔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들도 이속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 무감각해져서 그러한 죄들을 보고 듣고, 설령 동참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뭐 동참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런 분명한 그 암시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스라의 중보자적인 회개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새삼 그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심각함,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경고하고 있는 심판의 엄중함, 이것을 인하여 떨면서 나아오게 되었는데, 그 떨면서 나아오게 되었던 또 다른 동기 하나는 뭐냐 하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일차적으로는 자신 속에서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자신의 무감각, 혹은 동참일수도 있고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 그렇게 무감각하게 여겨졌던 그러한 민족적인 죄가 어마어마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 충격을 받으면서 그 말씀이 말하자면, 그 말씀이 주고 있는 택한 백성들의 순결함,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경고, 이런 것들을 인하여 두려워 떨게 되는 것, 그것이 사실은 각성이 아니냐? 이것입니다. 그것이 각성을 통하지 않고는 어떻게 그런 말씀이 살아서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실체로 다가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그것을 당하면서 나아오게 되었는데, 그들이 나아올 때에 좀 더 그런 생각이 구체화 되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이것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다, 내동족의 죄다, 내백성의 죄다, 우리가족의 죄다 그러면 내가 외식하고 내가 지금 각성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 이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하는 이것 때문에 나아오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3절이 에스라의 중보자적 회개를 보여준다라고 할 것 같으면, 4절은 우리에게 뭘 보여 주냐 하면, 중보자적인 마음, 중보자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의 죄의 설교는, 굉장히 깊은 그 원리가 이 속에 쭉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좀 더 보겠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4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뭐라 그랬습니까? 그렇죠. 거기서 무슨 느끼는 것 하나 없습니까? 이스라엘 하나님.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좀 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하나님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엘로헤 이스라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것 보면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엘 엘로헤 이스라엘. 똑같은 것입니다. 엘로헤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소유격이나 조사, 이런 것들이 나오면 그것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아주 진수가 담겨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지금 무얼 보여 주냐 하면, 왜 상천하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얘길 하지 않고 신명기 같은데 보면 종종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상천하지의 하나님, 온 열방가운데 다스리시는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여호와, 그런데 여기서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같이 이렇게 축소된 모습으로 확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죠. 택한 백성의 하나님. 택한 백성의 하나님. 그리고 택한 백성이 자기들을 택해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규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세상보다 비교적 나은 도덕적인 수준을 누리는 것,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새 그것은 다른 사람들한테 설득을 하려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기독교방송 TV방송국 설립해야 된다는 그 호소를 이 땅에, 땅에 떨어진 윤리를 회복하기위해서 이제 해야 된다 그러는데, 뭐 알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이제 사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목표는 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교회가 부흥이 필요한 이유는, 언약의 하나님께 충실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 보다 더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여호와가 되시지 아니하시면, 어떻게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겠느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다음에 그 하반 절에 보니까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렇게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나아옴에도 불구하고 이 에스라의 그 탄원과 통곡, 기막힘은 어떻게?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이랬을 것 아닙니까? 이러면서 떨고 회개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면 야, 우리 빨리 조직을 만들자, 팀을 짜자, 분과위원회를 만들자 그리고 회지를 발간하자, 그래서 사람들을 깨우자 그랬을 턴데, 에스라는 지금 이 말씀을 인하여 떨고 나오는 사람들이 안중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이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아오셔야 문제가 해결되지, 이 사람들이 나아온다고 지금 문제가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듣고 몇몇 사람들이 정말 덜덜 떨고 부흥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감격할 이유도 없고 거기에 기대를 걸 이유가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야지. 참 재미있잖습니까? 이 부분이. 사보나롤라에게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어떡하든지 뭔가 이렇게 뜻을 같이하면, 동료들의 세력을 규합 하고자 하는 그 말하자면, 그 조직가적인 그런 정치적인 그 발상들이 늘 떠오르는데, 에스라는 지금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땅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 사람의 시선은 하나님의 보좌에 꽂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신앙부흥에 대단한 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제가 하나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의 회개 제목이라고 그럴까?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하고 있는데, 내가 이런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너무 많이 계산해 넣었던 것, 그리고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규합하려고 했던 많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 과연 참 보시기에 시원스러운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합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신앙부흥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이나 어떤 그러한 사람들과의 관계, 이런 것들에 지나친 기대를 걸때에, 그 만큼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만이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와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신경을 쓰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그렇게 예민하게 신경을 썼는가? 