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배반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그들의 조상들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서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들 진노하게 하였으매”(시78:56-58)
녹취자: 김유진
54절, 55절 이전까지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던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장면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이끄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이유는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기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구절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 그들이 행한 일들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불순종과 배신과 우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분배받아 지파를 따라 정해주신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약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고 애굽에서 떠난 대부분의 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유업으로 얻었는데, 들어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고생한 기억밖에 없는데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남김없이 들러냅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며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주셨을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은 의도와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신 것은 가나안에서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물질생활을 누리며 안락하게 생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 자신의 의도와 백성들의 행복을 언제나 일치시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뜻이 있는 곳에서 그 뜻을 이뤄드리며 사는 가운데 그들이 행복을 누려야지만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소명과 그들의 행복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모든 유업들 그들에게 주신 모든 구원의 은혜는 바로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져버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이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대한 전체적인 배신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매우 가슴 아픈 사건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이 백성들을 징벌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사는데도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외적인 고통이던지, 내적인 고통이던지-하나님은 선하신 분일 수 없습니다.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선이 존재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악인이 고통 받은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참으로 선하시다면, 그 선이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막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의 선을 입증하게 됩니다.
비유를 해봅시다. 우리가 만약 헤엄을 치는데 물을 따라 떠내려간다면 수영이 힘들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없어도 발장구만 치면서 떠 있어도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한다면 앞으로 나아가도록 물장구를 쳐도 앞으로 거의 못나간다면 그 자체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커다란 증거입니다. 홍수의 물을 건너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물이 가슴밖에 차지 않아도 부력 때문에 물이 가볍게 뜨더라도 흐르는 물의 힘이 조금만 개울 바닥에 발을 잘못 디뎌도 자빠지게 되어 떠내려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힐문지만, 사실은 반대로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을 다루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악을 그렇게 다루십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이었습니다. 이 배반은 신의를 져 버리고 언약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바가 없거나 삶의 규칙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이미 있었고 받았지만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과 어떤 언약을 맺고 배신하게 되었다면 배신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과 중요한 약속을 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약속을 못 지킨다면 배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못 지킨 것입니다. 배신은 약속을 했는데 타의에 의해서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약속을 이행할 수 있었는데도 마음속에서 일어난 어떤 이기적 욕망 때문에 -신뢰의 원칙에 위배하여- 약속을 져 버린 것입니다. 배신은 밖으로부터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계약 위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가나안 땅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져 버릴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짖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시고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따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배신한 것은 외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배신을 하고 나니까, 구체적인 행동으로 거짓으로 나타납니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미 부정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이스라엘 백성간의 혼인 관계를 아주 더럽히는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속이는 화살’이라고 나옵니다.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서’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활을 제대로 만들었다면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과녁을 향해 조준하고 쏘면 맞아야합니다. 그런데 활 자체가 잘못 제작되면, 항상 빗나갑니다. 죄를 희랍어로 ‘하마르티아’라고 말합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의도하셨던 그 의도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는 비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을 향하여 죄를 지은 것이 어쩔 수 없는 한 두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마치 잘 못 만들어진 시위에 화살을 먹이면 언제나 빗나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행위가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보내 큰 축복을 주려던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광야와 같은 곳을 여행한다면 수시로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면서 가는 길을 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하나님이 의도하는 길을 가고 있나 항상 물어보아야합니다. 커다란 방향을 정했더라도 -한달이 아니라, 일년이 아니라- 매일 매일 걸어가면서도 자신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나침반의 원리는 자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나침반 옆에 자석이 있다면, 자력에 힘 때문에 방향을 잘못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침반과 같은데,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려는 의지가 결핍되면, 우리 안에서 솟아난 우리 중심적이 욕망에 의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나침반을 움직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거기에서 '속이는 살같이' 계속 죄를 짖고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 번째 악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싫어하시는 죄를 인간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지을 수 있을까 의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열심히 그렇게 했을 가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상도 형태는 종교입니다. 여호와의 종교와 우상의 종교가 나란히 하거나 또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나의 마음과 모든 삶을 주님께 합치시키는 지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지만,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우상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들이 바알, 아세라 같은 수상을 섬겼지만, 정말 섬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섬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욕망을 하나님께 빌어서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에게 빌었습니다.
우상에게 빌어서는 성취할 수 있는 욕망인데, 하나님께 빌어서 성취 못하는 욕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 나아가 번제와 제사를 드려서 간절한 소원을 빈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는 들어주시지만, 기뻐하지 않는 바는 회개하고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대만에서 보았답니다. 한 사람이 우상을 손바닥 위에 놓고 회초리로 때리더랍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것이 우리집 신인데, 요즘 게을러서 복주지 않아서 때린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은 결국 자기 욕망의 투영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우상에 투영합니다. 그래서 우상은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느냐? 이 제물이 정당한 제물이냐?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너의 마음은 이웃과 평화를 누리느냐?' 이런 것을 우상은 묻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우상숭배에 빠졌는데, 이를 사도 바울은 탐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는데, 그 땅은 사라지고 빼앗기고 주인이 바뀔 땅이었지만, 하나님의 우리에게 그 땅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살게 하듯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혹시 거기서 하나님께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 땅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당신 안에 있게 하신 거룩하고 존귀한 뜻을 드러내는 백성들로 살도록, 그분께 신실하고 순종하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