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행하신 일 1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시78:43-44)
녹취자: 김유진
43절부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할 때 내리셨던 재앙들을 차례로 거론하고 이후에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역사들을 - 광야 뿐 아니라 가나안 정착 이후까지도 -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라고 번역된 부분은 광야에서 반역할 그때에 하나님이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애굽에서 행한 일은 광야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던 것보다 선행합니다. “그 때에”라고 번역된 단어가 ‘아쉐르’인데, 영어로 말하면 관계대명사처럼 쓰이면서 목적, 이유를 나타냅니다. 오히려 43절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나타내실 때에 소안들에는 그의 징조들이 있었다. 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마실 수 없게 하셨다.” 그 표적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4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애굽에서 열 개의 큰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리시면서 커다란 징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징조는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재앙은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마실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나일 강은 애굽의 모든 풍요로운 생산을 좌우하는 강입니다. 그래서 홍수가 내리면 상류에서 비옥한 검은 흙을 하류로 흘려보내고 그 퇴적물로 인한 땅이 아주 기름져서 엄청난 수확을 거둡니다. 그런데 치수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치수가 왕의 덕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강이 자주 범람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신이 왕을 버렸다고 여겼습니다. 그리스문명이 자랑하는 과학의 발전을 이루게 된 종자씩 애굽 문명에서 나옵니다. 그들을 이미 기원전 수천 년 전에 원의 넓이를 계산할 정도의 수학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문적인 수학자들을 길러내어 관청의 중요한 요직에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홍수가 나면 땅의 지형이 계속 바뀌니까 토지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니까 수학이 발달합니다. 거의 3000년 전쯤인데도 원형의 넓이를 거의 정확하게 측정해냅니다. 오늘날의 수학과 비교해보면 오차가 불과 소수점 이하로 내려갈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해냅니다. 나일 강은 엄청난 풍요를 가져오는 강이었기에 사람들이 강을 중요한 신처럼 생각하며 섬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곤신이라고 나오는데 ‘다간’이 낱알 곡식이란 뜻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그것이 나일 강을 섬기는 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정도로 나일강은 신성시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습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 너무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기근이 들고 농사도 지을 수 없었는데, 백성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메콩 강의 물줄기 때문입니다. 파란 물이 흐를 때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비가 많이 와서 상류부터 시뻘건 흙탕물이 흐릅니다. 그 물줄기 속에 먹을 것이 많은데 심지어 600kg 민물고기가 삽니다. 사람이 강에서 미끄러졌는데 민물고기가 잡아먹을 정도랍니다. 수없이 많은 고기가 서식하니까 배고프면 물고를 잡아먹습니다. 나일 강이 이와 비슷한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가뭄이 들어 나일 강이 마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첫 번째 재앙으로 물이 피가 되게 합니다. 제일 먼저 나일 강이 완전히 피가 됩니다. 심지어 집안의 모든 물까지도 모두 피가 되어 마실 수 없게 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나일 강이 피가 되어 흐른다면 고기들은 모두 죽어 떠오를 것이고, 피가 강변에 엉겨 썩는 냄새와 집안의 모든 우물과 물에서 파리가 쓸면서 나는 냄새는 역겹기 그지없었습니다.
열 개의 재앙이 아무렇게나 쏟아져 내린 것이 아니라 애굽 백성들이 가진 전통적인 신앙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하나하나 겨냥합니다. 그 절정이 바로 태양이 빛을 잃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레오/라’를 섬겼는데, 그 신이 무력화됩니다. 학질 독종이 퍼져서 애굽 사람들이 희생제물을 지낼 수 없게 만듭니다. 한 편으로는 애굽 사람들에게는 자기 신이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신을 능가하는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서 저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의 신앙은 해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심어줍니다. 열 개의 재앙이 차례대로 기획되어 정교하게 의도를 가지고 진행됩니다. 첫 번째가 애굽의 모든 물을 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때 애굽 백성들이 느낀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것으로는 어마어마한 공포가 있었고, 현실적으로는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큰 능력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셨는데, 그러한 과거가 있는데,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노엽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하나님을 생각하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의 ‘징조’가 되었습니다. 표적과 징조는 무엇입니까? 표적은 믿음을 요구하는 기적입니다. 기적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강화된 믿음을 갖도록 의도하시면서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기적이 일어났을 때,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표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나를 위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심이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악하고 규율할 수 있는 원리가 되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커다란 표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을 때에는 불신앙의 죄가 훨씬 큽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징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표적을 행하실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은 나를 위하신다는 표적들이 되면 그 표적은 한번만 그 일을 행하실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보다 더 위대한 능력의 일을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행하실 것이라는 징조가 됩니다. 이것이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 될 것이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은총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강과 피를 피로 변하게 만들어서 애굽인들이 나일 강을 섬기는 종교심을 훼파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오랫동안 잊었던 조상의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애굽에게는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임을 당신의 놀라운 능력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세상이 박해하고 모욕하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하겠습니까? 우리를 핍박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 심판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심지어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키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도록 기도하지 말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축복하며 기도해야합니다.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이 악인들을 당신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하는 도구가 되도록 자처하지 말고 그들을 무한히 용서하며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커다란 표적들을 베푸시고 징조를 나타내사 나일 강을 피로 물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한이 가득차고 구원의 날이 다가오면 어느 한사람이 이런 일을 행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 자신이 애굽과 같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으며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 편에, 주님께 인정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뜻하시는 바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백성으로 살며 그 나머지를 모두 하나님 손에 맡기며 감사하며 따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