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칼에 사라진 노래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시78:63-64)
녹취자: 김유진
‘떠나시고 붙이시고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는지 63, 64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은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신 후에, 외적으로 인한 침탈 사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단순히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한 것뿐 아니라 536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광경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절을 보면 하나님이 북왕국을 택하지 않고 남왕국을 택하셨다는 것을 보면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왕국의 사건까지 모두 포함해서 역사를 회고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쩌면 여기에 나오는 심판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간적인 순서를 거슬러서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시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63, 64절에 무시무시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 절은 청년과 처녀들의 파멸, 다음절에 제사장과 과부들의 파멸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일부에 위기가 아니라 국가 전체가 멸망한 그림을 퍼즐처럼 보여줍니다.
우선, 청년들이 불에 살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청년들은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많은 장년도 속하지만 나이가 어린아이도 포함합니다. 청년들이 살라진 것은 국가가 외적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할 힘이 사라져서 침탈당한 것을 보여줍니다. 청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나라의 미래가 사라진 것을 보여줍니다. 외적이 침임으로 도시를 불 지르고 파괴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간 것을 보면서,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이들이 잘 피할 텐테, 외적에 의한 침탈과 파괴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은 나라의 기운이요, 미래인데, 하나님이 당신의 진노를 자기의 기업들에게 쏟으시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처녀들은 혼인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앞 절에 청년들이 모두 죽어 시집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녀들이 외적에게 겁탈당하거나 물질적인 노략물과 함께 끌려갔습니다. 처녀들에게 결혼을 할 상대가 모두 죽고 순결을 빼앗기고 혼인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철저히 짓밟혔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제사장들이 칼에 엎드려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칼에 엎드러진다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이는 적군을 공격하여 하나하나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륙이 일어날 때 나오는 표현입니다. 칼에 엎드러진다는 것은 커다란 도륙이 있어 공격자가 굳이 겨냥하여 그의 목숨을 끊지 않아도 도망을 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이미 엎드러졌는데 이미 엎드러진 사람의 세워진 칼에 수없이 죽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이 칼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두 가지를 암시합니다. 첫째는, 도륙이 극심하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굳이 제사장을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를 잊어버리고 타락하게 된 원인이 제사장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책임져야할 세 기관이 있었습니다. 첫째,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적 생활을 책임져야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도 법을 엄격하게 만들고 정당하게 처벌하면 사람들이 죄지을 생각이 억제됩니다. 이것이 일반은총의 효과입니다. 적어도 언약 백성들이 마음이 미끄러졌다할지라도 그 미끄러진 마음의 상태를 불신앙으로 토해놓으면서 행위로 하나님의 법을 짓밟거나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왕도 한 나라가 하나님의 경외하는 국가로 서는데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기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만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법은 봇물과 같아서 한 번 누군가 밟고 지나가면 정신없이 무너집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을 성폭행하는 것에 대해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합니다. 법원이 이런 자들에게 굉장히 관대합니다. 도리어 미국은 엄격하게 처벌하는데, 우리나라는 잘못하고 있습니다. 법학자와 사회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범죄자를 형량을 높이거나 사형한다고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행동을 할 때, 법을 의식하지만, 사이코패스 식으로 된 자들은 집착하고 탐닉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한다는 식의 사고가 없습니다. 옛날에 유영철 같은 살인범은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검증하며 계속 웃으면서 재연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형량을 높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나 왕의 통치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그룹을 따로 정하셨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살도록 촉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죄지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까로 고민했습니다. 사실, 그 고민을 올바로 하면 선지자의 기도와 제사장의 바람이 충돌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죄에 너그러워지는 것은 좋은데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인색하며 남에게 너그러운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까?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기에게는 너그럽지만 남에게는 인색합니다.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과 남을 위한 삶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제사장들은 잘못한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 죄가 얼마나 엄중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을 하는지를 정확히 지적하여 깊이 회개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있게 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반복적인 제사 속에서 백성들은 의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제사를 죄를 회개하고 뉘우칠 기회로 삼지 않고 죄를 정당화할 기회로 삼는데 제사장들이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와 함께 종교 지도자들도 함께 망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의 종교지도자의 면류관은 그 나라의 번영과 형통이 아니라 그 나라가 공의롭고 인애가 있는 나라가 되고 언약에 충실한 나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종교지도자 곧 제사장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이 도륙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위기가 임박했을 때,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들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역사 속에서 거품처럼 함께 심판당해 사라졌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피흘림이 없이 제사가 없다'고 했는데, 생생하게 죄가 무엇이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이고 범죄 했을 때 그들을 어찌 다루실지 보여주시는 훌륭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을 활용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배가 얼마나 우리자신을 돌이키기 훌륭합니까?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예배 속에서 의식하여 온 천하는 그분 앞에 잠잠하라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티끌임을 발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자기가 정말 불결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만나는 대신에 이렇게 예배드리면서 살아도 된다는 종교적 위안과 담대함을 얻은 역사들이 똑같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부들이 애곡을 못했다는 것은 가장들이 전쟁에서 죽은 것, 침략을 받아서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곡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냥 울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애곡했다는 것은 진짜 운 것도 있지만, "7일 동안 애곡하였더라"는 것은 정식적인 장례절차를 말합니다. 장사를 지낼 수 없었다는 것은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시체를 찾아도 옮길 수 없고 조문객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는 이 세 가지 것은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 큰 일입니다. 이것은 태어난 아이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죽은 자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행사인데, 이를 못했다는 것은 파괴와 파멸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자기 백성들을 짓밟히게 내버려 둘 수 있는가?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신정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