그리고 사람들에 의존하면 할수록, 결국은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주셔야 될 필요에 대해서 그 만큼 둔감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보는 바와 같이 아무도 사용 하시지 않고 에스라가 사람들을 규합하지 않아도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보나롤라 같은 경우도 아주 자연스러운 그러한 그 케이스를 대변해주는 인물이었잖습니까? 세례요한에게서 똑같은 것을 읽습니다. 그는 무슨 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규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광야에서 그냥 외롭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셨고 그리고 그들을 회개하셨죠. 그 시대를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충분했습니다. 윗필드 같은 경우에도 그런 것들을 잘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윗필드의 경우도. 충족한 그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근심들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 자신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그 선전 나오지 않습니까? 김삿갓 선전 나오면서 ‘백년도 못살면 천년을 염려하는 중생들아’ 어저께도 내가 교회에서 마태복음 2장 가지고 설교하면서 그랬습니다. 뭐 담임목사님이 안계시니까 교회장래에 대해서 늘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 이겁니다. 고민하지 말라. 다 갈 데로 간다. 주님이 주인이신데. 다 갈 데로 간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시는 것이지 사람의 염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야, 어쩌면 이렇게 영적인 지도자로서 의연할 수 있을까? 아, 이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목회하면 아무래도 사람 좀 보게 됩니다. 수미야, 나 물 한잔만 줄래?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신앙부흥의, 죄가 신앙부흥의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각성한 영적인 지도자의 그러한 성향, 그런 어떤 흑색의 죄가 아니라 회색의 죄, 그런 것들이 어떤 신앙부흥에 있어서 더 교묘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저 이런 이야기가 지금 뭐냐 하면 한계상황입니다. 인간으로서 상황은 벌어졌고 사람들을 데리고 하는 목회인데 어떻게 사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또 그다음에 원리적으로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된다는 문제, 그렇게 행동할 때에 다가오는 그 교묘한 비난들, 이런 것 속에서 할 때에 결국은 설교자의 아이덴티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입니까? 거기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 그 이야기 한번 언제 설교를 했나 모르겠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결국 뭐냐 하면, 설교자의 분깃은 세상에 없다. 설교자의 분깃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그 선지자들이 그렇게 보냄을 받고 또 그러다가 나중에 마지막에 그냥 죽고 끝내잖습니까? 그것처럼 설교자의 분깃은 세상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간단합니다. 설교자의 분깃은 세상에 없다. 요한이 세상에서 무슨 분깃을 받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설교자의 분깃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한데 그런 생각으로 진전되지 못할 때, 그 때 이런 한계 상황 속에서 몸 부림 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좀 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크고 대범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묵묵히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러한 초연함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뭐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와 늘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 조그만 부흥을 경험하면서 하여튼 그 고통을 느끼신다고 그러시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2년 이상이 지나갔는데도 이렇게 생각을 하면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그 하나의 힘은 뭐냐 하면, 그런 일들을 이제 말씀을 이렇게 설교할 때에 ‘아, 오늘은 저 뒤에 먹다 남은 콜라병이 날라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발길로 뻥 차고 “에이, 씨” 그러면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별 사람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도 이제 이길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이 뭔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기도할 때 하나님,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절대적인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하나 깊이 깨달은 바는 뭐냐 하면, 위기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고만 있다면, 위기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위로도 극적입니다. 극적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 오해 할까봐 겁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사실 그런 위기가 아니면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응답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초인적인 용기 같은 것도 저 사람이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도 가냘픈 사람이었고, 나중에도 고문 받으면서 몇 번을 번복했다고 자기 입장을.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인적인 용기는 결국 뭐냐 하면, 그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 대의에 있어서. 그리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위기가 넘치면 넘칠수록, 위기 속에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증거들을 더 크게 보여 주심으로써 설교가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도 사실은 기도의 싸움이다라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부분을 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신앙부흥의 원리와 방향들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초연함, 이런 대담함, 이런 것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다라면, 부흥은 다른 말로 정의를 하자면 부흥은 사단의 점령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사건입니다. 어째, 기가 막히네. 이야기 하고보니까. 사단의 점령지에서 일어나는 가장 극렬한 반란사건입니다. 그러면 평온하던 나라에서 반정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경계를 할 턴데 극렬한 반란이 일어났다 생각될 때, 모든 군대가 그리로 투입이 되지 않겠냐?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처럼 사단의 세력과 그 성령의 역사가 강한 충돌을 보이는 시대도 없는 것입니다. 그 격렬하게 보이는 것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열왕기서에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장면에서 아주 극렬한 대립을 탁 보는 것이잖습니까? 하늘의 불을 불러 내리는 것, 그래서 장작불을 사르는 것 말입니다. 그것 참 좋은 이야기네. 그러니까 신앙부흥은 사단의 점령지에서 일어나는 가장 격렬한 반란입니다. 그리고 급격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때에 엄청난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상식 아닙니까? 그런 속에서 대담하고 담대할 수 있기 위해서 결국 뭐냐 하면 그의 영이 하나님과 매우 완벽에 가까운 교통을 누리는 그런 것을 유지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확실히 신앙부흥이 신학교에서 안 일어나고 목회지에서 일어난 이유를 알 만합니다. 신학교에서 일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목양지가 이런 원리에 충실할 수 있는 여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부산에 내려가서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 이런 문제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심자리에 있는 문제입니다. 