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에스라 강해
녹취자 : 조원정
상황 속에서 로마서 쓸 때에 사도가 된지 한 20년 되었을 겁니다.
(질문) : 쓸 때가 58년쯤입니다.
(답) : 그러니까 20년쯤 되었죠, 25년쯤 되었어요.
그때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깊은 경험을 하고 그것이 원숙해져서 사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사실은 로마서도 역시 더 큰 베일 속에 가려지는 겁니다. 그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도 복음서를 깊이 이해해야 됩니다. 복음의 본질들을...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 : ?
(답) : 마음속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원이 참 진실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내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 나를 만나 주실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소원이 진실하면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안 만나주시고 하는 거는 상관없이 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만나달라고 기도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그 마음에 소원이 참으로 진실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권이니까 안 만나 주실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도해봐야 소용없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질문) : 마태복음에 한 서기관이 그 전에 보면 예수님이 이적을 일으키시는데 8장에서 그러고 난 후 한 서기관이 그 사실을 보고 감동해서 내가 주를 어디든지 쫒겠나이다. 예수님은 그 말에 일축해 버리셨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러면서 그 다음절에 한 제자에게 그는 자기 부친을 장사하고 그리고 당신을 쫒겠나이다. 라고 했는데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쫒으라 했는데 근데 상반된 두 사람이 나오는데 서기관이 쫒겠나이다. 했는데 일축해 버리고 그 다음 제자에게 너는 나를 쫒으라 했단 말이에요. 내가 과연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주님은 생각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쫒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주님이 주권적으로 선택을 하셔는데 나는 제자가 아니다라는 이런 생각도 드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확증을 보여주십시오. 라고 하는 기도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다음 9장을 보면 주님께서 권능과 권세를 분명히 제자들에게 주셨는데 파송 보내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권세와 권능을 주시고 참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런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주님께 따지는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고 난 후 첫 번째 에스라서 할 때 그 내용을 푸는데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것을 따지는 거 그거 자체가 교만이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거죠. 그러면서 굉장히 눈물 흘리면서 회개를 했어요.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열망하며 그분의 영광을 간절히 구하며 내 마음이 그렇게 되는 거로 족하지 그 외에 무엇을 따질게 잇느냐 그거 자체가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게 밀려오는데 굉장히 회개했어요.
(답) : 잘 생각한 것입니다. 확대해서 생각하면 어떤 얘기랑 똑같으냐면 창세기 신앙 부흥에서도 얘기했는데 총신의 모 교수님이 잡지에다가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을 썼는데 퇴폐하고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에드워드가 신앙부흥을 일으켰다 하는 기가 막힌 얘기를 하는데 바로 그겁니다. 뭐냐하면 그걸 교회적으로 확산시켜보면 그렇게 잘못된 적용을 교회에게 하게 되면 신앙부흥은 그것을 통해서 뭘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흐느낌으로 하는 신앙부흥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기 때문에 비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내적인 변화며 내적인 욕구입니다. 여기에서도 얘기 할 때 굉장히 예리하게 보셨습니다. 서기관이 나와서 상당히 헌신되어 있죠. 어디든지 주를 쫒으리이다. 그랬더니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하면서 거절 비슷하게 말씀하시는데 또 다른 제자는 쫒아오겠다고 안그러고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는데 오게 했다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 사람 속에 주님 어디서든 저는 쫒으리이다. 라고 하는 고백이 진정한 심령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면 주님이 안데리고 가셨어도 족한 거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는 그런 소망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주권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권적인 하나님이기에 주실 것이냐 안 주실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에게 미친 각성이 참다운 것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는 거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여인들이 요한복음 20장에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에 가서 통곡하며 운 것은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설교를 했지만 울며 누구를 찾느냐지만 거기서 운다고 해서 예수님이 돌아오겠습니까? 그렇게 논리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적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추구 이런 것들이 있고 상황은 자기를 가로막고 있고 그래서 울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논리로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논리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리 바이블 할 그런 마인드가 전혀 아닌 겁니다.
(질문) : 이대로 족한 것인 건가요 ? 내가 윤리적으로 제자입니까 아닙니까? 따지는 것이 아닌거죠?...
(답) : 에스라서에 둘째시간에 본 게 뭐냐 하면 방백 아니에요? 그러니까 뭔가 신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헤로이즘에 빠져있는 영웅주의 가운데 빠지기 쉬워요. 쓸데없는 영웅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아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배웁니다. 주님이 세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에 요한이 뭐라고 하냐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합당하니라. 주님의 관심은 누가 세움을 받고 누가 세움을 받지 않는 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겁니다.
