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시79:6-8)
녹취자: 김유진
탄원시 중에서도 오늘의 내용은 자신들에 대한 탄원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악을 행한 이방민족들에 대한 탄원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를 알지 않은 민족들과 동의어로 주의 이를 부르지 않는 민족과 나라들이라고 나옵니다. 민족은 혈연 개념이고 나라는 국가 개념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암'이고 후자는 '고임'인데 나라 즉 고임은 '까바'에서 왔는데 그 뜻은 '높다, 교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국가의 탄생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함으로 왕을 주었고 분노함으로 왕을 폐하였느니라"는 왕국의 역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원하였을 때, 그들의 열망은 하나님을 바라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를 바라봄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정 통치보다는 왕을 통해 대리적 통치를 받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 왕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시고 싶어 하셨던 인간 사회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통치를 받는 신정사회를 - 만약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졌을 - 세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 '민족과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 특히나 지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훼파한 대적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노를 쏟아 부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노를 쏟아 붙는 것은 성경에서 아주 흔한 나오는 표현입니다. 쏟아 붙는 것은 한 번에 물 같은 것을 커다란 그릇에 담아 확 부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용광로에 녹인 쇠를 한 번에 쏟아 붙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에 어느 주물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커다란 도가니에 펄펄 끓는 쇳물을 잔뜩 담아서 옮기는데, 기계가 망가져서 풀어지면서 어마어마한 쇳물이 아래서 일하던 근로자 위에 쏟아졌습니다. 당연히 시산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성경에서 쏟아 붙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대적들을 향한 분노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7절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북왕국 전체에 대한 애칭은 에브라임이고 유다 전체에 대한 애칭은 야곱이었습니다.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야합니다. 왜 북왕국을 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까? 남북 왕국이 갈라졌을 때, 가장 우세한 지파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남왕국이나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사용한 이유는, 야곱이란 인물이 하나님의 긍휼의 승리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모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요셉에게서 보다 야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고 의로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온유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이기며 사는 섭리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세속이었는데, 하나님의 치열한 열심히 그를 빚어 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긍휼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어쨌든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하나님께 사랑받은 이스라엘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잠언과 시편에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쳐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을 정복한 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이 거처는 이스라엘의 지계표 안에서의 거처입니다. 거쳐는 광의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의 땅이고 협의로 각 지파별로 씨족별로 가족별로 나뉘어진 지계표를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처를 황폐하게 하셨다는 것은 한편으로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 악을 행한 원수들의 죄가 얼마나 큰 가를 보여줍니다.
8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긍휼을 구하는 탄원이 나옵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조상들이라는 단어가 머리로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의 머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긍휼이 우리를 속히 만나게 해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로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의 전체가 하나의 몸(body)을 이룹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살다간 사람들은 - '언약의 대표'라는 뜻이 아니라 -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머리가 됩니다.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머리가 되고 새로운 후손이 태어나 자라납니다. 자신들이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단언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시는 어쩌면 아삽이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여기서 아삽이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family)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이나 다른 사람들이 지은 시를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해서 전수되어 왔는데 저자를 잘 몰라서 아삽의 시라고 했을 거라고 보는 학설들이 있습니다. 유사한 경우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고라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시이고 저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물론 아삽이라고 하는 정확한 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추측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를 지었을 때, 바벨론 포로기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지은 시일 수 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수시로 예루살렘에서 온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년 정도 지나면 한 세대씩 지나가고 60-70년 지나서 돌아왔으니까 아마도 그런 의미로 조상들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란 단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신명기에서는 여기에다 부정어를 붙여서 '잊지 말아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기억하다 잊지 말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기억력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에 그것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부른 것을 기억하라"고 할 때, '기억하다'는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 그 모든 것들이 조상들의 죄를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시고 분노하시기 때문에 일어날 결과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을 망하게 하는 것도 사실은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범죄 할 때, "올라가라 약속대로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 백성들이 너희를 쳐들어와 너희를 괴롭힌다고 탄원하느냐 내가 그러면 이방 백성들을 물리쳐 도망가게 하고 너희를 구해주겠다. 그러나 너희를 기억하지 않겠노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복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구약 최대의 약속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과는 먼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반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성립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는 것이 히브리 성경에는 "당신의 긍휼들이 속히 우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겸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안되니까 당신의 긍휼을 시켜서 속히 우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긍휼이 헤세드 즉,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성품에 기초해서 우리를 만나주는 것이 바로 긍휼이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호소하길,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혹은 비참하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비참이 무엇인가 말해줍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고 죽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삶의 형편에 놓여 있던지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분이 당신께 매어 달리는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거두지 않으실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바로 이런 약속을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에게 보증해주셨다는 믿으며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마지막 자기의 인생이 의지하며 살아가야할 절대자가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