나머지는 그 주변의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다 묻혀버리고 주변의 문제들만 더 크게 부각되어서 목회가 마치 하나의 그 전문인의 스킬인 것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사역지와 세상을 더 피폐하고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어쩌면 신앙부흥을 경험했던 사람들치고 이렇게 대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다 초연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성 속에의 깃들인 강인함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과의 깊은 동행하심 속에서 느끼는 그런 강인함, 그것을 디머라이 같은 사람은 holy toughness ‘거룩한 강인함’ 이게 뭐냐 하면, 늘 죄악을 인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고는 강철과 같이 터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이제 5절을 봅시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그랬죠? 좀 더 읽어볼까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듯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이제 5절에서 에스라가 드디어 기력을 찾습니다.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났다” 그가 이렇게 중보자적인 회개와 애통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외모에 거의 관심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의 온 마음과 심정과 관심은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끔찍한 죄를 어찌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부흥이 일어나야 된다사실 그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끔찍한 백성의 죄를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는 그 다음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었다” ‘무릎을 꿇고’ 지극한 겸비와 간절함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몇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서서하는 기도, 경건의 상징입니다. 엎드리는 기도, 비참함 낮아짐을 뜻합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 간절함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간절한 기도로 무릎을 꿇고 드디어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기도하기 전에 도입부가 뭐라 그랬냐 하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었다” 그거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그랬다가 이건 또 나의 하나님이라고 그러는 것은 또 뭡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이런 이야기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율법이 모든 이스라엘이 그 율법에 매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할 언약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보니까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그 다음에 “나의 하나님” “나의하나님” “나의 하나님” 계속 나의 하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제 무슨 얘기냐 하면, 율법의 관계로 묶어놓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들에게는 사죄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죄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나의 하나님, 내게 은총을 베푸셨고 나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사 이민족을 구원해 달라라고 하는 개인적인 탄원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 야훼를 향하여 손을 들고” 손을 들고 그러니까 중보자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말하기를 그러면서 이제 6절서부터 몇 절까지가 기도가 계속 나오나 하면 마지막 15절까지 이제 그 위대한 부흥을 구하는 기도가, 부흥을 구한다기보다도 위기 상황 속에서 민족을 위한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뭔가 이렇게 좋은 원리들을 우리들이 좀 찾아내봐야 될 줄로 압니다. 어쨌든 그러면서 이제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그러면서 이제 6절 두 번째 단어서부터 따옴표를 붙여야지만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민족적인 죄악의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는 것이 크게 4가지 요소를 가지고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4가지 요소를.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심판에 대한 인식입니다. 심판에 대한 인식, 그게 6절서부터 7절까지. 심판에 대한 깊은 인식. 심판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백성들이 이제 이대로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문 앞에 이르렀고,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보응하시고야 말 것이다라는 이 긴박한 위기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8절서부터 나오는 것이 8절서부터 9절까지 그게 뭐냐 하면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회상하는 것. 이 무슨 은혜나 ?어떻게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또 멸망 가운데에서도 바벨론 치하에서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남겨두셔서 또 이 약속의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또 다른 불가능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기업을 주셨다라고 하는 그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회상하면서 그 다음에 10절서부터 12절까지가 뭐냐 하면 절망,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직면함, 무슨 절망입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너무너무 크고, 그리고 민족들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범한 죄는 너무나 끔찍하고, 그래서 그사이에서 이 중보자로서 느끼는 깊은 절망,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아까 내가 12절 까지라고 그랬죠? 13절 에서부터 15절까지는 어쩔 수 없이 도래하고야 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식입니다.
10장이 이제 드디어 사건이 벌어지는 장인데, 10장의 장엄한 부흥사건이 도래하기 직전에 이 에스라의 기도는 우리들이 연구를 좀 많이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좀 해박하고 깊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를 집에 가셔서 6절서부터 15절까지인데 이 부분을 꼼꼼히 읽어보시면서 묵상을 많이 하십시오. 묵상을 안 하면 원리가 숨어있기 때문에 안 드러납니다. 묵상을 많이 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에스라가 심판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인식했는지, 또 그가 회상한 은혜가 어떤 것인지, 또 세 번째로는 그가 어떤 것들 때문에 이렇게 절망하게 되었는지, 그 다음에 결국은 피할 수 없이 다가오고야 말리라고 하는는 심판, 이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을 한번 이렇게 살펴보시면서 결국은 부흥을 구하는 기도가 이런 패턴을 따라야 될 것 같습니다. 네. 부흥을 구하는 기도가 이런 패턴을 따라야 될 것 같습니다. 잘 보십시오. 심판을 깊이 인식하고, 위기를 느끼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처해진 이 절망스러움, 그런 형편들을 느끼고,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야 말리라고 하는 위기,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사람이 과연 신앙부흥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요번에 언제까지 될런지 모르지만 하여튼 요것을 다 합시다 우리 10장까지. 해서 에스라의 신앙부흥을 꼼꼼하게 다는 못 본다고 하더라도 일단 한번 골격을 한번 훑고 그렇게 해서 한번 좀 살펴보기로 그렇게 합시다. 무슨 좀 더 의논할 것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