방백들이 에스라의 신앙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의 굉장히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자동차로 말하자면 발동을 거는 키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 이름도 기록해 주지 않는 그런 한 사람의 방백에 대해서 그런 일들을 하고 영원히 사라져 간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나를 중심으로 역사하시는 일이 아니면 내게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질문) : ??..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구하지만 들어주지 않아도 결과에 관계없이??
(답) : 그렇죠, 그냥 그렇게 나는 지난번 성지순례를 하고 왔는데 차가 못 올라가 중간에 해발 200-300미터에 세워놓고 500미터고개를 넘어갔고 한 시간 이상 걸어서 갔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게 나타난 것은 너로 하여금 큰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함이다.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 그랬거든요. 결국은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깊은 열망 속에서 그것을 신앙고백과 같이 토해다가 결국은 죽는 것이 그것이 설교자로서 하나의 목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보다 넓게는 설교자의 문맥이지만 짧게 보면 선교사의 맥락이고 더 짧게 보면 목회자의 맥락이기도 합니다. 다 끌어 낼 수 있어요. 그래도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요즘에 선교 후보생들이 우리 청년부에 꽤 있는데 곤욕스러워 죽을라 그럽니다. 나는 너희의 옷소매를 붙잡는 바이다. 가지말라 이거죠. 본 것도 없이 무슨 선교를 가겠느냐 비즈니스지 너가 진정으로 주을 만남 사람들이라면 이 본국에서 정말 주님의 영혼들을 사랑하고 있느냐? 구령의 열정에 불타지도 않는 사람들이 선교에 나가가지고 사무적인 비서밖에 더하겠느냐? 그것을 입증해 보여라. 그리고 그 면에 있어서는 베스트가 되어라. 그 안디옥 교회에서 베스트 둘을 뽑아가지고 선교를 보낸 거 아닙니까?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가?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라고 별로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선교사에서 돌아와 가지고 선교 보고를 하면 왜 천편일률 적으로 그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복음의 열정들을 불어 넣는 대신에 맨날 돈 얘기 선교사업에 뭐하는데 얼마 들어가고 또 얼마가 있어야 하고 물론 실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역시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한나라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한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본국의 영적인 수준 그래서 내 친구 선교사들도 계속 편지가 오는 게 뭐냐 하면 조국 교회에서 본토에서 변화가 일어나야지만 탁월한 선교사들이 배출되어서 선교지에 빛이 비췬다는 겁니다. 결과로서 그 증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어서 하나님이 보내시고 보내심으로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아가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교와 모든 것들이 결국은 출발점이 교회로 하여금 신약의 교회가 되는 그 원동력들이 이미 흔들리고 고갈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수많은 형식들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오스왈드 스미스의 책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좀 이렇게 넓게 봐야 됩니다. 사소한 잘못 몇 가지 때문에 사람을 전체적으로 매도하는 그런 어리석은 것은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심지어 아나뱁티드스푸터에게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화석화되어 갈 때에 그들은 뭔가 이것이 아니다 라고 확신을 하고 섹트로 나간거거든요. 그럼 거기에는 물론 부정적인 요소도 많지만은 그러나 그중에 모든 것이 부정적인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그만큼 고민하고 뛰쳐나갔기에 그 속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경건주의 물결도 내려오면서 둘로 갈라지고 루터파 경건주의와 개혁파 경건주의 쪽으로 갈라지는데 말하자면 그런 차이는 있을지언정 분명히 그 속에서 뭔가 시대에 의식 없이 시대의 물결에 흘러왔던 교회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몸부림치는 교회들에게 배우는 바도 적지 않다는 겁니다. 사람이 볼 때는 그렇게 폭넓게 봐야 됩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황당무개 했어요. 성경본문을 안 읽고 설교를 시작을 했으니까 나는 못 갔는데 월요일인가? 집사님한테 우리 교회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그래서 뭐냐고 했더니 한시에 집회가 끝났다고 하길래 아 이거 뭐가 있었구나. 그 다음날 가니까 그런 기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수많은 밴드 데리고 와 가지고 찬양대들 모두 마이크 하나씩 들려가지고 노래하고 했는데 그분이 성령충만 하다는 건 인정을 해요. 침례교 목사님인데 충만 하다는 건 인정을 하는데 헌신도 있고 열정도 있는데 성경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질문) : 성령충만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요? 그 표현이.....
