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까지니이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79:4-5)
녹취자: 김유진
1-3절이 심판을 당한 예루살렘의 광경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보고였다면, 4-5절은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었는데 어떤 비방 거리가 되었기에 오늘 시인이 "우리를 에워싼 자들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경건한 시인이 단지 자신들이"민족적인 억압을 받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는 상황적인 호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도록 짓밟혔을 때 그것은 단지 나라를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 어떤 신학을 가르쳐줍니다. 그 신학은 "하나님은 없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언약의 여호와는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늘의 주인이시다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신학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교적 신앙을 공교하게 해주는 빌미가 된 것입니다.
모압이라는 나라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고 그 조상이 에돔 즉, 에서입니다. 그 나라가 오랫동안 이스라엘 치하에 복속되어 있다가 이스라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승리를 한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것이 유명한 모압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 보면 그모스라는 자기의 신이 이스라엘에게 벗어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모압 민족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중동의 나라들이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은 모두 신과 신들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가슴을 찌르는 신앙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예가,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민족이 집어삼키고 심지어 언약백성들을 중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갈대아 사람들에게 빌붙어 호의호식(好衣好食)을 하려는 악인들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습니까?" 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고뇌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문맥을 보아서,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에는 소위 이야기하는 '피데스(fides)'내가 마음속으로 믿은 것과 함께 '피두키아(fiducia)' 그분을 향해 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살아가는 의뢰가 함께 그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하박국이 마지막 때 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선견자로서 미리 봅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이 하나님의 큰 심판이었습니다. 그 심판으로 말미암아 큰 재앙이 오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가 나무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양들이 없고 모든 주산업이 황폐된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나는 기뻐하리라"고 외칩니다. 이와 같이 커다란 심판 앞에서 눈물 흘리고 비참해하는 대신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그 심판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악마의 축복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이 주는 승리의 상금보다는 신앙을 따라 사는 핍박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항상 이기는 것 아닙니다. 때로는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거대한 세력에게 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조차도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합니다. 시인이 깊이 하나님의 앞에 호소하는 바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땅에 떨어지고 짓밟힌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이처럼 탄식하고 깊이 고통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이 상황을 주목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큰 심판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하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깨달아야 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는 동양에 살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우리가 일본에게 당한 트라우마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유대인 학살이라고 하는데 그들만 죽인 것이 아니고 정신대가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라파의 수많은 나라에도 정신대가 있습니다. 물론 규모에 있어 우리나라가 훨씬 더 큰 것은 사실입니다. 대책을 제대로 세우려면, 역사가와 서지학자들이 그 당시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져서 유럽사회를 일깨우기 위한 연대기를 구성해야합니다. 비참한 역사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독일이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독일에 때문에 일본이 상대적으로 의식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일본의 과거를 찾아 소상히 일깨워준다면 그들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민족적 박해로 온 유럽에 흩어졌습니다. 유대인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 전체에 흩어져 각 나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 만행에 대한 고민이 이스라엘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 유럽적인 고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자들을 보면서 존경스러운데, 그들은 역사문제에 대해 참 고민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이든 비 그리스도인이든 일본 문제만 나오면 거품 물고 욕하는데, 그들은 진지한 고민을 합니다. 홀로 코스트를 비롯한 2차 대전에서 600만을 죽인 만행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버리고, 모든 유신론을 유럽으로 하여금 경멸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최근 학설에 의하면 30페이지 책 한권 때문에 600만이 학살당했다는 이론이 나옵니다. 헤로도토스라는 사람이 쓴 역사책에서 잠간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언급합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학자들을 동원해서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로마시대 때부터 입증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냅니다. 이런 것을 사용해 민족 우월주의에 빠지면서 어마어마한 학살을 저지릅니다. 그 참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때, 신학자들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라는 고민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가스 실에서, 웅덩이에서 죽어갔습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전쟁할 때, 60만 명의 러시아 포로들이 두 번이나 포위되어 사로잡힙니다. 60만 명을 두 번에 걸쳐 총 120만 명을 사로잡았는데, 독일에는 그들을 먹일 아무런 식량 계획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혔지만 그들은 총칼에 죽인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굶어 죽여 버렸습니다. 신학자들이 이런 만행이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하는 고민을 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찾은 답은, 바로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는 해석을 합니다. 인류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유를 합니다. 거기서 이런 일들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답을 이끌어냅니다. 모든 추론 과정을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지만 깊이 고민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피 흘리고 조롱거리가 될 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이 어디 계셨냐고 묻고 싶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거기서 그 언약 백성들과 함께 고난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운명이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이 시인은 이런 역사를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이민족에게 박해받는 당신의 백성들을 못 구하시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라기보다 하나의 역사의 해석입니다. 그 해석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질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질투는 신인동형론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비유를 하면서 우리에게 삶과 신앙에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낮추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셔서 말씀하시는 아코모다치오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까지 영원히 노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질투를 불붙듯 하시겠습니까?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최고가 되길 원하지 않고 유일한 것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나머지는 그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종교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당신의 법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에 의한 재편된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바로 그 질서를 따라 살아야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는 그렇게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지 않겠다는 이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질투가 바로 소망이 됩니다. 부부가 헤어질 때가 되면 질투를 못 느낍니다. 질투란 감정은 사랑이 남아 있을 때 생겨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의 원함이 없다면, 질투감정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질투가 납니다. 저 사람들이 사랑받고자 하는 아무런 욕구가 없고 그리고 저 사람에게 사랑에게 사랑을 받느니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외톨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질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질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뜻대로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이 노하시고 질투를 하시면서까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기도가 안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말씀이 안 들어올 때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나 번민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잘 듣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도 악한 상황인데 여러분 생각하기에 선한 상황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해주신다면 그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악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선하게 대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과 여러분들의 악은 충돌을 일으켜 피를 흘리기까지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하고 외롭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죽고 싶은 욕망을 갖고 싶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신 증거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배양하는 삶을 살면서 행복할 수 없고, 만약 행복하다면 미래의 그 행복이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한. 그래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도 불행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평안과 복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