(답) :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설교를 하고 나서 심지어 어떤 얘기냐 하면 자기네 교회 교인들까지 데리고 왔어요. 앞에 다 앉히고 박수부대들까지 그리고 막 욕을 하고 심지어는 너는 일주일 금식기도해라 이주일 금식기도해라 깎아달라고 하면 하나님께 여쭈어봐라 뭐 이런 식으로 하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나서 그 다음 주일 교역자 둘이 오전 예배 오후예배 올라가가지고 박살을 냈어요. 설교로 사실 나는 말렸죠. 그럴 필요가 없다. 왜 그러냐면 벌써 말씀으로 깊이 훈련된 사람들은 듣는 순간에 저거 아니다 알거든요. 그래서 청년 하나가 그래요 설교가 은혜로웠습니까? 누가 물었더니 설교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런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신학적으로 이 설교 잘못되고 저 설교 잘못되고 하는데 대뜸 나오는 반응이 뭐냐 하면 그래도 이 설교 듣고 안 졸았다 이겁니다. 너희들 설교는 잔다. 이 얘깁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의 영적인 말씀의 권위로 성도들을 오류에서 인도 할려고 시도했던 것이 오히려 싸움의 불씨가 되는 겁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 : ??
(답 ):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찢어지는 것처럼 떠오르는 성경 구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마이크 잡고 왜 부흥사들은 그렇게 백바지를 좋아해 하얀 바지에다 하얀 구두신고 밴드마스터처럼 넥타이까지... 그러면서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는데 계속 내마음속에 찢어지는 것처럼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그는 빛이 아니요. 그것이 계속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얘기해줄까 하다가 대부흥사에게???? 내가 그래서 얘기한 거죠. 이단의 교주들 가운데 설교가 아니었던 사람들 한번 얘기를 해 보세요. 설교가 없이는 이단이 세워질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것도 유능하고 유창하고 능력이 깃들여있는 설교자가 아니면 이단이 설수가 없어요. 불가능한 겁니다. 이단적인 흐름은 있어도 종단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설교자가 바로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겁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그랬잖아요.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 “에그논” 몰랐노라 과거사에요. 알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몰랐던 거죠 참 중요한 얘깁니다.
그래서 5절에서부터 도고가 시작이 됐죠.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다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거기까지 했을거에요. 말하기를 그랬습니다. 따옴표를 집어넣어야 맞을 내용들이 길게 이어집니다.
(성경)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이렇게 몇 단계로 얘기했죠. 우선은 부끄럽다는거, 낯이 뜨듯하다는거,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서도 5절에 이어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족의 죄에 대한 동일한 지체의식이죠.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6절 처음엔 우리에게 뭘 소망을 주냐 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부르고 있죠. 결국은 민족이 혹은 개인이 혹은 나라가 공동체가 이렇게 절망적인 죄악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결국은 우리의 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냐 결국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 소망은 어디에 있는 거죠? 주님이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주시면 거기에 소망이 있는 겁니다. 불쌍히 여겨 주지 아니하면 결국 소망이 없는 겁니다.
6절은 결국은 신앙부흥에 있어서 위기상황에 있어서 소망이 무엇인줄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렇게 시작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나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말하면서 결국은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데 “나의” 라고 하는 말에서 뭔가 느끼는 게 없나요? 개인적인 단수니까!
(질문) : ?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는거...
(답) : 그런 것도 되겠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런 것 같아요. 민족적인 깊은 위기 상황에서 에스라는 다른 백성들의 모든 죄를 자기 것 처럼 다 짊어졌는데 단지 어디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때에는 그 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참다운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죄로부터 깨끗하고 언제든지 하나님과 열린 교제의 세계를 갖지 않고는 참다운 중보자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소망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이 패역하고 가증한 시대 속에서 예외적으로 에스라는 하나님과 얼마나 깊고 긴밀한 교제를 누려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과 에스라의 영이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친교하고 친밀히 교제하던 그런 에스라의 영적인 상태를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고백하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그런 고백과 함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점이 사실은 신앙부흥에 있어서 다른 목회 방법론과 사명이 구별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창세기 신앙부흥을 보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나. 그랬는데 끝이 너무 추상적이다. 우리의 대안은 하나님 자신 뿐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얘기가 어디 있느냐. 당연한 얘기를 하고 그렇게 끝나면 어떻게 하냐. 현실도피다 이거에요. 우리가 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그렇게 얘기를 해야지 하늘을 향해서 우리의 대안은 저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끝내는 것이 무책임한 거지 어떻게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답) : 그 이전에 나오는 여러 가지 목회 방법론들에 호소해 왔던 것들을 비판하면서 마지막에 우리의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했는데 그것이 사람들 눈에는 무책임한 현실도피로 분류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앙부흥은 여기서도 보여주지만 “나의 하나님이여” 이 사람이 나의 하나님이여 부르는 대신 할 수 있는 것들이 에스라에게는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이 사람들을 징벌하고 재판하고 몰수하고( ... ? ) 표면적인 문제를 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이 떠나가 버린 영적인 위기를 함께 본겁니다. 도덕적인 위기뿐만 아니라 영적인 위기를 함께 본겁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 부터 권세를 사용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영적인 회복을 갈망하는 거죠. 이것이 두 번째 의미입니다.
더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그 앞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 나오거든요 뒤편에 우리가 본데는 하나님 이렇게 간단하게 나옵니다. 여호와는 언약적인 의미가 굉장해 강해요 권능 큰 능력 세상을 통치하시는 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많이 연결이 되어서 쓰여 지고 언약 맺은 백성을 향한 신실하심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 약속, 구속 이런 것들은 여호와란 단어랑 많이 연결해서 쓰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와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는 이 땅의 계실 때에 육체적인 이름이었거든요 ( ?)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크리스토스는 ? 신적인 그런 하나님의 아들인 신자의 면을 많이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부를 때에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죠. 뒤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냐면 바벨론 포로시대 때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네들을 보호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쭉 나오면서 하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만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께 호소를 하는 것이죠. 나의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모든 민족의 주재자가 되시는 그 하나님께 하시는 것이죠. 그들이 에스라가 죄악 속에서 자신은 비참하고 티끌과 같은 존재가 되어졌지만 그 열린 교제를 통해서 그 광대하신 하나님께 자기네들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내가 부끄러워” 그랬는데 수치를 당하는 걸 얘기하거든요. 수치를 당한다.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반복되는 말이겠죠. 부끄럽다 라고 하는 것은 큰 수치심이죠. 무엇으로 말미암는 수치심이죠? 백성들의 율법을 어긴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 그 죄 나아가서는 방백과 백성의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말하자면 사회 보편의 교회 보편적으로 교회 안에 번지게 된 이 끔찍한 죄악들 때문에 그가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진정으로 신앙의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정죄하는 설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죄하는 설교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죄악을 향한 주님의 태도 그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겁니다. 분노도 결국은 자기가 거기에 구별되어진 분노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을 보면 내가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어떤 표준은 너무 고상한데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너무 밑바닥이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어떤 깊은 절망 그런 것들 때문에 부끄러워서 하나님앞 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 첫째로 우리에게 에스라의 제사장적인 심령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의 죄를 자기에게 느끼는 그런 것을 보여주고 있고 또 하나는 내가 부끄러워 그랬는데 그 앞에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았죠?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의 죄도 아니고 남의 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는 겁니다. 죄에 대한 매우 민감해진 민감한 그의 영적인 상태 마음의 순결함 경건 이런 것들을 보여 준다. 라고 하는 것이죠.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되고 그리고 순결한 삶을 추구 하는 데에서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자기 의를 의지하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느끼는 것은 신앙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무감각해지는 것이죠. 자꾸 죄를 지으면 그런 무감각해지지 아니하고 그 시대의 죄를 낯설게 느끼는 거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상대방은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이렇게 얘기할거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대화가 그렇게 되겠죠. 그런 것이 사실은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질적인 차이가 심령 속에 주어지지 않고는 그런 추구가 참 진실된 영혼의 추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 봐야 된다는 겁니다.
“낯이 뜨뜻하여” 그랬는데 죄악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 겁니다. 너무 비약된 얘기인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중보기도를 하면서도 그렇고 본인에게도 그렇고 죄악이 넘칠 때 육체적으로 까지 쇠약해지는 거 시인도 그런 것들을 고백을 하죠. 죄악 속에서 주님께 영적인 회복을 바라면서 쇠하여지는 자신의 육신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데 영혼의 죄는 이처럼 육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낯이 뜨듯해진거죠, 죄악이 넘쳐날 때에 육체적으로 탈진한 상태가 된다든지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다든지 술에 취한 상태가 된다든지 정신이 없어서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상태가 된다든지 판단이 흐려진다든지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결국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에스라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한가를 보여준 거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인데 자신들은 죄에 더렵혀져 있기 때문에 그분을 향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분께 미안한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분은 거룩함의 지존이시고 자신들은 이렇게 비천하고 가증하고 더럽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 더러운 것과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마주할 수 있겠느냐는 인식이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이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징벌하실지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도 있지만 그러나 진정한 성경이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두려움은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이죠. 거룩함과 죄악 됨이 만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뻔한 얘기입니다.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함과 거룩함을 이해할 수 없는 죄악 됨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함을 확보하기 위해서 심판하는 것이죠. 하나의 비유로 들자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때 경계선을 치고 못 올라오게 하죠. 올라오면 죽는다. 고의든 과실이든 경계선을 넘으면 죽는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확보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겁니다. 그 후에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죄악이 많아서 정수리에 넘친다. 이사야서에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곳 이 없도다. 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으로 발서부터 꽉차버린 모든 인격과 모든 육체를 다 체워서 머리 꼭대기까지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죠. 결국 죄악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다 지배해서 그 정수리까지 넘친 죄악으로 가득 찬 가운데 그 죄악에 지배를 받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그들의 행동은 허물로 이어진 행동이죠.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나이다.” 시편의 다른 기자는 주의 인자는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른다 했는데 이 사람은 허물이 하늘에 미칠 정도이니 단순한 시의 표현이 아닌 거죠. 구약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악과 자연을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에스라는 백성들 가운데 심령에 죄악이 넘치고 그것에 지배를 받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될 때에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허물이 너무 커서 하늘에 까지 미친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하여 당신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죄악이 허물이 커서 하나님에게까지 미치고 그 속에서 패괴함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이 보좌에게 까지 이르름은 그 다음에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는 거죠.
여기에서 얘기하는 이것은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까지 미침이니이다. 이 얘기는 단순히 상황이 그렇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속에 위기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죄악이 미치고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 상달됨은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내려가서 보리라 하고 시작이 되는 거죠. 7절에 증명이 되죠. 6절 마지막이 우리 죄가 심하며 우리죄악으로 인하여.... 옛날에 자기네들이 죄가 심해서 다시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이전에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셨다 그것들을 상상을 하는데 지금 상황이 죄악이 정수리에 넘치고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치게 되는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죠.
에스라는 7절서부터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해서 심판에 대한 뚜렷한 인식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죄악을 본 순간 경건한 이 사람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는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생각이 나는 거죠 그러므로 두려움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절망에 직면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지다가 10절에 드디어 최초로 무슨 단어가 나오냐면 죄를 자복할 때에 이게 나와요. 여기서 10장에선 단순한 도고의 기도였는데 10장에서는 에스라가 도고적인 회개에요. 중보자적인 회개, 백성들의 죄를 자복하면서 자기를 용서를 비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제사장적인 탄원을 이렇게 용서를 비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급격하게 에스라를 중심으로 회개가 일어나고 뚜렷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지도자가 결단을 하게 되고 설교를 통해서 민족적으로 그 부흥이 확산되고 국부적인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범죄가 보편적으로 행해진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죠.
10장 1절서부터 1절에서 지도자 에스라의 회개를 2절 3절 4절에서 결국은 회개를 통해서 지도자의 영적인 권위가 다시 회복되고 모든 상황의 중심자리에 에스라가 서는 것을 보여 주게 되는 겁니다. 죄를 자복 할 때에 많은 백성들이 나아와서 우리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거죠. 같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뚜렷한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선장이죠. 소생을 다 내어 버리고 아내를 버리겠다. 그 이전에 2절에서 1절과 2절에서 백성들이 함께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라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 많은 백성들이 심히 통곡하는 에스라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함께 통곡하는 기도로 이어진겁니다. 지도자가 문제를 영적으로 다루니까 영적인 방향으로 이 문제가 풀려가는 것입니다. 6절서부터 5절 6절 8절까지는 지도자의 결단이에요. 6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에서 일어나서 일어나는 것은 뭔가 결단하는 거죠. 3일내에 오지 않으면 전부 쫒아 버리겠다. 9절 10절 12,13,14절까지 설교를 통한 민족적인 확산이죠.
설교했다는 증거가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마침 그때 사람들이 덜덜 떨었는데 하나는 안 오면 다 죽여 버린다는 엄쳥난 권위 있는 선포와 다음은 큰 비가 내려서 위대한 신앙부흥과 자연현상도 무시 할 수 없는 거죠. 뭐냐 하면 하늘도 뭔가 이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의사 표명을 하시는 그런 광경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15절에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 므술람, 삽브데 이런 사람들이 국부적인 반대인데 그것도 조직적이에요. 주모자가 있었고 조력자 돕는 자들이 있었고 정치적으로 그 큰 권세를 가졌는데도 반대에 부딪히는 거죠. 어느 시대에나 있는 거죠. 그 다음에 보면 그러나 국부적인 반대에 있어서도 큰 부흥은 좌절되지 않고 16절과 15절 사이에 하나의 접속사를 집어넣는다면 그러나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부흥의 물결이 그대로 진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지막에 18절서부터는 부록입니다. 그 당시에 범죄의 보편성, 레위사람, 노래하는 사람, 다 이렇게 쟁쟁하게 섬기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죄악이 관영하였음을 보여주는 거죠. 이 부록은 사실 9장 바로 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